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제


프로이센이 만든 후장식 소총. 별칭은 니들 건(Needle Gun). 공이가 바늘모양이라서 붙은 별명이다.

1 제원

무게: 4.7kg
전장: 142cm
총신길이: 91cm
총탄: 도토리 모양의 탄환과 장약, 뇌관을 종이로 된 탄피에 싼 형태
구경: 15.4mm
장전방식: 볼트액션
1분에 10~12회 발사가능
유효사정거리: 600미터
급탄방식: 단발장전

2 최초의 후장식 볼트액션 라이플

Zündnadelgewehr Dreyse(췬트나델게비어)[1]

프로이센의 기술자 요한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Johann Nikolaus von Dreyse)가 1836년 개발한 여러가지로 혁신적인 소총으로 장약+뇌관+탄환을 하나로 묶은 종이탄피를 사용하고 뒤로 장전하는 최초의 제식 후장식 소총이자 최초의 볼트액션 소총이었다. 사실 최초의 후장식 소총은 영국에서 개발되었으나 여러가지 단점 때문에 도입되지 못했다고 한다.

3 후장식 총기로서의 이점

이전의 전장식 소총은 일정한 양의 흑색화약을 부어넣고 그 위로 탄환이 총신 안에 꽉 물리게 꼬질대로 쑤셔넣어야 했다. 무엇보다 전장식이기에 서있거나 무릎을 꿇은 상태 외에는 장전이 불가했으며 때때로 흑색화약을 쏟아버리거나 미처 꼬질대를 제거하지 못하고 총신 안에 집어넣은 상태로 발사하는 경우[2]도 종종 있었으며 30발 이상 발사하면 부싯돌을 갈아줘야만 했다.[3] 게다가 아무리 빨라도 1분안에 1~2발 이상을 발사했다면 상당히 빠른 편에 속할 정도로 느려 미리 장전된 탄환을 발사하고 재장전을 하더라도 최대 분당 2~3발을 넘길수는 없었다.

그러나 드라이제의 후장식 소총의 종이탄피는 재장전시간을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었고 후장식이기에 엄폐한 상태나 엎드려 쏴 자세에서도 적을 지향한 상태로 연사할 수 있었다. 1868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7주전쟁 당시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후장식 소총을 사용한 프로이센군이 엎드려 쏴 자세로 분당 5발을 연사하며 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트리아군을 관광보냈다.[4]



독일 ZDF에서 제작한 역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Die Deutschen(독일인들)>에 등장한 드라이제 후장식 소총. 총기의 작동 방식 및 전장식 소총과의 차이점을 잘 알 수 있다. 동영상 후반부에 내레이터는 전쟁 마지막 날에 오스트리아군은 15,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으나, 프로이센군은 불과 2000여 명만 전사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현대식 소총이 공이-뇌관-화약의 수순을 거쳐 격발하는 것과는 달리 이 드라이제 소총은 위 동영상처럼 공이-화약-뇌관의 수순을 거쳐서 격발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즉 바늘이 흑색화약을 거쳐서 탄환의 탄저판(Sabot[5])에 부착된 뇌관을 때리고 그로 인해서 흑색화약에 점화되어 폭발하는 방식이었다.


드라이제 소총과 샤스포 소총의 종이탄피 구조 비교
위에 보듯이 드라이제 구조적 순서는 Firing Pin (Needle) - Charge - Primer. 바늘 공이가 종이 탄피의 후장에 구멍을 뚫고 화약을 지나 Sabot의 홈에 들어 있는 뇌관을 격발한다.

4 단점

드라이제는 혁신적인 소총이었음에도 전장식에 비하여 밀폐가 잘 되지 않았기에 가스가 새어나오거나 공이가 부러지는 등의 문제가 자주 발생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노리쇠 폐쇄기술은 근대 금속 탄피를 사용하는, 프랑스의 그라스 소총같은 단발식 볼트액션 소총의 등장 후부터 도입된 것이다. 이 당시엔 그런 장치를 금속 성형 할만한 기술이 없어서 사실상 전장식 총에다가 총알넣을 구멍내고 볼트달린 뚜껑으로 닫았다 열었다 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가스가 새는 게 오히려 당연한 정도였다. 그걸 막으려고 고무링에 왁스 바른 명주실까지 동원하였으나, 고무링이나 실이 먼저 녹아내리는경우가 더 많았다. 사수가 패킹이 녹아내린지도 모르고 발포하면 사수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얼굴이 새까맣게 타 녹아내리는 문제가 발생하는것이다. 그리고 종이탄피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경우[6]가 있었기에 비전투손실이 무시못할만큼 커진 프로이센군은 1870년 벌어진 프랑스와의 보불전쟁에서는 보다 향상된 성능의 프랑스식 니들건인 샤스포 소총과 이들의 신식 기관총에 의해 보병대 보병으로 붙기만 하면 녹아내리게 된다.[7][8]

결국 프랑스가 그들이 사용하던 종이탄피 샤스포 소총을 그라스 소총이란 금속탄피 단발식 소총으로 개조하여 종이탄피식 소총들을 퇴역시켰듯 1871년부터 마우저가 개발한 금속탄피 사용 소총인 Gew71로 대체된다.

  1. Zündnadelgewehr의 정확한 뜻은 바늘 점화식 소총, 즉 영어의 Niddle gun이지만 편의상 후장식 소총으로 부른다.
  2. 이렇게되면 어디서 꼬질대를 새로 구해올 때까지는 총을 쓸 수 없게 되어버린다!작살총?
  3. 나중에 뇌관을 이용하게 되면서 부싯돌 문제는 해결
  4. 하지만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패한 것은 소총의 질적 차이도 있지만 지휘계통이 혼란해진 오스트리아군의 실책이 컸고, 전쟁 전반에 걸쳐 프로이센은 철도를 비롯한 빠른 군수보급 능력을 보여주었다.
  5. 분리철갑탄의 뒤의 Discarding Sabot 를 번역한 경우 "이탈피"라고 쓰는데, 분리철갑탄의 작동 현상을 직역하여 번역한 경우지만 이 경우는 탄저판이다. Sabot는 실은 이탈하는 물체도, 탄저판도 아닌 "총기 격발시 폭압을 제대로 받기 위해 구경에 꽉 맞게 채워주는 물체나 판대기"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 화포의 격목이나 토격과 같은 역할의 물체다.
  6. 탄피가 찢어지거나 습기를 흡수해서 작동 불량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쾨니히그래츠 전투가 끝난 후 몰트케도 '이 소총이 나쁜건 아니었지만, 결코 훌륭한 소총은 아니었다'고 인정할 정도.
  7. 그러나 무기의 우수성에만 의존하던 프랑스는 전술적으로는 매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쥘수 있었겠으나 전략적으로는 보불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8. 더 정확하게는 독일이 채용한 후장식 크룹포의 화력 덕분이었다. 포병화력에서 압도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