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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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임시정부
국기국새
250px
역대 임정청사 위치
1919년 ~ 1948년
표어대한독립만세!
(大韓獨立萬歲)
국가애국가
정부청사 위치상하이(1919-1932)
항저우(1932-1935)
자싱(1935)
난징(1935-1937)
창사(1937-1938)
광저우(1936-1939)
치장(1939-1940)
충칭(1940-1945)
서울(1945-1948)
수도서울(명목상)
정치체제민주공화정
국가원수대통령국무령주석
언어한국어
민족한민족
주요사건1919년 3.1 운동+독립선언
→ 1919년 임정수립
1923년 국민대표회의
1932년 윤봉길,이봉창 의거
1940년 한국 광복군 창설
1941년 대일/독 선전포고
1945년 광복
1948년 정부수립선포
통화원(圓)
법통 승계국가대한제국
법통 계승국가대한민국

1 개요

임시정부 헌법전문
1941년 임시정부 건국강령
건국강령(국한문 혼용 버전)
대한민국 제헌헌법
대한민국 헌법

1919년 3월 1일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계기로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된, 현 대한민국 정통성의 모태가 되는 망명정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기 때문에 국가의 명칭도 대한민국이다.

2 창립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자,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이 결성되었다. 신한청년당은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김규식)를 파견하였고, 일본에는 장덕수를 파견하여 2.8독립선언을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소식들이 일제 치하 조선에 전해지자 독립에 대한 희망이 생겼고, 고종의 사망으로 군중이 운집한 상황에서 3.1 운동이 발생했다. 민중 운동의 결과 상해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서 각종 논의를 거친 뒤 1919년 4월 13일에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1]

파일:Attachment/provisionalgov3.jpg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2]
파일:Attachment/provisionalgov2.jpg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첫돌 1월 1일, 임시정부 요인 58명이 상하이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둘째줄 왼쪽에서 7번째가 이승만, 첫째줄 왼쪽에서 3번째가 김구, 이승만 오른쪽으로 4번째가 안창호.

2.1 건국강령

임시정부 건국 강령에서 주가 되는 조소앙삼균주의손문삼민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편으로 1940년대 초 일본이 전선을 확대해나가자 독립 운동의 재조직을 위해 사회주의 세력을 포섭할 필요성을 느껴 국유화 등의 주장을 넣었다. 물론 이후에도 좌우 알력은 계속되었지만...반면 공산주의 세력인 조선 독립 동맹 같은 경우에는 아예 토지 분배를 주장했고, 좌파 우파를 떠나 국내 독립 운동 세력을 모으는 것부터 난관이었던, 그래서 이념을 벗어나 단합을 추구할 필요가 있었던 건국동맹 같은 경우에는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정체 건설 정도의 강령을 세웠다.

2.2 창립인

상해 임시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로는 여운형, 조동호,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이광수, 현순, 신익희, 조성환, 이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이영근, 조동진, 여운홍, 현장운, 김동삼 등 29인이 있었다.

이 중 여운형, 조동호,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이광수는 신한청년당원이었다. 그만큼 창립 당시에 신한청년단의 영향은 강했다.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게 신한청년당이었으니 당연하다.) 김구도 신한청년당에 관여하였지만, 정부 수립 당시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수립 며칠 후에 임시정부를 찾아왔다. 김규식도 신한청년당원이었지만 당시 미국에서 이승만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고 있어서 임정 수립 당시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3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부 형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건립 초기부터 1948년 한반도 내에 재건되기 직전까지 의원내각제를 기반에 둔 정부 형태를 고수하였다. 이는 대통령제를 채택했던 1919년부터 1925년 사이에도 유효하였다.[3] 이후 1925년부터 2년간 순수 의원내각제를 실행하다 1927년부터는 국무위원을 주축으로 한 집단지도체체를, 1940년부터는 의정원에서 선출한 주석이 대한민국을 이끄는 주석제를 채택했다.

1919년 4월 11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동년 9월 11일에 선포된 임시헌법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며, 국가를 대표한다
대통령은 국무총리 이하 각 부처 장관을 임명한다
대통령은 국무원들과 정부위원으로 구성되는 국무원을 주재한다
의정원은 각 지역별 선거로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2년이다
대통령은 의정원 의원들이 기명단기식 투표로 선출한다

건국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현 국회에 해당하는 의정원에서 의원들이 선출하였으며, 이는 1948년 제1대 대통령 선거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또한 대통령 휘하에 국무총리가 존재하고 국무회의를 주재한다는 점에서 현행 헌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4 임시정부의 행적

시작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역이었지만, 일본군의 훼방과 중일전쟁이 심화되어 계속 이동하였다. 항저우를 시작으로, 가흥, 진지앙,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스촨 차지암, 충칭 시로 이동하였다. 해당 지역에 가면 아직도 건물이 남아있다.

4.1 다른 세력과의 통합

이전에 경성부의 한성정부가 있어서 13도 대표 국민 대회의 명의로 선포되었다. 이승만(집정관 총재), 이동휘(국무총리), 박용만(외무부총장)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민주제를 채용했다. 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다. 그러나 분산되어 있을수록 항일투쟁이 힘들다는 의견이 모아져서 서로 통합을 계획하게 된다.

이에 국민의회-상해임시정부가 먼저 통합을 하기로 했지만 위치 문제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국민의회의 대다수를 의정원에 포함시킨다는 조건으로 결국 통합되었다. 한성 정부와의 통합 역시 난관이 많았지만 한성정부가 국제언론에 노출되었다는 것, 국내에서 국민대회를 통해서 결성되었다는 점에서 정통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래서 정통성과 기틀은 한성정부로 하고 대신 위치와 국명을 상해임시정부로 한다는 것으로 합의안이 완성되어서, 결국 그 해 9월 11일에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그런데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상하이 임시정부를 제외한 여러 정부들은 실질적으로는 임시정부였지만 자체적으로 임시정부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다. 임시정부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은 통합 이전이건 이후건 오로지 상해 임시정부 뿐이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초기에 교통국, 연통제(자금 및 연락용) 조직을 만들고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외교활동을 하는 등 각종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상하이 임정은 정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5 와해

상해 임시정부가 모두 합심해서 오로지 독립운동에 매진했을 것 같지만, 각종 분열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출신, 사상과 이해관계가 다 제각각이었다. 사실 이들이 모여 정부를 조직한 것은 3.1 운동이라는 혁명적 민중운동의 결과였으며, 그들을 공통적으로 묶어주는 것은 '항일'일 뿐 그 방법론에 있어서 합의가 충분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거기에다가 합의를 이끌어내는 민주주의식 토론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정부부터 조직되었으니... 그래서 사실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돈문제와 노선문제로 서로 많이 싸웠다(...)

민주주의 정부에 대해서는 당시 세계의 대세였고 고종이 세상을 떠난 이상[4] 큰 이견은 없었지만, 창립 초부터 정부 이름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 논의가 분분했다. 일부세력은 대한이라는 칭호를 반대했다. 대한제국이 세운지 얼마 안되어서 망한 나라이고 당시 세계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황제권 강화나 하려고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대한'민국이 되었다. 이걸 세대별 갈등으로 보기도 했지만, 대한제국 항목에도 있지만 지역별 대립도 컸다. 그래서 구황실 우대를 법조항에 넣는 문제로 의견이 갈라졌다. 연로한 층은 구황실 우대를 주장하였으나, 청장년층은 황실이 무능하고 우유부단하게 대처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보았으므로 황실 우대를 반대했다. 사실 장년층 이상은 고종에게 밀서건 자금이건 받으면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이들이 많았고, 상대적으로 연소한 이들은 독립협회 등을 통해서 고종과 대립한 경력이 많았다. 결국 청장년층이 양보해서 구황실 우대 조항이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분열은 시작에 불과했으니...

임정과 국내 진공작전을 같이 모의하고 임정을 오랫동안 지켜본 OSS의 보고서에도 이러한 분열상은 잘 나와있는데, OSS는 결국 임정의 분파주의가 심각한 상황이며, 최종적으로 해방후 한국의 정치를 주도할 능력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한다. 1920년대 임정의 분파는 무려 최소 27개가 난립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분열상은 해방직전까지 그대로라 해방직전 작성된 OSS의 보고서에선 임정의 분열상에 대한 비판과 함께 해방 이후 임정 요인들이 정권을 맡을 능력이 전무하다는 설명으로 가득차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해방 후 미군의 임정 홀대로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5]

결국 이러한 논리 전개는 최종적으로
1) 임정의 분파주의가 심각하며
2) 대중적 지지 기반이 취약하며
3) 임정을 우대할 경우에 발생하는 여타의 독립 단체에 대한 파급 효과
등을 고려할때 한국에는 현실적으로 수권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전개되고 만다. 물론 이는 미국의 아시아 피 지배국에 대한 일천한 이해력도 한 몫 하기도 하였지만, 분열자체는 사실이었다.[6]

5.1 기호파 / 서북파 문제

일종의 지역 갈등인데, 출신지역도 작용했지만 사실은 어느 지역 편에 드느냐, 성향이 어떠하냐(주로 보혁 갈등)에 더 초점이 맞춰졌다. 중심이 된 갈등은 기호파(서울, 경기도, 충청도)와 서북파(평양, 평안도 일대)였다.

강원도경상도, 전라도는 기호와 서북 지역에 비해 내세울 세력 근거가 약한 편이었다. 전라도의 경우 일제강점기 이전 의병 활동의 중심지였으나, 남한 대토벌 작전독립 의군부의 검거 등으로 직접 항일 투쟁에 참여했던 세력들은 사실상 뿌리를 뽑히다시피 한 상태였다.[7]

기호파는 임정의 주류세력으로, 조선 내내 수도(한성)를 중심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보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서북파는 비주류 세력으로 조선시대 내내 열등한 지역으로 취급되었다.

서북지역은 과거시험 응시에서 불이익을 받아 조정에 편입할 수 없었고, 따라서 지역 분위기도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볼 때 성리학 이념이 굳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유독 상업이 발달하고 개신교가 흥했던 것이 이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때문에 서북파는 기존의 기호 중심의 질서에 도전하려 하였으며 개혁적 성향이 강했다.

이러한 기호파 서북파의 대립은 인맥을 타고 암투로 발전하였다. 기호파의 대표적 인물이 이승만이었고, 서북파의 대표적 인물이 안창호였으며 이 둘은 지속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심지어 8.15 광복 이후까지(안창호 항목 참고).

5.2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미국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썼다는 이유로 탄핵 제기를 당하게 된다. 이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라고 크게 성토를 했다. 사실 이승만의 위임통치안 청원은 이게 처음이 아니고, 단 한 번인 것도 아니다. 임시정부 수립 이전부터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신채호의 저 발언도 그 시기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단적으로 신채호가 임시정부와 대립한 것은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이 크게 문제가 된 시기라기보다는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임된 그 순간부터였다. 박은식의 독립신문과 외부 설전을 벌인 것도 국민대표회의 이전 시기.

거기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임하면서도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상하이에서는 활동이 거의 없었다. 이 때 안창호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활동했는데 안창호는 임정 업무 처리하느라 과로로 죽어났고, 이승만에게 빨리 상해로 와달라고 했지만 이승만은 싫다고 안왔다. 결국 이승만이 상해에 머물렀던 기간은 거의 6개월 정도 뿐. 게다가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의 자금을 멋대로 썼다는 이유로 1925년에 탄핵을 당하게 된다. 이승만이 있는 구미 위원회가 그 자금을 맡았는데 외교 활동으로 다 쓰고 본부엔 조금밖에 안 보냈다고. 사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초기에 대통령제가 아닌 국무총리제였다. 원래 이승만의 공식 직함은 '국무총리'인데, 이승만이 '대통령'이라고 바꿔썼기 때문에 대통령으로 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내각의 수장 정도를 의미하는 국무총리보다 정부 수반으로서의 대통령이 좀 더 권위가 높다고 생각했고, 더군다나 이승만이 주로 활동했던 미국이 대통령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대통령 명칭이 아니면 안된다고 했다 한다.[8][9]

단순히 이승만의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론은 초기 임시정부의 주요 방책[10]이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우드로 윌슨이 약속한 '약소국의 독립'은 명분만 좋았지 사실상 열강의 관심 밖이었고(자기 땅을 잃을 공산이 더 크니까), 열강이 보여준 이러한 대처는 이에 크게 실망한 준비론/자치론이나 무장 투쟁론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그나마 약소국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꾀하던 소련이었고 이는 이후 공산주의가 흥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윗분들만 이야기하는 외교론과 달리 아랫사람들의 의식을 자극하는 구조이기도 했고.

5.3 공산주의에 대한 시각 문제

공산주의를 어떻게 보느냐도 분열에 일조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로 공산당이 집권하고, 국제 공산당이 반제국주의 투쟁 활동을 지원해주면서 항일운동가들 사이에서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임시정부 내에서도 이동휘의 주도로 고려공산당이 창립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주류 세력은 공산당 활동을 좋게 보지 않았다.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대개 임정 비주류에 속하여 임정 주류에 도전한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공산당이 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이에 의지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인다고 싫어하였다.(친일파와 다른 점을 알지 못했다.) 당시 친일로 변절했던 인사들이 내세웠던 논리가 일제를 이용해서 조국의 해방을 이끌어 냄에 있다라는 것이었는데 누구나 알듯 궤변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 역시 이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더구나 김구는 어떤 외부세력에 의지해서 이룩하는 해방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갈등이 폭발한 것이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인데, 이동휘김립을 시켜서 국제공산당에서 반제투쟁에 쓰라고 받아온 200만루블을 임정에 내주지 않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나눠줘버렸다. 해당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건 임정의 수많은 실책 가운데 하나이다. 이때문에 임정주류와 사회주의 계열이 열나게 싸운 게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로 김구는 공산당 활동을 한 사람들인 이동휘, 김립 등이나 외교활동 차원에서 공산당과 접촉했던 사람들을 다수 쫓아내버렸다. 심지어 김립은 김구의 지시를 받은 사람에게 암살당했다. 여운형, 김규식 등. 김규식은 반공주의 입장에 있지만 후에 창조파 입장에 서서 소련과 외교한 것 때문에 쫓겨났다.

이 때문에 임정은 외교관들이 퇴출되고 국제사회에서 자금문제에 대해 신뢰를 잃게 되면서 재정적으로 굉장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재력가였던 이시영이 사재를 털어서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시영의 동생 중 한명은 굶어죽기도 했다. 당시 재력가 이석영은 철종때 영의정 집안으로 양자로 가서 조선 4대 갑부에 속했으며 이 돈으로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열고 독립운동하였으나 3년만에 돈을 다썼다고 할정도로 힘든 독립운동이었다. 임정이 두차례 이동될때쯤 이시영 6 형제들은 거진 다 죽어갔고 남은 돈도 없었다. 양자로 갔다가 형제들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석영은 상해에서 두부피지만 먹다가 영양실조로 굶어죽었다. 이후 한인애국단 창설 전까지 운영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김구가 글 그림을 그려 팔아야 했을 정도였고 이는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 개전 이후 고조되는 반일정서를 눈치챈 김구가 한인애국단을 창설하여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국민당의 지원을 받을때까지 지속된다.

사회주의에 대한 시각 문제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임시정부가 안고 가야 했으며, 이러한 문제는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제시되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5.4 창조파/개조파 문제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자 1923년 신채호의 주도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각지의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여기에서 임시정부의 창조론(기존 정부를 해체하고 다시 정부를 수립, 무장 투쟁할 것을 주장)을 내세우는 이르쿠츠크파와 개조론(기존 정부를 유지하고 부분적으로 구조를 바꾸자는 주장)을 내세우는 상하이파(당시 고려공산당은 이동휘의 상해파와 여운형의 이르쿠츠크파가 있었다)로 분열되었고, 내무총장 김구는 국민대표회의 성과가 미진하자 해산 명령을 내렸다. 해산명령을 내렸다라고 기세좋게 적혀 있지만, 김구는 애초에 극소수였던 현상유지파, 혹은 국민대표회의 개최반대파였고 이들에게 뭐라고 명령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창조파는 심지어 연해주로 가서 별도의 국민대표회의를 열기도 했지만 막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소련에 쫓겨나서 뿔뿔이 흩어졌다.

이 후로 임시정부는 주요 요인들은 합의를 못보고 해외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그 중 안창호, 김규식의 경우 다시 임정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국민대표회의 이후의 임정은 '정부'라기보다는 상해에 존재하는 소규모 항일 정당 연합체 가운데 하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6 대일 항쟁 활동

이렇게 세력다툼으로 사분오열된 데다가 재정까지 열악하니 제대로 된 독립운동 성과가 나타날리 만무했다. 그러던 중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자 당시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가 이러한 암울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이듬해인 1932년 한인애국단 소속의 이봉창 의사는 도쿄에서 일왕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아깝게 실패했다. 이때 이를 보도한 한 중국 신문이 '일본천황에 대한 테러가 아깝게 실패로 끝났다'고 보도했고 데자뷰? 일본은 이를 빌미로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게 되었다. 상하이 사변 이후 일본은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축하 기념식을 열었고, 바로 여기서 윤봉길 의사의 활약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으로 일본에게 악감정을 갖게 된 중국인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특히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에 대해 "중국 청년들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라고 감탄하며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박헌영이나 조봉암, 이승만이나 미국연합국 세력은 이러한 활동을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김구 항목을 보면 나와있지만 백색테러와는 다른 문제로, 당시 고상한 항일운동(외교론이거나 실력양성론 쪽)을 자랑거리로 여기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다. 박헌영의 경우 폭력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극소수 몇몇의 투쟁은 민중의 계급각성과 연대가 뒷받침되지 않았으므로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승만은 이러한 활동이 도리어 일본의 선전을 강화시키고 본국의 동포들이 더 탄압받게 되며 연합국의 어그로를 끌어들인다고 보았다.

이게 일단은 맞기는 맞다. 전쟁나기 전까진 미국 등지는 친일적이었고-이승만이 '일본 내막기'를 출간하자(일본은 본성이 악랄하다. 따라서 알래스카든 하와이든 어디가 되었든 미국을 머지않아 공격할 거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을 멀리하고 한국을 독립시켜 일본을 견제하게 하는 것이 좋다는 논지) 아시아 사정을 잘 아는 펄 벅 등 극소수의 미국인들만 호평을 하고 나머지는 '일본이 그럴 리 없다능'이라고 까대다가 진짜로 일본이 공격하자 데꿀멍-동포 탄압은 간도 참변 등을 생각하면 쉽다. 애초에 이승만부터가 반일을 강하게 주장하는걸 미국이 싫어하는 것같다는 낌새를 차린 이후에는 논조가 확연히 약해졌다.

문제는 그 이외에 별다른 더 효과적인 투쟁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외교론은 임정이 승인도 못받은 상태라 한계가 명백하고 실력양성론은 친일과도 연계가 되는 부분이 있는지라...물론 무장투쟁론도 병력도 자본도 무기도 다 딸려서 한계; 결국 김구가 최후의 타개책으로 선택한 것이 한인애국단의 활동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임정으로는 안된다고 튀어나간 신채호가 의열단 선언에서 주장한 것이 직접 폭력 투쟁인데, 그 전개가 바로 한인 애국단의 그것과 유사했다. 당시 상황에서 비현실적인 투쟁방법을 배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결국 비슷했던 것이다.( IRA 항목을 참고) 이 때문인지 의열단의 단장인 김원봉은 뒤에 임정에 합류하여, 임정이 좌우합작 냄새를 풍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하여튼 임정은 윤봉길의 의거 이후 장제스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중일전쟁이 벌어지면서 임시정부와 국민당의 연계는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인정받았다기에는 좀 무리가 있으며, 한국 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하는 등 문제도 많았다.

6.1 남목청 사건

1938년 5월 6일, 임시정부 위원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과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이 후난성 장사에 위치한 남목청(楠木廳)에 모여, 민족주의 삼당인 '조선혁명당' · '한국독립당'. '한국국민조선혁명당'의 합당을 논의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에 매수당한[11]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에게 저격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특히 이 와중에 김구 선생은 치명상을 입고, 현익철 선생은 사망하였다. 사건 후, 중국에서는 사건 해결을 위한 협조를 하였다. 당시 후난성 주석이었던 장즈중(張治中)은 도주 중이던 범인을 조속히 검거하였고, 장제스 역시 김구에게 위로와 지원을 하였다. 사건 이후, 신변의 안전을 위해 김구 일가는 잠시 소련영사관에 몸을 의탁하기도 하였다. 김구가 얼마나 소련을 싫어했는지를 생각하면 이 당시 상황의 급박함을 짐작할 수 있다.

7 무장투쟁

그리고 1940년대에 이르러 무장투쟁기에 접어들었을 때,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주석제로 바뀌고 김구가 주석에 취임했다. 1940년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얻어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 광복군을 조직했다. 여기에 소속된 장군에는 백파 김학규 등이 있었다. 한국광복군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일 선전포고를 했으며, 같은 해에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채택하고 보통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국의 수립 등의 내용을 골자로하는 건국 강령을 발표했다. 삼균주의는 정치, 경제, 교육 세 분야의 균등을 주장하는 것인데, 이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계열과의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포함시킨 측면이 있다. 실제로 1942년 사회주의 계열인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총본부를 이끌고 충칭으로 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사실 김원봉의 라이벌 최창익이 김원봉과 싸우다가 3개 대대중 2개 대대를 이끌고 화북(중국공산당 세력이 있었던 지역)으로 가서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군대 내 입지를 상실하여 임정으로 간 것이었다. 최창익은 언제까지 눌러앉아있지 말고 중국공산당의 협력을 받아서라도 서둘러서 항일투쟁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겠지만, 이러한 독립운동가들의 한계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이 김원봉 세력을 받아들인 임시정부는 다시 한번 개헌을 통해 주석&부주석제로 바꾸고 주석에는 김구, 부주석에는 김규식이 취임했다.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한국광복군은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인도 및 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어 주로 공작 활동을 수행했다. 특히 1945년 3월 이후에는 미국 CIA(우리가 아는 그 CIA 맞다)의 전신인 OSS(미군 전략 정보처)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으나,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실제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일각에서는 만약 일본이 조금만 더 늦게 항복을 해서 이 작전이 실제로 수행되어 성공했다면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역시 엄연한 연합국 자격으로 스스로 독립을 성취해낸 것이므로 분단과 같은 상황이 오지 않을 수 있었더라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광복군 참조.

물론 이런 저런 제약으로 광복군의 수는 독립 운동의 전성기만 못했다. 애초에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의 규모는 전반적으로 상당히 축소된 상태였고 이 때문에 한국 쪽에 불리한 거 서술하기 안 좋아하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서는 대개 숫자를 쓰지 않았다. 교육에 종사하는 양반들이 '독립군이 있긴 했는데 엄청 적었음' 식으로 쓸 수는 없을 테니...#

사실 무장 독립투쟁의 규모나 교전경험등을 따진다면 광복군보다 조선의용군의 활약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용군 경우는 화북지대에서 중국팔로군, 신사군과 같이 활동하여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김무정이 이끄는 태항산 전투등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의용군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조선인민군으로 대거 편입해 국군과 UN군 상대로 싸웠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좋게 보기 힘든 상황. 그리고 장준하돌베개에 의하면, 광복 이후에 만들었는데 아편장수나 일본군 위안부조선인 포주(광복전에 들어가면 일본군에게 사형되니)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임정은 초기부터 실질적으로 무장세력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항일무장세력이 줄어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자유시 참변인 것은 분명한데, 그 이전에 임정에서 직할할 수 있는 무장세력이 있었느냐라고 하면 그런거 없다라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명목상으로는 남만주의 서로군정서와 북간도의 대한군정서, 통칭 북로군정서가 임시정부 휘하에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명목상으로는 그렇다는 이야기고, 실제로는 서로군정서는 신민회가 삼원보 지역에서 시작해서 자생했던 군사조직이다. 신민회가 삼원보에 거점을 만들면서 경학사와 부민단이라는 자치단체를 만들었는데, 이중 부민단에서 이어진게 한족회고, 한족회의 임시군정부가 서로군정서다. 이 신민회가 이름만 바꾼 것이 서로 군정서다. 북로군정서는 대종교 계통에서 만든 대한군정부가 역시 이름만 바꾼 것이다. 이 두 조직은 모두 별도의 무관학교와 자치단체, 내부 자금원 등을 갖춘 독립적 조직으로 임시정부와의 연결고리는 몇몇 주도적 인물들이 양쪽에 모두 이름을 걸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애초에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가 만주와 간도에 있는 무장단체를 직접 지휘할 수 없다. 결국 이름만 임시정부 산하로 걸어놓고 모든 세력은 자기맘대로 움직였다.

오히려 임시정부 산하의 무장병력이 그나마 움직인 것은 자유시 참변 이후의 일이다. 자유시 참변 이후에 잔존세력을 바탕으로 탄생한 참의부(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가 임시정부의 직할부대로 개편되었는데, 이게 1923년의 일이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이다. 그런데 이나마도 임시정부가 주도해서 창설한 것은 아니고, 당시 만주지역에 있던 무장투쟁단체중 일부가 일부러 상해까지 가서 임시정부와 접촉해서 임시정부 직할이라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결국 참의부는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인 3부통합운동으로 탄생한 혁신의회, 그리고 일부는 국민부에 통합되는 형태로 해체되는데 국민부건 혁신의회건 임시정부 직할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이 해소에 있어서 딱히 임시정부의 통제를 받지도 않았다.

결국 1940년대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될 때까지 임시정부가 움직일수 있었던 병력은 없었다. 김원봉이 조선의용대 본대를 이끌고 합류하기는 하는데,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는 이름으로 독자적 활동을 하다가 만주에서 인근 세력과 합쳐져서 이름을 바꾼다. 그게 바로 위에 언급된 조선의용군이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의 껍데기만 가져왔을 뿐이고, 그나마도 임시정부에서 무시당해서 활약이 없었다.

8 광복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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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12일 종로 대각사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영회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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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당시 임시정부요인들의 환국 기념사진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은 조선 땅에 귀국하지만, 미군정은 미군정만이 한반도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선언하여 임시정부 또한 정부 승인을 받지 못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미국이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당시 한반도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대한 정확한 이해나 정보가 없었고 그나마 항복한 일본군들로 부터 듣은 정보가 전부다 보니 대한 임시정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당연히 이들은 한반도 남쪽의 점령군으로 자처하였고 남한현실을 정확하게 인지 하지못해 친일경찰과 친일관료들을 미군정에 소속시키거나 남한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을 실행하는 병크를 저지렀다. 다만 소련군정같은 경우는 소련군내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반도 현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 따라서 초반을 제외하면 북한 사회를 빠르게 안정시켰다. 사실상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보부재가 오늘날의 비극을 만든것이다. 케네디 대통령도 그냥 남한을 일본 지배하에 다시 집어넣자고 발언했다가 아시아 전문가들에게 지적당하고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였다.

그런데 제공된 비행기에 인원 제한이 있어 임정 인사들은 서로 가겠다고 하며 개싸움을 한다. 결국 김구등 한독당 계열이 1차로 귀국하고 김원봉등 조선의용대 계열이 2차로 귀국 한다. 그리고 임정 인사들은 당시 임정 정부여당이었던 한국독립당(줄여서 한독당이라고 한다.)이라는 이름으로 정치활동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왔기 때문에 이미 국내에서 빠르게 조직을 갖춘 건국준비위원회(후에 인민공화국으로 개편)에 비해 국내 기반이 취약했고, 임정측은 이미 국내에 들어섰던 인민공화국이 임정법통이 그대로 정권으로 이어지는 것에 걸림돌이 된다며 매우 분개하였다. 여기에 미군정의 비협조에 의해 열받은 김구는 미군정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한다. 이에 미군정에 일하는 한국측 자문단은 물론 미국인들 밑에서 일하는 요리사, 하인들까지 전부 출근을 안했다. 또한 서울내 6개 경찰서장이 달려와 김구에게 충성 맹세를 한다.(김구는 수십년간 중국에 있었지만 영향력은 국내 최강이였다.) 그러자 요리사까지 전부 출근을 안해 굶어죽게 생긴 미군정은 부랴부랴 김구에게 달려가 총파업을 취소하고 협조해줄것을 요청한다.

그 후 임정측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한민당, 이승만, 미군정과 합종연횡을 하면서 극단적인 활동을 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활동이 반탁운동과 백색테러 단체 백의사 활동을 통한 임정 부정세력 암살이었다. 이 시기에 대표적으로 암살된 사람이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인데 이중에서 장덕수는 김구가 암살한 것으로 특히 의심된다.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미군정, 이승만과 소원해 지게 된다. 실패한 암살 사건은 그 유명한 김일성 암살 사건.

8.1 반탁운동

한독당 주류 세력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국내 보도가 나오자, 신탁통치에 대해 격분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박헌영 세력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전환하자 박헌영을 성토한 뒤 좌파세력 타도를 주장하였으며 격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심지어 미군정 청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파업을 유도해 미군정 주요인사들의 아침식사 올리는 것까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한독당 내부에서 김규식, 안재홍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본질이 통일 임시정부 수립이라고 보고 극렬한 반탁운동을 반대하면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행보는 한독당 주류세력에게 기회주의자, 빨갱이라는 혹평을 받게 했고, 이 때문에 이들은 백의사를 비롯한 테러단체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8.2 토사구팽

이러한 한독당의 행보는 이승만을 반탁운동에 참여한 애국자로 이름값을 높여 주었고, 이승만의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이승만의 입지를 점점 강화시켜 주었다. 하지만 한독당 세력의 과격한 반탁운동은 미군정의 미움을 사게 된다. 미국 역시 신탁통치 중심세력 중 하나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는 것이지만 신탁통치는 연합국 사이에서, 그것도 미국이 주도해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역시 이러한 반응이 좋을리 없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미소공동위원회는 파행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근본적 배경은 이 시기 이미 기미가 보이고 있던 냉전분위기 때문이지만, 표면적인 문제는 반탁 세력을 새로운 정부에 참여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였다. 소련은 찬탁세력만 참여시키자고 하였고, 미국은 모두 참여시키자고 하였다. 이유는 찬탁 세력에 우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여세력을 확대해보려고 미국이 영입하려고 했던 인물이 바로 여운형이었는데, 그 여운형이 암살당했다. 그나마 중립에 가깝던 여운형이 죽은 다음에 그 나마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 온건파엿던 한민당이었는데, 이번에는 한민당 관련 인물들이 암살 된다. 때문에 백의사를 통한 정치인 암살은 국내 정치인들의 미움을 사게되었다. 이 과격한 반탁운동이 좌파쪽의 미움을 많이 샀지만, 이승만, 한민당 인사들의 미움도 꽤 샀다. 이승만의 경우 외교론자였기 때문에 테러활동을 좋은 눈으로 볼 수 없었다(미국에서 독립운동 할 때도 그랬다). 그리고 한민당의 경우 백의사 관련 청년들로 총수가 두 명이나 암살되었다(송진우, 장덕수).

결국 장덕수가 암살된 사건에 대해 미군정은 한독당 총수 김구를 검찰을 통해 소환토록 하였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이승만은 거절하였고, 한민당은 이 사건을 김구 및 한독당 세력을 몰락시킬 정치적 호재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런 이해관계가 겹쳐서 이승만은 한민당과 손을 잡았고, 한독당은 총수가 검찰에 소환되자 열세에 몰렸다. 후에 김구는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하지만 정치적으로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고 다만 통일운동에서 좋은 평가를 건졌다. 그리고 김구의 몰락과 더불어 한독당은 빠르게 사멸되었다. 김구는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대통령 선거에서도 낙선되고 난 뒤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으며, 신익희는 민주국민당(민주당의 전신)으로 가고, 조소앙은 탈당하여 사회당을 창당하고, 이시영이나 이범석 등은 이승만 진영으로 가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등 완전히 분해되어 버렸다.

한독당 세력은 해외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건국준비위원회조선공산당에 비해 조선 국내 민중들의 지지기반이 약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민심이 지지해주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에 비해 이승만의 경우 임정 초대 대통령이라는 네임밸류도 있었고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 사건"으로 대중들 사이에 독립운동가로 인지를 굳혔다고 한다. 거기에 미군정의 지지도 따랐다. 따라서 한독당은 스캔들 몇 개 터지니 쉽게 와해되었던 것이다.

9 임정법통성 논쟁

대한민국 임시정부/법통 논란 문서 참조

10 임정 내 쿠데타

이승만은 1925년에 탄핵되어 면직되자, 조소앙쿠데타를 건의한다.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훗날 조소앙이 한국전쟁으로 북한에 억류된 신세가 되자,이승만은 그를 자진월북으로 몰아 가족들을 연좌제로 괴롭혔다.
  1. 이 문서 수정 전에는 4월 11일로 되어 있었다. 임시헌장공포 날짜가 4월 11일이라 이날로 보는 학계의 의견도 있으나, 대외적인 정부 수립선포는 13일이고. 국가보훈처에서도 공식적으로 4월 13일로 보고 있다. 1990년에 4월 13일로 지정하면서 기념식도 13일에 열리고 기사 달력에도 4월 13일은 임시정부 수립일로 지정 되어 있다. 링크 추후 변경될 가능성이 있으나 아직까지는 공식적으로 13일이다.
  2.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3. 때문에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를 희망하던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의 권한에 불만을 제기한 바 있다.
  4. 고종이 살아있었으면, 망명가능성 등을 포함해서 입헌군주정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종과 연결고리가 있는 사람들도 많았고, 고종만한 자금력이 있는 세력도 없었으니까. 의친왕 망명 계획을 꾸미다 실패하고 상해로 찾아온 동농 김가진이 성공했다면 이쪽도 가능성은 있고.
  5. 한국분단사 자료집 II 34쪽, 신복룡(편), 한국분단보고서(상) 43-44쪽, 신복룡,김원덕 (역)
  6. 한국 분단사 연구 p.75
  7. 거기다가 이때까지만 해도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은 충청도와 함께 하삼도로 묶여 도매금 취급받고 있었다. 조선시대 관리들도 대부분 하삼도 출신이고, 사림파도 하삼도 중심이었으니... 다만 출신이라고 해도 고향이나 기반이 하삼도라는 것이지, 거주는 서울에서 했다. 지금 정치가들이 지역구는 지방에두고 실제로는 서울에서 사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이 부분 때문에 지역대립을 올려잡는 것에 반발하는 이들이 많다.
  8. 이승만의 이러한 행동은 기호파와 서북파의 대립을 타고 번졌는데, 특히나 1910년에 연해주에 있었을 당시 기호파들에게 배척을 당했던 경험이 있는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에게 있어서 이승만은 "독립정신이란 전무한 썩은 대가리"였다. 물론 이승만에게 있어서 이동휘는 한낱 우스운 급진주의자 였지만...
  9. 박노자 ,『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2005,351쪽
  10. 애초에 근거지가 외국 외교관들의 조계가 존재했던 상해였다는 것 부터가 외교론을 우선시했던 신한청년당의 영향이었고, 이를 그대로 이어받은 임정주류파의 선택이었다. 무장투쟁론자들은 실질적으로 교포들이 더 많이 살고 있는 만주나 연해주를 주장했으나 세력이 약했다.
  11. 일제가 연루되어 있는지 여부는 확실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