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시대 말기에 세워진 문
1.1 개요
구한말인 1896~1897년에 걸쳐서 완공한 기념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름의 유래로는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미의 문. 절대 일제로부터 독립한다는 의미의 문이 아니다!! 그런 의미라면 아주 좋겠지만 일제강점기가 도래하기도 이전에 세워진 문인데 어떻게 그런 의미를 담을수가 있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구한말에 세워졌다. 그 외에 잘못 알려진 것이 의외로 많다.[1] [2]
1.2 역사
독립문의 최초 건립 과정에서 당시 청일전쟁을 벌였던 일본의 의사가 반영된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박영효와 유길준의 개입이다. 박영효는 같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한 때의 동지, 미국인 필립 제이슨(서재필)에게 조선으로 건너올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그 필립 제이슨이 1896년 1월에 조선으로 건너와서 중추원의 고문[3]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진행한 것이 독립문 건립 운동이었다.
당시 청이 꾸준히 털리는 상황에서 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인식은 전방위적으로 퍼져있었고, 필립은 국적이 미국인 동시에 오로지 독립문 건립만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당시 조선 조정에서도 어느정도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다. 필립 제이슨은 직접 파리의 개선문을 보고 기본 스케치를 하였고, 세레딘 사바친[4]이 설계를 했으며, 조선인 건축기사 심의석이 실제로 건축을 하게 된다.
다만 필립 제이슨의 귀국과 실제 독립문 건축 시작의 과정에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다. 바로 1896년 2월에 벌어진 아관파천이다.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일본의 입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일본의 의도로만 독립문이 건설되었다는 것이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이 와중에 기존의 친일에 기울었던 정부 관료는 다 죽어나갔지만 필립 제이슨은 미국인이었으므로 입지를 보존할 수 있었고, 꾸준히 독립문 건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게 설득력을 얻으면서 독립이란 표현이 들어간 최초의 단체가 등장하는데 바로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이다. 이 독립신문은 정부의 재정지원금 4400원이 들어갈 정도로 친정부적 성향으로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 생성된 단체가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이다. 그리고 이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가 바로 이후의 독립협회의 모체가 된다. 즉,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쌓은게 아니라, 독립문을 쌓기 위해서 독립협회를 만든 것이다. 단적으로 이 독립문 추진 위원회 시기는 당시 정부관료 중에서도 외교적 역할을 하던 정동 구락부 출신 인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1896년 5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취임하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호전되고(이 과정에서 로마노프 야마가타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반면에 러시아와 조선관계는 슬슬 틀어지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대외적으로 독립을 밝힐 필요는 더 커졌다.
그래서 1896년 7월에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를 기반으로 해서 독립협회가 창설되었는데 회장이 안경수, 위원장이 이완용이었다[5]. 필립 제이슨은 고문이었고, 동농 김가진, 월남 이상재 등의 고위관료와 명사들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는 독립협회건 독립신문이건 죄다 친정부 성향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앞세운 조선 정부의 주도로 독립문 건립은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건설 비용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왕실의 기증으로 충당했다. 1896년 11월 21일 공사를 시작해서, 1897년 11월에 완공되었다. 이 가운데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고, 동년 10월에는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물론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충실하게 이 과정을 지지한다. 이 덕분에 완성된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문이 되었다. 현판은 정부관료인 이완용이 썼고, 현판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이 새겨졌다. 태극기가 새겨진 곳도 독립문이었다. 이 태극기가 바로 대한제국 시기의 공식 태극기인 독립문 태극기이다. 3.1운동 당시 민중들은 태극기의 정확한 모습을 몰랐기 때문에 경성 거주민들은 독립문으로 가서 거기 있는 태극기를 보고 그리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청의 사신을 맞는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뜬 석조문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에 나오는 기묘한 돌기둥이 영은문의 주추.
하지만 이후에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필립 제이슨이나 박영효와의 문제로 대한제국과 틀어지게 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독립문을 청에 대한 독립만을 강조하면서 독립문을 총독부에서 관리한 것 등으로 인해서 일본과 독립문 사이의 관계가 두드러지게 되었고 독립문의 건립에 있어서도 일본의 의도가 과도하게 강조된 것이다.
1.3 기타
영화 그림자 살인의 배경에 나오기도 했고, 무한도전 세계일주 특집에서 파리 개선문 대용으로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공사중이었다.
구자춘 서울시장이 금화터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고가차도를 놓기 위해 그냥 통째로 들어 약간 비껴나게 옮겼다.[6] 전유성은 자신의 책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와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에서 이 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고가가 꼭 일직선이어야만 되냐, 이 짜슥들아? 반원형으로 돌아가면 안 되냐? 관광상품이란 것은 '굴만 파면 빨리 돌아갈 수 있는 길을 한국 사람들은 바로 저 독립문 때문에 멀리 돌아가기로 했단다.'하는 안내문이 만드는 거다. 이 인간들아! 누가 독립문을 옮기냐!
이전하기 전에는 순수한 석조물로 알고 있었으나, 뜯어 보니 내부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었다. 돌 현판 글자는 당시에 지금과 달리 한글도 우에서 좌로 썼기 때문에 '문립독'이라고 되어 있다.
한때 인근 교통 표지판에 로마자 표기를 Dogribmun이라고 써 놓아서 조롱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7] 그대로 하면 '개(dog) 갈비뼈(rib) 문'이 된다.(…) 이후 로마자 표기법의 개정에 따라 Tongnimmun을 거쳐 현재는 Dongnimmun이 되었다.
찾아가는 방법은 지하철로 갈경우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리면 바로 보인다. 버스는 추가바람.
필립 제이슨의 출생지인 보성에 독립문 1:1 실사모형이 있다. 문덕면 용암리에 있는 서재필 기념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광주에서 벌교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가다 보면 아주 잘 보이니 참고.
대한민국 국군(특히 육군)에서는 공병의 병과마크이다. 공병가에서도 언급이 되는데... 왜 그런지 아는 사람은 추가바람.
2 의류 회사 P.A.T의 예전 브랜드
평안섬유공업에서 1971년에 PAT(Pyong-An Textile의 약어)로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사용한 내의 브랜드명. PAT로 바꾼 이후에도 한참 동안 독립문 PAT라고 친숙한 브랜드명을 함께 사용했다. 지금은 코뿔소 모양 상표를 쓰고 있다.
1970년대 초반 당시에 "여성용 빤쓰는 독립문표, 남성용 빤쓰는 쌍방울표"라는 화장실 유머도 있었다.- ↑ 설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2015년 8월 14일에 KBS 6시 내고향에서 일본으로부터 독립한것을 기념하여 세워졌다.라는 해설을 할 정도로 왜곡된 정보가 퍼져있다.
- ↑ 이름은 독립문이긴 하나 여기서의 독립은 무슨 조선이 청나라 영토였다가 독립한다는 것보다는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벗어난다는 그런 의미가 더 강하다.
- ↑ 이 시기의 중추원은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의 영향력을 피할 수 없었다.
- ↑ Середин-Cабатин.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청에서 파견한 고문 묄렌도르프와 함께 조선으로 건너왔는데 묄렌도르프와 마찬가지로 딱히 청의 목적을 위해서 활동하지는 않았다. 손탁호텔이나 덕수궁 중명전, 러시아 공사관 등 이 시기의 서양식 건축물을 대부분 설계하였을 정도로, 당시 조선의 조정과도 사이가 좋았다. 덕분에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의 사망을 실제로 목격한 2명의 서양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필립 제이슨은 사바친을 스위스인이라고 기록을 했기 때문에 이 사람의 국적과 혈통 문제로 논란이 있었고, 스위스 방식으로 읽어서 이름이 사바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 국적이란 것이 드러났고, 좀 더 뒤져본 결과 부계에서 스위스계 혈통이 발견되긴 했다.
- ↑ 이 시기의 이완용은 촉망받는 친미파 신진 관료로, 춘생문 사건에도 개입해서 고종의 신임도 두터웠고 백성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좋았다. 이후에는 우리가 잘 알듯이..
- ↑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이전하였다.
- ↑ 사실 1959년~1984년의 공식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Dogribmun이 아니라 Doglibmun으로 쓰는 것이 맞았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받침 뒤의 ㄹ은 r이 아니라 l로 쓴다는 조항이 있다. 다만 저 조항이 현실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아서 그랬는지 표지판에 Dogribmun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