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

獨立協會
Independence Club[1]

1 개요

1896년 7월 설립된 조선대한제국 시대의 사회정치단체. 필립 제이슨, 이상재, 윤치호, 손병희 등이 중심이 되었다. 젊은 시절 이승만이 활동하였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했으나, 굳건한 권력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지지층인 민심까지 이반할 정도의 지나친 강경 드라이브로 황실과 유림의 분노를 샀으며[2][3] 스스로 병크까지 저지른 결과 결국 무력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2 역사

2.1 설립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역적이 되어 해외로 도피했다가 미국에 귀화한 서재필, 아니 필립 제이슨(이하 피제손)은 조선을 장악하고 을미개혁을 진행하고 있던 개화파 동료 박영효의 초청으로 11년 만인 1896년 1월 사면을 받고 귀국한다. 이후 을미개혁을 진행하는 중추원의 고민이 된 피제손은 독립문 건립을 주장한다. 이후 박영효는 추방되고,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서 친일파가 제거되면서 피제손을 지원해줄 이들이 조정 내에서 사라지지만, 독립문 건립만 주장한 피제손은 버틸 수 있었다. 이 때 생긴 단체가 독립협회의 전신인 '독립문추진위원회'이다.

독립문추진위원회는 중추원 관료였던 미국인 피제손을 비롯해서, 외교관료였던 정동구락부가 주축이었고, 설립과정에서 왕실의 자금까지 들어간 명실상부한 관변단체였다. 그리고 1896년 4월 7일, 독립문을 만들기 위한 홍보창구 겸 개화정책 홍보용으로 만든 것이 바로 독립신문이다. 즉, 독립문을 만들기 위해서 독립신문을 만들었다.

독립협회의 1대 책임자였던 피제손은 독립문 건립을 홍보하는 한편으로, 개화를 좀 더 제대로 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자고 주장하게 된다. 이 주장에 따라서 1896년(고종 33년) 7월 2일 한성부에서 조직된 것이 바로 독립협회이다. 회장은 안경수, 위원장은 이완용, 피제손은 고문이었다.

2.2 활동

1897년에 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여 청사신을 환영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지었다. 1898년에는 고영근을 중심으로 서울 종로 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주최하여 일반 시민들의 여론을 모으고 압력단체로 삼았다.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며 약 4천명의 회원수를 가진 단체가 되었다. 만민공동회에 관리들을 참여시켜 '관민공동회'를 열기도 하고, 여기에서 '헌의 6조'를 결의하여 제출했다. 이후 중추원 관제가 받아들여지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니콜라이 2세가 절영도 조차권을 할양받고 한러 은행을 설치하는 한편 군사, 재정 고문을 파견하자 필립 제이슨을 비롯한 반러주의자들이 중심이었던 독립협회는 이에 격렬히 반발, 외부대신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고 고종 35년 3월에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에 러시아는 놀라울 정도로 순순하게 모든 협의를 백지화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대항마로 러시아를 끌어들일 생각이었던 고종은 이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고종은 러시아 고문들을 해임하면서 관민공동회 전에 필립 제이슨도 해임해버렸고 필립 제이슨은 미국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안경수가 회장직을 맡았고 이후 이완용이 제2대 독립협회 회장이 되었으나 전라북도 관찰사가 되면서 곧 그만두게 되었고 윤치호가 3대 회장, 이상재가 부회장이 되었는데 윤치호는 취임 직후에 중추원 설립을 청하는 600명의 연명상소를 올리며 의회설립운동에 나섰다.

“(...전략...) 다시 생각해보면, 당요(唐堯)가 50년간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림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조정에 묻고 한편으로는 재야에 물었는데, 조정에 있는 사람이란 것은 곧 모든 관리와 12목(牧)이며 재야에 있는 사람이란 곧 모든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모두 현명하다고 한 후에 등용하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한 후에야 배척하라.’고 하였으니, 이는 한 번 등용하고 한 번 배척할 때에 나라 사람들의 의견을 반드시 따라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요즘 구라파(歐羅巴)의 여러 나라들에서 비록 전제 정치(專制政治)라고 하더라도 국사(國事)를 의논하는 상, 하 의원(議院)을 둠으로써 국시(國是)를 자문하며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놓았습니다. 이는 조칙에서 한 번 상을 주고 한 번 벌을 주는 일을 함부로 시행하지 말고 다 공론에 부치라고 하신 뜻이 너그럽고 위대하니, 더없이 넓고 높은 성덕(聖德)이 옛날의 훌륭한 정사에 부합되며 만국에 통행하는 규례에 맞습니다. 비록 신들이 우매함으로도 더욱더 감격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어 성상의 위엄을 피하지 않고 감히 어리석은 충심을 진술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준수하고 훌륭한 선비를 널리 구하고 여론을 겸손히 따르시어 크고 작은 정령(政令)에 대해 위로는 백료(百僚)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묻고 널리 받아들여 시행하신다면 만백성이 매우 다행일 것이며 천하가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고종 35년(1898년) 7월 9일. 윤치호의 상소

이에 고종은 "나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너 미쳤냐?"란 반응을 보였다.

“아뢴 내용이 비록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조정의 일에 대해 지위를 벗어나 망녕되이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부터 독립협회는 조선왕조 500년 사상 유일무이한 일들에 나서기 시작한다. 민중이 중심이 되어 대신들을 탄핵한 것이다. 의정부 참정 조병식[4], 내장원경 이용익[5] 등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았고 조병식은 만민공동회에 편지를 보내서 해명까지 했음에도 끝내 여론에 밀려 면직당했다.

이후 김홍륙 독다사건이 터지자 김홍륙 등 3인이 교형에 처해지고 길거리에 시신이 내걸려 군중들에 의해 도륙되게 하였는데 독립협회가 지난 개혁으로 금지된 구시대의 법을 다시 끌어온 것을 강력히 비판하며 심순택, 윤용선, 이재순, 심상훈, 민영기, 신기선, 이인우 이렇게 일곱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고 군중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자 고종은 결국 일곱 대신을 모두 파직했다. 의정부 의정, 참정, 궁내부, 법부, 군부, 탁지부의 대신들이 갈려나간,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일이었다.[6] 이 일로 박정양 내각이 출범하였고 독립협회에 우호적이던 민영환도 군부대신이 되었다. 박정양은 독립협회 대표들을 불러 회의를 했는데 조선 역사상 최초로 관민의 대표가 궐 안에서 마주 앉게 되었다. 이들은 논의 끝에 중추원 관제를 구성했고 이 과정에서 독립협회는 중추원 의관의 절반인 25명을 선출할 막강한 권한을 얻었다. [7] 그런데 독립협회에게 의석이 주어졌으니 황국협회에게도 의석이 주어져야 한다는 이의가 제기되자 고종은 그 말이 맞다면서 17석을 독립협회에 8석은 황국협회에게 할당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독립협회는 "우리가 지금까지 한일이 얼만데 이따위로 대우하기냐? 그럼 다 때려쳐라."라는 자세로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버렸고 고종은 25석을 전부 독립협회에게 할당해줘야했다.

크게 고무된 독립협회는 더욱 과감한 행보를 밟으니 만민공동회에 의정부 대신들을 비롯한 조정의 전현직 대신들을 초청했다. 대신들은 대수롭잖게 여기고 불참했는데 이에 만민공동회는 군중을 동원하여 시위를 계속하며 대신들을 압박했고 대신들은 고종에게 어찌하면 좋냐고 물었다. 이에 고종은 하는수없이 대신들에게 만민공동회에 참석할 것을 명했고 박정양, 이종건, 서정순, 심상훈, 민영기 등이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만민공동회장에 나타나면서 만민공동회는 관민공동회로 거듭났다. 관민공동회는 대신들에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전부 다 의견을 펼치면서 매우 열렬하게 진행되었고 헌의 6조가 정해졌다. 헌의 6조는 다음과 같다.

  •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모두 힙을 합해 황제의 전제황권을 굳건히 한다.
  • 외국인과의 조약은 각부 대신들과 중추원 의장의 서명, 날인을 거친다.
  • 재정은 탁지부에서 관할하고 예산, 결산을 공표한다.
  • 중대 범죄는 공판을 진행하되 철저히 설명해 자복한 후 형을 집행한다.
  • 칙임관은 황제 폐하께서 정부에 자문해 과반의 찬성으로 임명한다.
  • 규정을 실제로 이행한다.

이를 보고받은 고종은 헌의 6조를 수용했다.

2.3 해산

그런데 독립협회에 의해 탄핵되었던 조병식이 사고를 친다. 조병식은 당시 의정부 찬정에 제수되어 있었는데 군부대신 서리, 법부협판과 모의하여 고종에게 독립협회가 11월 15일을 기해 박정양를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이상재를 내부대신으로 정교를 외부대신으로 선출한 다음에 군주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울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익명서를 하나 바친다. 내용이 어설프기 그지없었지만 가뜩이나 이제 말로만 자신을 높일 뿐이지 정작 자신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독립협회에 불만이던 고종은 즉각 독립협회의 수뇌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려 이상재, 정교, 남궁억을 비롯한 13인을 체포했다[8].

“지난번에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관해 한계를 정하고 그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신칙한 것은 따뜻하고 정중히 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지혜를 발달시키고 개명한 데로 나아가도록 한 것이며 회의 순서를 정하고 규정을 따르도록 한 것이었다. 이것은 깨우쳐 인도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발길을 돌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패거리를 모아 더욱 위세를 부리고 명령을 거역함이 갈수록 방자해져서 심지어는 조정을 꾸짖고 대신을 쫓아내는 데까지 이르렀다.대궐을 떠나지 않으면서 상소를 올렸을 때의 일을 생각하면 간절한 칙령을 여러 차례 내렸건만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도성 안을 떠들썩하게 하였으니, 만약 신민(臣民)으로서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마지막에는 바로 폐단을 수습한다고 빙자하여 네거리에 목책을 치고 백성들을 지휘하여 움직여서 높은 벼슬아치를 위협하고는 결재할 것을 청하도록 다그쳤다. 그리하여 난리의 싹과 재앙의 기미가 당장 나타나게 되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게 되니 나도 모르게 한심하다. 이것을 심상히 처리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른바 협회(協會)라고 이름한 것은 모두 혁파하라.

내부(內部), 법부(法部), 경무청(警務廳),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일체 단속하고 신칙하도록 하되 각 회 중에서 가장 드러나게 남들을 부추겨 현혹시키고 사리에 어그러지게 흉악한 짓을 한 자에 대해서는 사실을 명백히 조사하고 엄격히 잡아다 그날로 조율(照律)하라. 해당 관원은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만일 털끝만치라도 인정에 끌려서 용서해 주고 숨겨주는 폐단이 있으면 보고 되는 대로 범한 모든 죄를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밖에 선비와 백성으로서 나이가 어리고 지각이 없는 무리들 중 덩달아 따라다닌 자들은 모두 죄를 따지지 말고 그대로 놔두고 각별히 신칙하고 풀어 주어서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라.”

만약 옛날대로라면 이걸로 독립협회는 끝이었을 것이다. 나랏님이 독립협회를 닫으랬는데 백성들이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리가 있나. 그런데 상황은 지난 수천년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갔다. 독립협회에 할당된 의관 25인을 선출하기 위해 모여든 군중들은 독립협회의 지도부가 체포되었단 말을 듣고 분노하여 경무청을 포위하고 즉석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충군애국이 죄가 되는가? 애국자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체포하였는가?"라며 지도부의 석방을 촉구했다. 체포된 지도부가 고등재판소로 옮겨지자 만민공동회도 그곳으로 옮겨졌다. 심지어 배치된 군인들이 즉석에서 해산, 지지를 표명하며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5일이나 재판소를 포위한 군중들이 한치도 물러서지 않자, 고종은 어쩔수 없이 수뇌부를 풀어주어야 했다. 다시 읽어보자. 단군 이래 수천년간 전제군주제였던 나라에서, 백성들이 황제의 요구에 거부하여 시위를 하여 황제의 명령을 철회시킨 것이다.

군중은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조병식을 비롯하여 독립협회 수뇌부를 체포하게 만든 '5흉'에 대한 처형을 요구하는 한편 헌의 6조의 즉각적인 실행을 요구했고 독립협회의 해산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고종은 독립협회를 복설하고 5대신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는 척하더니 환호하는 백성들이 물러서기가 무섭게 길영수, 홍종우가 이끄는 황국협회 보부상 2천여명을 풀어서 만민공동회를 습격하게 했다. 결국 만민공동회는 해체되었고 보부상들은 대궐에서 제공한 술과 고기를 먹으면서 회포를 풀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분노한 한양의 백성들이 돌맹이와 몽둥이로 무장하고 길거리로 쏟아졌다. 보부상들은 돌팔매를 맞고 달아나야 했고 조병식, 민종묵, 홍종우, 길영수의 집은 성난 군중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거리를 장악한 군중은 만민공동회를 다시 열었다. 결국 고종이 직접 나서게 되었다. 고종은 만민공동회 대표 200명과 증인으로 각국 영사, 공사들 및 조정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고종은 만민공동회 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들 모두는 짐의 말을 들을 것이다. 전후하여 내린 조칙(詔勅)에 대해서 너희들은 대부분 따르지 않고 밤새도록 대궐문에서 부르짖었으며 네거리에 가설로 문을 설치하고 제 마음대로 도리에 어긋나게 사나운 짓을 하면서 사람들의 가산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어찌 500년간 전제 정치의 나라에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이겠는가?

너희들은 한 번 그 죄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라.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는 만큼 중형에 처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짐이 나라를 다스린 이래로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점차 소동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오직 너희 만백성의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오늘 바로 크게 깨닫고 짐은 매우 부끄러워한다.
물론 정부(政府)의 모든 신하들이 짐의 뜻을 받들어 나가지 못함으로써 아래 실정이 위에 전달되지 못하게 하여 중간이 막힘으로 해서 의구심이 생기게 되었다. 오직 너희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울부짖는 것이 어찌 너희들의 죄이겠는가? 짐이 오늘 직접 대궐문에 나와서 어린아이를 품에 안듯이 하고 간곡히 타일렀으니 글 한자, 눈물 한 방울은 하찮은 사람에게도 믿음을 주고 목석같은 사람에게도 감동을 주리라.
오늘부터 시작하여 임금과 신하, 상하 모두가 한결같이 믿음을 가지고 일해 나가며 의리로써 서로 지키고, 온 나라에서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구하며 무식한 자의 의견에서도 좋은 생각을 가려서 받아들이고, 근거 없는 말을 너희들은 퍼뜨리지 말며 미덥지 않은 계책을 짐은 쓰지 않을 것이다.
새벽 이전까지의 일에 대해서는 죄가 있건 죄가 없건 간에 경중을 계산하지 않고 일체 용서해주며 미심스럽게 여기던 것을 환히 풀어주어 모두 다같이 새롭게 나갈 것이다.
아! 임금은 백성이 아니면 누구에게 의지하며 백성은 임금이 아니면 누구를 받들겠는가? 이제부터 권한의 범위를 넘어서거나 분수를 침범하는 문제는 일체 철저히 없애도록 하라. 이와 같이 개유(開諭)한 후에 혹 혼미한 생각을 고집하며 뉘우치지 못하고 독립의 기초를 견고하지 못하게 만들며 전제 정치에 손상을 주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은 결코 너희들이 충애하는 본래의 뜻이 아니다. 나라의 법은 삼엄하여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각각 공경스럽게 지켜 날로 개명(開明)으로 나아가도록 하라.
짐은 식언(食言)하지 않으니 너희들은 삼가야 할 것이다. 민회(民會)의 사람들과 상인들은 모두 짐의 적자(赤子)이다. 지극한 뜻을 잘 받들어 자애롭고 사이좋게 손을 잡고 함께 돌아가 각기 생업에 안착하라.”

이에 협회측에서 독립협회를 복설할 것, 대신을 가려 임명할 것, 보부상을 영원히 혁파할 것, 법령을 규정대로 이행할 것, 조병식, 유기환, 이기동, 김정근, 민종묵, 홍종우, 길영수, 박유진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고 고종은 독립협회 복설과 보부상 혁파를 수용하는 대신에 협회에게 토론이나 잘 하고 정부에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것을 조건으로 거는 한편 소위 5흉은 처벌할 것이로되 홍종우 등 삼인은 너그러이 용서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민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니 국권을 훼손시키지 말것을 당부했다. 이에 대표들은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고 물러났다. 뒤를 이어 보부상 대표 200명이 고종의 명을 받고 입궐하여 상리국과 임방을 복설해줄 것, 만민회, 독립협회를 해체할 것, 조병식 등 8인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고종은 상리국 복설을 거부하는 대신에 보부상들의 생업을 편히 해줄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하였고 독립협회는 전과 다르게 바뀔 것임과 조병식 등 8인은 재판을 통해 죄의 유무를 가릴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보부상들도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친 다음에 물러났다.

한편 보부상 혁파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조병식 등 8인도 체포되지 않자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렸고 고영근이 대표가 되어 고종에게 항의했다.

“신 등이 올해 10월 26일에 대가(大駕)가 대궐문에 직접 나온 것을 우러러보았는데 칙령 말씀의 간절함이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간곡히 타일러주는 정도일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신 등은 감격의 눈물을 견디지 못하여 몸 둘 바를 모르면서 폐하의 은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있으나 티끌만한 성과도 내기 어려우니 더욱더 황송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건대 전날에 칙령을 내린 다섯 개 조항과 신 등이 헌의(獻議)한 여섯 가지 조항에 대해서는 기어이 실시하겠다는 유음(兪音)을 삼가 받들었습니다. 그런데 신 등이 어제 관보를 읽는 가운데 심상훈(沈相薰)과 민영기(閔泳綺)를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과 군부 대신(軍部大臣)의 직책에 임명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곧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적합하지 않다고 하고 있으며 지난번에 신 등이 상소를 올려 규탄한 데 대하여 폐하가 세상의 공론을 따라서 이미 물리친 자들입니다. 그런데 며칠 되지도 않아 또 의정부(議政府)에 물어보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도 못했는데 급히 골라 뽑아서 다시 높은 관리로 임명하였습니다.
또한 김명규(金明圭)로 말하면 지난번 농상공부(農商工部)의 벼슬에 임명되었던 날에 이미 폐지한 보부상(褓負商)을 제 마음대로 인가하여 규정을 문란시켰으며 백성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심지어 대궐문 가까이에서 회민(會民)의 백성들을 구타하여 상하게 함으로써 위로는 임금에게 근심을 끼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울분을 격동시킨 결과 오늘에 와서도 수도 안의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김명규가 미연에 화근을 방지하지 못한 죄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상께서 골라 다시 교육의 임무를 맡겼으니 폐하가 사람을 등용하는 방도에 있어서 어찌 현명한 것과 어리석은 것을 판별하지 못하고 간사한 것과 바른 것을 뒤섞어 등용하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모두 내쫓음으로써 조정의 기율을 엄숙히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신 등이 생각건대 5흉의 죄에 대해서는 이미 전날에 연명으로 올린 글에서 모두 이야기한 만큼 거듭 폐하의 귀를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폐하가 이미 나타나는 대로 재판한다는 칙유를 내린 지도 시일이 많이 지나갔는데 신 등은 아직 한 사람이라도 잡아왔다든가 염탐하여 찾고 있다든가 하는 일에 대해서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법을 맡은 신하가 자유로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간사한 무리가 임금의 귀와 눈을 가려 중간에서 엄호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폐하가 이 무리들에게 의거하고 비호하며 꺼리는 데가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신 등이 의혹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이것입니다.
심지어 유기환(兪箕煥), 이기동(李基東)과 같은 자들은 애초에 재판한 일도 없이 급히 유배의 명을 내렸지만 오늘까지 많은 시일이 흘렀으나 압송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나라의 법이 진실로 이와 같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날에 당요(唐堯)가 4흉(凶)에게 죄를 준 것을 온 천하가 모두 승복하였던 것이니, 신 등의 오늘의 말은 바로 천하의 공론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법을 맡은 관청에 명하여 조사하고 잡아다 징계함으로써 나라의 법을 확립하도록 하고 민심을 승복하게 하도록 할 것입니다.
신 등이 생각건대 보부상을 없애는 데에 대해서는 이미 명령을 내린 것이 있고 또 간절하고 지성스럽게 칙유한 만큼 마땅히 서둘러 빨리 물러가 흩어져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 저 한산하게 지내는 무뢰한들이 몇백 몇천 명씩 무리를 지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수도 안에 따로 소굴을 만들고 저마다 뜬소문을 내서 인심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이를 금지하지 않으면 황명(皇命)은 시행될 길이 없으며 백성들의 의심은 풀릴 길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경찰을 맡은 신하에게 그들을 쫓아버리고 흩어지도록 하며 다시는 종전의 버릇을 되풀이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직업에 안착되도록 하고 폐단을 제거해 버리도록 할 것입니다.
신 등이 다시 생각건대 당일에 임금과 신하 상하 모두는 한결같이 믿음을 가지고 일해 나갈 것이라는 칙어를 만백성은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였고 외국의 사신들도 참가하여 들었으니, 이것은 우리 ‘대한(大韓)’이란 나라가 생긴 이래로 처음 있는 훌륭한 일입니다.
3신(臣) 물리치는 것과 5흉을 징계하는 것과 보부상을 없애는 것은 바로 오늘 폐하께서 한결같은 믿음을 가지고 일해 나가는 첫 번째 일입니다. 바로 이것은 만백성을 기쁘게 하고 여러 나라에 믿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유의하여 밝게 살피소서.”

이에 고종은 시끄럽게 굴지 말고 기다리라고 화를 냈다.

“지난번에 직접 유시한 이래로 짐(朕)은 한창 생각을 가다듬어 새로운 정사를 해나가고 있는데 너희들은 어째서 직업에 안착하지 않고 또다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것인가? 3신의 문제는 이미 지나간 일인 만큼 탓할 것이 없이 앞으로의 성과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5신을 재판하는 것은 법을 맡은 관청의 소관이고 상인들을 단속하는 문제는 해부(該部)가 원래 있다. 지금 이미 없애버린 만민회(萬民會)를 설치하자는 것은 다시 시끄럽게 구는 것이니, 이것은 명령에 항거하는 것이 아닌가? 특별히 참작하여 주겠으나 만약 또 고집부리면 나라의 법이 지극히 엄하다. 알았으니 물러들 가라.”

이즈음 최익현을 필두로 유림들이 독립협회를 맹렬히 비판하기 시작했다.

"일곱째, ‘민당’을 혁파하여 변란의 발판을 막으소서. 신은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비방하는 것을 써놓는 나무와 진언(進言)할 때 치는 북이 있었으며,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도 또한 유생들이 대궐문에 엎드리고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이 시위(示威)의 표시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린 일이 있었으니, 진실로 백성들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계가 있고 절제가 있어서, 차라리 정사에 대해 비방은 할지언정 대신을 협박해서 내쫓는 일은 없었으며, 차라리 소장을 올려 호소는 했을지언정 임금을 위협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늘 이른바 ‘민당’이라는 것은 시정(市井)의 무식한 무리들을 불러 모은 것으로서, 구차하게 패거리를 규합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명분을 빌려서 대신(大臣)들을 멋대로 명하여 오라 가라 하고 임금을 지적하여 탓하며 나라의 정승을 능욕하였습니다. 밤낮으로 저들끼리 결탁하여 고함을 지르며 위엄을 보이고 생색을 내는 것이 굉장하여 그 기세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아! 이로부터 정사에 관한 권한과 권세가 모두 백성들에게 옮겨가 앞으로 조정에서는 한 마디의 말과 한 가지의 일도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가의(賈誼)가 말한 바, ‘발이 도리어 위에 있고 머리가 도리어 아래에 있다.’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비슷합니다. 이와 같은데도 금지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어찌 법과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1898년 12월 10일 최익현의 상소.

“신이 듣건대, 예로부터 나라에 화를 끼친 간악하고 흉악한 자치고 애당초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여 뭇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은 자는 없었다고 합니다. 임금 주변의 흉악한 무리를 말끔히 없앤다는 핑계를 대거나 백성들의 폐단을 제거한다고 빙자하기도 하면서 패거리들을 날로 번성하게 하고 임금의 형세는 날로 고립되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하루사이에 나라의 권세를 썩은 나무를 꺾는 것보다 쉽게 가로채어 제 하고 싶은 대로 다하는데 누구도 감히 시비하지 못했으니, 전날의 독립협회(獨立協會)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저들은 충성과 애국이라는 두 마디 말에 목적을 걸어두고 있으며 논하는 내용도 전혀 채용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속내와 말이 달라 나라에 화를 끼치는 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적신(賊臣) 안경수(安駉壽)와 서재필(徐載弼)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도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찌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저 두 흉적과 한 패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한번 이야기를 해서 그간의 죄상을 밝히고자 하니, 폐하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삼가 생각건대, 이 무리들은 패거리를 결성하여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며 거리낌이 없었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을 능사로 삼고 감히 해서는 안 될 짓을 하여 온 나라를 소란스럽게 하였으니, 이것이 저들이 저지른 첫 번째 부도(不道)한 죄입니다.
...(중략)...지난번에 저들이 대궐문을 떠나지 않고 상소를 올렸을 때 성상께서는 동궁의 몸이 편치 않은 것을 매우 염려하여 여러 번 간절하게 신칙하여 우선 물러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더욱더 제멋대로 고함을 치고 밤낮으로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면서 임금의 근심을 강 건너 불 보듯 하였으니, 이것이 저들이 저지른 다섯 번째 부도한 죄입니다.
대소 신료들을 출척(黜陟)하는 것은 으레 조정의 명령이 있어야 하며 누구나 참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들은 제멋대로 행동하고 권세를 부려서 순종하면 아무 일도 없지만 거슬리면 곧바로 소란을 일으켜 제 마음대로 대신을 잡아들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축출하고 있습니다. 그 계책은 옛 신하들을 제거하고 저들이 좋아하는 자를 등용하려는 데에 있으니, 이것이 저들이 저지른 여섯 번째 부도한 죄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확고한 결단을 내리시어 여론을 따르소서. 이른바 만민공동회를 맨 먼저 발기한 사람들과 조정의 신하들 중에서 이에 아부하면서 맞장구를 친 사람들은 일체 법사(法司)에 속히 회부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조율(照律)하여 감단(勘斷)함으로써 간흉의 싹을 근절하소서.”
- 1898년 12월 10일 이복헌 등의 상소.

“백성들이 협회를 설립하고 사안을 거론하는 일은 애초에 벌써 세력을 믿고 임금을 강요하는 혐의가 있는 것인데, 관직에 있는 사람이 어찌 말할 기회가 없을까 근심이 되어 도리어 백성들에게 달라붙는 것입니까?

옛날에 벼슬하는 사람들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백성들에게 전하였는데, 오늘날 벼슬하는 사람들은 장차 백성들의 힘을 끼고 임금에게 강요하자는 것입니까? 세상이 변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민회(民會)로 말하면 앞서 이미 7명의 신하를 쫓아냈으며 뒤에 또 5명의 신하를 쫓아냈습니다. 이 열두 신하들의 현우(賢愚)와 사정(邪正)에 대해서는 신이 아는 바 없지만, 그들의 다섯 통의 상소문에서 조목을 들어 아뢴 것에 대해 한번 논의해 보겠습니다.
거기에는 이르기를, ‘민의(民議)가 들끓고 공론(公論)이 행해진다면, 규정 이외의 근신(近臣)이 나아갈 수 없을 것이고, 사인(私人)의 벼슬 청탁이 이루어질 수가 없을 것이며, 공공연히 뇌물이 오갈 수 없을 것이고, 외국의 권력을 빙자하는 일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말은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 관리들과 백성들은 한 패거리가 되었으며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조종하는 권한이 아래에 있고 위에 있지 않습니다. 저 무리들이 떠받드는 자를 대신의 반열에 둔다면 근신이 위에 나아가지 않고 반드시 아래와 통할 것이며, 사인(私人)들이 위에 청탁하지 않고 반드시 아래에 모여들 것입니다. 뇌물은 관청에 들어가지 않고 반드시 개인집으로 들어갈 것이며, 대외적인 권한이 나라에는 없고 반드시 강한 신하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몇 가지 문제는 모두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략...)
또 들으니, 상민(商民)의 패거리들이 수천, 수백 명씩 무리를 이루고는 하는 행동이 매우 해괴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이상한 소문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신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마땅히 농상공부(農商工部)에 명하여 타일러서 물러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1898년 12월 10일 이남규의 상소.

가뜩이나 유림층이 반발하는 와중에 독립협회는 자살골을 넣고 만다. 중추원의 새 의관으로 박영효를 추천하는 이가 대거 나오는가 하면 거기서 더 나아가 박영효가 무죄임을 주장하는 소까지 올린 것이다. 이게 왜 문제인지는 갑신정변중추원박영효 항목 참조. 열받은 고종은 군대를 풀어서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켜버렸다. 군사들이 종로 거리를 엄중히 막고 대포를 설치해서 시민들에게 겨냥함에 따라 분위기는 살벌해졌고 또한 황제를 계속 압박하는가 하면 유림들이 길길이 날뛰고 거기에 역적 박영효의 복권까지 요구하는 독립협회의 모습에 민중들도 불안감을 느끼고 등을 돌린 것이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11가지 죄를 열거한 하교를 내리며 독립협회의 부활이 없을 것임을 천명한다. 그렇게 독립협회는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엄청난 족적을 남긴 체 사라졌다.

“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백성들은 짐의 말을 분명히 들으라. 단문(端聞)에서 대궐 문에 직접 유시(諭示)한 지 며칠 안 되었기에, 짐은 너희들이 다시 이런 행동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아! 너희들의 죄는 너희들 자신이 알고 있을 것이다.

관소를 이탈하여 모임을 개최하는 데 대해서 이미 금령이 있었는데도 도처에서 모여들며 전혀 그만둘 줄 모르는 것이 첫 번째 죄이고, 독립협회(獨立協會)에 대해서는 이미 승인하였는데 ‘만민공동(萬民共同)’이라는 명목을 마음대로 내건 것이 두 번째 죄이고, 신칙하기도 하고 비지를 내리기도 하여 물러가도록 타일렀는데 줄곧 명령에 항거하면서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것이 세 번째 죄이고, 쥐를 잡으려다 그릇을 깰까 염려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경계하던 것인데 대신(大臣)을 능욕하는 것을 다반사로 여기는 것이 네 번째 죄이고, 임금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은 사람으로서 감히 할 수 없는 일인데 외국 공관에 투서를 하여 스스로의 죄를 숨기려고 한 것이 다섯 번째 죄이고, 백성과 관리는 체모(體貌)가 원래 다른데 관리를 위협하여 억지로 모임에 나오도록 한 것이 여섯 번째 죄이고, 부(府)와 부(部)의 행정은 어떤 경우에도 비워서는 안 되는데 관청에 난입하여 사무를 보지 말라고 외친 것이 일곱 번째 죄이고, 재판 사건은 힘 겨루는 일이 아닌데 소송할 것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무리를 지어 사단을 일으킨 것이 여덟 번째 죄이고, 군병을 파견하여 문을 막으라는 명령이 원래 있었는데 분풀이로 돌을 던져 중상을 입힌 것이 아홉 번째 죄이고, 여러 차례 명소(命召)했으므로 즉시 와서 대령했어야 하는데 요사스러운 말로 선동하며 줄곧 명을 거역한 것이 열 번째 죄이고, 도망간 역적은 용서할 수 없으며 사람마다 누구나 죽일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을 꺼내어 임용할 것을 기도한 것이 열한 번째 죄이다. 기타 자질구레한 범죄는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아! 너희들은 스스로 위에 열거한 죄상에 입각할 때 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너희들 역시 스스로 모면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고 하늘이 매우 진노하고 있는 만큼 엄격한 징벌을 가할 도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희들의 본뜻을 세세히 따져 볼 때 어찌 진실로 죄에 빠지는 것을 달갑게 여겨 그런 것이겠는가? 처음에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취지에 입각하여 착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결국에는 도리에 어긋나고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죄명에서 피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의구심이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짐은 너희들의 부모로서 단지 너희들이 처음에 착했던 것만을 알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그동안 저지른 모든 죄를 일체 너그럽게 용서할 것이니, 너희들은 더 머뭇거리지 말고 서로 이끌고 물러갈 것이다. 아! 너희들 중 짐의 이 말을 듣고 눈물 흘리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본연의 양심이 반드시 왕성하게 일어나야 할 것이니, 각각 이전의 잘못을 씻어버리고 모두 함께 새롭게 나아갈 것이다. 짐은 더 말하지 않겠다.”

3 평가

구한 말 최초로 민권운동을 하였으며 개혁적인 활동을 한 단체였으나 한계로는 친일적이었고 너무 독선적이었던 것이다. 이후 독립협회가 무너지자 더 이상 열강의 힘의 논리로부터 조선의 이권을 지켜낼 절차적 방패막이가 없어짐을 의미했다. 이후 일본과 일부 열강은, 집중된 권력으로 차르 단단히 맞은 전권을 행사하는 황제 고종을 꾸준히 협박하거나 회유했고 그렇게 굴복한 고종의 허가 한 방에 여러가지 이권 등이 일본과 열강에게 술술 넘어간다. 열강 입장에서는 사실상 실질적인 허가자인 고종만 협박하거나 구슬리면 되므로 일은 좀더 쉬워졌다. 만약 독립협회의 의회 구상이 받아들여지고, 조선 대중들과 정치권의 연대가 계속되었다면 어느정도 이런 압력을 절차적으로 지연시키거나 좌절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를 노릇. 물론 당시 조선의 상황이 워낙 안습이라 독립협회가 존속하여 조선을 살려낼 수 있는 가에는 의문이 있다.

물론 이들이라고 고종보다 잘했을지는 여러모로 의문점이 남는다.

  • 우선 독립협회라고 해서 딱히 이권을 지키는데 엄청나게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들이 배제하고자 한 대상은 어디까지나 러시아였고, 일본이나 다른 서양 국가들에게는 오히려 호의적이였다. 독립협회가 '이권 수호'라고 막은 대상은 주가 러시아 였고, 가끔 프랑스와 독일이 포함된다. 그렇다, 삼국간섭에 참여한 나라들이다. 반면에 철저하게 옹호한 나라들이 있는데, 영국, 미국, 일본이었다. 특히 일본이 철도부설권을 가져간 것은 당시에도 정치적 목적이라는 이유로 비판이 쏟아졌는데, 무조건 긍정적이라고 처절한 쉴드를 쳤다.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보면 현대 기준으로는, 누가 봐도 러시아로 기울어야 하는 것이 맞다. 이건 러시아가 좋은 나라이고, 일본이 나쁜 나라라서가 아니라, 러시아의 주목적은 만주와 연해주였던데 반해서, 일본의 목적은 일관되게 한반도였기 때문이다. 아관파천 이후 일본이 러시아에 밀리고 밀렸을 때 제안한 것이, 38선을 기준으로 한 조선의 분할 점령이었다.
  • 게다가 정치적 역량 측면에서도 딱히 나은 점은 없었다는 점은 이들의 몰락을 봐도 금방 드러나는데, 모처럼 자기 흐름대로 흘러가 거의 성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9] 스스로의 병크로 화려하게 말아먹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고종 대신 정권을 장악해봤자 더 나은 결과가 나오기는 힘들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 군사적 면모로 보면 더 답이 없어지는데, 이들이 잡은 기준은 동학이나 도적 같은 애들을 때려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고 주변 열강들에게는 이권이나 나눠주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 열강들, 특히 일본이 호시탐탐 조선을 먹을 궁리를 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국제정세를 읽는 흐름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고밖에 여길 수 없다.
  • 무엇보다도 이 사람들 상황인식이 바닥이었던 것이 최대한 긍정적으로 인식해줘도 아시아주의를 이야기하는 일본이 진정이라고 믿었던 바보들이었다. 그래서 독립협회에 참여하였고, 동시에 조정관료가 아니었던 인물중에서 친일로 넘어가지 않은 인물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심지어 이런 생각을 했던 근대적 지식인에는 안중근도 포함되고, 일진회를 만들어서 한일병합을 추진했던 이용구도 포함된다. 위에는 압력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하는데, 이건 상대가 러시아, 독일, 프랑스일 때 이야기이다. 상대가 일본이었던 상황에서 이들의 행보는 잘해야 박영효나 친일로 넘어간 이후의 이완용처럼 보다 보기 좋은 한일 병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교과서에서 독립협회의 행보를 절대로 자세히 다루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교육과정에서는 사실상 1890년대 후반의 주인공 역할이자 선역(...)이다. 덕분에 이를 통해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도 독립협회에 대해서는 상당히 호의적. 고종안티가 되게 하는 결정적인 촉매이다(...)

독립협회의 독립을 '중국에서 독립' 정도로 해석하면서 일본에 상당히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독립문 문서에도 적혀 있지만, 독립의 의미는 청을 포함해서 모든 나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이건 독립문 건립 와중에 대한제국이 설립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독립협회하면 '일본에서 독립'으로 국사시간에 졸은 것이 틀림없는 이들로 인해서 이득을 많이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4 여담

이승만은 이 시기에 독립협회에서 반러시아 투쟁을 하며 제법 유명해졌는데(독립협회 마지막 토론회에서 찬성 측 토론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정치깡패 임화수는 제1공화국 시기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이라는 이승만 찬양 영화를 만들었다.
  1. 오늘날 한자어 '협회(協會)'는 보통 'Assocnation'의 한국어 번역으로 쓰이지만, 본래 '협회'의 뜻은 어떠한 사람 또는 대상을 '돕는 모임'이라는 뜻이다, 당시 독립협회의 목적은 당시 조선의 군주와 정부의 독립 의지를 뒷받침하고 독립 사업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였기 때문에 '협회'라는 이름을 썼고, 이는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모임'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Association과는 의미상 큰 차이가 있었다. 이 때문에 독립협회의 영어 이름은 Independence Association이 아닌 Independence Club이 되었다.
  2. 이들이 전제황권을 공고히하고 공화제 및 불경한 언어를 금한다고 하는 등 독립협회 내부에서도 친황실계와 반황실계가 나뉘어서 다투는 처지였다. 결국 막판엔 박영효 지지파를 비롯한 반황실파들이 독립협회를 박영효를 비롯한 정치적 망명자들의 귀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막나가면서 독립협회는 무너지게 된다.
  3. 반대파들(조병식 중심의 보수파 대신들)은 독립협회가 공화제를 주장한다고 상소를 올렸는데, 이건 실제로 독립협회 일각에서 나오던 주장이었다.
  4. 조병식이 흉년 때문에 방곡령을 내려서 양곡의 대일 수출을 금지했을 때, 일본이 이 일에 대해 소송을 건 일화로 유명하다. 하지만 동학을 탄압하여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라고 불리기도 하며 실제 행적만 봐도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탐관오리이다. 조병갑과 똑같다 조병갑과 결국에는 독립협회로부터 지금까지 한 일들 중에 제대로 한 일이 없다고 탄핵당했다.
  5. 광산 개발로 해독을 끼친 혐의, 인삼 행정을 잘못한 혐의, 화폐를 잘못 주조한 혐의를 받고 탄핵당했다.
  6. 상식적으로 현 대한민국 체제에서도 시위로 장관을 한둘도 아니고(사실 단순 시위로는 장관 하나 교체한 것도 어렵긴 하다.) 일곱명이나 교체하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7. 총 50석에, 왕이 나머지 25명을 지목
  8. 윤치호를 비롯한 체포 대상 3명은 도주했다. 이후 독립협회 사무실을 압수하는 과정에서 사무원이 체포당하고, 평의원중 2명이 자기들도 체포하라고 나서서 체포되는 등 4명이 추가로 체포된다.
  9. 처음 제시한 것보다 좀 손해를 보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중추원은 설립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