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평통보

常平通寶

1 개요

17세기 후반 이후 유통된 조선화폐. ‘조선통보’, ‘십전통보’와 함께 개항 이전 조선의 국가 공인 화폐로, 실질적으로 꾸준히 그리고 전국적으로 화폐 역할을 했던 유일한 화폐이다.[1] 조선 후기의 상업 발전과 그 움직임을 같이해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상평(常平)은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준말로 유통가치에 항상 등가를 유지하려는 의도와 노력을 그대로 반영한 표시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동전(銅錢)으로 기록되어 있고 민간에서는 엽전(葉錢)이라 불렀는데, 이는 동전을 세는 단위가 ‘닢’(동전 한 닢, 두 닢 하는 식. 나무에 달린 그 과 어원이 같다.)이었기 때문이다. 혹은 상평통보를 주물로 제조 하는 과정에서 상평통보들이 마치 가지에 달린 잎처럼 생겨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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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가 생각난다!
아니 돈이 열린거 보니 여기

2 조선 전기 상업과 화폐의 제작

조선의 건국 이념은 성리학으로, 성리학적 이념 하에서 천부의 재화는 농업으로부터 나왔으므로 농업은 천하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산업이었다. 반면 상업은 스스로 생산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이익을 취하는 산업으로 보고 천하게 여겼다. 따라서 전기의 조선 왕조는 말업(末業)을 억제하는 억말(抑末) 정책을 꾸준히 시행하였고, 시전이나 보부상 등도 철저히 국가 등록 하에 움직이게 하였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 화폐의 제작은 시장의 물류 유통을 원활히 하겠다는 의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는 국가의 이권을 국가에서 보증하는 화폐 아래에 꽉 잡겠다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이를 이권재상론, 利權在上論이라고 한다). 부수적으로는 당시 민간에서 사용되던 면포나 쌀이 중간 유통 과정에서 손실이 많았기 때문에 이 과정의 손실을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명나라에게 조공품으로 지정되어 확보에 큰 고난을 겪고 있던 , 이나 왜구에 맞설 화포나 무기 등에 사용되던 , 을 함부로 빼낼 수 없었다.

결국 1401년(태종 원년) 이후 저화가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당시 시장에서 유통되던 5승포 1필과 쌀 2말에 상응하는 가치로 상환해줄 것을 결정하였다. 이는 대까지 중국의 교초가 널리 유통되어 국내에서도 사용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채택한 것인데, 저화 소지자가 정부에 금/은과의 교환을 요구했을 때 정부가 화폐 가치에 준하는 분량으로 지급하는데 필요한 금/은 준비금을 마련하지 않고, 그 자체로 아무 가치가 없는 저화를 발행한 것은 민간의 신뢰를 전혀 얻지 못하는 정책이 되어 저화의 가치가 폭락하였고, 제대로 유통되지 못했다. 한양개성 등지에서 저화를 실물로 교환해주면서 신뢰를 얻으려 애쓰고 면포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하면서까지 저화를 유통하려 해보기도 하였으나 백성들은 이런 화폐보다는 쌀이나 면포 같은 현물거래를 선호했다.

동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이러한 저화를 보완하자는 의미에서였다. 동전은 그 자체가 실물 가치를 어느 정도 보증하므로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에서 1423년(세종 5년) 조선통보의 발행이 시작되었다. 이 결과 일각의 우려대로 저화는 시장에서 사라지고 말았고, 그나마 동전마저 신뢰를 얻지 못했다. 동전 1푼은 쌀 1되로 규정하였으나 실제 가치는 동전 9.7푼에 쌀 1되 수준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1425년(세종 7년) 5월 시점에서는 동전 3푼이 쌀 1되 정도의 가치로 유통되었다.

이에 민간에서 포화(布貨)의 사용을 금지하자 큰 원성이 일어나 1426년(세종 8년) 포화의 사용이 다시 허용되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정부 정책을 더욱 불신하여 1427년(세종 8년) 1월에는 동전 8 ~ 9푼이 쌀 1되로, 9월에는 12 ~ 13푼이 쌀 1되로 평가되었다. 동전에 들어가는 동보다도 동전의 가격이 낮아지자 동전은 아예 구리를 뽑아내기 위해 녹여지거나 해외에 밀수출되기까지 했다. 이 결과 동전의 가격은 동 가격 수준으로 회복되었으나 시중에서 유통되는 동전 양은 더욱 줄었고, 정부에서는 발행 비용을 생각할 때 더 찍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게 되어 1438년(세종 20년) 철전 논의마저 좌절되자 1445년(세종 27년) 조선통보의 발행은 중단되었다.

동전 발행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화폐 사용 경험의 부족화폐에 대한 불신 등이었다. 고려 시대에도 동전, 철전 등의 발행이 시도되었으나 동전이 조금 돌았던 것을 빼면 나머지는 정부 관할 상점 정도에서나 유통되어 실질적으로 화폐 유통이 폐기된 상태였다. 외국 화폐로는 저화가 유통되었으나 저화의 신용도는 , 이라는 제국 정부의 보증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지 조선 정부의 수준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지폐가 17세기 상업 자본주의의 성숙 이전까지 쓸모 있게 유통된 사례는 송 · 원 대의 사례가 유일하다. 그러나 그 두가지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국내 시장의 미발달. 당시 조선은 한양을 제외하면 시장이 없다시피 했다.

사실 1400년대는 화폐 유통이 전세계적으로 침체된 상태이였다. 유럽 지역도 1500년대 후반 포토시 같은 남아메리카의 은광 로또가 터지지 전까지는 , 의 공급 부족으로 곤란을 겪어서 그레샴의 법칙(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이 나오던 시기였고, 중국도 원나라 말기 교초의 남발이 후임 명나라의 화폐 경제를 크게 침체시켰고, 동아시아의 은광역할을 하던 일본도 1500년대 연은분리법으로 은광로또가 터지기 전이라 가마쿠라 막부무로마치 막부도 자체적인 화폐를 전혀 발행하지 못한 채 송, 원, 명 등 중국 화폐에 의존하여 교역을 진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정황상 백성들이 동전을 믿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조차 세금을 돈이 아닌 특산물로 받는 모순적인 체제도 한 몫 했다. 그나마 태종 때 저화를 발행하면서 세액 납부를 일부 저화로 대체 가능하게 하고 녹봉도 저화로 지급하는 등의 노력을 했으나, 일반민의 신뢰를 얻지 못해 유통의 실효성은 적었다. 게다가 화폐의 발행량도 적었다. 쌀 1되가 조선통보 4문(4개) 정도의 가치였는데, 조선통보의 총 발행량이 전체 미곡거래의 5% 미만이였으니 애초에 화폐의 사용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수준이였다.

이 결과 1445년(세종 27년) 발행 시의 손해가 심각한 동전은 발행을 중단하고 저화를 재발행하였으며, 공정 시세는 저화 1장에 동전 50푼, 쌀 1말로 정해졌으나 저화 유통은 기피되었다. 1458년(세조 4년) 결국 포화의 사용이 재허용되었고, 이후에도 세조가 철전을 유통시키거나 성종이 저화를 재발행하려는 노력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화폐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3 17세기의 화폐 유통 정책과 고난

16세기 중엽에 들어서면 전세계적으로 유통 및 무역권이 형성되어, 서민 사회 내에서도 점차 화폐 유통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명은 15세기 후반 이후 화폐 경제의 부활 이래 1565년 처음 시행되어 1570년대 전국에 확산된 일조편법을 통해 은 경제를 확립시켰고, 일본에서도 1530년대 조선에서 회취법이 건너간 이후 이와미 은광 등 금 · 은광의 발굴이 활발하여 동아시아의 은 펌프 역할을 했다. 1570년대에는 동아시아권까지 진출해 있던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수은아말감법이 개발되어 은 생산의 획기적인 전기를 불러왔다.

조선에서도 15세기 초 회취법의 개발 이래 단천 은광 등이 활성화되고, 1540년대 이후에는 왜은(倭銀)이 들어와 국내에서 유통되기 시작하였으나 서민 사회에 보급될 정도로 널리 유통되지는 않았다. 특히 조선 초에 100여 년 간 시달리며 조공품을 금, 은에서 면포와 로 바꿔놓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공으로 뜯길 것을 우려하여 은광 개발을 국가 차원에서 활성화시키지는 못했고, 은 유통은 대 중국 무역에서 지불되거나 정부에서 확보하여 중국 사신의 접대와 조선 사신의 중국 사행 경비로 쓰는 것이 주된 용도였다.

이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 조선에 들어온 명이 은화를 가지고 물건을 사려고 하자 물건의 매매가 불가능한 상황에 말려들게 되었다. 전쟁 상황임을 감안해도, 중국과 조선의 은 사용도 격차는 상당히 컸다. 어쩔 수 없이 인부의 부역으로 중국에서 쌀을 날라왔으나 민생은 극도로 피폐해졌고, 파견된 중국군조차 조선에 화폐의 유통을 요구하는 상황에 치달았다. 이에 중국처럼 화폐를 찍거나 중국 화폐를 들여와서 편의를 도모해보자는 의견이 올라왔으나 선조의 반응은...

비변사가 아뢰기를, "동전을 주조하는 일에 대하여 의논하는 자 중에 혹자는 '이렇게 재정이 바닥난 때에는 통화(通貨) 증식 정책으로 모든 방법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일단 시험해 보았다가 중지하더라도 큰 해는 없을 것이니, 시험삼아 실시해 보는 것도 무방하다.'하고, 혹자는 '우리 나라는 풍속이 중국과는 달라 조종조에서도 시행했다가 금방 폐지한 사실이 있었으니, 그렇게 쉽게 할 일이 아니다.'하였습니다. 다만 경리가 그것을 꼭 실시해 보려는 생각이 있어 중국에 주본을 올려 만력통보(萬曆通寶)를 주조할 것을 청하라고까지 하였으니, 시험삼아 해조로 하여금 마련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틀림없이 시행이 안 될 것이다."하였다.
- 선조 31년(1598) 4월 2일 3번째 기사
호조가 아뢰기를,
"동철은 애당초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 지금 수 천만 관의 동전을 주조하려면 반드시 허다한 공력이 소비될 것이며, 과연 등통(鄧通)의 산과 같이 많은 구리가 없습니다. … 성상이 염려하시는 것이 사실 공연한 걱정이 아닙니다. 신들도 어찌 그러한 곡절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경리가 한번 적극 시험해보기 위하여 주본을 올리라고까지 독촉하니, 아무래도 그만 둘 수는 없는 형세인 것 같아 매우 민망스럽고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이왕 그만 둘 수가 없는 일이라면 그 유통 계책을 강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 만약 운용을 적절히 하고 내고 들이는 데도 일정한 방법을 둔다면, 유통 과정에 과연 폐단이 없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전혀 쓸모없는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근래 와서 술과 고기 · 두포(豆泡)·염장(鹽醬)·시초(柴草) 등의 소소한 값들은 모두 은자(銀子)를 사용하고 있는데, 중외의 백성들이 오히려 그 덕으로 생계를 꾸려 간다고 합니다. …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만력통보를 만들어 중국인과 매매할 때 서로 있고 없는 것을 교환하게 한다면, 사람마다 교환하기를 원하여 지금 은자를 쓰는 것과 같이 즐겨 사용할 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동전과 은자는 다르다. 지금 그렇게라도 마련하여 혹 시행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아 나로서는 그 일이 반드시 시행이 안 되리라고 본다. 지금 초기(草記)를 보면 또 한 가지 큰 일을 추가하려고 하는데, 이는 까닭없이 일을 만드는 것으로써 일 하나 만드는 것이 일 하나를 더는 것보다 못한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러한 일을 한단 말인가. 내 뜻은 그러하니 다시 비변사와 상의하여 처리하라."
- 선조 31년(1598) 4월 8일 8번째 기사

"야 안 돼! 야 생각을 해봐, 전쟁 중에 동전을 어떻게 유통시키냐? 안 돼!"

...결국 화폐 유통은 좌절되었으나, 어찌되었건 임진왜란은 어떻게든 은의 유통 경험 등을 쌓는 결과를 낳았고, 조정에 본격적으로 화폐 유통 논의가 올라왔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이에 힘입어 1603년에는 호조에서 주전사목을 마련하기도 했으나, 구리가 부족해 찍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구리의 주요 수입처였던 일본과 교역이 단절된 상황이었으니 구리를 구할 곳이 없었다.

전환점이 된 것은 대동법의 시행이었다. 대동법은 중간 과정에서 공납가가 팍팍 올라가는 폐단이 컸던 이전의 공납 제도를 폐지하고 백성들에게 대동미를 거둬 그것을 공인에게 주어서 왕실과 조정에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대동미를 직접 들고 다니면서 물건을 사려니 불편한 점이 많아서 구체적으로 새 화폐제조 논의에 불을 댕겼다. 특히 김육은 대동법과 화폐의 사용 모두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인물로, 총체적인 경제 계획에 혜안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1625년(인조 3년) 동전이 60만 개 주조되었으나, 주전량의 부족 등으로 곤란을 겪다가 정묘호란을 맞아 중단되었다. 이어 1633년(인조 11년) 김신국과 김육이 건의하여 물가 안정을 임무로 하는 상평청을 설치하고 화폐를 주조 유통했으나, 불과 몇 년 뒤에 병자호란이 터지면서 화폐 주조는 중단되었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화폐 유통 논의가 일어났고 김육은 1650년(효종 원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15만 문 상당의 청전을 사비로 사와서(!) 평양과 안주 등 평안도 일대에서 유통을 시도했다. 김육은 대동법을 함께 추진하면서 화폐세 납부와 대동법의 시행을 연동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1651년(효종 2년)에는 행전사목이 실시되어 동전 사용을 북돋았고, 1653(효종 4년)년에는 평안도에 행전 별장을 파견하여 행전을 독촉하였으나 강압적 추진과 모리 행위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도 했다. 1655년(효종 6년)에는 은화 1냥을 동전 6냥과 쌀 1섬에 대응시켜 실물 가치와 화폐의 연동을 꾀했다.

이러한 상황에 힘입어 동전 유통은 한반도 서북부를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어 나갔으나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조정 내에서 화폐 자체에 대해서 불신하는 의견도 아직 컸지만, 현실적으로도 구리의 부족이 발목을 잡았고, 당시에는 일본산 은의 유통이 활발하던 시절이라 '동전이 은보다 나은 게 뭐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17세기 후반까지 매매 문기는 지역차는 있으나 동전보다는 은이 유통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당시 시중에서 일본 은이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이며 정작 그 은조차 농촌을 비롯한 지방에서는 유통되지 못하는 곳이 많았다. 하지만 김육은 뚜렷한 신념하게 화폐 유통책을 말 그대로 우직하게 밀어붙였고, 효종한테 '죽을 때까지 못 고칠 병'이라고 까이기도 했다.

상이 이르기를, "전화(錢貨)를 시행한 지가 이제 10년이 되어가는데 해로움만 있고 보탬이 없다. 경들과 상의하여 혁파하려 한다."하자,
시방이 아뢰기를, :전화를 시행하기 어려움에 대해서는 김육도 깨닫고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육의 고집스럽고 막힌 병통은 죽은 뒤에야 그만 둘 터이므로 마음이 흔들릴 리가 결코 없을 것이다."하자,
시방이 아뢰기를, "전화 사용하는 법을 1년 동안 혁파하지 않으면 1년 동안의 폐단만 있게 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애당초 전화를 사용하게 한 것은 오로지 재화의 유통을 위해서였다. 10년 동안 시행하였지만 조금의 효과도 없으니 어찌 혁파하지 않겠는가. 통행(通行)하는 화폐로는 백금(白金, 은)만한 것이 없는데 시골에서조차 사용되지 않으니, 하물며 전문(錢文)에 있어서이겠는가."하였다.
- 효종 7년(1656) 13권 9월 25일 1번째 기사

그러나 효종의 말과 달리 의견의 주류는 화폐 유통의 진척도에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다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므로 완급 조절을 잘 해야 한다는 주장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고, 현실적으로도 그랬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 그리고 전화(錢貨)를 통행시키는 것이야말로 재화를 넉넉하게 하기 위한 방도이니, 만일 사방에 잘 유포하여 온 나라가 힘입을 수 있게끔 한다면 어찌 이 백성들의 큰 행복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나라는 본디 구리가 나는 산이 없어서 오로지 바다 밖의 공봉(貢奉)에만 의존하고 있으니, 돈을 주조하여 통행시키는 것이 진실로 쉽지 않습니다. 기필코 통행시키려고 한다면 반드시 돈을 일단 많이 주조한 다음 점진적으로 유통시킴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이 이롭고 해가 없다는 것을 조금 알게 한 연후에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 급박하게 독촉하여 신뢰감을 갖기도 전에 강요한다면 아마도 재화가 넉넉해지기도 전에 백성이 먼저 고달프게 될 것입니다. …" 하였다.
- 효종 4년(1653) 3월 4일 4번째 기사

4 상평통보의 유통과 우여곡절

상평통보가 본격적으로 제조 유통되기 시작된 때는 숙종 4년인 1678년으로, 허적이 새 화폐 제조와 유통을 건의한게 받아들여져 주조되었다. 이 때의 통용책은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세심해져서, 동전을 쌀 · 무명 · 은화와 연결시키고 세금 일부의 납부와 녹봉의 일부 지급에 동전을 이용하여 사회 심리적으로 동전의 안정성을 보증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동전의 확산에는 일본의 은 수출 제한도 영향을 미쳤다. 1681년까지 대만의 정씨 세력에 대해 해금령을 실시하고 해안의 거주민들을 내륙으로 옮기는 등 완전한 해상 봉쇄 정책을 폈던 청나라가 대만 세력을 몰아붙이고 해금을 해제하면서, 일본으로 쇄도하는 중국 상선이 늘어났다. 이에 일본에서는 1685년 내항하는 중국 상선의 머릿수를 제한하여 은 유출을 줄였고, 1695년에는 은화를 은 함량 80%의 게이쵸 은에서 은 함량 64%의 겐로쿠 은으로 전환하였다.

조선은 이에 대해서 인삼을 무기 삼아 인삼에 한해서 80% 은을 계속 뜯어낼 수 있었지만, 이전의 중국산 생사 · 비단 무역은 타격을 받아 은의 유입량이 줄어들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한편으로 은을 구리로 대체하려 노력하였고, 이에 1710년대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은보다 구리의 공급이 원활해졌다. 이에 힘입어 조선에서는 상평통보를 유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평통보의 초기 유통에서 조선 정부는 또다시 화폐 운용의 미숙으로 인한 여러 곤란을 겪어야 했다. 1695년부터 1697년까지 대기근으로 인해 구휼을 위한 재정이 긴박해지자 정부는 지나치게 화폐 주조를 통한 이익에 집착하였고, 그 결과는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각 관에서 마음대로 찍는 데다 사주조도 활발하여 동전의 질도 들쭉날쭉했다.

어영청에서 10삭(朔)에 한하여 주전(鑄錢)하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 이 때에 흉년들어 재물이 궁핍하니, 호조 및 각 군문(軍門)이 날로 주전하여 재용을 늘리는 길로 삼고, 민생이 이로 인하여 더욱 곤궁하여짐을 생각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근심하였다.
- 숙종 21년(1695) 12월 10일 5번째 기사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독관 이희무가 상주하기를,
“전폐(錢幣)는 곧 나라 안에서 통용되는 화폐입니다. 전화(錢貨)는 크고 작음이 각각 그 제도가 있는데, 근래에 점점 잡스럽고 뒤섞여 당초의 모양과 비교하여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는 단지 관에서 주조한 것도 처음과 같이 못할 뿐 아니라, 반드시 민간에서 몰래 주조하는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엄중히 금지 단속하면 거의 값이 떨어지는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이며, 또 법을 범하는 것을 막는 방법도 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였다. 당시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여 사주(私鑄)가 매우 많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잡스럽고 뒤섞임이 날로 더 심해지고 가치가 더욱 떨어졌으므로, 이희무가 마침내 엄금하기를 청한 것이다.
- 숙종 24년(1698) 5월 6일(기묘) 2번째 기사

이 결과 동전의 폐단에 대한 상소가 잇달아, 1698년부터 동전의 주조가 중단되었다. 문제는 그것이 1731년까지, 33년 동안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결과 동전의 가치가 계속 상승하고 1710년대부터는 동전이 부의 축적 도구로 이용되면서 시장에서 돈이 마르는 전황(錢荒)이 발생하였다. 몇십 년 사이에 화폐 가치가 들쭉날쭉한 상황을 겪으면서 화폐의 신인도는 하락하였고, 성호 이익 등은 아예 동전을 폐지해 버리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730년대부터는 동전의 주조가 재개되어 전황에는 다소 숨통이 트였으나, 1820년대까지 전황 국면은 계속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1710년대부터 일본이 구리의 수출도 제한하기 시작하면서 구리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구리에 아연 등을 섞어 원가 절감을 노렸으나 이 결과 동전이 쉽게 부스러져 시장 내 유통 기한이 짧아졌고 돈이 줄어들었다. 또한 시장의 규모가 확산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물류 유통 자체가 팽창했던 것도 작용했다.

그러나 18세기 토지 매매, 임금 지불 등의 문기에서 거래는 대부분 동전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상평통보가 제법 보편화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전황 또한 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 동남아시아 구리, 스웨덴 구리 등의 유입으로 동아시아 내에서 구리의 공급이 활발해지면서 구리 가격이 내렸고, 이에 1829년부터 1832년까지 152만 냥을 찍어 유통시키는 등 1809년부터 1857년까지 600만 냥이 보급되어 소멸하였다.

5 화폐 경제의 한계

흔히 상평통보의 유통은 조선 후기 경제사의 발전으로 평가되고 실제로도 이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견해이지만, 마치 이것이 자본주의의 싹이었으며 조선 경제가 완전히 물물 교환 경제에서 탈피했다고 보는 것은 오산이다. 최근에 가공된 통계는 상평통보의 유통이 실제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시각보다 상당히 부족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상평통보가 시장 내에서 어떤 한계를 가졌는가에 대해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일부 단락을 인용하고자 하니 참고하기 바란다.

… 1860년 경의 동전량은 1400만 냥 내외이고, 그것으로 미곡 생산량의 13%에 해당하는 200만 섬을 구입할 수 있었을 것이고, 국내 총생산의 3% 정도에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렇게 화폐 경제가 성장하였지만, 19세기까지는 자급자족의 영역이 지배적이었고 무명과 쌀의 화폐 기능이 뿌리 깊게 존속하였다. 19세기에도 농가 생산물의 상품화율은 20 ~ 30%로 추정된다. 아직 시장 경제가 미성숙하고 동전의 공급이 풍부하지 않는 19세기 전반 이전에는, 제값을 받고 손쉽게 팔 수 있고 옷감과 식량으로 늘 수요되고 있고 조세 부과의 대상인 쌀과 무명은 여전히 화폐로서의 매력을 상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20세기에도 인플레이션이 격심하면 쌀은 화폐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 서울 등 도시에서는 화폐의 사용이 활성화된 반면, 일반 농촌에서는 그러하지 않았다. 남공철(南公轍, 1760 ~ 1840)은 서울에서는 돈으로 살아가고 지방에서는 곡식으로 갈아간다고 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도 장시에서 물물교환이 활발하다고 외국인은 보고하였다. …
동전은 국가 지불 수단으로서 위상을 신장하였으나,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세를 동전으로 납부하는 추세는 진전되다가 18세기 말부터 법정 조세의 전납화 추세는 정체하여, 경지세의 전납화율은 19세기 중엽에도 25% 정도에 머물렀다. …
- 국사편찬위원회, 『화폐와 경제활동의 이중주』 82 ~ 85쪽에서 부분 인용, 두산동아, 2006

물론 이는 부정적인 단락을 골라 뽑은 것이며 전국적으로 도시와 시장에서 상평통보가 널리 유통된 것은 맞다. 그러나 통계상으로 볼 때 '화폐 경제'라기에는 여러 통계가 이를 지지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쌀과 포에 대해 동전은 보조적 역할을 했으며, 실제로 조선은 화폐 운용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화폐 경제에 대한 관념은 성숙하는 데 오랜 기간을 필요로 했다. 정부에서는 화폐 주조 차익을 노려 주전하는 경우가 많았고, 영조나 성호 이익 같은 사람은 화폐를 사치의 근본으로 여겨 고깝게 여겼다. 실제로 영조는 재위 초기에 화폐를 찍지 않으려다가 실패했고, 이익은 폐전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견이 사그라든 것은 화폐 본연의 운용 가치를 인정했다기보다는 화폐를 없애는 것이 오히려 사회에 큰 부담을 지우게 된 상황을 자각한 것 때문이지, '사치를 억제해서 민생을 안정하게 하자'를 넘어서서 중상주의와 같은 적극적 화폐관이 보편화되는 것은 더욱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화폐 유통의 촉진 노력이 이렇듯 저조했던 데에는 18세기 이후 구리의 원가가 올라가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기에는 부담이 커졌던 데도 이유가 있었다. 제임스 팔레의 『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282 ~ 283쪽)에 따르면 원유한은 화폐 주조를 통해 얻는 이익이 1679년 50%에서 1814년 10%로 줄었다고 주장했고, 제임스 팔레는 실제로는 1829년 37.6%와 1830년 31.4%에 달했다고 수정했다(단 19세기 중반의 구리 공급 완화를 고려한 것인지는 좀 더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17세기 유럽의 금화와 은화 주조 비용은 액면가의 5%와 25%에 불과한 반면 조선의 상평통보는 1825년 92%, 1829년 73%, 1830년 73%였다고 한다. 즉 유럽에 비해 화폐를 찍을 동기 자체가 잘 부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상평통보에는 2전 이상의 화폐가 없었다. 정조 이후 5전과 10전의 유통 계획이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시안만 제시되고 실행되지는 않았다. 이유는 인플레이션과 도적의 횡행, 사치와 부정 축재 등이었는데, 이유 그 자체로는 이해할 만하지만 고액권 자체가 없었던 상황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우려가 심했다. 말 그대로 100냥짜리 거래를 하려면 100냥을 지고 가야 했고, 1000냥짜리 거래를 하려면 1000냥을 지고 가야 했던 상황. 이 결과 고액 거래에서는 어음으로 화폐 전달을 대신하거나 화폐를 전달하면서 중간의 환(換)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19세기 중반을 넘어서면 고액권 논의가 점차 활발해지고, 원가가 쌌던 청의 동전을 유입시켜 이익을 누려보자는 의견이나 은화를 발행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한동안 기각되었다. 청전의 유입은 화폐의 자주권을 상실할 우려 때문이었고, 은화를 찍어내기에는 조선 내에서 확보할 수 있는 귀금속의 양이 적었다. 당장 일본과의 은 교역도 거의 단절된 상황에서 청으로의 은 유출을 틀어막아야 했던 상황상 이는 불가능했다. 결국 고액권 유통의 논의가 활발해졌으나...

6 조선 말의 상평통보

고액권에 대해서는 조정 내에서도 당오전, 당십전 정도를 발행하여 천천히 고액권을 인식시켜 나가자는 의견이 주류였다. 실제로 상평통보의 가치는 제조에 들어가는 구리의 가격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절차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과 그 주변 인물들은 안이한 판단을 했다. 소액권보다는 고액권이 국가 재정에 이익이 되니 일단 찍어보자는 것이었다. 기초적인 경제학 원론만 들었더라도 그런 결정은 하지 않았겠지만 당시에 어디 그런 걸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국고채에 대한 개념이나 재정 정책, 통화 정책에 대해서는 개념조차 잡히지 않은 시대였다.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은 서구에서조차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시기였으니까. 물론 나중에 조선이 일본에 진 빚 때문에 크게 데이고 망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기는 하지만 최소한 이 때 국채를 발행하는 편이 당백전 따위를 찍어내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병학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다 떨어졌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공사(公私) 간에 일을 더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조절하여 메워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였지만 아직 그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돈이라는 것은 경중을 잘 맞추어 준절하여 쓰는 물건입니다. 옛적에 당십전이나 당오전을 쪼개어 당이전이나 당삼전으로 만들어 쓴 법은 모두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한 정사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된 때에 응당 이익되는 것과 손해보는 것을 절충해서 쓰는 원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당백대전(當百大錢)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통보(通寶)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신의 좁은 소견을 대번에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官)에게 하문하시기를 바랍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아주 좋다. 속히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 고종 3년(1866) 10월 30일 2번째 기사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어...) 이건 좁은 소견이 아니라 나라 절딴내자는 소리지

그 결과 한국 전근대 화폐사 최악의 오판으로 평가받는 당백전이 발행되어 기존의 화폐 가치를 완전히 뭉개놓았다. 실제 가치는 상평통보의 5 ~ 6배밖에 인정받지 못한 당백전을 100배의 가격으로 인정하라는 압력을 받자 저항이 속출했다. 이때 찍어낸 당백전의 명목상 금액은 상평통보 유통량 전체보다 더 컸다. 한 순간에 돌고 있던 화폐총량이 2배도 넘어버린 셈이다. 이러니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물가가 6개월만에 5 ~ 6배로 뛰어오르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민생은 피폐해졌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수익도 거의 없다! 더구나 조세를 거둘 떄는 당백전을 받지 않고 상평통보만 받으면서, 당백전에 대한 화폐불신풍조는 하늘을 찔렀다. 유생들은 이전부터 대립각을 세워왔다고 하더라도 민생 파탄의 책임론은 대원군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이에 대원군은 청전을 투입하여 물가를 잡아보려고 했다. 청전은 말 그대로 청나라 동전으로, 이것도 상평통보의 1/3의 가치도 없는 악화이다. 원래 이 청전은 당백전이 발행되자 관리들이 환투기를 하기 위해서 청나라 동전을 밀수 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백전의 문제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대원군은 청전의 유통을 합법화 시켰다. 그리고 결국 당백전이 주조를 시작한지는 6개월만에 중단, 유통된지는 2년만에 유통이 금지되면서 청전의 유통은 합법화를 넘어서 공식화 되었다. 더구나 조정은 당백전의 유통을 금지시킨 다음에, 당백전을 거둬들여서 청전 1냥과 교환해주는 형태로 없애 버렸고 당백전은 녹여서 구리를 만들었다. 문제는 청전이 당백전에 비해서나 양화이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평통보에 대해서는 악화라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돈의 투입은 당백전 폐지 이후 조금 가라앉기 시작했던 인플레이션을 가중시켰고, 청전은 전체 화폐유통량의 40%를 넘겼다. 결국 청전은 당백전 보다 느리게 화폐경제를 부식시켰고, 인플레이션과 화폐불신도 당백전보다는 느렸지만 그 진행은 꾸준했다. 문제는 이 속도가 느리다는 것 때문에 대원군은 정권에서 밀려나는 그 순간까지 청전의 유통을 금지하지 않았고, 누적되었던 모든 문제에 더해서 경제적인 문제가 더해지면서 결국 대원군은 정권에서 밀려난다. 결국 대원군을 밀어낸 고종은 청전을 그제서야 폐지했는데, 이는 당연히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졌고, 조선 조정은 이미 올라버린 물가로 인해서 세수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1880년대 조선에서는 당오전, 평양전을 발행하여 상평통보를 대체하려 노력하였으며, 1894년 상평통보의 발행은 중단되고 1892년부터 발행된 백동화로 그 역할이 대체되었다. 이러한 화폐의 혼란상 속에서 갑오개혁으로 인해 100% 조세 금납화(이전까지는 25%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을 기억하자)가 강요되자 혼란은 더욱 심각해졌다.

게다가 당오전은 실제로는 2 ~ 3푼의 가치로 유통되었고, 백동화는 차익을 노린 주조가 과도한 데다 곳곳에서 밀주되어 그 가치가 나날이 폭락했다. 이 결과 오히려 구리 값이라도 제대로 유지되는 상평통보가 계속 유통되는 기이한 상황이 펼쳐졌으며, 러일전쟁으로 구리값이 올라가자 더욱 심했다.

이렇게 상평통보 유통이 유지된 지역은 주로 남도 지역[2]이었는데, 1905년 시행된 화폐 정리 사업 과정에서 이를 빼놓을 수 없었다. 화폐 정리 사업 이후 조세율은 1결당 신 화폐 80원이었는데, 타 지역에서는 엽전 8푼으로 대체한 반면 경상도전라도에서는 12푼으로 내도록 했다. 이 지역에서는 따라서 엽전을 보유하고 있으면 4푼어치만큼의 손해를 보게 된 것이다. 또한 당시 엽전 1냥은 신 화폐 6.7냥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어, 엽전 1냥으로 신 화폐 10냥을 대체할 수 있는 타 지역에서는 조세로 냈을 경우 이익을 보았다. 이 결과 엽전은 조세로 회수될 뿐만 아니라 전국에 흩어져 지리멸렬해졌고, 파란만장했던 상평통보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7 일제강점기의 상평통보

비록 상평통보의 주조는 1894년에 중단되었지만, 지방에서는 일제강점기까지도 상평통보가 꾸준히 통용되었다(...). 상평통보의 유통을 중단시키고 발행한 백동화는 실제 금속가치에 비해 상당히 높은 액면가를 가진 악화였고, 그래서 중앙정부의 화폐정책을 불신하는 풍조는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백동화 발행당시 조선정부는 상평통보 2전짜리를 기준으로 100개, 1전짜리는 200개를 신화폐 한냥으로 교환해주었으며[3] 지속적으로 상평통보를 없애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찍은 양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개혁은 서울, 경기권에서나 유용했지 지방에서는 중앙이 뭐라하든 여전히 상평통보로 거래하는 풍조가 남아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기존의 발행한 구 한국은행권 주화들은 1925년 말까지 일제가 발행한 조선은행권과 병행해서 쓰이다가 유통이 중단되었는데, 이때 상평통보는 여전히 보조화폐로 쓰였으며 1925년 말 구 한국화폐의 유통중지령에도 상평통보는 제외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이 당시의 상평통보는 보조화폐로서의 용도가 강했는데, 일단 당일전이든, 당이전이든, 당오전이든, 당백전이든 가리지 않고 한 푼으로 쳤으며[4], 10푼이 모여서 1돈이 되고, 10돈이 모여 1냥이 되고, 구한국시절에 엽전 닷냥을 1원으로 바꿔서 계산했었으므로 일제시대에 상평통보는 닷냥(=500개)이 조선은행권 1원으로 통용되었다. 즉 상평통보 닷푼이 조선은행권 1전과 동등한 가치로 통용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풍조는 특히 경상도전라도지방에서 해방 직전까지도 살아남았는데,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시골집에선 가끔 집안에 굴러다니는 상평통보가 발견된다. 한국인을 가리켜 엽전이라고 비하하는 표현도 이 시절 끝까지 엽전만을 고집하던 조선인들을 두고 만들어진 표현이라 하니, 정말로 질기고 질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1. 더 이전 시대의 조선통보, 십전통보나 고려시대 건원중보, 동국, 해동, 삼한 등의 전명(錢名)의 화폐들을 전국적으로 통용되지 못하고 대도시에서만 제한적으로 쓰였다.
  2. 애초에 남도지역과 평양 이북의 관서 지역은 당백전이 유통이 되건말건, 청전이 합법화되건말건 상평통보 외에는 안 받았다. 그래서 당백전과 청전의 문제는 주로 수도권에 치명타를 가한 반면에 남도와 관서 지역에는 영향이 적었다. 정부 시책을 안 들으면 자다가도 떡나왔던 시기였다.
  3. 이때부터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같은 '반푼'이라는 표현이 돌기 시작했는데, 이전까지는 반푼이라는 단위가 없었다.
  4. 1902년에 미국 의사 필하와(...)와 한국인 신해영이 서술한 <산술신편>에 "당오전은 한푼이 곧 닷푼이므로, 엽전의 다섯배가 되어서 한푼을 닷푼이라고 이르렀으나, 지금은 법률로 당오전 한푼을 엽전과 같이 마련하니라." 라는 구절이 있는걸로 보아 이런 풍조는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있었던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