당백전

當百錢
dangbaek_copy.gif

1 개요

흥선 대원군 최대의 삽질

조선 후기에 발행되었던 화폐.

실물의 가치와 국가의 보증 가능성을 무시하고 화폐를 발행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를 말해주는 좋은 예. 참고로 30여년 뒤 고종이 똑같은 짓을 한번 더 하면서, 백성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사실 이는 지구곳곳에서 여러 번 확대, 재생산되었는데 오마주인가 아프리카 어느 나라, 그리고 한반도 북쪽의 또다른 조선에서 저지른 삽질들이 유명하다.

2 역사

2.1 발행

1866년 (고종 3년) 11월에 발행된 화폐로 6개월 간 유통되었다. 조선 후기에 일반적으로 쓰이던 화폐는 상평통보였는데, 당백전은 명목상의 가치는 100배에 해당(애초에 당백전의 뜻이 100배(百)에 맞먹는(當) 엽전)했지만 소재가치는 상평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당대에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총액은 약 1천만냥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 풀린 당백전의 총액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1600만냥 정도나 되었다. 즉 시장에 기존의 1.5배에 달하는 자금이 풀린 셈인데, 실물경제는 그대로인 상황에서 화폐만 불어나면 어떤 사태가 터질지는...

당백전이 발행된 가장 큰 이유는 조선 정부의 재정 악화에 있다. 조선 후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아 정부의 재정이 매우 궁핍하였다. 거기다가 흥선 대원군경복궁의 증건을 추진하면서 이에 많은 재원이 투입되면서 더욱 궁핍해졌다. 경복궁 중건에 들어간 돈은 원납전으로만 750만냥이 들어갔다. 현물 징수나 노동력 강제 동원등은 모조리 제외한 금액으로도 이 정도인데, 순조 22년에 호조에서 낸 통계에 따르면 조선조정의 1년 세수는 평균 60만냥이므로 대원군이 걷어들인 원납전은 조선 조정의 12년분 예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인 것이다. 물론 이것에는 당백전과 청전 발행으로 이어지는 인플레이션의 영향도 있는데, 결국 청전이건 당백전이건 다 폐지해야 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결국 빚잔치한 셈이다.

이 때문에 실시되었던 것이 백성들에게 (강제로) 기부를 받는 원납전이었으나[1], 시간이 갈수록 기부 금액이 줄어들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발행한 것이다. 당백전을 발행하여 일시적으로 이득을 보기는 했다.[2]

2.2 문제점

문제는 당백전이 유통되면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는 데에 있다. 실질 가치는 5~6배인데 명목상의 가치는 100배라서, 실질 가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일반 백성들에겐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돈이었고 일상생활에 쓰기에도 액수가 너무 컸다. 일반 백성들은 당백전을 불신하여 상평통보와 교환을 하려 하지 않았고, 상인들도 이를 꺼려서 물물교환의 모습까지 일어났고 물가는 치솟았다. 이건 더도 덜도 아닌 그레샴의 법칙이다. 이 엄청난 양의 당백전이 단 6개월만에 쏟아져나오면서 이런 혼란을 더더욱 부채질하였다. 더구나 기존 상평통보가 있는 상황에서 당백전을 발행한 바람에 유통되는 화폐의 총액이 몇배로 치솟았다.[3] 그리고 정부에서는 조세 수납에는 이 당백전을 받지 않으면서, 공신력을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정부의 공식적인 이유야 당백전 유통을 활성화하겠다라는 것이었지만, 악화인 당백전을 정부가 거부하는 것은 당백전에 대한 불신을 더더욱 가중시킬 뿐이었다. 몇몇 수령은 실물로 세금을 받고 당백전으로 중앙에 납부하는 퍼포먼스까지 보였다.

여기에 일종의 위조화폐, 즉, 사주전 또한 기승을 부렸다. 조선시대에 화폐를 위조하면 그 자리에서 사형이었지만, 산속, 심지어 배 위에 대장간을 차려놓고 강에서 주조하기도 했다.[4] 그렇지 않아도 유통량이 많은 당백전이 이제 위조 화폐까지 나도니 그 총액이 얼마인지는 짐작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2.3 폐기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1867년 4월에 주조가 중단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유통도 금지되었다. 이렇게 폐지된 당백전 1600만전[5]을 회수할 때는 청전[6] 1냥이나 상평통보 1냥으로 교환을 해주었고[7] 이렇게 회수한 당백전은 다시 녹여서 철로 만들어버렸다.

3 평가

시작부터 끝까지 재앙이 된 화폐. 윗사람이 경제에 무지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를 말해준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당백전의 가치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당시 백성들은 땅돈이라고 불렀으며, 여기에서 땡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지금도 자주 쓰이는 '땡전 한 푼 없다'는 말은 이 망할 당백전 한 개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는 뜻이다.

이 당백전의 폐해는 흔히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큰데 단순한 인플레이션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경제를 철저히 박살내버렸다는 것이다.[8] 결과적으로 고종 친정이 시작된 다음엔 군비가 죄다 축소되어서 운요 호 사건을 불렀으며[9] 재정 부족으로 인한 구식군대에 대한 푸대접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임오군란으로 청에 대한 예속 상태가 이어지면서 외국이 조선을 무시하는 외교적 위신 추락과 개화파들의 급진적인 행동인 갑신정변까지 야기하는 그야말로 초거대 나비효과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21세기에 북쪽의 후손이 북한/화폐개혁으로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한다. 다만 대원군은 돈을 너무 한꺼번에 풀어서 경제를 조졌고 김씨네는 돈을 한꺼번에 뺏들여 들어서 경제를 조졌다는 차이가 있다. 웃긴건 결과적으론 정부가 백성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거금을 강탈하게 되었단 결과는 같았단 것.

현대 대한민국의 화폐 발권기관인 한국은행 내에서도 발권정책의 흑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실제로 화폐박물관에서도 당백전을 전시하고 있으며, 2016년 한국은행 노동조합 측에서 한국형 양적완화에 동원되는 발권력 동원을 이 당백전 발행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1. 자원해서 낸다는 의미에서 원납전이었으나 백성들 사이에선 원한을 품으면서 낸다는 원납전이라고 뒷담이 돌았다고 한다. 당연하지.
  2. 인플레이션을 배제한다면, 조선정부는 당백전 1냥을 제조할 때마다 상평통보에 비해서 18배의 이득을 본다.
  3. 6개월만에 1섬에 7문하던 쌀값은 48문으로 올랐다. 6개월만에 인플레이션 800%! 2016년 현재 서울의 가구당 식비가 월평균 71만원인데, 이걸 단순히 대입하면, 486만원으로 비용이 상승한다. 동기간 월평균 경상소득이 366만원이었으니, 다른 것 아무 것도 안하고 식비만 유지해도 월 평균 120만원 적자.
  4. 하지만 상평통보의 사주전 문제는 고질적인 문제로, 당백전 때문에 가중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당백전은 사주전이 적은 편에 속하는데, 1문전에 비하자면 소재가치에 비해 고액권이였지만 만들기가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보통 사주전은 호조의 퇴역군졸이나 대장간잡부들을 써서 만드는데, 당백전은 최소 장인급이 참여해야 그나마 모양이라도 재대로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5. 상평통보의 총합이 1000만전이었다.
  6. 淸錢, 청의 화폐. 청의 화폐도 조선말기 한국에서 상평통보 가치의 1/3정도로 통용되곤 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수입하기도 했고, 밀수로 유입되기도 했다. 애초에 고려시대부터 당의 화폐들을 들여와 사용하곤 했다. 이는 어느나라나 마찬가지인데, 유입전이라 한다.
  7. 명목상 가치는 1/100, 실질적 가치는 1/6이 된 셈이지만 유통이 금지된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공식적으로 주조한 화폐를 녹여서 금속을 건지려고 했다가는 당시 조선의 국법으로 처벌받았다.
  8. 그리고 구한말 일제에 의해 이뤄진 화폐정리사업이 결정타가 되어 조선의 경제는 일본제국에 종속되게 되었다.
  9. 물론 고종은 일본에 겁을 먹고 개항한 것이 아니라 이득이 있을 것 같다고 개항한 것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