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가넷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No. 21
케빈 가넷 (Kevin Maurice Garnett)
생년월일1976년 5월 19일
신장211cm (6' 11.25")[* [[ DraftExpress.com 1995년 드래프트 측정 결과 맨발 신장 6' 11" = 211cm][1]
체중108kg (240 lbs)[2]
포지션파워포워드/센터[3]
드래프트1995년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 지명
역대 소속팀미네소타 팀버울브스 (1995~2007)
보스턴 셀틱스 (2007~2013)
브루클린 네츠 (2013~2015)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2015~2016)
등번호21번 (미네소타)
5번 (보스턴)
2번 (브루클린)[4]
수상내역정규시즌 MVP (2004)
NBA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2008)
NBA All-Star Game MVP (2003)
Olympic Gold Medal (2000)
NBA All-Star 15회 (1997,1998,2000-2011,2013)
All-NBA 1st Team 4회 (2000,2003,2004,2008)
All-NBA 2nd Team 3회 (2001,2002,2005)
All-NBA 3rd Team 2회 (1999,2007)
NBA All-Defensive First Team 9회 (2000-2005,2008,2009,2011)
NBA All-Defensive Second Team 3회 (2006,2007,2012)
NBA All-Rookie Second Team (1996)
2004년 NBA 정규시즌 MVP
팀 던컨케빈 가넷스티브 내쉬
2008년 NBA 올해의 수비수상
마커스 캠비케빈 가넷드와이트 하워드
2003년 NBA 올스타 MVP
코비 브라이언트케빈 가넷샤킬 오닐
2004 ~ 2007년 NBA 올해의 리바운드왕
벤 월러스케빈 가넷드와이트 하워드

1 개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그 자체인 선수

NBA의 농구선수. NBA 파워포워드 포지션에서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사이에 거의 같은 세대인 팀 던컨,크리스 웨버와 함께 3대 파포로 손꼽혔던 선수.[5]
한때 팀 던컨과 라이벌구도를 형성했지만 업적만으로 평가하자면 지금은 던컨이 가넷을 아득히 추월하였다.[6] [7] 더크 노비츠키와의 비교에서는 줄곧 우위를 점하였으나 2011년 노비츠키가 뛰어난 퍼포먼스로 댈러스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평가가 역전되었다. 여담으로 espn에서 2016년에 선정한 역대 파워포워드 랭킹에선 노비츠키가 3위, 가넷은 5위였다. 4위는 찰스 바클리
2016년 9월 23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화려한 NBA 커리어의 막을 내렸다. 이로서 2016년은 코비 브라이언트, 팀 던컨, 케빈 가넷이라는 NBA 역사에 남을 3명의 전설이 한꺼번에 은퇴를 선언한 해가 되어버렸다.

2 성장

케빈 가넷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그린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넷과 가넷의 어머니를 떠났고, 가넷의 어머니는 가넷이 12살때 재혼했다. Hillcrest중학교를 거쳐 Mauldin 고등학교에 진학한 가넷은 사상 최초로 3학년(미국의 공립고등학교는 대부분 4년제다)으로서 주(州) MVP격인 Mr. Basketball에 선정되는 등 두각을 나타낸다.[8] 그러나 3학년 말에 시련을 겪게 되는데, 어느날 학교내에 백인학생과 흑인학생간의 패싸움에 연루되어 체포된 것. 가넷의 죄는 그 근처에 서있었다는 죄밖에 없었는데, 경찰은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을 체포했다(...)[9]

후에 풀려난 가넷은 첫날 급식실에서 자신의 얼굴을 향해 핫도그가 날아오는 등 적대적으로 변해버린 학생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기 되는데, 이 모습을 보다못한 어머니 셜리 가넷은 그와 여동생을 전학보내기로 걸심한다. 그는 나이키 캠프에서 친분을 갖게 된 넬슨 감독을 통해 시카고에 위치한 페러것 고등학교로 전학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가넷은 자신의 농구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평균 25.2점, 17.9리바운드, 6.7어시스트, 6.5블록슛의 활약을 펼친것. 이를 발판으로 전미 고교농구선수의 올스타전 격인 McDonald's All-American Game[10] 에서 18득점 11리바운드 4어시스트 3블록슛을 기록하면서 역시 전국구 적인 관심을 얻게되며 고등학교에서의 활약에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긴 가넷은 1995년 NBA드래프트 참가신청을 내게된다. 고졸 선수로써.[11]

3 NBA에 입문하다.

워크아웃에서 엄청난 운동능력 덕분에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실상 가넷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래리 버드와 함께 보스턴 셀틱스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파워 포워드 출신이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사장이었던 케빈 맥헤일 외에는 없었다. 키는 컸으나 당시에 100kg도 안되는 몸무게 때문에 파워포워드를 보자니 파워가 떨어지고 스몰포워드를 보자니 활동범위가 좁았다. 거기다 그는 고졸이었다. NCAA는 커녕 성인농구 경험이 전무한 풋내기로 수많은 전문가들은 그를 선택하는 것은 그야말로 모 아니면 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도박이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맥헤일은 가넷의 성장가능성을 높게보고, 그를 전체 5순위로 지명하게 된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맥헤일의 결정을 "ㅋㅋㅋ 너님 저런 해골을 데려다 뭐 어쩔꺼임?ㅋㅋㅋ"라며 비웃었으나, 맥헤일은 "즐! 저 아이는 대스타 될꺼임. 나중에 질질짜지나 마셈" 이라며 쿨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그 맥헤일의 장담은 현실이 되었다.[12]

4 커리어

4.1 미네소타 늑대무리의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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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NBA에 데뷔했으나, 프로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감독이었던 빌 블레어는 아직 덜익은 가넷을 잘 종용하지 않았고 당시 팀 에이스였던 크리스챤 레이트너가 가넷의 플레이를 비난하는등 고난이 있었다.팀의 포워드 자리에는 레이트너와 톰 구글리오타가 자리잡고 있었고,아직 어린 가넷은 그들보다 분명 밀렸다.한 때 세 사람을 동시에 코트에 세우기 위해,가넷이 선발 센터로 출장한 경기도 있다.

그러자 맥헤일은 빌 블레어를 해고하고,트레이드 데드라인에 크리스챤 레이트너를 애틀란트 호크스로 보내버리면서 가넷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감독도 자신의 친구이자 가넷과 호흡이 잘 맞는 플립 손더스로 교체했을 정도. 루키시즌인데다 기본기가 부족했던 고교생이었지만 가넷은 33득점을 득점하기도 하는등의 가능성을 폭발시켰다.그러면서도 팀은 레이트너가 떠나고 가넷이 주전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도,출장시간을 30분 이하로 철저하게 관리하며 배려했다.주전 파워포워드로 자리잡은 이후의 성적만 치면,평균 14점 8리바운드 정도를 기록.

96-97시즌을 맞이하면서 팀은 아웃사이드에서 가넷을 보조할 공격형 루키 가드 스테판 마버리를 영입하면서 가넷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기존의 톰 구글리오타도 건재했고 그후 가넷은 루키시즌과는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며 만20세의 어린 나이에 첫 올스타전에 출전한다. [13] 팀 역시 창단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물론 1라운드 상대가 하킴 올라주원, 찰스 바클리, 클라이드 드렉슬러 등이 버티는 휴스턴인 탓에 3패로 광속탈락했지만.

하지만 가넷의 성장은 멈출 줄 몰랐다. 꾸준히 자신의 개인기록과 기량을 향상시켜 나가면서 미네소타를 플레이오프에 이끌었다. 그러나 매번 1라운드 탈락.

9899시즌에 팀은 25승[14], 본인은 평균 20득점 10리바운드를 처음 달성했고 올 NBA 서드팀에도 들게 되었는데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그해 챔피언이 될 팀 던컨의 스퍼스에게 단 1승만을 거두며 탈락했다.

9900시즌때엔 처음으로 올 NBA 퍼스트팀에 들고 정규시즌성적을 50승까지 끌어올리는등 물이오른 수완을 보였지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에게 1승 3패로 무너졌다

2002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선 디르크 노비츠키의 댈러스 매버릭스에게 1승도 못거두고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했다.

가넷을 보좌할 만한 파트너의 부재, 그리고 가넷의 가능성만 믿고 루키계약이 끝나자마자 97년도 오프시즌에 가넷 맺은 천문학적인 연봉이(6년 1억25백만 달러) 미네소타의 전력보강에 방해가 된탓.[15] [16] [17] 그러다보니 미네소타는 정상적인 전력보강이 매우 어려웠다.[18] 구단의 흑역사이자 NBA의 흑역사중 하나인 "조 스미스 부정 계약 파문"이 바로 그 예. 이 때문에 2006년 라샤드 맥캔츠를 지명할때까지 5년간 1라운드 지명권 박탈이라는 징계를 받았다.[19]

하지만 2003-2004시즌 팀이 과감한 트레이드를 통해 가넷의 고향별 형제셈 카셀과 라트렐 스프리웰을 데려오면서 가넷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팀 성적도 좋았다. 가넷은 정규시즌 MVP를 차지하고 팀 역시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가뿐하게 돌파하고 컨퍼런스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비록 당시 전당포 라인업으로 무장한 레이커스에게 탈락하긴 했으나 가넷에게나 팀에게는 다음시즌에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는 개뿔. 카셀과 스프리웰이 연봉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겪으며, 태업이 의심될만한 플레이를 일삼기 시작했다. 여기에 스프리웰의 경우 "난 먹여살릴 가족이 있으니 돈 더 내놔 숑키들야!"라는 어처구니가 없는 발언을 해, 구단분위기를 망쳐놨다. 04-05시즌에 무려 천4백만달러나 받고 기량도 하락세인 인간이 저런 헛소리를 했으니(...)[20]

이 때문에 가넷도 많은 상처를 입었다. 올스타전 주간에 인터뷰에서 가넷은 울음을 터트리며 "농구는 팀 스포츠다. 아무리 내가 잘한다고 해도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수없다."라며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리고 가넷이 신임했던 플립 손더스 감독을 구단이 해임해버리자 팀에 불만도 높아졌다. 04-05시즌 결국, 미네소타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05-06시즌, 06-07시즌 역시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그동안 트레이드나 자유계약 선수 영입등, 구단도 나름 노력은 했으나 가넷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면책용성 영입이 많았다.[21]

2007년 여름 가넷은 자유계약 시장의 큰 화두였다. 가넷은 이미 팀에 마음을 떠났고, 미네소타 역시 변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를 둘러싼 트레이드 루머가 빈번했다. 시카고 불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 피닉스 선즈, 보스턴 셀틱스 등 다양했다.

보스턴 셀틱스의 경우 가넷이 대놓고 가기를 거부했다.(...) "만약 나를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하면 옵션을 사용해 자유계약 선수가 되겠다."라고 했을 정도. 당시 보스턴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 [22] 그러나 보스턴이 만렙슈터 레이 알렌을 트레이드로 데려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미네소타와 보스턴간의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 가넷의 샐러리를 맞추기 위해서 보스턴은 다섯명의 선수[23]와 현금, 그리고 1라운드 지명권까지 내주었다. 이로써 NBA라이브에서나 볼법한 사기라인업이 탄생한 것이다.

4.2 보스턴 Big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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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플레이스타일도 정적으로 변했지만 가넷은 변함없었다. 보스턴에서는 폴 피어스,레이 앨런이라는 훌륭한 원투펀치 득점원이 있었고, 포인트가드 자리에는 켄터키대학의 신예 라존 론도가 있었다. 또한 잘짜여진 수비전술 중심의 감독인 닥 리버스, 그리고 2011년인 지금도 팀 디펜스에 있어서는 NBA최고로 인정받는 천재 수비코치 톰 티보두(Tom Thibodeau, 現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감독)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넷은 이적후 자신의 장점인 수비를 극대화 시키는 수비형 빅맨으로 변신을 시도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가넷은 건재한 수비능력으로 보스턴 골밑을 지켰고, 캔드릭 퍼킨스, 리온 포우, 글렌 데이비스등과 같은 젊고 몸싸움 강한 빅맨들을 잘갈구고이끌었다. 팀이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서 가슴을 두드리는 세레머니도 자주 했다. 보스턴의 리더는 폴 피어스였지만, 가넷역시 보컬리더로써 젊은 선수들을 잘 조율했고 팀을 바로 잡아주었다.

07-08시즌에 그는 올해의 수비수 상을 수상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의외로 1라운드부터 애틀란타 호크스에서 7차전까지 갔고, 당시 르브론이 버티고 있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도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면서 많은 팬들이 걱정했으나,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를 4승2패로 물리치고, 결승전에서는 LA레이커스를 4승2패로 물리치는데 일조하면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가넷은 너무 기쁜나머지 울음을 터트렸다. 그전의 저조한 팀 성적으로 인해 흘리는 참담한 눈물이 아닌 기쁨에 겨워 흘린 눈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우승후 인터뷰에서 가장 팬들마음속에 강렬하게 새겨진 한마디를 했다.... "ANYTHING IS POSSBILE!!"[24] 파이널mvp는 폴 피어스에게 돌아간 2인자로서의 우승이었지만 팬들과 가넷은 모두 감격에 겨워했다

08-09시즌에도 2연패를 위해 시동을 걸었으나, 그만 부상을 당해, 데뷔이래 가장 많은 경기를 결장했고 중요한 플레이오프에도 뛰질 못했다. 결국 보스턴은 2라운드에서 괴물 센터 드와이트 하워드가 버틴 올랜도 매직에게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09-10시즌 가넷은 건강하게 돌아와서 자기몫은 했지만 팀 성적은 지난 두 시즌에 비해 너무 떨어졌다. 많은 팬들은 "보스턴의 Big3도 이제 약빨이 다된거 아니냐?"라는 우려를 보였으나, 바로 플레이오프에서 마이애미, 클리블랜드, 올랜도를 쳐바르고 파이널에 올랐다. 상대는 2년전 자신들이 꺾었던 레이커스. 전통의 라이벌 답게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이었으나, 결국 7차전을 내주고 우승에는 실패했다.

10-11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2라운드에서 역시 젊은BIG3구성한 마이애미 히트에게 1승4패로 무기력하게 탈락하고 만다.

4.3 브루클린 네츠

12-13시즌이 끝난 후, 보스턴이 리빌딩에 들어가면서 폴 피어스, 제이슨 테리와 묶여 브루클린 네츠로 트레이드되었다. 부상과 노쇠화로 많은 경기에 결장하고, 출장시간도 20분 남짓으로 줄어들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다. 그러던 와중 트레이드 데드라인이 다가오자...

4.4 다시 미네소타로


옛 스승인 플립 선더스 감독과의 재회.

"If LeBron can go home, why can't I?" [25]

데뷔 팀이자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10년 넘게 뛴 미네소타와 브루클린 사이에서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미네소타의 PF/SF인 테디어스 영과 케빈 가넷의 1:1 트레이드로 브루클린은 사치세 절감 및 젊은 재능의 추가, 미네소타는 팀 프랜차이즈 역사 상 최고의 선수 복귀 및 라커룸 리더의 충원이라는 양팀의 니즈가 맞아 떨어진 결과. 구단끼리의 딜은 한국 시간 새벽 3시경 이루어졌지만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는 가넷이 고민하면서 승인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데드라인인 한국 시간 새벽 5시를 얼마 안 남긴 4시 30분 경 트레이드 거부권을 풀면서 딜이 이루어졌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2라운드 픽이라도 안 낀 시점의 1:1 트레이드는 네츠 윈이라고 봐도 무방하지만 태디어스 영의 경우 팀의 영건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내년 플레이어 옵션 행사가 확실했던 반면에, 영건들에게 절실했던 락커룸/보컬 리더이자 만기계약자, 팀 레전드인 케빈 가넷이 오게 되어 미네소타 팬들은 그딴 거 없고 축제 상태.



케빈 가넷 환영시 현장 직촬. 공홈에서도 볼 수 있다.

트레이드 이후 복귀시즌에도 부상을 입고 시즌을 종료했고, 다음해인 15-16시즌에도 시즌의 절반도 소화하지 못한채 아웃되었다.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해주고 있지만 쌓인 마일리지 탓인지 제대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있다. 과거 철인이라 불리던 시절을 생각한다면 시간이 야속할뿐... 그래도 출전한 시간만큼은 수비에서 제 몫을 해주었다. 계약 마지막 해인 16-17시즌이 마지막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복귀를 장담할 수 없다고한다. 어린 선수들을 이끌고 플레이오프에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자신의 몸상태 탓에 그럴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현지 시간 2016년 9월 23일, 이미 계약이 되어있던 16-17 시즌에 대한 바이아웃 협상을 마치고 계약을 종료시키더니 결국 은퇴를 선언하였다. 코비 브라이언트, 팀 던컨에 이은 명예의 전당급 선수의 은퇴에 많은 농구계 인사들이 감사와 존경,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26] 특히 15-16, 루키시즌을 함께 뛰면서 가넷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 칼 앤서니 타운스 선수는 선배의 커리어에 대한 찬사와 함께 선배의 의지를 이어가겠다는 모습을 보여주어 많은 농구팬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5 플레이스타일

앨런 아이버슨이 동네농구선수들의 로망이라면, 케빈 가넷은 게임에서나 볼수 있는 캐릭터가 툭 튀어나왔다고 할 수 있다. 축복받은 신체조건과 사기적인 윙스팬, 무시무시한 운동능력과 개인기술, BQ등을 갖춘 다재다능한 선수.

공수를 겸비한 토탈 패키지 스타일이라 6시즌 연속으로 평균 20득점 이상 10리바운드 이상 5어시스트 이상을 하는 굇수같은 플레이를 펼쳤다. 물론 잘할때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지만 못할때는 스탯찌질이라는 악명도 같이 받는 타입.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실제로는 스크린, 전방위 수비 능력이 더 눈에띄는 선수고 너무 이타적이어서 문제인 선수다. 게다가 스탯 찌질이가 거의 만장일치로 MVP를 탈 정도로 NBA가 만만한 리그는 아니다. 이 때문에 팬들은 그에게 마침 생김새도 비슷한 외계인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 외 미국에서 불리는 별명으로는 Big Ticket, KG등이 있다

공격에서는 다양한 옵션이 있지만 스피드를 앞세운 페이스업 돌파가 1대1 공격의 주를 이루고 주 무기가 롱 2 점퍼이니만큼 슈팅 레인지도 넓은 편이다.[27] 단지 림어택을 많이 시도하진 않으며 포스트업 이후에도 점프슛으로 처리한다. 올라운드형 파워포워드인 만큼 코트 전체를 활용할 줄도 알고 시야가 넓어 패싱 센스도 뛰어나다. 2004년 플레이오프 2라운드 새크라멘토 킹스와의 시리즈 7차전은 가넷의 다재다능함을 극한까지 보여주는 경기로 손꼽히는데, 가넷은 이 경기에서 30-20을 넘기는 스탯은 물론이고 경기 막판에는 직접 포인트가드(!) 역할까지 하며 공격을 이끌었다. [28] 미네소타는 월리 저비악-프레드 호이버그-라트렐 스프리웰-가넷-어빙 존슨이라는 오프 더 볼 득점원 세명, 수비형 센터 한명, 가넷이라는 희한한 라인업을 돌렸는데, 여기서 오는 PG의 부재를 가넷이 주득점원과 PG역할을 동시에 하면서 메꿨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다재다능한 농구선수의 표본. 오프 더 볼에서도 높은 BQ와 성실성으로 활약하는데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스크리너중 1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의 최대 강점이자 안티들도 절대 건드리지않는 상징은 바로 디펜스다. 긴팔과 빠른 풋워크에서 나오는 가로수비와 점프력, 긴팔을 사용한 세로수비에 모두 뛰어났고 BQ가 뛰어나 수비전술 이해도도 좋았기에 지역수비가 부활하고 듀얼가드들이 득세하면서 리그가 픽앤롤 중심의 농구로 전환하자 이에 대항하는 강력한 전진 압박수비뒤 복귀[29]로 스크린을 믿고 돌파해온 상대의 가드들을 2선에서 압살하는 수비로 현대 NBA 농구의 큰 흐름을 이끌었다.[30] 넓은 수비범위 못지 않게 단단한 하체힘을 이용해 상대 포스트업도 적극적으로 잘 막는 타입이었고 3번,4번,5번을 동시에 수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거점수비도 뛰어났다. 이러한 이유로 상대가 스몰라인업을 돌릴 경우에 그것에 가장 잘 대처하는 빅맨으로 라이벌 팀 던컨과 함께 스몰라인업의 악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뛰어난 bq를 잘 보여준다. 거기에 4년 연속 리바운드왕을 거머쥘 수 있게 해 주었던 무기인 수비리비운드 또한 역대급 선수이다. 어쩌면 공격보다도 더욱 올라운더로써 돋보인 것이 바로 수비. 또한 팀 디펜스이상으로 맨투맨 디펜스역시 동시대 파워포워드에서는 군계일학으로 엄청난 활약을했다. 가넷과 동시대의 공격력이 뛰어난 4번으로는 팀 던컨, 덕 노비츠키, 크리스 웨버, 엘튼 브랜드, 파우 가솔, 크리스 보쉬, 샤리프 압둘라힘, 라시드 월러스, 알 제퍼슨등이 있는데 가넷은 이들을 상대로 뚜렷한 상성이 없이 전부 맨투맨적으로 잘 수비해냈으며 특별히, 팀 던컨과는 정규시즌및 플레이오프에서도 라이벌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수비수치로도 던컨과의 비교가 많은데 객관적인 수치로 본다면 팀 던컨은 디펜시브팀에 15번(퍼스트8번) 선정되었고 가넷은 디펜시브팀에 12번(퍼스트9번) 선정되었으며 던컨에게는 없는 수비왕경력이 1회있다. 디펜시브팀 선정으로는 던컨이 앞서기에 던컨은 커리어내내 꾸준한 수비를 보여주었다고 할수있고, 반면 가넷은 수비왕등 임팩트있는 디펜스는 가넷이 다소 앞섰다고 드러난 객관적인 수치상으로는 설명 할 수있겠다.

실제 게임스타일은 nba와 관련된 국내외 커뮤니티와 미국의 ESPN, 훕스사이트등 전문가들이 기고하는 칼럼을 종합해서 볼때, 가넷은 맨투맨 디펜스에 중점을 두면서도 팀 디펜스로서의 수비범위가 넓은, 4쿼터 마지막까지 열정적으로 수비하고 체력을 바탕으로 뛰어다닌다면, 던컨은 맨투맨 디펜스보다 팀디펜스에 비중을 두면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팀 사정상, 가넷과는 다르게 팀원들을 활용해서 수비하는등 전반적으로 체력을 비축하며 영리한 디펜스를 한다고 할수있다. 페인트존에서의 인사이드 수비는 둘다 매우 우수하며 굳이 우열을 가린다면 맨투맨 디펜스는 가넷이 던컨보다 살짝 앞서는것으로 볼 수도있다. 실제 미국의 전문가등의 칼럼에서도 수비는 가넷이 근소하게 우세하다는 평론이 많기때문이다.

공격에선 적극적으로 골밑을 선호하지 않아 오펜스 리바운드가 약하다는 인식이 있긴 하지만 이런 편견과는 정반대로 전성기 시절 2개 후반대에서 3개 정도의 오펜스 리바운드를 기록했고 가장 높은 오펜스 리바운드를 기록했던 99시즌에는 경기당 3.5개를 기록했는데, 라이벌이었던 팀 던컨이 기록한 가장 높은 시즌평균 오펜스 리바운드가 3.5개로 같다는 걸 감안해보면 가넷의 오펜스 리바운드 참여도가 낮은 건 아니란 걸 알수 있다. [31] 물론 두 선수를 비교하면 던컨의 오펜스 리바운드가 확실히 낫다. 오펜스 리바운드 3개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던컨 9시즌, 가넷 5시즌일 정도로 꾸준히 잡아줬기 때문.

최대 약점은 어정쩡한 마인드에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32] 농구, 특히 48분이나 되는 NBA의 농구에서는 매경기마다 코트위의 5명이 80~100번 정도는 공격을 하고 공격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공격에 있어서 팀내 1인자는 팀이 중요한 순간에 처했을때 1인자가 공격으로써 해결해줘야한다. 1인자에게는 마이클 조던,코비 브라이언트처럼 자신감을 넘어 이기적으로 보일 정도로 슛을 던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가넷은 자신의 올라운드 플레이 능력을 더 선호한 나머지 1인자다운 슈팅욕심을 내지 않았다.[33]

에이스가 클러치 순간에 슛을 던지는 깡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넷의 경우, 클러치 순간에 다른 강심장의 선수들에 비해 약하기는 했어도 슛을 안 하고 억지로 패스를 돌린 적은 없다. 사실 폭탄돌리기유명한 사람은 따로있다.

다만 가넷의 경우 MVP 출신 파워포워드 중에서는 가장 득점력이 낮았으며, 플레이오프에서의 공격효율도 상대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새가슴설에 휩싸였던이 있으며 아직도 그 논란은 계속되고있다. 그런데 사실 새가슴 논란이 일었던 다른 선수들은 정규시즌에 비해 플레이오프에서 기록이 크게 하락하거나 제몫을 못하는 성향이 있는데, 가넷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네소타 시절 유일하게 우승후보급이었던 04시즌, 실제로 2인자로서 우승했던 보스턴Big3시절의 08시즌, 그리고 동부4번시드에 불과했으나 결승까지 올라갔던 10시즌엔 망가져가는 몸상태에도 불과하고 기대이상의 성적으로 팀을 결승까지 가는데 엄청난 도움을주었다.[34] 최근 몇시즌에는 플레이오프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그가 무릎을 포함해 몸 여러군데가 망가진 리그19년차 선수인 탓이 크다. 근데 멀쩡하진 못해도 보다 더 잘뛰고있는 올타임 No.1 포워드우승 이후 가넷과 순위논쟁에서 피튀기는 경쟁중인 강심장의 독일용병은 잘만 뛰고있다.[35][36] 적어도 멀쩡히 뛰던 시절에는 큰 무대에서 그닥 못한 적은 없다. 그의 팀이 약체인적도 더러있어 1라운드에서 여러번 탈락해 이런 오해가 있지만, 이때 가넷의 활약상은 결코 정규시즌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가 시야와 패싱등 전방위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를 활용을 잘했지만, 에이스로써 가장 필요한 것은 중요한 순간 슛을 성공시키는 에이스기질인데 그는 그런점에서 1인자타입은 아니었다. 미네소타때는 그가 정말 1인자여서 이것까지 모두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됐었지만 보스턴 셀틱스로 이적한 이후에는 그의 공격의존을 확 줄이고 수비 타워 역할에만 전념하는 2인자 역할에 전념하면서 커리어 연장과 함께 그가 평생 원하던 우승반지도 손에 넣고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대가로 플레이스타일이 바뀌고 출전시간도 줄면서 득점 수치가 급격히 떨어져 팀 던컨보다 20-10이 더 빨리 깨졌다. 팀 던컨은 13-14 시즌 후에야 19.9득점 - 11리바운드로 20-10이 깨졌는데 가넷의 13-14시즌 후 통산 기록은 18.6득점 10.3리바운드.

네이버의 인터넷 라디오 방송 '파울아웃'에 종종 나오는 이승기 기자는 이런 가넷의 스타일과 행보를 두고 농담으로 롤플레이어라고 말하기도했다.(...) 후에 꽤 후폭풍이 있었지만 조던보다는 피펜에 더 가까운 유형의 선수라고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으며 보스턴 Big3 시절을 다시 운운하며 우승에 일조할순 있어도 주도하지는 못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했다.

다만 이말은 좀 어폐가 있는것이 우승시즌만 놓고 보더라도 퍼스트팀에 오르고 표차이는 코비 브라이언트 82표, 크리스 폴, 28표 케빈 가넷 15표 르브론 제임스 1표로 제법 나는편이지만 MVP 후보3위에오른 가넷이었다. MVP투표가 1위한 선수에게 몰리는 성향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때 가넷은 나름대로 선전한편. 예를 들어 07시즌의 MVP3위였던 코비는 단 두표를 얻었고 09시즌엔 2위 코비, 3위 웨이드를 합해서 9표 얻었다. 또한 또한 MVP점수 자체도 (1,2,3위표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점수를 합산한 것) 코비 1105점, 폴 889점, 가넷 670점으로 가넷은 상당히 많이 점수를 얻은 편이다. 대량득점보다는 팀플레이로 공헌하는 선수'라는 점 때문에 가넷이 롤플레이어라고 까내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60년대 보스턴 셀틱스 왕조를 이끌었던 빌 러셀도 롤플레이어다.[37] 참고로 이승기기자는 가넷을 제2의 빌러셀이라고 말한적도있다...

파이널 MVP는 피어스가 가져갔지만 파이널 기록만 봐도 가넷은 18.2점 13리바운드 3어시스트[38] 야투 42.9% 자유투 76%로 21.8점 6.3리바 4.5 어시 야투 43.2% 3점 39.3% 자유투 83%를 기록한 피어스에 크게 뒤지지 않으며 오히려 팀에 얼마만큼의 승을 공헌했는지 윈셰어에서는 플레이오프에 출전한 모든 선수를 통틀어 4.1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파이널에서의 윈셰어와 per은 각각 1.16, 19.8등으로 전부 20.3점 5.0리바 2.5어시 1.3스틸 야투 50.7% 3점 52.4% 자유투 86.7%의 레이 알렌이 1위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파이널mvp는 플레이오프 전체가 아닌 파이널에서 제일 잘한 사람 즉 한시즌 최고의 큰경기,큰시리즈에서 가장 MVP의 자격이 있는 자의 손에 들어가는것이다.
가넷의 플레이오프 윈셰어가 같은 팀의 파이널 평균득점이 20점이었던 레이 알렌(3.1)이나 폴 피어스 (3.0)보다 제법 차이가 난다는 것은 당시 가넷이 어디까지나 플레이오프 1라운드부터 보자면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도 볼수있다는 뜻이지만 그렇다고 폴 피어스가 마냥 보스턴 셀틱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여서 파이널MVP를 꽁으로 먹었냐면 그건 절대 아니다. 사실 가넷의 입장에선 아쉬워도 별수없을 만큼 괜찮은 활약과 기록을 남겼지만 기록도 그렇고 경기를 실제로 본사람들은 폴 피어스가 받아 마땅했다는 의견이 많다. 항목을 참고해보면 아는 사실인데 피어스도 그저그런 선수가 절대 아니었고 명실공히 보스턴의 주득점원이자 상징 그 자체였던 선수다. 파이널 당시 팀내 에이스로서의 활약이 걸출했던것은 당연.[39]
스탯 찌질이가 거의 만장일치로 시즌mvp를 탈 정도로 nba는 만만한 리그가 아니듯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이유때문에 파이널 mvp를 탈 정도로 nba는 만만한 리그가 아니다. 프랜차이즈 스타가 아니어도 자신의 실력으로 당당하게 파이널MVP를 받은 선수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더불어 가넷의 가장 큰 장점은 기록에 드러나지 않는 수비라는 걸 감안하면 스탯과는 별개로 팀의 큰 공헌을 했다고 볼수 있다. 실제로 아래에 언급된 대로 다른 빅2가 부진하자 혼자 공격을 이끌기도 했고, 04년도 당시엔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전력이었는데 이때 가넷은 플레이오프 당시 에이스로서 맹활약했다. 결과적으로 중도에 떨어지긴 했지만... 특히 새크라멘토와의 벼랑끝 7차전에서는 인생경기를 펼쳤으며, 저비악, 카셀 등이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레이커스와의 컨퍼런스 결승에서는 레이커스의 그 괴물들 샤킬오닐, 칼 말론, 코비 브라이언트, 게리 페이튼을 상대로 상당히 분전했었다. 가넷이 우승을 이끌지 못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결과론적인 이야기. 커리어동안 한팀의 더 맨으로서 우승을 이끌지 못했던것은 팩트지만...

물론 에이스 기질이 부족하다는 것은 비슷한 역대급 선수인 강심장 중 강심장, 더크 노비츠키, 팀 던컨, 코비 브라이언트같은 선수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고 가넷의 클러치 능력은 오히려 좋은 편이다. 07-08 시즌, 팀의 에이스인 폴 피어스레이 알렌이 동반 침묵하자 1라운드, 2라운드 초반 공격을 이끌었는데 피어스가 4점, 앨런이 무득점에 그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의 2라운드 1차전에서 침묵한 동료들을 대신해 28점을 넣으며 르브론과 맞짱을 뜨다가 마지막엔 조 스미스를 제치고 승부를 결정짓는 레이업까지 성공시켰다. 최전성기이자 MVP를 수상한 04시즌, 새크라멘토와의 정규시즌 경기에서 팀이 6점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삼점슛 두방을 연속으로 성공시켜 결국 연장승부 끝에 팀을 승리로 이끈 적도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SEz5u-_KPg
http://www.youtube.com/watch?v=W4hn5Kz317c
http://www.youtube.com/watch?v=oVmhn6LLzHw

또한 위에 적힌 사례를 제외하고 보스턴 시절에만 가넷이 터뜨린 위닝샷의 일부만 모아봐도 제법 된다. 같은 팀에 레이 알렌, 피어스가 있는데도 파워포워드가 위닝샷을 쏠 일이 많이는 없지만 그런데도 가넷은 종종 마지막 슛을 쏘는 경우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클러치 능력이 없다면 지장으로 유명한 닥 리버스가 알렌, 피어스를 놔두고 가넷에게 시키진 않았을것. [40] 원맨팀 시절인 울브스 시절엔 당연히 훨씬 많았다 비단 위닝샷 뿐만 아니라 전공분야인 수비력으로 클러치 스틸을 만든적도 더러 있었고. [41]

6 더티플레이

원래 현역시절부터 NBA에서 가장 악명높은 트래쉬 토커중 1명이었지만 셀틱스 이적 이후부터 지나친 트래쉬 토킹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찰리 빌라누에바의 트위터에 의하면 "암환자같이 생겼다"라고 떠든적이있는데 가넷측에서는 "넌 리그의 암적인 존재야!"라는 뜻으로 얘기 했다고 항변했다, 찰리 빌라누에바는 어렸을적에 병을 앓아서 몸에 털이 없는데, 이런 증상은 항암치료를 받는 암환자에게 보여지는 것이다. 물론 가넷은 그런 뜻이 아니었으며 빌라누에바의 병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단지 코트 안에서 일어나는 심리전이라고 해명했지만, 정도가 지나친 트래쉬 토크라는 비난은 피할 수 없었다.

토론토전에서는 토론토의 포인트가드 호세 칼데론을 자기가 수비할선수가 아닌데도 계속 수비하면서 "넌 아무것도 못하는 애송이야!" 라며 계속 도발했다. 잠깐 그런것도 아니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짜증나게 했던지 칼데론도 말싸움을 벌였다. 이 행동때문에 팬들마저도 가넷을 이해할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인디애나와 경기에서 핸스브로의 얼굴을 가격하고 프래그런트 파울2를 받고 퇴장을 당했다. 가넷 본인은 고의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방향을 향해서 가격을 했고, 경기도중에 과격한 행동이 종종 나온적이 많기에 크게 사람들이 믿지는 않는 상황이다.

점프슛 도중이었던 채닝 프라이선수의 낭심을 가격한적이 있었다.(...) 에라이 인간아

2013년에는 뉴욕 닉스와의 경기에서 카멜로 앤써니와 신경전을 벌였는데, 경기 내내 몹시 분노해 야투율 6-26을 찍은 카멜로가 경기 후 셀틱스 라커룸에서 소리를 치고 셀틱스 버스 앞에서 가넷을 기다리기도 했다. 비공식적인 정보에 의하면 가넷이 앤써니의 아내가 Honey Nut Cheerios (미국의 시리얼) 같은 맛이라고 말했다고 멜로의 아내가 Honey Nut Cheerios 맛이 난다고 하는 것은 당시 그 경기장에서 관람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트위터에서 나온 이야기이고, 나오자마자 없어진 트윗글. 후에 멜로의 부인인 La La도 자서전에서 '절대 그런적이 없다.'라고 해명해두었다.

미네소타 시절 섬머리그 연습도중에 자신을 상대로 선전한 2라운드 출신 루키 릭 릭커트에게 주먹을 날려 이빨이 나가고 일곱바늘을 꿰메게 만든 사건도 있다. 당시 릭커트가 가넷을 상대로 연속해서 득점을 올리고 인유어페이스 덩크마저 성공시키자 가넷이 어떤 경고도 없이 갑자기 얼굴을 가격했다고 한다. 일부 가넷 팬들은 릭커트가 가넷에게 건방지게 굴었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옹호하지만 어떤 기사에도 릭커트가 가넷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언급은 없으며, 단지 연습을 구경하던 팀 동료들이 가넷을 약올렸다는 얘기만 있을 뿐이다. 즉 가넷은 그저 자신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국내의 케빈 가넷팬들중 극소수는 아닌 몇몇이 이러한 행동과 언사들을 두고 승부욕에있어 과도한 열정때문이라는 망언을 일삼을때가 있다.(...) 더티플레이 부문 열정왕 브루스 보웬, 트래쉬토크 부문 열정왕 게리 페이튼

위에 서술된 트래쉬 토크와 더티플레이에 의해 케빈가넷에게 질린 선수들이 좀 있는편인데 대표적으로 조아킴 노아드와이트 하워드다.
노아는 함께 뛰면서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집에있던 가넷의 브로마이드를 찢어버렸고(...) 근데 노아도 가넷만큼은 아니지만 가끔 이상할때가 좀 있긴한데... 하워드의 경우엔 가넷의 등번호였던 21번을 거꾸로 달정도로 가넷을 존경했지만 시간이 좀 지난 이후 인터뷰에서 인간적으로 존경할만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했었다. 너는 코트 안팎으로 문제잖아

2014년 12월 28일 인디애나와의 경기에서 데이비드 웨스트의 귀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 랜스 스티븐슨? nba팬들의 도마위에 올랐다.[42] 가넷의 팬들까지 은퇴할때도 다 된 선수가 왜 아직도 그러는지 이해못하겠다는 반응.

함께 한솥밥을 먹고지낸 레이알렌의 얘기론 입에서 Fxxx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고.(...)[43]

2015년 1월 13일, 휴스턴 로켓츠와의 경기에서 드와이트 하워드와 싸움이 날뻔했다.그리고 지단 클럽에 가입했다 정확한 정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영상으로 봤을때 먼저 불을 지핀건 가넷으로 보인다.[44] 그러나 자세히 보면 허리 민것으로 싸움이 시작된게 아니고 그 이전부터 두 빅맨이 격렬히 몸싸움을 하다가 다툼으로 번진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가넷은 한 경기 출장정지, 하워드는 1만5천달러 벌금을 물었다. 농구커뮤니티 NBA 매니아에선 이사건과 관련된 게시글이올라오자댓글수가 폭발하는중.

다만 위에 언급된 조아킴 노아는 베테랑이 된 이후 오히려 가넷을 존중(respect)한다고 한 적이 있다. [45] 이 인터뷰에서 노아는 가넷이 오직 승리를 위해서 자신을 불태우는 방식에 대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었다면서, "자신의 팀동료가 아닌 선수들과 친구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걸 참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올스타 주간에 둘이 앉아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오해를 풀었다고. 참고로 노아또한 인성면에서 좋은소리만 나오는 선수가 아닌만큼 가려서 판단하자

분명 더티 플레이는 문제지만 가넷이 악의적으로 상대방에게 낭심은 가격했어도 부상을 입히거나 한 적은 없다는 점, 또한 위에 언급된 패륜적인 트래쉬토킹의 경우 어디까지나 확인안된 루머라는 점을 생각하자. 또한 가넷은 코트 안에서 사고를 친 적은 있지만 코트 밖에서 상대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하거나 한 적은 없다. 가넷이 더티플레이어며 종종 도를 넘는 트래쉬토커라는 명확한 사실을 무시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라, 더티 플레이어인 가넷을 비판하되 함부로 인간쓰레기라고 단정짓는 것은 자제하자.
요약하자면 인간쓰레기는 아니지만 결국 욕쟁이 더티플레이어란거다.

2016년 뉴올리언스와의 경기에서 라이언앤더슨의 얼굴을 팔안쪽으로 쳤다(...)

7 이것저것

스펜서 헤이우드라는 흑역사 이후, NBA에서 고졸 선수들의 프로직행 신호탄을 쏜 선수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하면, 바로 NCAA의 존재감 때문이다. NBA보다 시청률 잘 나올 정도로 큰 리그의 경험을 통해 검증을 받고[46] NBA 드래프트를 받는 것이 당연한것이었는데 그것을 깨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 코비 브라이언트의 성공을 통해 NBA에서 가능성 있는 고졸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NBA문을 두드렸고, 2003년 드래프트에서는 NBA최고의 스타 르브론 제임스가 전체 1번 지명을 받아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다.[47] 가넷이 아니었어도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NCAA도 거치지 않은 고졸 선수가 NBA의 문을 두드려서 환영받게 된 전초를 제공한 그 자리에 바로 케빈 가넷이 있었던 것이다.

고졸선수로 데뷔한 리그 4년차의 케빈가넷은 미네소타와 재계약을 하면서 연평균 2000만 달러, 6년 1억 2600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는데 이것때문에 NBA가 발칵 뒤집힌적이 있었다. 연봉이라는 것은 오르기는 쉽지만 내려가기는 쉽지 않은데 겨우 22살 짜리선수가 2000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으니... 선수 연봉인플레를 염려한 NBA측은 선수노조에게 몇가지 보완책으로 연차별 맥시멈 제도를 제시했고 선수협은 거부. 이에 협상이 이어졌지만 결국 결렬되고 말아 NBA측이 직장폐쇄를 단행해 버린적이있었다[48]
케빈 가넷이 미네소타 커리어 거의 전체에서 보여준 하드캐리는 절대 폄하할수없는 것이지만 그가 팀내에서 엄청난 액수를 받아왔기에 팀의 성장은 지체되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케빈 맥헤일이 미네소타에서 일했을 당시 선수보강에 애를 먹었던것은 사실이기 때문.

재밌는 버릇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경기 중 파울이나 작전타임, 레프리타임 등으로 인해 휘슬이 울리고 상대 선수가 그냥 연습처럼 던지는 공이 골대로 향하는 꼬락서니를 절대 두고보지 않는다는 것. 골대 아래에서 훌쩍 뛰어서 공을 잡아내거나 옆에 있으면 블로킹을 해버린다(...) 이에 대해서 가넷은 농구의 슛 또한 그날그날 감에 의해 좌우되는데, 이러한 '감'을 찾기위한 상대팀의 경기 중 연습 슈팅을 굳이 내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농구장 외에는 얌전한듯하다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될때 보스턴에서 뛴적이 있던 천시 빌럽스에게 '여기 놀때 어딨음 ㅡㅡ??'물어보자 '너 어차피 집에서 안 나갈꺼잖아'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히키코모리??
라고 가넷은 사생활이 문제가 없는것처럼 국내에 알려져 있으나, 팀버울브스 치어리더 출신 krissy와의 수년째 염문설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의심되는 사진은 구글이미지로도 찾아 볼수있다.

파일:9LdGlu3.jpg 동그라미 안에 있는 사진속의 인물이 가넷과 크리시. 바깥에 있는사람들이 케빈가넷과 그의 부인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않은 루머에 불과하니 사실인양 퍼뜨리는 것은 자제하자. 또한 위의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나오는 사진은 크리시와 찍은 사진도 두 장 있지만 나머지는 가넷의 실제아내 브랜디 가넷의 사진도 포함되어있다. [49]

참고로 NBA선수치고 이런저런 루머에 시달리지 않은 선수는 없다. 대표적으로 모범적인 사생활로 유명한 팀 던컨 역시 최근에 이혼하면서 그가 양성애자이며, 결혼생활도중에 남자와 바람을 폈다는 루머가 돈 바 있다. [50] 떠도는 염문설이 전부 진실이라면 NBA에서 막장이 아닌 사람이 거의 없다. 사실 가넷은 사생활이 드러나는 걸 줄곧 매우 꺼려왔는데 2004년에 브랜디와 비공식 결혼을 한 이후 사생활을 거의 공개 안하고 있다. 가넷 부부와 딸 Capri이 공식석상에서 찍힌 사진 정도 뿐이며 가족에 대한 언급을 인터뷰에서 자주 하지도 않는다.

농구잡지인 베켓에서 사인이 불성실한 선수로 꼽혔었다. 사인도 아주 가끔해주는데, 검색해보면 매번 싸인의 모양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인에 대한 그의 평은 '그의 손은 은행에서 돈을 입금하고 출금할때만 쓰는 모양이다.' 라고 적혔다.(...) 사인하기 매우 싫어한다고 알려져 있고, 최근 유명 카드 제작사와의 사인카드 발행계약도 연장하지 않았다.

한때 미네소타에서 같이 뛰었던 말릭 실리라는 선수를 존경[51] 해서 그가 대학시절 달던 21번을 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릭 실리는 케빈 가넷의 생일파티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음주운전을 하는 차량과 충돌해 현장에서 사망했다. 당시 가넷은 너무나도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도 자기 생일파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랬으니 오죽했으랴...

미국의 가수 겸 코미디언 그룹인 The Lonely Island의 노래 'I'm on a boat'의 가사에 그의 이름이 잠시 언급된다. 육지 좆까 노래에서 앤디가 케빈의 셀틱스 시절 우승후 눈물을 흘리며 외쳤던 우승소감인 "ANYTHING IS POSSIBLE!!(무엇이든 가능하다)"라고 외친다. 유튜브 영상

2016년 espn에서 선정한 역대 파워포워드 랭킹에서 5위에 랭크되었다.[52]

리복을 제외한 웬만한 농구화메이커를 섭렵한 선수다. 나이키[53], AND1, 아디다스까지. 지금은 중국메이커인 ANTA와 계약되어있다.

상대 팀에게는 독사같은 존재지만, 자기 팀은 끔찍히 아끼는 것으로 유명하다. 빌 시몬스가 운영하는 Grantland란 팟캐스트 서비스에서 예전 동료 브라이언 스칼리비리니가 출연해 가넷이 팀동료로서 "정말 최고(the best)"라고 증언하면서 "모든 NBA팬들은 가넷 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두 사람은 동료가 아니었다) 또한 닥 리버스가 밝힌 바에 따르면, 매년 들어오는 신인 선수들도 잘 챙겨준다고 한다. 리버스의 증언에 따르면, 가넷은 매년 이들을 데리고 나가 "프로라면 제대로 입고 다녀야지"하면서 재단사를 불러 고급양복을 두벌씩 맞춰줬다고 한다. 사실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하는 신인 중에는 드래프트되어 들어온 선수들 외에 자유계약으로 들어온 선수, 단기계약으로 들어온 선수들은 정규시즌 로스터에 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즉, 다시 볼일이 없을 가능성이 높은 선수들도 여럿 있는데 이들까지 전부 챙겨준 것. 그럼 팀동료이자 신인인 릭커트는 왜 팼나...

앞서 서술한 내용을 보자면 알겠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극과극으로 갈리는 선수이다. 그렇다고 선수의 기량이나 기록이 훼손될것은 아니며 커리어 전반에 걸친 수상과 남긴 누적만은 두말할것없이 역대급의 업적. 가끔 빠가 까를 만드는것인지 까가 빠를 만드는것인지 헷갈릴정도로 안티와 열성팬들에 의해 평가가 과도하게 격하되고 또 미화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전부 다 떠나서 생각해본다면 전설의 반열에 들어가는것은 당연하게 생각되는 선수.[54]
그러니 부디 어느 한쪽의 의견을 편파적으로보고 한쪽의 의견을 맹신할것도없이 자신이 생각하기 나름으로 각자 잘 판단하길 바란다. 무의미한 키배를 멀리합시다...

위에 나와있는대로 선수시절에 엄청난 연봉을 받고 광고계약으로도 높은 수익을 올린지라 재산이 수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데 [55] 이를 이용해 은퇴 후 미네소타 팀버울브즈를 인수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NBA는 선수가 팀 지분을 소유하는 걸 금지한다) 물론 아무리 알부자인 가넷이라도 조던처럼 막대한 재산을 보유하진 못하니 [56] 단독으로 팀의 대주주가 되진 못하고, 팀버울브즈의 사장이자 팀 지분을 약간 소유하고 있는 플립 손더스와 함께 투자 그룹을 만들어 인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다만 현재 구단주인 글렌 테일러가 팀을 팔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현재로선 말 그대로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테일러는 NBA구단주 중에서도 상당히 부유한 편인데 현재 재산이 22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이 얘기가 나왔던 때는 가넷이 아직 울브스로 복귀하기 전이니 그가 미네소타에 대해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손더스는 "전혀 놀랍지 않아요. 그(가넷)가 미네소타 그 자체니까요"라고 반응한 바 있다. 또한 손더스는 가넷에 대해 프런트 오피스로서는 상당히 유능하겠지만, 그의 치열한 성격 때문에 감독직에는 맞지 않을 것이라고 봤는데, 이런 평가는 마이클 조던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그가 미네소타로 돌아온날 기자가 혹시 감독이나 코칭을 할 의향있냐고 하니까 "Hell Naw"로 대답했다. 자기 와이프나 딸이 잘 이야기를 하면 다른것들은 해주긴 해주는데 감독이나 코칭을 죽어도 절대안할꺼라고.... 이렇게 그의 코치 전향 가능성은 아예 없는걸로 못을 박아버렸다.

http://www.twincities.com/sports/ci_26938203/kevin-garnett-says-he-would-like-buy-timberwolves
  1. 팬들이나 전문가들은 그가 이보다 더 자랐을 것이라 보는 이가 많다. 실제로 213cm나 216cm로 보는 사람도 꽤 되는듯 케빈 가넷도 농담으로 자신의 키를 6' 13"이라고 얘기한적이 있다. 근데 피트법은 11가 끝이므로 착화 신장 7' 1"(216cm)로 보는게 정설이다.
  2. 신인 때는 97.8kg(215lb), 전성기 때는 115kg(253lb), 그리고 지금은 살이 빠져서 현 체중으로 나왔다. 정확한 정보는 nba.com을 참조하시길.
  3. 파워 포워드로 대부분 뛰었고 센터는 팀 사정에 따라 가끔 뛰었다. 2005년에서 2007년에 팀이 안습의 절정을 달릴때는 센터로 많이 나왔다. 또한 나이가 들어 발이 느려진 이후로 센터로 나오는 비중이 점점 늘다가 미네소타로 오면서 다시 PF로 복귀했는데, 사실 현대 농구에서 센터/파워포워드는 구분이 애매해 큰 의미는 없다. 정확한 포지션 비중을 보려면 링크 에서 play-by-play 항목을 참고. 여담이지만 젊은 시절엔 워낙 높이가 좋고 점프력이 높아서 포지션에 상관없이 경기 시작할때 점프볼을 전담하곤 했다.(보통 점프볼은 센터가 한다)
  4. 이 등번호는 자신이 존경했고, 같이 뛰었던 말릭 실리가 미네소타에서 달았던 백넘버. 이 2번 백넘버는 미네소타 구단의 유일한 영구결번이다.
  5. 93드래프트 전체 1번 크리스 웨버, 95드래프트 전체 5번 케빈 가넷, 97 드래프트 전체 1번 팀 던컨, 98 드래프트 전체 9번 더크 노비츠키 순으로 데뷔했는데 크리스 웨버가 부상과 불운으로 롱런에 실패하면서 이외의 세선수가 실질적인 3대 PF로 2000년대를 풍미했다.
  6. 아득히라는 말은 전혀 과장이아닌게 이번 13/14시즌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우승으로 가넷에게 이제 던컨이란 넘사벽 수준.
  7. 다만 예전에는 실력 자체는 스타일이 달라서 그렇지 동급으로 평가받았다. 업적 자체는 넘사벽이지만. 그러나 몸이 완전히 망가진 말년에는 실력까지 크게 밀렸다.
  8. 1993년에 그는 고등학교 유망주들을 대상으로 한 나이키 농구 캠프에 참가하게 되는데, 여기는 미래의 NBA올스타인 앤트완 재미슨도 있었다. 당시 그를 담당한 지도자는 시카고의 패러깃 아카데미의 감독 윌리엄 "울프" 넬슨이었는데, 처음엔 너무나 비쩍 마른 가넷을 보고 "장난하냐?"고 했다고 한다. 빅맨을 담당하기로 했는데 조그만 녀석을 줬다고. 당시 가넷의 키는 208cm에 달했지만 몸무게는 90킬로그램을 조금 넘었다. 여기서 넬슨은 가넷이 덩크를 하자 "뭐하는거냐! 그건 기집애같은(sissy) 덩크"라면서 자신이 "짐승"이라는 걸 보여주라고 조언한다. 이때부터 가넷은 덩크를 한 뒤 고함을 지르고 가슴을 마구 두드리는 특유의 도발적인 스타일을 갖게 된다.
  9. 여기에 부가설명을 하자면 정확히는 패싸움이 아니고 백인 학생을 흑인학생들이 집단구타 (린치)한 것이다. 그런데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백인비중이 높은 데다 은연중에 흑인 차별이 남아있는 남부지방이었기 때문에 해당사건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가넷이 주변에 서 있다가 말려들기 싫어서 자리를 피했다고 증언했지만 경찰은 이미 유명인이었던 가넷을 희생양으로 삼아 체포해버린다. 그러나 죄질 자체도 약했고 (린치는 징역행감이지만 가넷은 방관한 것이라) 초범이라 청소년들을 위한 일종의 사회봉사 프로그램으로 가넷은 풀려나게 된다. 여담으로 덩치도 큰 가넷이 말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총기허가가 자유로운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폭력에 휘말리는 건 정말 위험하다. 법적으로 총기구매가 불가능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며(한국에서 미성년이 술이나 담배 못 산다고 해도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듯이) 총이 아니더라도 칼이나 다른 흉기를 휴대하는 학생들도 많다. 웬만큼 막장이 아니고서는 칼을 직접 사용하지 않는 대한민국과 다르게 미국에선 흉기사용 범죄가 상당히 흔하다. 미국 경찰들이 경고에 불응하면 바로 총을 뽑아들 정도로 강경한 데는 이유가 있다.
  10. 본 게임 이전에 열린 삼점슛 콘테스트에도 참가했다. (당시 기준)센터가! 비록 결승에서 9점에 그치지만 빅맨이 삼점슛 대회에 나선다는게...참고로 이 대회에선 가넷의 절친인 스테판 마베리, 빈스 카터, 폴 피어스, 샤립 압둘라힘 등 미래의 NBA 스타들이 즐비해서 초고교급 플레이를 펼치는데 워낙 유명한 대회라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가넷은 210언저리에 신장으로 가드처럼 뛰어다니는데 한번은 레이업을 하고, 상대팀이 반대쪽 코트까지 기습 롱패스를 하자 순식간에 반대쪽 코트까지 질주해 블럭을 시도하는 괴물같음 스피드와 점프력을 보여준다.
  11. 1976년 데릴 도킨스 이후 20년만에 탄생한 고졸 NBA선수였다. 재밌는 건 가넷은 원래 NBA로 직행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상술한대로 NBA는 20년 가까이 고졸선수를 뽑지 않았으며 절친인 마베리를 포함해 모든 동기들이 대학 진학하는 가운데 지명될지도 모르는데 혼자 NBA 드래프트를 신청하는 모험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가넷이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던 것. 학생 운동부들은 요구하는 SAT점수가 훨씬 낮지만 가넷은 이마저도 계속해서 점수가 안 나왔고(한국과 달리 미국은 SAT를 여러번 본다) 결국 드래프트를 신청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드래프트 당일 날에 그의 마지막 SAT 점수가 통보되었는데, 그가 통과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소식을 알려준 건 그의 은사인 울프 넬슨 감독이었는데, "아 인마 너 통과했어"란 소식을 듣고 벙쪘다고...
  12. 재미있는 점은,당시의 가넷은 전성기 때의 맥헤일과 체격이 거의 비슷했던 데다(지금은 트레이닝으로 근육과 몸을 불리며 더 좋아졌지만)플레이 스타일도 맥헤일과 많이 닮아 있었다는 것이다.이를 보고 자신이 선수시절 파워포워드를 볼 때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그리고 가넷은 맥헤일의 선수시절 영광의 팀이었던 보스턴 셀틱스에서 우승을 일궈냈다.맥헤일의 입장에선 매우 반갑고 기쁠듯.
  13. 가넷과 이때 같이 선정된 톰 구글리오타는 미네소타 역사상 최초의 올스타로 기록된다.
  14. 단축시즌이었다.
  15. 이 계약은 그 엄청난 금액으로 인해 바로 다음 시즌 CBA 협상결렬로 인한 직장폐쇄 (lockout)이놈이 바로 만악의 근원 엄청나게 복잡한 맥시멈 조항이 만들어진 것은 가넷의 크레이지 딜 때문이란 것이 거의 정설
  16. 밑도끝도 없이 가넷 때문이란 건 전혀 설명이 안되니(...) 부가 설명을 좀 더 하면, 원래 샐러리캡이란 것은 농구관련 수익 (basketball related income:BRI)의 일부로서 정해진다. 매년 선수협상은 이 BRI에서 샐캡이 차지하는 비중을 늘이냐, 줄리냐를 두고 구단주 측과 선수협회가 씨름하는 것. 그런데 90년대 초반에 NBA가 새로운 중계권 계약을 하고, 그 기간에 마이클 조던을 필두로 한 NBA의 황금기가 이어지면서 수익이 80년대와 비교도 안되게 늘어버린다. 80년대 후반 당시만 해도 거액 계약이던 조던, 스카티 피펜 등의 장기계약이 "노예계약"이 된 건 이 때문. 이에 샤킬 오닐, 알론조 모닝같은 스타들은 연간 천만불 이상의 장기계약을 뻥뻥 터뜨린다. 근데 문제는 이 분위기를 타 젊은 선수들이 거액의 계약을 요구하는 트렌드가 생겨난 것. 94년에 전체 1순위로 데뷔한 글렌 로빈슨은 신인 주제에 1억불 계약을 요구했고, 데뷔가 늦어질 뻔했다. (결국 그는 1억불까진 아니지만 10년 8천만불에 사인하고야 만다). 96시즌에 자유계약 선수로 풀린 워싱턴 불리츠 (현 위저즈)의 2년차 선수 주완 하워드는 무려 7년 1억 5백만불이라는, 오닐/모닝의 계약에 약간 모자라는 금액을 따내고야 만다. 이 와중에 하워드보다 더 큰 기대치를 받고 있고, 팀 사정이 더 절박했던 울브스의 가넷은 큰 금액을 부를 수 있게 된 것. (원래 한 선수가 계약하면 그 계약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다른 선수들에게 "기준"이 된다) 당시 가넷의 에이전트는 가넷을 휴가보내놓고 협상을 전담했는데, 이에 케빈 맥헤일은 친분이 있는 가넷에게 호소할 틈도 없이 에이전트와 치킨게임을 해야했다. 울브스 측은 하워드가 받은 것과 비슷한 1억달러를 제시했으나, 아쉬울게 없는 에이전트는 계속 튕겼고 결국 1억2천5백만이라는 전대미문의 금액까지 오른 것이다. 문제는 하워드의 계약이 가넷의 계약에 "기준"이 된 것처럼, 가넷의 계약 역시 또 하나의 "기준"이 되어 거대계약이 이어질 것이 뻔했다는 점이다. 당시만 해도 계약 상한액이 없었기 때문에 마이클 조던이 3천만달러라는, 샐러리캡 전체보다 큰 금액에 계약할 수 있었다. (물론 조던의 가치를 생각하면 과도한 금액은 아니며, 사실 조던은 커리어의 대부분을 실력보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뛰었다). 게다가 하워드와 가넷 이후 잠재력이 큰 어린 선수들이 "나도 저만큼 달라"고 할 건덕지가 생겨버린 것이다. 밑에 언급될 마베리라든지...이에 구단주 측은 연차별 맥시멈 계약 및 신인계약 액수에 상한을 두자고 주장했고, 선수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직장폐쇄(파업strike이 아니라 lockout이다)가 일어나고 만다. 결국 아무래도 을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선수 측에서 대부분 구단주의 입장을 수용하게 된다. 즉, 가넷의 계약 하나 때문에 직장폐쇄가 일어난게 아니라, 선수들의 연봉이 점점 뻥튀기되는 과정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위에 언급된 하워드는 이후 우주먹튀(...)가 되지만 그나마 가넷은 돈값을 해줬다.
  17. 참고로 연봉 규정은 문제가 있다고 바로 협상하는게 아니라 몇년에 한번씩 선수-구단주 측이 Collective Bargaining Agreement(CBA)에 합의하는 과정에서 수정이 된다. 가넷이 계약한 1997년 다음해에 CBA협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넷의 케이스가 자주 언급이 되는 것인데, 만약 몇년 후에 CBA 협상이 있었다면 위에 언급된 트렌드를 타고 또 다른 젊은 선수가 더 큰 규모의 계약건을 터뜨렸을 가능성도 있다. 가정에 불과하지만 빅마켓에 구단주 제리 버스가 돈 쓰는 걸 주저하지 않는 레이커스와 코비 브라이언트라든지, 또한 FA대란으로 알려졌던 2000년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그랜트 힐이라든지.
  18. 위의 가넷 계약 이후 그의 절친이자 팀동료인 스테판 마베리는 이에 자존심이 상해서 "1달러라도 모자란 금액엔 싸인 못한다(I won't sign for a dollar less)"라고 못박아버렸다. 사실 돈도 돈이지만 자기가 가넷보다 못할 게 없다고 믿은 마베리 입장에선 자존심 문제가 컸다. 결국 마베리는 뉴져지로 이적하고, 기대를 모았던 가넷-마베리 콤비는 허무하게 해체되고 만다.
  19. 이러한 계약은 단순히 미네소타의 뻘짓으로만 전해지고 있는데, 가넷의 에이전트가 상당히 크게 불렀으며 이 때문에 케빈 맥헤일과의 사이가 잠깐 소원해질뻔했다는 말이 있다. 여담으로 가넷은 2014년 기준 NBA 누적 연봉 역대 1위다.
  20. 그러나 이는 헛소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미국 흑인 사회 내부의 고질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먹여살릴 가족이란, 실제로 그의 가족뿐 아니라 그에게 빌붙은 일가친척 전부 그리고 어렸을때부터 그의 주변에 붙어있던 흑인 갱단들이다. 한마디로 패밀리. 빈곤한 미국의 흑인사회에서 NBA선수란 능력만 있으면 가장 손쉽게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에 이 흑인 갱단들은 일찌감치 농구에 재능이 있는 흑인 어린이에게 들러붙어 보호해주겠단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고, 진짜 NBA스타가 되면 더 뜯어낸다. 스프리웰 외에도 앨런 아이버슨,에디 커리등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흑인 스타들의 뒤에는 드러나있진 않지만 그들의 돈과 유명세를 이용해 이득을 뺏어가는 갱단들이 연계되어있다고 한다. 다만 당시 스프리의 실력을 생각하면 미네소타가 제시한 금액이 과다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네소타는 3년 2천7백만달러를 제시했는데 스프리가 당시 34세란 점과 이때 시세 (마누 지노빌리보다 계약기간은 짧았지만 평균 연봉은 약간 많았다)를 생각하면 이것도 후한 대우였다.
  21. 가넷의 리더쉽문제가 크게 대두되던 시기이다. 초기의 파트너였던 마버리는 가넷의 장기계약 때문에 미네에서 부담을 느끼고 트레이드를 해버렸고, 윌리 저비악과 가넷의 사이는 최악이었으며, 맥헤일의 가넷 감싸기가 과도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었다.
  22. 사실 가넷이 이적할 것이라는 것은 05-06시즌, 06-07시즌 내내 나오던 예상이었다. 매직 존슨의 경우 TV에서 대놓고, "넌 할만큼 했어. 케빈. 이제 떠날 때가 됐어"고 할 정도. 매직 존슨이 레이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프랜차이즈 스타가 갖는 의미를 잘 알고 있단 걸 생각하면 그만큼 울브스가 답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가넷은 07시즌 전까지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트래이드를 요구한 적이 없다. 그만큼 팀에 애정도 깊고 책임감 때문...그런데 3년동안 개고생하다가 드디어 포기하고 이적하려는데, 리그 꼴찌팀으로 보내려고 하니 빡돌지 않을수가 없다.
  23. 알 제퍼슨, 라이언 곰스, 세바스찬 텔페어, 제럴드 그린, 티오 레틀리프
  24. 후에 이걸 론리 아일랜드가 I'm On A Boat에 차용한다.. 육지 좆까! 레이커스 좆까! 가넷이 홍보하는 신발브랜드의 광고문구기도했다
  25. 해석: 르브론도 집에 갔다면 나도 갈 수 있다는 거 아님?
  26. 실제로 세 선수는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예정이다.
  27. 이는 후에 가넷이 터프하지 않았다는 일설이 나올때마다 가담되는 얘기. 찰스 바클리도 이런 말을했다.
  28. 이 경기를 찾아보면 가넷이 지쳐 숨을 몰아쉬면서도 4쿼터의 거의 모든 득점을 올리며 숨을 헉헉 쉬어대는 가넷의 모습을 볼수있다. 오오 가넷횽님 오오
  29. 이를 헷지 앤 리커버라고 하며 2대2 수비의 필수요소이다.
  30. 특히 그가 보스턴 셀틱스로 이적한 이후 동부 컨퍼런스 플레이오프의 가장 큰 라이벌리가 바로 르브론 제임스 vs 케빈 가넷이었다. 정확히는 보스턴 Big3 그 자체였지만...
  31. 4대센터중 하나인 패트릭 유잉이 기록한 가장 높은 시즌 평균 오펜스 리바운드가 3개인데 이걸 지적하는 전문가는 없다.
  32. 어디까지나 의견이다. 반대측의 의견이나 서로 나름 일리가 있으니 참고만하도록 하자.
  33. 그러나 코비와 조던 모두 감독한 필 잭슨은 자신의 "Eleven Rings: The Soul of Success."에서 "슛 컨디션이 안좋을때 코비는 슛감이 돌아올때까지 계속 슛을 던진다. 그러나 마이클은 팀이 승리할 수 있도록 수비나 패스, 스크린플레이 등에 신경을 쓴다"고 설명했다. http://articles.latimes.com/2013/may/16/sports/la-sp-phil-jackson-kobe-20130516 즉, 이런 식의 무리한 공격은 오히려 코비가 조던보다 못한 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이지 1인자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34. 물론 이 때 팀내 최고선수는 라존 론도였다
  35. 물론 저둘과는 각자 라이벌관계였기에 묶이는거지 상황은 좀 다르다. 하여간 그놈의 부상이 문제.
  36. 참고로 부상도 문제지만 가넷은 던컨보다 2년, 노비츠키보다 3년 먼저 데뷔해 누적경기수가 훨씬 많다. 물론 던컨이 플옵 경기를 많이 뛰긴 했지만, 그는 강팀소속이었던 덕분에 비교적 일찍인 20대 후반부터 출장경기/시간 관리를 받은반면 가넷은 원맨팀에 가까운 지라 죽어라 굴러야 했다. 대표적으로 04-05시즌 당시, 시즌중반부터 가넷의 무릎이 고장났는데 울부스가 플옵에 가느냐마느냐가 걸려있던지라 그는 끝내 수술을 받지 않고 전경기 출장을 강행했다 (정작 플옵진출은 실패...안습) 가넷은 전시즌에 평균 3개가 넘는 공격리바운드를 기록했으나 이때부터 거의 매시즌 공격리바운드 수치가 하락했으며, 고질적인 무릎 문제로 고생하기 시작했다. 그가 관리를 받기 시작한 건 보스턴 시절부터였는데, 이때는 이미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37. 여담이지만 러셀이 가장 아끼는 후배 선수가 팀플레이에 능하기로 유명한 가넷과 팀 던컨이라고한다. 가넷이 보스턴에 처음 왔을때 러셀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가 자네라고 항상 얘기했잖아. 이제야 맞는 색 유니폼을 입었구먼"이라고 한 적이 있다. 08년 셀틱스의 우승여정을 다룬 비디오에 나오는 장면.
  38. 기록을보면 대략 알수있지만 파이널에서의 가넷은 수비와 궂은일등에 전념하는 일종의 탱커역할을 맡았고 득점과 해결사노릇은 피어스가 맡았었다
  39. 1차전엔 무릎부상으로 잠시 나와있었으나 곧 다시 돌아와 투혼을 보이기까지했다.
  40. 하지만 전술상 얼마든지 가넷이 던질상황은 있을수있다. 가령 뻔한 미스매치라던지... 다만 위에서 보듯이, "그런 상황에만 어쩔수없이 던졌다"고 주장하기엔 너무 많다.
  41. 가장 유명한 장면이 2008년 시즌 당시 친정팀 팀버울브즈와 가진 홈경기에서 나온 클러치 스틸이었는데 이때 가넷보다 거의 30cm가 작은 재빠른 포인트 가드 세바스찬 텔페어가 마지막 순간에 공을 잡았는데 1대1로 붙은 가넷이 몸을 바싹 낮추더니 공을 뺏어버렸다. 여담이지만 가넷같이 큰 선수가 스위치 (순간적으로 마크하는 선수를 바꾸는 전략) 상황에 걸려 작은 포인트가드에게 외곽에서 붙으면 뚫리거나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야오밍이 루키시절 스테판 마베리와 1대1상황에서 엉덩방아를 찧는 굴욕을 당한 적이 있다) 가넷같은 경우 (전성기 기준) 굴욕은 커녕 스피드와 신장을 이용해 오히려 압박수비를 가한다. 이런 식으로 작은 선수 막는 능력은 벤 월러스도 있었으며 (가넷보다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던컨도 가넷보다는 떨어지지만 젊었을때 포인트가드를 잠깐씩 무리없이 막고는 했다.
  42. 참고로 그 경기에서 도발에 걸려든 웨스트는 가넷을 밀쳐내 테크니컬 파울을 받았다 안습.
  43. 이걸 사람이 숨을 내쉬는것에 비유했으니 보통 욕쟁이 레벨이 아닌듯하다...
  44. 언뜻 보면 하워드가 먼저 가슴팍을 친걸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가넷이 먼저 하워드의 허리를 밀었다.
  45. http://articles.chicagotribune.com/2013-02-17/sports/ct-spt-0218-nba-all-star-bits--20130218_1_bulls-noah-celtics-garnett-respect
  46. 사실 더이상 NCAA에서 뛰지 못하는 선수들이 만개한 기량을 펼친다는 인식이 더 컸다.
  47. 르브론 제임스의 네임드가 워낙 강력해서 최초의 고졸 1전체 1번이 아니냐고 흔히 착각하는데 최초의 고졸 1순위 지명자는 저 유명한 기름손 초코콰미 콰미 브라운 이다.
  48. 결과적으륜 3년이던 신인 계약기간이 4년으로 늘었고 비제한적 FA제도가 신설되었으며 연차별 맥시멈제도까지 생겼다... 선수협쪽에서의 이득이라면 NBA 전체수익의 50~60정도를 선수들 몫으로 할당할것을 명시화 한것.
  49. 다만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이 묘한 포즈로 있는 사진을 보고 "가넷과 크리시다"라는 글도 있는데, 이 경우 출처가 확인되지 않고 얼굴이 제대로 찍힌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진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50. http://rollingout.com/sports/tim-duncans-estranged-wife-claims-hes-bisexual-in-divorce-proceedings/
  51. 오죽하면 실리가 미네소타 합류 이후, 감독이 지시하는데 가넷은 실리 얼굴만 바라봤다고 한다. 실리가 기가 막혀서 "감독님이 너한테 얘기하잖아! 네가 프랜차이즈(Franchise player로 한 팀을 대표하는 선수를 의미)야!"라고 했을 정도. 실리는 대학농구 스타 출신으로 가넷이 어렸을 때 우상이었는데, 그 우상과 같은 팀에서 뛰게 되니 가슴이 벅찬 것. 실제로 둘은 매우 친했다.
  52. 1위는 팀 던컨 2위는 칼 말론 3위는 노비츠키 4위는 바클리
  53. 그 유명한 팀 던컨, 제이슨 윌리엄스와 함께한 '못말리는 녀석들' 캠페인의 한 명이었다. 그러고보니 팀 던컨도 나중에 아디다스와 계약을...
  54. 사실 안티들도 전설이라는 말에 딱히 부정하진않는다. 마찬가지로 팬들도 그가 더티플레이어라는 거나 트래쉬 토킹이 심하다는 것을 딱히 부정하진 않는다. 뭐 당연한거겠지만 못하는 선수한텐 딱히 관심이없어 욕하지도 않는다.
  55. 인터내셔널 비지니스 타임즈에 따르면 2013년에 재산이 1억9천만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가넷은 연봉으로만 3억달러 넘게 받고 광고수익까지 합하면 거의 4억에 가까웠겠지만, 미국은 이런저런 세금으로 떼어가는 비율이 엄청 높은데다가(재수없으면 절반 가까이 뜯기기도 한다) 그동안 소비한 것도 있을테니 누적 수익의 거의 반을 모은 건 굉장히 알차게 모은 셈이다.
  56. 조던은 2014년 기준으로 스포츠 선수 출신으론 최초로 자산이 10억 달러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