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웨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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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을 털어버릴수 있다면 악마와 계약이라도 할것입니다."

- 크리스 웨버

이름Mayce Edward Christopher Webber III
생년월일1973년 3월 1일
208cm
체중111kg
포지션포워드 겸 센터
출신대학교미시건 대학교
드래프트1993년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올랜도 매직에 지명
소속팀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1993~1994, 2008)
워싱턴 위저즈(1994~1998)
새크라멘토 킹스(1998~2005)
필라델피아 76ers(2005~2007)
디트로이트 피스톤스(2007)
등번호4번, 2번, 84번
수상내역NBA All-Star 5회
NBA 올해의 신인상 (1994)
All-NBA First Team 1회
All-NBA Second Team 3회
All-NBA Third Team 1회
NBA All-Rookie First Team (1994)
NCAA All-American First Team (1994)
Mr. Basketball of Michigan (1991)
새크라멘토 킹스 영구결번
No. 4
1994년 NBA 올해의 신인상
샤킬 오닐크리스 웨버그랜트 힐, 제이슨 키드

1 개요

다재다능했던 포인트 포워드

NBA 선수. 케빈 가넷, 팀 던컨과 함께 3대 파워포워드로 명성을 떨쳤다. 뛰어난 기량과 스타성을 겸비한 선수로서 평가된다. 별명은 C-Webb. 다만 전성기 시절 잦은 부상과 우승경험이 없어서 위에 두 라이벌들과는 달리 저평가 받는 부분이 있는편.

디트로이트 미시건에서 태어났고, 생후 10개월부터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9살때부터 농구를 시작했고, 컨츄리 데이 고등학교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학교를 주 챔피언으로 올려세웠다. 미시건주의 미스터 바스켓볼에 선정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후 크리스 웨버는 미시건 대학교에 입학한다.

2 환희와 악몽의 대학시절

신입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 웨버는 주전자리를 꿰찼다. 이때 같이 들어온 신입생인 주완 하워드, 제일런 로즈, 지미 킹, 레이 잭슨등과 함께 NCAA 농구판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이들을 Fab(Fabulous의 약자)5[1]라 칭하며 열광했다. 특히나 이들은 패션센스도 뛰어났고, 그중에서도 웨버는 단연 최고의 관심을 받았다. 큰키에 빠른 스피드와 넓은 시야, 그리고 긴 슛거리 등 기량면에서도 최고였고, 그리고 미남에다가 세련된 패션감각등을 바탕으로 기량과 스타성을 동시에 보유한 선수로 찬사받았다. 미시건 대학은 돌풍을 일으키며, NCAA 파이널까지 올랐지만 아쉽게도 듀크대학에게 패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1학년때 최고의 인기를 얻었고 또 준우승이긴 했지만 웨버와 Fab5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2학년때 NCAA 토너먼트 노스 캐롤라이나와의 경기에서 경기 종료 11초전 2점차로 미시건이 지고 있었고, 볼은 웨버에게 있었다. 노스 캐롤라이나는 웨버에게 더블팀을 붙었고 당황한 웨버는 타임아웃을 불렀는데, 이때 미시건 대학은 타임아웃을 다 써버려서 더이상 사용할 타임아웃이 없었다. 결국 웨버는 테크니컬 파울을 얻었고, 미시건 대학교는 73대 71로 패배하면서 탈락했다. NCAA 역사에서 빠질수 없는 사건으로 이 웨버의 타임아웃은 누누히 회자되었고, 그는 이때 미스터 타임아웃이라는 조롱섞인 별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웨버 본인도 "정말 잊고 싶지만 잊을수 없는 일" 이라고 말할정도로 본인에게는 흑역사.

NCAA우승을 꼭 하고 싶었던 웨버였으나 이 타임아웃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대학에 남아있을 명분이 사라졌고, 웨버는 미련없이 NBA 드래프트를 신청한다.

하지만, 이후 Fab5는 이들의 입단 과정에서 드러난 금품 수수등의 부정행위로 조사에 들어갔고, 크리스 웨버 본인이 미시건 입학 대가로 금품 수수를 한 것이 드러나면서 미시건 대학교의 농구팀 기록이 삭제되고 선수 스카웃도 금지되는 결과를 맞으면서 웨버의 대학 커리어는 씁쓸하게 마무리 된다.

3 NBA 커리어

크리스 웨버는 1993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순위로 올랜도 매직에 지명되었다.지금이야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2학년만 마치고 1순위로 픽된 것은 1979년의 매직 존슨 이후 최초의 일로 당시엔 꽤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올랜도에 지명되자 한해 먼저 올랜도에 입단한 샤킬 오닐과의 막강골밑 듀오 탄생에 흥분했지만, 당시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이었던 돈 넬슨은 큰 키에 다재다능한 플레이를 펼치는 웨버를 눈여겨보고 있었고, 결국 드래프트 당일 골든 스테이트가 1라운드 3순위로 지명한 앤퍼니 하더웨이와 트레이드 되어 웨버는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루키시즌을 시작하게 된다.

웨버는 신인시절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큰키에도 불구하고 가드처럼 드리블하고 패스하면서, 운동능력도 뛰어났고 또한 골밑플레이도 당연히 능했던 웨버는 루키시즌에 평균 17.5점 9.1리바운드 3.6 어시스트, 1.2스틸, 2.2블록슛. 여기에 55.2%라는 무시무시한 필드골 성공률까지 더하면서 뛰어난 신인으로 기량을 떨쳤다. 신인상을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루키 시즌 중 압권이었던건 속공 장면에서 드리블을 하며 찰스 바클리(..)의 수비를 피해 비하인드 백으로 공을 돌려 찰스 바클리 면전에다 인유어페이스를 날려버린 것, 당대 최고의 힘을 가진 바클리를 날려버린 이 장면은 웨버와 계약하며 시그니쳐 슈즈까지 만들어줬던 나이키에서 광고로 활용했다. (바클리가 허락을 했을까..)

하지만 시즌내내 감독인 돈 넬슨과 불화가 심했다. 돈 넬슨은 웨버가 좀 더 센터답게 플레이해주기를 원했지만, 어린시절 매직 존슨을 동경하며 농구를 시작했던 웨버는 가드처럼 플레이하길 원했다. 이런 둘의 엇박자는 시즌내내 계속되었고, 웨버가 패스를 하면 할수록 돈 넬슨의 표정은 굳어져갔고 급기야 작전타임때 "내 말좀 들어, 임마!" 라고 할 정도였다. 93-94시즌이 끝난 후 웨버가 트레이드 될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웨버는 트레이닝 캠프에 불참했다. 기자들은 돈 넬슨에게 "익명의 제보자에 따르면 웨버가 곧 트레이드 된다던데요?" 라고 물었고 결국 폭발한 돈 넬슨은 "그 익명의 제보자가 누군데?" 라고 추궁했는데, 그 익명의 제보자는 웨버 본인이었다.(...)

결국 웨버와 골든 스테이트의 인연은 한 시즌만에 끝났고 웨버는 워싱턴 불릿츠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 워싱턴에는 대학 동기이자 Fab5의 일원인 주완 하워드가 있었다. 또 당시 짐 라이넘 워싱턴 불리츠 감독은 웨버에게 골밑플레이를 강요하지 않았고, 웨버는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를 할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적 첫시즌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결장했고, 워싱턴은 웨버효과를 전혀 누리지 못한체 21승 61패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야했다. 95-96시즌에 부상당했던 왼족어깨 부상이 재발하면서 단 15경기 출전에 그쳤다. 워싱턴은 또 한번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대학동기이자 친구인 주완 하워드는 이 시즌에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96년 FA 최대어중 한명이 되어 몸값 1억달러의 주인공이 되었다. 다음 시즌인 96-97시즌에는 도중에 감독이 두 번 교체되는[2] 악재에도 불구하고 웨버는 모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72경기에 출전하고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워싱턴은 막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겹경사가 터지기도 했다. 물론 1라운드 상대는 시카고 불스(...)였고 3전전패로 광속탈락하고 말았다. [3]

97-98시즌이 끝난후 웨버는 또다시 트레이드를 통해, 새크라멘토 킹스로 이적했다. 하지만 웨버는 새크라멘토 이적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당시 새크라멘토는 존재감이 매우 희박한 소규모 프랜차이저였고, 성적도 좋지 못했다. 하지만 98-99시즌을 앞두고 킹스는 대대적인 전력보강을 했다. 99년 드래프트에서 7순위로 뽑힌 제이슨 윌리엄스와 페쟈 스토야코비치, 그리고 블라디 디박등 수준급 선수들이 영입되었고, 킹스는 단축시즌으로 치뤄진 98-99시즌에 5할승률을 찍으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이때 제이슨 윌리엄스와 크리스 웨버가 선보인 화려한 농구에 많은 이들이 매료되었다. 웨버도 이때 평균 리바운드 1위를 차지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리바운드 1위에 올랐다.

00-01시즌에는 더욱 일취월장한 기량을 선보이며 평균 27.1점 11.1리바운드, 4.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킹스는 어느덧 서부 컨퍼런스의 강팀으로 우뚝서게 된다. 비록 2라운드에 레이커스에게 4전전패를 당하면서 탈락하긴 했지만. 01-02시즌에 킹스는 아예 우승을 목표로 잡고 화려하지만 여러모로 불안했던 제이슨 윌리엄스를 트레이드 시키고 마이크 비비를 영입했다. 또한 페쟈 스토야코비치는 리그 최고의 슈터로 거듭났고, 기존의 블라디 디박과 덕 크리스티 그리고 팀의 최고 식스맨이었던 바비 잭슨도 건재했기에,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수 있는 전력이었다. 팀은 61승 21패를 기록하면서, 리그 전체 1위 승률을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유타 재즈와 댈러스 매버릭스를 꺾고 드디어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레이커스와 맞붙었다. 홈코트 어드밴티지가 있었던 킹스는 1차전을 내줬지만 2,3차전을 내리 따내고 4차전에서 45분 넘게 리드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4차전 종료직전 터진 로버트 오리의 3점슛으로 4차전을 내주고 말았다. 5차전을 승리했지만, 다시 6,7차전을 내리 내주면서 킹스의 우승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4]

02-03시즌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주었다.문제는 달라스와의 플레이오프 컨퍼런스세미파이널 2차전에서 벌어졌다.가비지 타임으로 흘러가던 경기 막판,무릎부상을 당해버린 것. 결국 킹스는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댈러스에게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탈락하고 말았다. 당시엔 그리 심각한 부상이 아닐 줄 알았지만,결국 이 무릎부상을 기점으로 웨버는 과거의 운동능력을 거의 잃어버리게 된다.

더 잔인한건 웨버가 결장한 상태로 치른 03-04시즌 초반,킹스의 경기가 오히려 잘 돌아갔다는 점이다. 새로 영입한 센터인 브래드 밀러는 블라디 디박의 가르침 덕분에 뛰어난 패싱센스를 겸비한 빅맨을 거듭났고, 팀의 중심도 웨버에서 페야 스토야코비치로 넘어가 있었다.스토야코비치는 프린스턴 모션 오펜스의 해결사로 이 한 시즌만은 물만난 고기처럼 펄펄 날면서,MVP급 포스를 보였다. 시즌 막판 웨버는 돌아왔지만,과거의 운동능력을 잃어버리면서 수비에서는 잉여가 돼버렸고, 킹스의 원활한 패싱게임이 웨버에게 공이가면 뚝뚝끊기는 일도 많아졌다. 점점 웨버의 입지는 좁아져만 갔다. 03-04시즌 그의 야투성공률은 41%대로 대폭 추락했고, 어느덧 중거리슛만 던져대기 시작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2라운드에서 당시 돌풍의 팀이었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게 패배[5] 하면서 다시 우승도전에 실패하게 된다. [6]

04-05시즌이 되면서 더욱더 좁아진 팀내 입지에 웨버는 불만을 터트렸고, 팀 동료를 비난했다. 킹스 역시도 기량이 옛날만 못하고 거액의 장기계약을 가지고 있는 웨버가 부담스러웠고, 결국 웨버는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1대3 트레이드 된다. 비록 기량은 저하되었다고는 하나 당시 그의 존재감은 엄청났었기 때문에 앨런 아이버슨은 처음에 크리스 웨버가 온다는 말을 듣고 "농담하지 마라"라고 했을 정도였다. [7]

하지만 필라델피아에서의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무릎부상으로 이미 예전의 기동력과 운동능력을 잃어버렸고, 픽앤롤 수비시에서는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릿자루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새크라멘토에서는 자신이 팀의 작전의 중심이었지만 당시 필라델피아는 말 그래도 아이버슨의, 아이버슨을 위한, 아이버슨에 의한 작전을 구사하는 팀이었기에 웨버는 더욱더 팀 전술에 녹아내릴수 없었다. 결국 그는 06-07시즌 중간에 필라델피아에서 방출되고 만다. 이렇게 그의 농구 인생도 끝인가 싶었지만...

고향팀인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물론 우려도 있었지만 웨버는 아직까지 건재한 패싱능력과 특유의 농구센스로 의외로 디트로이트 농구에 적응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깨알같은 활약을 펼쳤지만 아쉽게도 디트로이트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패배하며 탈락했다.

06-07시즌이 끝난후 자유계약 선수가 되었다. 이미 전성기 시절의 기량은 아니지만 디트로이트에서 보여주었던 죽지않은 패싱능력과 농구센스 그리고 외곽슛 능력 덕분에 그를 노리는 강팀은 몇몇 있었다. 하지만 웨버는 전혀 뜻밖에도 자신이 NBA경력을 시작한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와 계약하면서 모두를 놀라게했다. 놀랄수 밖에 없었던것이 당시 골든 스테이트는 약팀이었고, 웨버가 우승타이틀을 노리기에는 한참이나 뒤떨어진 팀이었기 때문이었다. 돈 넬슨 감독 역시도 "우리팀 전력이 좋지 않아서 웨버가 올지 확신이 안섰다." 라고 했을정도였다. 거기다 당시 워리어스의 농구는 "닥치고 달리고 또 달리는" 공격농구였기 때문에 기동력을 잃은 웨버에게는 어울리는 팀이 아니었다. 돈 넬슨은 웨버를 9경기중 8경기에 선발로 출전시켰을 정도로 중용했지만 그리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결국 웨버는 은퇴를 선언했다.

4 플레이스타일

4번 포지션으로 딱 맞는 체격에 센터도 소화가 가능했다. 무엇보다 웨버를 대표하는건 바로 다재다능한 플레이. 빅맨으로서의 본연의 플레이도 뛰어났지만 뛰어난 패싱능력과 긴 슛거리 등은 그를 막기 까다로운 선수로 만들었다. 2m8cm의 빅맨이 가드처럼 크로스오버 드리블을 하고 중장거리를 던질수 있고, 가드처럼 빨리뛰고 돌파하는데다가 전성기 시절에는 골밑에서도 전투적인 플레이를 펼치고 보드 장악력도 뛰어나니 상대 마크맨 입장에서는 "이걸 어떻게 막아" 소리가 절로 나올수 밖에 없다.

크리스 웨버의 이런 플레이스타일이 더욱더 빛을 보게 된건, 당시 새크라멘토 킹스의 프린스턴 모션 오펜스 덕분이기도 했다. 한명이 공을 잡고 있을때 다른 선수들은 끊임없이 빈 공간을 찾기 위해 움직여야 하며, 빅맨의 스크린과 더블 스크린, 플레어, 컷, 베이스라인을 활용하며 상대팀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이 모션 오펜스의 주 모태이며, 가드 뺨치는 패싱능력과 넓은 시야를 가진 웨버는 이 전술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수 있었다.

하지만 무릎부상은 그의 장점 대부분을 빼앗아갔다. 기동력과 운동능력을 잃고난후 그는 돌파대신 중거리 슛만 던지면서 플레이의 생산성이 크게 떨어졌고 상대의 픽앤롤, 픽앤팝에 속무무책으로 털리게 되었다. 그나마 커리어 말기에는 패싱능력과 농구센스로 커버하긴 했지만.

5 이것저것

참으로 굴곡진 농구인생를 보냈다. 대학시절 초창기에는 정말 인기도 많았지만 타임아웃 사건을 계기로 조롱거리가 되었고, 프로 신인시절에는 돈 넬슨 감독과의 불화, 새가슴 논란, 그리고 멘탈적인 문제까지 다양했다.

3대 파워포워드인 케빈 가넷이나 팀 던컨과는 달리 우승은 커녕 파이널에 한번도 올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 두명보다는 저평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뛰어난 기량은 여전히 올드팬들이 그리워하는 부분. 지금도 잘생겼지만 젊은시절에는 그야말로 미남소리 나오는 얼굴덕분에 인기는 대학시절 다른 Fab5보다도 월등했다. 누구와는 다르다! 누구와는! [8] 패션센스도 좋고. 3대 파워포워드 중에서도 가장 잘생겼다. 웃지 않으면 철근이라도 씹어먹을듯한(...) 가넷이나, 무뚝뚝한 인상의 팀 던컨에 비해 정말 잘생기고 웃는것도 매력이 넘친다. 검색창에서 웨버 이미지를 검색하면 그의 웃는 사진이 정말 많이 나온다.

은퇴후에는 객원해설가로 종종 활동하며[9] ,자신이 설립한 크리스 웨버 재단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뉴올리언스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한바탕 쓸고 간 후에 그곳에 교과서를 보내주기도 했다.

비록 새크라멘토 킹스와 모양새가 좋지 않게 헤어졌지만 킹스는 팀의 전성기에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크리스 웨버의 4번 유니폼을 영구결변 시켜주었다. 웨버도 이 영구결번 기념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며 팬들과 동료들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이 자리에는 과거에 같이 뛰었던 동료인 덕 크리스티와 블라디 디박도 함께 자리해 그를 축하해주었다.

추가바람
  1. '경이적인 5인'이란 의미로,비틀즈를 'Fab4'로 불렀던 것이 근원이다.
  2. 짐 라이넘-밥 스타크 감독대행-버니 비커스태프.
  3. 비록 전패긴 했지만 싱겁게 관광당한건 아니다. 1차전은 12점차로 패했지만 2차전은 5점차로 근소한 차이었고, 3차전에는 단 1점 차이로 패했다. 당시 불스는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베테랑 팀이었고 끝판왕까지 있었던 걸 생각하면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 된 어린 팀치곤 꽤 잘 버틴 셈.
  4. 이 시리즈는 심판의 편파판정- 조작한 게임이 있다면 꼽힐 대표적 시리즈-로 가장 말많은 바로 그 시리즈다.
  5. 이 시리즈는 7차전까지 이어졌으나,최종전에서 케빈 가넷이 30점 20리바운드가 넘는 스탯에 상대팀을 거의 전부 커버하는 무지막지한 수비, 거기다 막판에 포인트가드 역할까지 하는 괴물급 대활약을 펼치며 미네소타가 가져간다. 7차전에서 종료 직전 킹스가 3점차로 뒤지고 있는 가운데 웨버가 3점슛을 던졌으나 아깝게 빗나가면서 패배하고 만다. 이때 장면을 보면 버져가 울리고 바닥에 엎드려 안타까워하는 웨버와 바로 옆에서 환호하는 가넷이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6. 그러나 장기결장에서 돌아온 선수가 적응기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웨버는 이때만해도 팀의 에이스로 여겨졌으며 05시즌 당시 필리로 트래이드되기 전까지 20-10-5에 가까운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7. 여담이지만 당시 필리에서 웨버의 등번호 4번을 달고 있건 건 루키 안드레 이궈달라였다. 그러나 이궈달라는 웨버에게 4번을 양보하고, 웨버는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고급시계를 선물했다고.
  8. 르브론 제임스의 경우 자신의 고등학교 농구팀을 Fab5라고 칭했었다
  9. 생각보다 많은 지식과 괜찮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해설한다는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