清 少納言(청 소납언)
1 개요
헤이안시대 중기의 여류 작가. 일본 최초의 에세이집인 마쿠라노소시로 유명하다.
'세이 쇼나곤'은 본명이 아니고 궁궐 내에서의 별명으로, 키요하라 쇼나곤네 집안 따님 정도의 의미이다. 다만 아버지의 직책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게 보통인데, 일단 아버지인 키요하라노 모토스케는 '쇼나곤'까지 올라가지 못했고(…) 가족 중 누가 '쇼나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출생년도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출생년도와 세이 쇼나곤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의 나이[1]로 비추어보았을 때 966~968년쯤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
세이 쇼나곤의 집안인 키요하라 가문은 와카[2]로는 유명했지만, 신분은 중~하류 귀족이었다. 아버지 키요하라노 모토스케도 와카 편찬집 편집부인 나시츠보의 5인에 선발될 정도로 유명한 가인이었지만, 61세가 되어서야 경로우대(…)로 겨우 5위(지방관)에 올랐다.
결혼한 연도는 대충 980~2년 정도. 추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의 결혼 풍습이 남성이 여성의 집에 드나들다가 아이가 생기면 정식 부부가 되거나 하는 식이었기 때문.[3]
어쨌든 982년에 타치바나노 노리미츠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 걸로 봐서, 이전부터 결혼 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타치바나노 노리미츠는 집안은 후지와라가 다음이었지만 당시 황태자였던 카잔 덴노의 젖형제인데다 직책도 쿠로우도(덴노 전속 비서관)로, 상당히 전도 유망한 청년이었다.(다만 카잔 덴노가 부인이 죽었다고 머리밀고 이치죠 덴노에게 양위하는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 됐다.[4])
이후 성격 차이[5]로 이혼하긴 하지만, 이혼하고 나서도 노리미츠와 세이 쇼나곤의 사이는 좋았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저 두 사람은 무슨 남매 같구나!!"라고 속닥거렸다고 한다.
세이 쇼나곤의 출사는 993년, 중궁 후지와라노 테이시의 사적인 궁녀가 됨으로써 이루어졌다.[6] 이때의 일들을 적어 놓은 에세이집이 마쿠라노소시[7]이다.
중궁 후지와라노 테이시와 덴노에게 각각 선물로 고급 종이가 들어왔는데, 이치죠 덴노는 이 종이에 사기(일본어 발음은 시키)를 쓰게 했다. 테이시가 "우리는 이 종이에 무엇을 쓸까??"라고 세이 쇼나곤에게 묻자, 세이 쇼나곤은 "그쪽이 시키를 쓴다면 우리는 마쿠라를 쓰지요."라고 대답했고, 그 말에 테이시가 세이 쇼나곤에게 종이를 하사했다고 한다.
여하튼 이 이야기가 맞든 안 맞든 간에 마쿠라노소시를 영어로 옮기면 The Pillow Book.[8]
당시 후지와라노 테이시와 세이 쇼나곤의 사이는 일반적인 주종관계보다 훨씬 친밀한 교류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에 대한 와카도 남아있다. 세이 쇼나곤이 잠깐 궁궐을 떠난 사이에 "보고 싶으니 얼른 돌아오라."는 내용을 시로 써서 보낸 것. 당연하지만 세이 쇼나곤은 감동하고 회답을 써서 보내고.[9]
그러나 이런 궁중에서의 생활은 후지와라노 테이시의 아버지인 후지와라노 미치타카가 사망하면서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미치나가가 재빨리 권력을 움켜잡으면서, 테이시가 의지할 곳이 없어진 것. 더군다나 테이시의 오빠인 코레치카와 남동생 타카이에가 여자 문제(…)로 前 덴노인 카잔인과 싸움이 붙어서 검비위사(당시 경찰)에게 끌려가는 등, 황후 테이시의 친정은 망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빠와 남동생이 끌려가는 걸 본 테이시는, 속세를 떠났다가 이치죠 덴노의 간곡한 부탁으로 환속했다. 하지만 약 2년후, 딸 비시 내친왕을 낳다가 세상을 떠난다. 이로써 테이시의 사적인 궁녀였던 세이 쇼나곤은 궁궐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10]
이후 세이 쇼나곤은 지방 수령인 남자와 재혼해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다고 한다.
세이 쇼나곤은 겐지모노가타리의 작가인 무라사키 시키부와 동시대의 인물로 라이벌과도 같은 사이. 서로가 모시고 있었던 중궁이 정치적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지만[11], 다만 이 경우 중궁 쇼시가 입궁하고 1년 남짓해서 황후 테이시는 사망했고, 테이시의 개인 궁녀였던 세이 쇼나곤은 재혼해서 지방으로 내려갔으며 무라사키 시키부가 입궁한 것은 조금 뒤의 일이므로 두 사람은 직접 대립한 적은 없다. 다만, 무라사키 시키부가 쇼시의 뇨보(女房)로 영입된 것은 문재가 풍부한 전 중궁 테이시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서이므로, 무라사키 시키부가 세이 쇼나곤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가질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겐지모노가타리에서 묘사되는 인간상과 마쿠라노소시에 그려지는 인간상을 보면 두 사람의 성격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세이 쇼나곤은 자기 주장을 딱 부러지게 표현하고 남자들과 한시(漢詩)로 승부하기까지 한 반면, 무라사키 시키부는 자신을 너무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내성적인 타입이었던 듯. 나아가 세이 쇼나곤은 마쿠라노소시에서 무라사키 시키부의 남편을 흉본 적이 있고, 무라사키 시키부도 자기 일기에서 세이 쇼나곤을 깠다.(…)[12]
2ch에 따르면 블로그녀. 라이벌인 무라사키 시키부는 부녀자.#. 근데 세이 쇼나곤과 무라사키 시키부의 행적이나 성격에 비춰 보면 묘하게 말이 되는 비유다.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에서 특전무장으로 등장.
2 백인일수
백인일수 | ||||
덴지 덴노 | 지토 덴노 |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 | 야마베노 아카히토 | 사루마루노 다이후 |
오토모노 야카모치 | 아베노 나카마로 | 기센 법사 | 오노노 코마치 | 세미마루 |
오노노 다카무라 | 승정 헨조 | 요제이 덴노 | 미나모토노 토오루 | 고코 덴노 |
아리와라노 유키히라 | 아리와라노 나리히라 | 후지와라노 도시유키 | 이세 | 모토요시 친왕 |
소세이 법사 | 훈야노 야스히데 | 오에노 치사토 |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 후지와라노 사다카타 |
후지와라노 다다히라 | 후지와라노 가네스케 | 미나모토노 무네유키 | 오시코치노 미쓰네 | 미부노 다다미네 |
사카노우에노 고레노리 | 하루미치노 쓰라키 | 기노 도모노리 | 후지와라노 오키카제 | 기노 쓰라유키 |
기요하라노 후카야부 | 훈야노 아사야스 | 우콘 | 미노모토노 히토시 | 다이라노 가네모리 |
미부노 다다미 | 기요하라노 모토스케 | 후지와라노 아쓰타다 | 후지와라노 아사타다 | 후지와라노 고레타다 |
소네노 요시타다 | 에교 법사 | 미나모토노 시게유키 | 오나카토미노 요시노부 | 후지와라노 요시타카 |
후지와라노 사네카타 | 후지와라노 미치노부 | 후지와라노 미치쓰나의 어머니 | 다카시나노 기시 | 후지와라노 긴토 |
이즈미 시키부 | 무라사키 시키부 | 다이니노 산미 | 아카조메에몬 | 고시키부노 나이시 |
이세노 다이후 | 세이 쇼나곤 | 후지와라노 미치마사 | 후지와라노 사다요리 | 사가미 |
승정 교손 | 스오노 나이시 | 산조 덴노 | 노인 법사 | 료젠 법사 |
미나모토노 쓰네노부 | 유시 내친왕가의 기이 | 오에노 마사후사 | 미나모토노 도시요리 | 후지와라노 모토토시 |
후지와라노 다다미치 | 스토쿠 덴노 | 미나모토노 가네마사 | 후지와라노 아키스케 | 다이켄몬인노 호리카와 |
도쿠다이지 사네사다 | 후지와라노 아쓰요리 | 후지와라노 도시나리 | 후지와라노 기요스케 | 슌에 법사 |
사이교 법사 | 자쿠렌 법사 | 고카몬인노 벳토 | 쇼쿠시 내친왕 | 인부몬인노 다이후 |
구조 요시쓰네 | 니조인노 사누키 |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 아스카이 마사쓰네 | 승정 지엔 |
사이온지 긴쓰네 |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 후지와라노 이에타카 | 고토바 덴노 | 쥰토쿠 덴노 |
제 62번 세이 쇼나곤(清少納言)夜をこめて 鳥のそらねは はかるとも / よに逢坂の 関はゆるさじ
요오코메테 토리노소라네와 하카루토모 / 요니아후사카노(요니오오사카노) 세키와유루사지
밤이 깊어져 닭의 울음소리는 흉내 내어도 / 기어코 오사카[13]의 관문은 불허되네
- 5-7-5-7-7의 정석 형태이다. 어장관리(...)로 유명한 세이 쇼나곤을 대표하는 시 중 하나.
- 세이 쇼나곤에게 후지와라노 코우제이(藤原行成)[14]라는 남친이 있었다. 어김없이 밀회를 하던 어느날엔 축시(새벽 2시)에 훌쩍 돌아간 적이 있었다. '닭이 운 것 같아 (점차 새벽이 밝을테니) 돌아갔소.'라며 코우제이가 뒤늦게 변명편지를 보내니 쇼나곤이 '그 닭은 맹상군의 닭이군요.'라고 타박 준적이 있었다. 이는 중국 고사의 맹상군 일화로 맹상군 자신이 암살당할 위기에 처하자 함곡관으로 도망쳤는데 이 함곡관이 새벽닭이 울기 전엔 문을 열지 않아서 일부러 닭소리를 흉내내어 문을 열어내는데 성공했다는 것에서 인용, 코우제이를 거짓말쟁이라 비난한 것이다. 그러자 코우제이가 '그건 함곡관이잖아. 오사카와는 관계없잖아?'이라고 반박하니 쇼나곤이 이 와카를 보냈다고 한다. 함곡관이든 오사카관이든 그게 그거라는 이야기. 또는 이것을 '오사카(쇼나곤)는 함곡관과 다르다.'라는 것을 암시하는 해석도 있다.
- ↑ 60세 전후, 당시로써는 고조할아버지도 될 수 있는 나이다! 흠좀무.
- ↑ 일본의 전통 시가
- ↑ 물론 정식으로 혼인하는 경우도 있다.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오치쿠보 모노가타리>를 보면, 정식 혼인은 양가에서 혼담이 오간 후 처가에서 사위를 맞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수순이었다. 남녀 간에 와카를 적은 편지를 주고받다가, 남성이 여성의 집을 드나들고, 더 사이가 깊어지면 밤을 함께 보내게 되고, 3일 연속으로 함께 밤을 보내면 부부가 된 것으로 보았다. 이런 경우는 정식 아내가 아닌 첩이 되는 경우가 잦았던 듯하다.
- ↑ 일부에서는 이치죠 덴노의 외척의 압력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 ↑ 남편은 별로 시 같은 걸 좋아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무관 쪽이고, 나쁘게 말하면 센스가 없고 시에 문외한이었다고 한다. 마쿠라노소시에 따르면 노리미츠는 세이 쇼나곤이 시를 써서 주는 것을 싫어해서 "나랑 남남이 되려거든 시를 읊어달라"고 했다고 적고 있다.
- ↑ 헤이안 시대에는 궁녀가 크게 덴노 전속 궁녀와 그 외의 높은 신분을 지닌 사람의 사적인 궁녀로 나뉘어졌는데, 사적인 궁녀는 덴노로부터 급여를 받는 게 아니라 자기를 고용한 사람한테 급여를 받았다고 한다.
- ↑ 일기는 결코 아니다!!
- ↑ 영어 의미는 에로책(…)이다.
- ↑ 여기서 모티브를 얻었는지,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어>라는 백합 4컷 만화가 나왔다. 히키코모리 니트 생활(…)을 청산하고 궁녀로 들어간 세이 쇼나곤이 테이시에게 반해서 망상일기를 쓰거나, 무라사키 시키부의 가슴을 주무르다 얻어 맞거나(…)하는 내용.
- ↑ 테이시가 남긴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궁궐에 남아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궁궐을 나갔다는 쪽이 더 신빙성 있는 듯.
- ↑ 후지와라노 테이시의 아버지 미치타카와 쇼시의 아버지 미치나가, 이치죠 덴노의 어머니 센시는 부모가 같은 형제지간이었다. 미치타카 생전에는 장남이었던 미치타카가 권력을 잡지만 미치타카가 갑자기 사망하고 난 후, 미치타카의 아들 코레치카에게 권력이 넘어갈 때 동생 미치나가를 귀여워했던 센시가 개입해서 미치나가가 그 뒤를 이어 권력을 잡게 된다. 그러니까 테이시는 후원자가 아버지 미치타카에서 오빠 코레치카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힘을 잃게 되고 쇼시는 중궁이 되어 급상승하게 된 것.
- ↑ 무라사키 시키부는 세이 쇼나곤을 "잘난 척하면서 글이나 끄적이는데, 그 글을 읽어보면 모자란 곳 투성이"라며 폄하했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세이 쇼나곤 외에 다른 여자들도 신나게 까댔다(…) "글은 좀 쓸줄 아는 모양인데 읽는 눈은 없는 것 같다"는 둥, "사생활이 더럽다"는 둥…
이런 걸 보면 아무래도 궁궐 안에서 별로 친구는 없었을 것 같다 - ↑ 옛 표기법. 현재는 大阪라고 표기.
- ↑ 유키나리라고도 한다. 이 시절의 성명은 음독과 훈독 2가지 읽는 방식이 공존한다. 기록에 후리가나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