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피아 전투

라피아 전투
날짜
BC 217년 6월 22일
장소
라피아, 현 가자 지구 라파 시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셀레우코스 왕조
지휘관프톨레마이오스 4세 안티오코스 3세
병력보병 70,000명 기병 5,000명 코끼리 73마리보병 62,000명 기병 6,000명 코끼리 102마리 
피해 규모보병 1,500명 기병 700명 코끼리 42마리[1]보병 14,000명[2] 기병 300명 코끼리 5마리
결과
이집트의 승리, 헬레니즘 세력의 몰락 시작

라피아 전투(영어명:Battle of Raphia)는 기원전 217년 6월 22일, 이집트셀레우코스 제국이 벌인 대규모 회전이다.

1 전쟁 전 상황

알렉산더 대왕 사망 후, 디아도코이 간의 대전쟁이 있었고 그 결과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이집트가, 셀레우코스 1세에게 페르시아 본토 지방 및 아나톨리아 반도가 돌아간다. 하지만 이때의 전쟁으로 이집트와 셀레우코스 제국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고, 그 결과 3번의 시리아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기원전 219년 제4차 시리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친히 대군을 몰고 이집트령 시리아로 진격했고, 이 소식을 들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 역시 친히 요격을 나간다. 두 군대는 라피아 전장에서 만났고, 셀레우코스군의 이집트 왕 암살 작전이 실패하면서 전투로 돌입하게 된다.

1.1 양군의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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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진영이 보유한 코끼리의 체급차이

라피아 전투는 최초의 두가지 코끼리[3] 간의 싸움으로 알려졌다. 이집트의 전투 코끼리는 현재 에리트레아 지방에서 징발한 북아프리카 숲 코끼리[4]였고, 제국의 전투 코끼리는 인도 코끼리였다. 갑옷까지 갖춘 제국의 커다란 코끼리는 이집트의 소형 코끼리들에게 공포심을 안겨 주었고, 셀레우코스군은 이를 통해 코끼리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2 전투

5일 간의 탐색전 후, 전투가 시작되었다.
먼저 양군은 코끼리를 돌격시켰다. 하지만 윗 문단에서 상술했듯이 이집트 코끼리는 완전히 압도당했고, 도망가면서 아군의 팔랑크스진을 무너뜨리고 팀킬을 시전한다. 그 사이에 이집트군 좌익에서 기병전도 벌어진다. 그리고 보병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변이 벌어졌다. 원래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군은 급조한 토착민 출신 보병으로 꾸린 팔랑크스가 대부분이라서 셀레우코스군의 마케도니아인 정예 보병[5]에 압도당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실전에서는 이집트군 정예 보병이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는데다가 왕이 직접 나서서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사기가 오른 토착민 보병이 정예부대에게 전혀 꿀리지 않고 잘 싸우게 된 것이다. 때문에 보병 전열에서는 충공깽스러운 격전이 벌어지게 된다.한편, 우익에서는 이집트 기병이 셀레우코스 기병에게 제압당했다. 이 때문에 안티오코스 3세는 아군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판단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셀레우코스군의 팔랑크스가 결국 붕괴당했고 줄줄이 모랄빵을 터트렸다. 그렇게 전열은 수습되지 않았고, 전투는 이집트의 승리로 돌아갔다.

3 전투 후...

이집트는 시리아와 유대 지방을 지켜냈다.[6]그리고 토착민 부대의 활약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토착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 이집트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가 세계의 제왕이 되는 일은 없었다. 자기들간의 내전에 모든 힘을 쏟아낸 헬레니즘의 두 거성은 이어지는 로마와의 전쟁에선 거짓말같이 몰락을 당했다.
  1. 16마리는 죽었고 26마리는 노획당했다.
  2. 10,000명은 전사했고 4,000명은 포로가 되었다.
  3. 후술하듯이 흔히 생각하는 아프리카코끼리인도 코끼리는 아니다.
  4. 현대는 멸종한 소형종으로, 카르타고의 주력이었다.
  5. 심지어 그 유명한 은방패장창병이 이 전투에 다량 투입되었다.
  6.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 때 안티오코스 3세는 다시 시리아 지방을 빼앗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