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철학

이렇게 해서 우리의 발기 기관은 <향유>의 자리를 상징하게 됩니다. 그 자체로서도 아니고, 이미지의 형태로서도 아니고, 바라는 이미지에 결여된 부분으로서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발기 기관은 위에서 형성된 의미 작용의 (-1)^(1/2)에 해당하는 것이고 기표 (-1)의 결여가 가지는 기능에 대한 진술의 계수만큼 발기 기관이 복원시키는 <향유>의 (-1)^(1/2)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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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고자라니!!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 4. 13~1981. 9. 9)의 철학.
혹은 그의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
라캉주의라고도 한다.

1 라캉은 누구인가?

라캉은 정신과 의사에서 시작하여 철학 및 정신분석학계에 손을 뻗친 사람으로, 그 스승격인 프로이트를 방법론적으로 채용, 보충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며, 다시 해석함으로서 프로이트를 계승하고 있다. 그의 강좌를 받아 적은 세미나[1] 시리즈에선 프로이트로의 귀환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욕망, 무의식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지표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는 것이다. 욕망이란 틀 속에 억눌린 인간의 내면세계를 해부한다고 하여 정신분석학계는 물론 철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2 라캉철학의 근본 개념

라캉철학은 그 논란성을 제쳐두고서라도 굉장히 난해하기로 유명하지만, 이는 본격적인 철학적 저술 중에 그렇지 않은 것들이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특이한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의 라캉주의는 라캉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 없이 2차, 3차 문헌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근본 개념들을 서술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사실 라캉이 까다로운 것은 그 사람이 몰고 다녔던 스캔들을 감안하면서 그 저작들을 판단하지 않기가 어렵기 때문인데, 자기가 앞장 서서 연구소를 만들었다가 해체를 시켜버리지 않나 당대의 유명 인사와 식사를 하면서 그들을 당황시킬만한 언동을 보이질 않나 기존까지 지켜왔던 룰을 자의적으로 바꾸질 않나, 그 기행들로 인해 그의 사상에 접근하는 것은 그런 것들도 함께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상의 시발점이 되는 개인 중에 자기가 살아온 방식과 관계가 없는 사상을 펼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를 신경쓰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라캉의 경우에는 그게 다른 비교적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온 사상가들의 그것보다는 확실히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2.1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라캉은 자신의 정신분석학에 세 가지 계를 설정한다.

먼저 상상계는 사회와 구별되는 개인의 주체적인 영역을 가리킨다. 인식이 없으면 어떠한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모두 상상계의 인식을 통해 개인에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의미에서 상상계는 인간 개인에게 가장 근본적인 영역이다.

다음으로, 상상계의 반대에 상징계가 서있다. 상징계는 말그대로 현실의 영역이다. 라캉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사회의 의미화를 벗어나려는 개인의 투쟁으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 라캉은 상상계가 상징계에 처음 포섭되는 과정은 상징계의 일방적인 우위로 이루어지며, 이후에도 상징계는 상상계보다 앞서 상상계의 의미를 규정지으며 절대적인 위치에 남아있는 듯 보인다. 다른 한편, 라캉에 있어 '욕망'이라는 개념도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상징계가 상상계를 포섭하는 과정은 상징계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상계가 궁극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위치는 남아있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상상계는 '결여'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상상계는 자신과 세계의 안정적인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지점을 꿈꾸게 되고, 이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형태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첨언하자면 라캉에 있어 '욕구'와 '욕망'은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욕구는 말하자면 상징화에 앞선 지점에 있고, 욕망은 상징화 이후에 등장한다. 간단히 말해 "밥을 먹고 싶다"처럼 본능적이고 필수적인 것은 욕구라 할 수 있고, "누구누구와 같이 즐겁게 밥을 먹고 싶다. 그러면 정말 행복할텐데.."는 것은 욕망이라는 것. 욕망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실재계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실재계는 상징계의 의미화 작용이 실패로 돌아가는 지점을 가리킨다. 상징계가 말할 수 없는 영역을 통해 상상계는 거꾸로 스스로 절대적인 위치라고 말하는 상징계를 '의심'하게 된다.

문제는 이 개념의 정확한 위치인데, 이 개념이 상상계(개인)과 상징계(사회)를 모두 넘어선 지점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슬라보예 지젝등은 이 개념이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의 지점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즉, 상징계의 의미화 작용이 실패하지만 상상계가 인식할 수 있는 장소에 실재계가 서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앞서 욕망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바 있는데, 욕망이 향하지만 상징계가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지점, 바로 그곳에 실재계가 위치한다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헤겔주의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겠는데, 자세한 것은 슬라보예 지젝의 대부분의 저작을 참고.뭐라고요?

권택영 저서의 라캉과 자연을 정리.
'실재계란 텅 빈 죽음이다. 인간은 텅 빈 해골을 역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도치시켜 미화한다. 그래서 종국적으로 인간은 죽음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 삶이란 지나치게 빨리 죽음으로 가지 않는 것이다. 도착적인 반복이 이에 해당한다. 삶충동이란, 죽음충동을 늦추고 다양하게 변주함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의지이다.'

2.2 거울단계

라캉은 상상계 등의 근본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도둑맞은 편지의 비유 등 많은 예시를 덧붙여 놓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논란이 되는 비유가 바로 '거울단계'라는 개념이다. [2]

"거울 속 이미지를 마주하고 있는 아이는 아직 신체적으로 미숙하여 자기 몸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는데 거울 속 이미지는 완벽함과 통일된 상으로 다가오고 아이는 그것이 자신의 이미지라는 것을 지각한다. 자신의 이미지를 대면하면서 아이는 외부 공간 속에 가시화되는 자신의 형상을 감각적으로 확인하기 때문에 커다란 환희와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아이는 완벽한 모습으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형상에 도취되는데 이는 나르시시즘의 최초 순간이기도 하다. 아이는 환호하지만 아이가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거울단계는 실제 몸의 감각과 그것에 대해 투영하는 이미지의 괴리가 은폐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시기 아이는 아직 운동신경과 몸의 운동 조절 능력이 미숙하여 실제 몸의 느낌은 통일되지 못함에 반하여 이미지는 완벽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 (김석, 『에크리』, 2006)

'거울단계'의 가장 근본적인 맥락은 아직 상상계적 작용에만 자신을 맡기는 아이가 처음으로 상징계가 제공해주는 이미지에 자신을 맞추는 데에 있다. 그렇지만 상징계의 이미지는 유동적인 것이고, 상상계는 그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은 이후의 라캉의 논의에서도 이어지기 때문에 라캉을 접해보려 한다면'거울단계'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2.1 거울단계에 대한 논란

라캉이 스스로 자신의 철학을 "과학과 철학 사이"라고 말한 바, 라캉은 언제나 수많은 과학도들과 철학도 사이에서 논란거리가 되어왔었다. '거울단계'라는 개념 역시 논란들을 피할 수 없었는데, 이 항목에서는 과학도들과 라캉주의자들이 대립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선들에 대해서만 설명하기로 한다.

과학도들은 아이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자각하고, 또 소외된다는 실증적 근거가 없음을 지적한다. 한편, 라캉주의자들은 '거울개념'을 구성하는 상상계와 상징계라는 개념이 이미 과학의 방법론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등 이에 대한 반박을 시도한다. 라캉에 대해 과학과 철학이 대립하는 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에 대한 논란에서,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은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이 등장한 것은 1936년으로, 이 시기까지 거울에 비친 상을 보고 자기를 인식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특질이라는 게 과학계 일반의 인식이었다. 인간 이외의 동물도 거울상을 보고 자기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1970년 고든 갤럽의 침팬지 실험에서야 확인되었다.[3]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런 식으로 과학적인 일단락이 있고 나서부터는 거울단계를 비유로써 보는 게 적합하다는 지적이 뒤를 이었다. 주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이유로 과학이 아니라는 것. 나중에는 정신분석학을 수학에 비유해서 썼지만 이조차도 정확하게 그런 개념들을 설명하진 못했다.

2.3 "성관계는 없다"

"성관계는 없다"라는 문장은 라캉 욕망 이론의 핵심을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표현한다. 리비도 등의 개념을 통해 욕망을 생물학적 방향으로 환원시키려 한 프로이트와 라캉이 바로 이 지점에서 갈라서기도 하는데, 라캉이 이 문장을 통해 말하려 하는 것은 "남녀는 모두 고자다"(...)는 게 아니라 "남녀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안정적인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성관계를 넘어, "존재와 세계는 절대 안정적인 합일을 이룰 수 없다"는 라캉의 철학적 맥락은 이후의 논의에서도 이어진다.

라캉이 말한 성관계는 없다는 것은 이상적인 그 자체로서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인데, 그 내용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회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렇게 벌어진 일과 관계를 하게 되는데, 이렇게 관계를 하면서 개인들은 가능한 쾌락의 형식에 자기 자신을 집어 넣게 된다. 이를 쾌락원칙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을 타자에 종속된 주체로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타자에 종속된 개인들은 가능한 쾌락의 바깥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존재하려고 하는데, 이를 정신분석학의 성욕에 대한 원리에 맞춰 성관계=존재로 보아, 존재는 개인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라고 본 것.

그래서 성관계는 없다는 것은 (개인이 원하는 방면으로 인식이 가능한)존재는 없다고 풀어 쓸 수 있다. 사실 이 발상 자체는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닌데, 대표적으로 테오도르 아도르노부정변증법이라는 개념을 통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 그런 건 없다고 라캉과 비슷한 시기에 이야기한 바 있다.

이 문장에 한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간이 성관계를 할 때의 상대방은 물리적으로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이 상정한 객체라는 것이다. 쉬운 예로 성행위를 하며 다른 사람을 떠올린다거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체위나 성적 지향 등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다. 라캉은 이 예들에서 착안하여 무의식 중에라도 인간은 성행위를 하며 상상적 쾌락을 가미(사실상 상상적 쾌락 위주로)하여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4 주이상스

라캉철학의 핵심 개념은 그래서 이 총체적인 흐름을 넘어서는 단 하나의 가능성을 찾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뭐든 그렇게 총체적인 흐름으로 환원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 주이상스jouissance는 프랑스어로 즐긴다는 의미를 가진 영어 enjoyment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명사인데, 라캉에게 주이상스는 정해져 있는 쾌락을 넘어서는 것을 통해 찾아오게 되는 것이었다.

이 바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주체화의 욕동이 존재하는데, 이는 주체가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판단하는 순간을 통해 찾아오게 된다. 이를 라캉은 환상의 횡단, 혹은 환상을 가로지르기라고 불렀는데 이를 통해 정해져 있는 쾌락원칙을 따르고 있던 개인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판단하게 되고, 이를 통해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기를 선택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에 종속되기를 거부했을 때, 기표에 종속 되어 동물과 같은 순수한 쾌락이 불가능해진 인간에게 가능한 일말의 쾌락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캉은 바로 이 쾌락을 선택하는 것을 윤리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윤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될 수 있는 이상적인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정신분석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2.5 증세

역사적 흐름 앞에서 개인은 무언가를 하려고 선택할 수 없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그 현실을 마주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삶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고 믿게 된다. 그렇게 한계가 정해져 있으니 어떤 것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 한계 안에서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한계 안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것은 라캉은 이것이 인간이기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믿을 뿐이라고 보았다. 이 믿음을 증세라고 하는데,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과정이란 이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고 좌절했지만 라캉은 그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발견한 정신분석이라는 방법론의 정수라고 보았다.

이를 넘어가는 최소한의 쾌락으로서의 주이상스를 설정한 것은 그렇다고 한들 다시 그것을 선택하는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라캉철학은 아도르노의 그것과 차이를 보이는데, 아도르노는 그렇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기를 선택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라캉은 그렇게 살게 된 과정을 주체적인 차원에서 다시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윤리적인 결정이라고 보았던 것.

이 지점에 라캉철학이 지니는 윤리학적 의의가 있다. 정신분석을 통해 분석을 받는 개인[4], 분석주체가 자기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선택한 삶을 긍정하고 그 삶이 던지는 문제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이것과 마주할 수 있도록 분석가가 지속적으로 분석주체가 만들어낸 증세라는 환상과 마주하게 해야 한다는 것.

3 한계

라캉은 정신분석학, 철학 모두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하지만 이는 라캉의 지나친 교조화 때문에 영향력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남미에서는 라캉주의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5] 한국에서는 이상한 종교 집단처럼 되어버린 식이다.

프랑스 철학계에서는 포스트 구조주의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다. 구조주의가 대세였을 시절, 라캉은 레비스트로스, 바르트, 푸코 등과 함께 구조주의의 거두로써 구조주의를 비판하며, 포스트 구조주의를 일으켰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정신분석은 정신분석 따로, 구조주의를 비롯한 철학적 사조는 그것대로 따로 움직이고 있는 데에다, 구조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은 너무나 평범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라캉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프래그머티즘 철학에는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그리고 미국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북미의 경향을 따라가는 한국의 철학에도 비교적 협소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장 미국의 유수 대학의 철학과 교수들이 편집한 주요 현대 철학 논문들을 엮은 핸드북에서 라캉의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애초에 철학과 대립중인 정신분석학은 프래그머티즘 철학 조류에서는 언급 될 가치조차 없는 것. 굳이 라캉의 연구주제를 미국에서 현재 분류하고 있는 분류법에 맞춰 분류하자면 심리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현대 심리철학의 최대 쟁점 중 하나인 물리주의 논쟁에 라캉이 기여한 바는 전혀 없다. 물론 라깡이 살았던 시기가 시기인만큼 현대 논쟁에서 비껴서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같은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이나 철학계에서는 잘만 쓰이는데, 문학의 특징상 상상이나 실제 등과도 관련된 상징체계(언어)를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계에서도 상징계나 초자아나 다 도덕적인 행동들을 설명하기 적확하다. 특히 욕망의 의미를 셋으로[6] 나눈 점 등에서 철학적 의의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장 정신분석학과 철학이 대립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라깡철학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로 인해 비평에 대한 공부를 한다면 한번쯤은 접하게 될 인물이다.

4 국내 상황

정신분석학덕에 갑자기 한국일본에서 교양있는 사람의 필수 덕목이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문학과에서 더 유명한 학문이 되었고, 철학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국내에 제대로 번역도 되지 않았을 뿐더러 라깡의 사상은 라깡의 개인적 구어에 종속되어 있기에, 문어로써 변환이 불가능하고, 다른 언어로의 이행 또한 불가능하다고 한다. 언어의 본질적인 속성상 라깡의 사상이 전달되는 것도 100%는 불가능하다고는 하는데, 일단 라캉이 생전에 했던 말이나 썼던 문장이 그리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본인이 직접 에크리와 같은 저서에서 말하기를, 내 글은 읽혀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뭘 위한 것이라는 거냐

사실 이는 컨텍스트를 생각하면 그럴만 하다. 대체로 어떤 사건 속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것들은 그 사건 자체를 바깥에서 바라보고 난 이후에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건데, 헤겔의 말마따나 이런 건 그 일이 끝나고 나서야 판단이 가능하다. 생전에는 그 말과 행동이 판단 대상이 안 된다는 걸 이미 전제해 두고 있었던 것이라고 보면 그럭저럭 납득할 수는 있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사실인 건데, 굳이 그걸 부각했을 뿐이니.

4.1 국내 분석

라캉철학의 유입 경로는 철학 영역이라기보다는 영미의 문학/문화비평 계통이다. 물론 비평이론을 철학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또 비평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철학 이론가라는 점을 들어볼 때, 이는 어찌 보면 상당히 당연한 것이다.[7] 문화비평을 하는 영미 계통의 인문학자들에게 이른바 "라캉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그대로 한국으로 넘어온 셈이다. 물론 최근 들어 원전 번역작업과 정신분석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비평의 도구로 삼고자하는 학문적 경향이 일고 있다.

5 국외 상황

슬라보예 지젝이 라캉을 열렬히 옹호하며 헤겔과 연역하여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남미에서는 라캉을 포함한 유명 정신분석학자들의 영향력이 상당하다고 한다. 남미 특유의 정치 상황이 소규모 단위를 통해 진행되는 민주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는 것. [8] 여기서 정신분석을 진행하는 분석가가 지역 사회의 문제에 중심에 뛰어들 수 있는 매개로서 작용하는데,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적인 유물론적 접근법이 시행되고 있다는 이야기.

이에 따르면 분석가에게 분석을 받는 개인들이 이를 통해 자신의 문제와 마주할 수 있게 되는데, 이 문제라는 것이 소규모 단위에서 진행되는 감정의 교류가 막혀 있는 상황을 풀기 위한 매개가 되고, 이를 통해 특수한 유물론적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개개인이 자기 스스로의 욕망을 분석하고 타협된 선에서 실행하는 사회는 실제로 라깡이 제시한 유토피아에 가깝다.

세계정신분석학회나, 한국 정신분석학회에서 프로이트 이야기가 나오면 필연적으로 라캉의 이론과 결부시켜서 논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현대 정신분석학에서 프로이트가 갖는 위상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학회들이 정통 프로이트 주의를 표방하지는 않는다. 거기에 심리학에서는 공식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험과 통계를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지며 자연과학에 가까운 연구방식을 채택하는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학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연구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정신분석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심리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주류 철학은 정신분석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 애초에 전제 자체가 판단 불가능하다는 무의식을 깔고 들어가는 정신분석학과 판단 가능한 것인 자아에서 시작하는 현상학, 그리고 이해 불가능한 것을 세분화하는 정신분석학과 이해 가능한 것을 총체화하는 체계화 철학이 서로 부딪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극렬하게 나타나고 있는 나라가 프랑스.
  1. 사위인 자크 알렝 밀레가 주도를 해서 출판중.
  2. 이는 후기 라캉에서는 별로 중요한 개념은 아니다.
  3. 물론 인간과는 달리 자기인식 이후에 더이상 거울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4. 라캉주의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분석주체라고 부른다
  5. 하지만 남미 라캉주의자들조차도 영미로 수학하러 떠났다가 라캉주의의 실증성에 회의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6. 각각 '타인이 욕망하는 대상'(불필요한 명품 및 사치품 등)을 욕망, '타인의 욕망'(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등이 누리는 인기)을 욕망, '타인'(애정이나 소유욕 등)을 욕망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모두 함축하여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하였다.
  7. 데리다, 들뢰즈, 바르트 등 대부분의 프랑스 현대 철학자는 비평가를 겸하고 있다.
  8. 출처 : Marx and Freud in Latin America: Politics, Psychoanalysis, and Religion in Times of Terr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