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의 문란

1 개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여러명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19세기 조선왕조에 세도정치가 성행하게 되면서 매관매직으로 수령직에 오른 탐관오리들이 조세제도 세가지인 전정, 군정, 환곡을 악용하면서 일어난 폐단을 가리키는 역사 용어. 환곡(還穀)은 세금은 아니었지만 어쨌든간 국가가 운영하는 제도였던데다가 환곡 제도의 부정부패도 전정, 군정의 부정부패와 양상이 비슷했기 때문에 그 당대부터 '삼정'의 문란이라고 묶어서 불렀다.

부패한 관료와 이에 결탁한 지주에 의한 수탈은 예전부터 있었겠지만 조선이라는 국가 전체적으로 이렇게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은 역시 세도정치기부터이다. 즉,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정치쪽에서 기존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 오던 권력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붕괴되고 한쪽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이것이 수취 제도에까지 심각한 민폐를 끼친 사례이다.

세도정치 당시 조선에서는 세도가에 을 주고 관직에 오르는 자들이 비일비재했는데 이들은 수령직에 오른 후 애꿎은 백성들에게서 본전을 뽑으려고 했다. 당연히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와 같은 각종 질병이나 기근, 수해 등의 자연재해까지 겹쳐 조선 백성들의 생활에 직격타를 날렸다.

세도정치 시기에 생긴 문제라고 오해하기 쉬우나, 역사적으로는 조선 중기부터의 정치 변동과도 큰 관련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은 지주전호제, 즉 집권 세력이었던 사림의 경제 기반을 개혁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이것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삼정의 문란은 조선이 근대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게 한 원인으로 평가된다.

북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카더라 조선은 장사하는 건 안건드렸지 얘네는 화폐개혁에 장마당까지 다 때려잡으니 더하다

2 삼정의 종류

2.1 전정(田政)

전세, 즉 농사짓는 땅에 매기는 토지세를 말한다. 엄밀히 말하여 토지세는 농민의 부담이 아니고 지주의 부담이다. 현대 사회처럼 건물주가 세입자한테 자기 세금을 전가시키는 문제는 조선시대에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전세의 부과 대상은 지주였다.

그런데 가진 놈한테서는 덜 뜯고 없는 놈한테서 더 뜯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문제가 된 것이었다.임대업하기 좋은 나라 조선 초기에 세종이 준비했던 전분 6등법이나 연분 9등법은 결국 토지 실소유자가 낼 돈이 수확량 등에 따라 더 커지기도 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인조대에 이르러서는 최저세율로 고정되어버린다. 연분 9등법의 하하년에서 걷던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된 것인데, 간단히 설명하면 나라 경제가 어려우니 기업 세금을 최저세율로 내렸다는 것이다.

왜란이 끝난뒤 경제를 복구시키기 위해 토지개간이 장려되고[1] 양전사업과 은결을 찾아내어 세수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주들의 부담은 증가하였으나 땅 소유자에게 부과되는 세금이었으니 제도적으로는 농민의 부담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운송비라던가 수수료라던가 창고 보관 중 쥐새끼가 파먹었다 등의 부담을 농민더러 물어내라고 하는 것이 문제였다. 현대적으로 예를 들면 정부가 집주인들한테 주택보유세를 더 내라고 하니깐 갑자기 건물 관리비가 오르는 현상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르다(...)

그 외에도 탐관오리들이 멀쩡한 토지세에 추가금을 거두거나 새로 개간해 양안(量案; 토지대장)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토지를 등록하는 대신 몰래 토지세를 거둬 사욕을 채우는 사례도 등장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는 이앙법의 발달 이후에는 지주들이 전세는 국가에 무조건 내야 하는 부분이니 다른 부분에서 소득을 더 늘리려고도 한다. 소작농이 떼어가던 부분까지 자신들이 다 먹으려고 들기 시작하는데[2], 즉 이것이 노비에게 직접 경작을 시키는 지주전호제의 확산이다.

2.2 군정(軍政)

군역을 지지 않는 16부터 60세까지의 남성들이 내는 군포(軍布)를 말한다. 군역을 부담하는 이들이 군 복무를 하는 동안 군역을 면제받은 사람들이 군포를 납부해 군 복무자들을 경제적으로 돕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임란 이후 공명첩 등으로 양반이 증가하고, 도망친 농민들이 많아지면서 과세 대상이 크게 감소한다. 다시 말해서 국방세를 걷으려 해도 세금을 낼 대상이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영조 무렵에 5군영이 설치되어 직업군인의 숫자가 늘어나고[3] 결국 이 경비를 충당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등장한 균역법(均役法)은 의해 1년에 1필의 군포를 내도록 하는 제도였는데, 중앙군 말고도 지방에서도 필요에 따라 따로 군포를 징수하기도 하였다.

균역법의 핵심은 결작으로, 이는 땅에 매기는 세금이었으므로 시행 초기에는 지주의 부담은 증가하고 농민의 부담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머리가 좋았던- 지주들이 이를 곧 소작농에게 전가시키면서 농민의 부담은 오히러 더 커지게 된다.

탐관오리들은 죽은 사람의 이름을 올려 군포를 받거나(백골징포 ; 白骨徵布[4]), 갓난아기에게도 군포를 내게 했으며(황구첨정 ; 黃口簽丁[5]), 60세가 넘은 노인에게도 군포를 징수했고(강년채 ; 降年債[6]) 만약에 이걸 낼 사람이 째는 일이 발생하면 연좌제를 적용하여, 가족이 대신 내게 하는 족징(族徵)과 이웃이 대신 내게 하는 인징(隣徵)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버티지 못한 가장이 자신의 아들의 영 좋지 못한 곳자르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정약용의 시인 '애절양(哀絶陽)'에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균역법 이후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농민들은 적극적으로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앙법 참고.

2.3 환곡(還穀)

문란의 상태가 가장 심각했던 제도.

춘궁기에 먹을 것이 없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되받는 바람직한 취지의 제도였지만 세도정치 때는 각종 고리대의 온상이 되었다. 당시 탐관오리들은 곡식을 빌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도 억지로 이를 빌려줘 높은 이자를 받아내거나[7], 빌려주는 곡식에 겨나 모래를 섞거나 물로 불려서 양을 속이는가 하면, 빌려주는 통과 받는 통의 크기를 다르게 하는 등의 치졸함까지 보였다. 심지어는 빌려 주지도 않고 이자만 챙겨 가기도 했다.

환곡은 모곡에 대한 이자를 1/10으로 제한하였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환곡의 성격이 구휼 제도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환곡은 먹고 살만한 사람이 빌리는 것이 아니다.

이를 현대에 적용시켜서 생각해 보면, 최저생계비 정도만 벌어서 먹고 사는 가정에 국가에서 강제로 대출을 해주면서 이자까지 물린 것이다. 조선의 전반적인 세율 체계에서 10%의 이자는 낮은 수준이었다고 하지만, 최저생계비를 겨우 버는 정도라면 실제로 체감되는 이자 부담이 일반인보다 심각한 수준일 것이다. 환곡의 문란은 이런 점에서 생겨난다.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 사정에서 담당 공무원이 빼돌리는 부분까지 나온다면 어떻겠는가(...)

3 이후

결국 이를 참지 못한 백성들이 농민봉기에 가담하거나 도적의 무리에 합류하고 조정에서 암행어사를 파견해야 하게 하는 등 조선 후기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게 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진주민란으로 대표된 임술농민봉기의 원인이 되어서 조선은 거의 막장으로 달하게 된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철종 대에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 만들어졌지만 효과는 미미했고 이미 삼정의 문란은 이것만으로 해결하기엔 역부족일 정도로 뿌리가 깊은데다가, 두 달만에 폐지되었다. 진주민란 이후 민란이 지속된 것도 이 때문.

흥선대원군 때 와서야 적극적인 시정이 이루어졌는데, 양전사업으로 은결(隱結)[8]을 색출하면서 전정을 고치려 했고, 호포제(戶布制)[9]를 실시하면서 군정을 고치려 했고, 환곡은 마을단위로 주민이 관리하는 사창제로 되돌리면서 해결했다. 그러나 이는 또 여흥 민씨 세도정치에서 허사로 돌아갔고, 결국 매관매직 문제와 함께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동학농민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1. 등록되지 않은 땅을 개간한 사람은 신분에 상관없이 소유권을 인정해주고, 일정 기간동안 세금을 면제하였다.
  2. 소작은 기본적으로 병작반수제로 소작농이 수확량의 1/2을 가져가는 제도이다. 물론 공납이나 역에서 요구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실제로 소작농에게 남는 양은 1/2에서 반도 안남기도 하는게 일상이었다.
  3. 영조 한참 이전부터 양인개병은 붕괴되는 추세였다.
  4. 백골, 즉 죽은 자를 산 사람처럼 꾸며 포를 징수한다는 뜻
  5. 어린 아이를 성인(장정)으로 취급한다는 걸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호적에 만 15세를 넘은 성인 남자만 올리고 여자와 아이들은 아예 빼버렸기 때문에 이건 명백한 불법이었다. 황구는 노란 입이라는 뜻인데, 어린 아이들이 먹을 것을 흘리곤 하는 바람에 입가가 누래진 것에서 온 것이다.
  6. 60세가 넘은 노인은 군역 대상이 아니기에 역시 군포 징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탐관오리들이 60세가 넘은 노인의 나이를 내려서 억지로 군포를 걷은 것이다.
  7. 이를 늑대(勒貸)라 하는데 을사늑약 할 때의 그 늑에다가 빌려줄 대 자를 쓴다. 이 늑대가 아니라.
  8. 등록을 하지 않고 숨긴 토지
  9. 쉽게 말해서 유학호(儒學戶: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한다는 제도. 1명당 2냥씩 징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