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Latrell Fontaine Sprewell |
생년월일 | 1970년 9월 8일 |
키 | 196cm (6 ft 5 in) |
체중 | 88kg (195 lb) |
출신학교 | 앨라배마 대학교 |
포지션 | 슈팅 가드/스몰 포워드 |
드래프트 | 1992년 드래프트 1라운드 24순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 |
역대 소속팀 |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1992~1998) 뉴욕 닉스(1998~2003) 미네소타 팀버울브스(2003~2005) |
등번호 | 15번 (골든스테이트) 8번 (뉴욕, 미네소타) |
수상내역 | All-NBA First Team 1회 (1994) NBA All-Star 4회 (1994-1995, 1997, 2001) NBA All-Defensive Second Team (1994) NBA All-Rookie Second Team (1993) |
목차
1 개요
前 NBA의 농구선수. 전성기에는 포스트 조던 후보중 한명으로 꼽히다 특유의 폭발적인 득점력과 투핸드 덩크로 인기를 끌었으며, 국내 팬들에게는 PJ 칼리시모의 목을 조른 사건이나, 부양할 가족이 있다는 발언과 월간해외농구잡지 루키 조현일 편집장이 좋아하는선수로 유명한 선수이다.
2 프로 입성 이전
부모님이 어릴때부터 이혼한 스프리웰은 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이사를 자주 했기 때문에 체계적인 농구를 배우지 못하고 길거리 농구코트를 전전하다 아버지가 마약 복용으로 체포되며 밀워키의 어머니 집으로 옮기고 부터 본격적으로 농구를 배우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졸업 뒤에는 처음에는 2부 대학리그에서 뛰다 3학년때 앨라배마 대학으로 편입을 했고, 4학년때부터 특유의 폭발력과 수비력을 보여주며 사우스이스트 컨퍼런스 올 SEC 퍼스트팀 과 올 디펜시브팀에 선정되어 스카우터들에게 주목받았다고 한다.
3 NBA 입성 이후
3.1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
데뷔하자마자 Run TMC중 하나였던 미치 리치몬드의 자리를 채우면서 평균 15.4득점 3.8어시스트 3.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올 NBA 루키 세컨드 팀에 들었다. 2년차에는 전경기에 출전하며 무려 평균 43분을 뛰면서 총 3533분 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평균 21득점으로 팀의 공격을 이끌면서 2년차만에 올스타에 선정되고, NBA 퍼스트 팀과 함께 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올라가면서 공수겸장으로 이름을 올린다. 팀 하더웨이와 크리스 멀린이 아웃된 팀을 50승으로 이끌었지만 팀은 선즈에게 시원하게 플레이오프에서 스윕 당했다.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중 하나로 성장했지만 스프리웰은 선수나 팀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절친한 동료인 크리스 웨버와 빌리 오웬의 트레이드에 대해 돈 넬슨 감독과 구단과 불화를 일으키고 이전에 Run TMC를 이끌던 팀 하더웨이와 굉장히 사이가 나빴다.
결국 그를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기 위해서 팀은 팀 하더웨이까지 트레이드를 시키면서 그를 중심으로 팀을 재편해 줬지만, 팀은 성적이 신통치 않았고 스프리웰에 대해서도 자신의 기록만 챙기는 선수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후 시튼홀 대학교 감독으로 NCAA 토너먼트 결승에 올린 명장이자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감독이던 PJ 칼리시모가 5년 계약을 맺으면서 감독으로 부임하고 97/98시즌을 맞이하는데...
3.2 칼리시모 감독 목조르기 사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입장에서 흑역사나 다름 없는 사건인 PJ 칼리시모 감독의 목조르기 사건이 일어난다. 이전에도 팀 차원에서 스프리웰을 트레이드 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이후에도 불편함을 껴안고 시즌을 지내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칼리시모와 스프리웰이 대립각을 세우자 칼리시모가 그를 11월 이후로 식스맨으로 기용하며 불만이 끓어 올랐고, 1997년 12월 1일 스프리웰이 칼리시모의 목을 조르며 난동을 피우고 목에 상처를 남겼고, 이후 구단 사무실로 쳐들어와 "나를 트레이드 해달라!" 라고 불만을 토해냈다. 결국 그는 choke master라는 불명예 스러운 별명을 얻었고, 컨버스와 계약금도 받지 못하고 잔여 연봉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선수노조가 나서서 변호를 해줬고, 중재인이 죄가 너무 무겁다는 등 스프리웰 살려주기 덕분에 시즌 전 경기 출장정지 징계가 68경기로 완화되었지만 한번의 실수로 많은 것을 날려먹은 사건이었다.
3.3 뉴욕 닉스의 트윈테러로
앨런 휴스턴과 트윈 테러를 이루던 시절.
이후 뉴욕 닉스의 부름을 받았고, 골든스테이트도 그를 옮기는데 동의 하면서 존 스탁스, 크리스 밀스, 테리 커밍스와 트레이드로 뉴욕 닉스로 팀을 옮긴다. 직장폐쇄로 인한 단축시즌에서 긴 공백기와 부상으로 37경기중 4경기만 선발출장하면서 식스맨으로 주로 출장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무대에서는 앨런 휴스턴과 트윈 테러로 상대방을 휘저으면서 패트릭 유잉과 함께 8번 시드의 기적을 이끌어 냈다. 유잉이 벤치를 지키고 마커스 캠비와 래리 존스가 못나오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수비를 휘저으며 평균 26득점으로 분전해냈다.
밀레니엄 닉스 이후 스프리웰은 2000년대 초반의 뉴욕을 이끄는 선수였다. 유잉이 중심이 된 묵직한 팀에서 트윈 테러를 앞세운 스피드한 농구를 하는 팀으로 변모하는 중심이었으며, 화려한 플레이로 스포츠 뉴스 하이라이트에 나오는 스타일있는 선수였다. 그 유명한 스파이크 리 감독도 스프리웰의 저지를 입었으며, 자체적으로 자선단체에 기부도 하고, 여러가지 광고를 따내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코트 밖에서 사소한 말썽을 계속 일으키고 다녔고 팀의 캐미스트리가 점점 좋아지지 않은데다, 고액연봉자인 스프리웰은 부담스러웠고, 많은 트레이드 루머가 돌다 결국 케빈 가넷의 미네소타로 트레이드 된다.
3.4 미네소타에서 말년
미네소타에서.
케빈 가넷이 분전하던 팀에서 최고의 미남 샘 카셀과 함께 중심 축이 되주며 공격 옵션에서 활로를 이끌어 내는 활약을 펼치면서 미네소타가 처음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에 가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시즌 후 그 유명한 발언인 "나에게는 가족을 부양할 의무가 있다"[1] 라며 3년 2100만 달러의 계약을 거절했고, 결국 그는 한시즌 더 뛰고 NBA무대를 떠나게 된다.
4 프로 커리어 이후
모터스포츠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지내는 듯 하다가 어느샌다 빛더미를 껴안게 되었다고 한다.
5 플레이 스타일
처음에는 포스트 조던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자신만의 또다른 스타일을 구축한 선수.
특유의 종종걸음을 하다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페네트레이션을 하는 것은 NBA 선수들 중에서도 굉장히 수준급에 꼽힌다. 돌파도 뛰어나고 슈팅도 정확한것은 아니었지만 터지면 막기 힘든 폭발력이 있었다. 수비력도 끈질기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준수한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투 핸드 덩크는 여러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단점은 슈팅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인데, 잘풀리면 폭발이지만 안풀리면 난사급이라고 할만 했다.- ↑ 여기서 가족이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가에 관해 소문이 많이 돌았었다 패밀리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한 가정의 식구를 뜻하기도하지만 조직폭력배와 연관되었다는 카더라가 있었기때문에 몇몇 인사들 사이에서 의혹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