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朴殷植, 1859년 10월 25일 ~ 1925년 11월 1일)은 구한말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다. 본관은 밀양이며 호는 백암(白巖), 겸곡(謙谷), 필명은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이다.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냈다.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 10살 때 부친 밑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885년 향시(鄕試)에 급제했으며 1888년부터 참봉 벼슬로 지냈고 1898년 위암 장지연이 속한 황성신문의 주필을 지냈다. 이 때를 계기로 계몽운동에 참여하여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등에 참가하게 되었고 1904년 성균관의 후신인 서우학회를 세우고 학규신론을 간행하여 교육활동에도 참가했다.
1908년 서우학회의 후신인 서북학회 회장을 맡았으며 1909년 보수적인 유교와 유림사상을 질타하는 유교구신론을 발표해 을사조약을 막아내지 못한 보수 유림들을 질타하는 기고문을 내었고 중국의 양명학을 중시하여 이를 필두로 한 대동교를 창시하여 종교부장을 지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교육활동을 포기하고 독립운동가로 전향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서게 되었다. 이듬해인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구국 운동을 하게 되었으며, 1912년 상하이로 이동하여 박달학원을 세우고 상하이에 있는 동포들에게 민족 교육을 양성했다.
1915년에는 이상설, 신규식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감독이 되었고 독립단체인 대동구국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며 191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게 되었다가 이듬해 1919년 상하이로 돌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을 맡았다.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1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 되었다가 그 해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후 11월 병고(病苦)와 노환을 앓게 되어서 독립을 위한 민족의 통일을 주창하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67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순국 후에는 상하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93년 노백린, 신규식 등과 함께 국내 운구가 결정되어 중국에서 유해가 이송,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고종 즉위부터 105인 사건까지의 역사를 다룬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사를 다룬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있다.
- ↑ 사진 보존이 잘 안 되었는지 그가 찍힌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