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

獨立新聞

1 조선 말 발행된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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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닙독[1]

1896년 4월 7일[2]에 한국에서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3][4]으로 한글3면, 영문 1면으로 구성됐다. 서재필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의 기관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독립신문이 독립협회보다 먼저 창간되었다[5]. 처음에는 주3회 300부 발행하였다. 1897년 1월 5일부터 영문판을 4면짜리 The Independent로 분리했다. 1898년 일간으로 바꾸었다. 독립협회가 해체된 이후, 윤치호, 아펜젤러 등이 잠시 맡았으나 정부에서 인수한 뒤 폐간시켜버렸다.

사진에 보면 아래아가 남아 있는데, 독립신문이 나온 지 한참이나 지나서야(1933년) 아래아가 폐지되었기 때문. 또 한글에 띄어쓰기를 정착시키게 한 신문이기도 하다. 이전까지는 한글을 쓸 때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서재필은 독립신문에서 자신의 이름을 필립 제이슨의 한역인 피제손으로만 기록하였고, 대한제국에서 축출되었던 1898년에는 애초에 독립신문을 일본이나 러시아에 팔아넘기려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상재와 윤치호의 만류로 넘어갔다고 하는데, 독립신문이 니꺼가?[6] 결국 윤치호가 운영을 이어받는다.

네이버에서 독립신문의 원문과 원문을 현대 한글로 표기해놓은 한글 현대문, 영문판 전부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뉴스 라이브러리가 아닌 지식백과에서 볼 수 있다. 링크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신문

상해임시정부가 1919년 발행한 신문. 처음에는 독립이었다가 1을 계승하여 이름을 고쳤다. 책임자는 박은식[7]. 1943년 폐간했다.

3 극우 인터넷언론

1998년 반 김대중성향의 신혜식이 만든 우익언론. 처음에는 '안티 김대중' 웹사이트로 시작되었으나 독립신문으로 바뀌었다. 극우성향으로 변질되었고 별로 성장하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 당시 몇몇 사진합성만평이 논란과 소송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베트남 출신으로 세계 4대 성불이라 불린 틱낫한 스님 방한때 벌인 병크. 스님이 베트남전때 반전시위를 했다고 빨갱이로 비난한것도 모자라 스님이 포르노배우와 섹스하는 합성사진을 올린 것.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있는데 스님의 방한을 추진한게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등 보수언론이었다. 위의 항목들과 구별을 위해 일각에서는 <인터넷 독립신문>이라고도 통칭한다.

2011년 군소 우파계열 인터넷언론과 뉴스파인더로 통폐합했다. 따라서 뉴스파인더는 인터넷 독립신문의 후신인 셈.
  1.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2. 덕분에 4월 7일은 한국에서 신문의 날이 되었다. 그런데 독립협회나 독립신문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등장하면서 신문의 날을 바꿔야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한 듯.
  3. 한국 최초의 신문은 1883년 10월 31일에 만든 한성순보. 단 이건 국가에서 만든 것이다.
  4. 사실 독립신문도 정부에서 4400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여기에 지원금이 더해져서 창건되었는데, 정부는 운영에 개입하지 않았으므로 민간신문으로 분류한다.
  5. 독립협회의 원형인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를 기준으로 하면 선후가 바뀔 수도 있지만, 그 기준에서 보면 독립신문도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서 창간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독립신문의 창간호의 내용이 순 독립문 건립하자는 주장 밖에 없다.
  6. 애초에 독립신문 자체가 서재필 개인돈으로 설립한 신문이 아니기 때문에 서재필이 이걸 일본이나 러시아에 팔아도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7. 역사학자로 유명한 그 박은식이 맞다. 심지어 무장투쟁론을 펼치던 신채호가 이끌던 다른 신문과 논쟁까지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