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캄행

타이 수코타이주 수코타이에 위치한 람캄행 동상

1 개요

รามคำแหง

동남아 태국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의 제3대 왕. 본명은 퍼쿤 람캄행. 수코타이 왕국을 전성기로 이끌었고 태국의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거기다가 이 사람도 자국의 문자를 손수 만들었으니 한국으로 치면 세종대왕과 비슷한 셈.

어렸을 때부터 문무를 겸한 태국의 먼치킨. 외교, 제휴, 군사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수코타이를 동남아의 패권국으로 만들었다. 전설의 왕 르완왕을 선조로 삼고 국왕은 아버지, 국민은 아들들이라고 하여, 왕족과 같은 온정주의를 강화하였다.

태국 국민들에게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2 역사

1239년(추정)에 태어나 1279년 왕위에 오른뒤 1298년에 죽었다[1] 1279년, 형이였던 반 무앙 왕이 죽자 타이 시암 중북부의 작은 왕국 수코타이 왕국을 물려받았다.

그에 대한 거의 모든 기록은 왕 자신이 초안해서 쓴 1292년의 비문에 근거하고 있다. 이 비문은 크메르어를 개량해 만든 타이어로 기록돼 있는데, 타이어의 원형을 보여주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타이어 자료이기도 하다.

자신이 직접 기록한 비문에는 그가 모든 이에게 공정하고 너그럽고 존경할만한 군주이며 인자한 아버지, 성군중의 성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신이 직접 기록한 비문에(…).

다만 이 비문은 조작이 아니냐는 말도 조금씩 나오고는 있다. 발견한 사람이 19세기 태국의 왕이자 왕과 나로 유명한 라마 4세(...) 그가 승려일 때 발견한 것이지만, 그래도 이후의 왕이 발견한 것이니 반론을 쉽게 펼치기는 힘들다.

왕위에 오른 20여년 동안 람캄행은 여러 훌륭한 업적들을 많이 남겼는데, 조선의 세종대왕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다.

3 치세

3.1 외교

외교에서 람캄행은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북방 린나 왕조, 파야오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어 북방의 안전을 해결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뛰어나 말레이 반도 전체를 점령한 후 캄보디아를 제압했다.

꾸준한 정복활동 끝에 오늘날 라오스의 위앙 쨘과 루아프라방, 서쪽으로는 미얀마의 인도양 해안, 남쪽으로는 말레이 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는 동남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다.

다만 이 때의 정복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후 아유타야가 성립된 짜오프라야강 캄보디아-롭부리[2]로부터 정복한 것은 사실인 듯 하나, 위앙 쨘, 루앙프라방, 테나세림, 나콘 시탐마랏의 정복의 경우 단순히 종주권을 인정받은 듯하기 때문이다. 그가 죽자마자 이 지역들은 대부분 쑤코타이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당시 타이족은 동남아 전체로 이주해서 독자적인 소왕국(무앙)을 세우던 상황이었고, 람캄행은 이들을 대표하는 패자라고 보는 것이 적절.

1294년과 1300년 두 차례에 걸쳐 조정에 방문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대 패권국이던 원과의 우호에 특히 공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3.2 불교

람캄행은 당시 불교 선진국이던 스리랑카에서 스님을 직접 모셔와 왕실과 평민 모두 불교를 믿도록 하였다(고려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람캄행의 이러한 서비스에 감동을 받은 스리랑카 왕조에서는 수코타이 왕조에 황금 불상을 선물해줬다.

3.3 문화

태국만의 독특한 양식이 발전했는데, 특히 청동조각과 도자기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달해있었다.

또한 조선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듯, 크메르 문자를 바탕으로 타이 문자를 만들었다.

4 평가

람캄행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지도자이다. 그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수코타이 왕조는 그가 죽은 뒤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고 아유타야 왕조에 병합되고 만다.

한편 외교적인 통합의 한계도 보였다. 람캄행의 제위기의 쑤코타이의 영토는 크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방사형 영토가 아닌 실선으로 뻗어간 모양을 보인다. 즉 각지에 분포한 타이족 소왕국들의 맹주적인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 동맹이 쑤코타이에 대한 복종보다는 람캄행 개인에 대한 신뢰에 가까웠으므로 그가 죽자마자 대부분 소왕국들은 쑤코타이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아직 타이족의 영토가 아니었던 짜오프라야강 하구 서안을 정복함으로써 1350년 아유타야가 성립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기도 하였다. 또한 앙코르조와의 항쟁도 계속하였는데, 13세기 말 앙코르조 캄보디아를 방문한 중국인 주달관은 국경에서 섬(暹)인과 크메르인이 수시로 상대편을 학살하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소개한 이 사람의 업적은 전부 자기가 기록한 비문에 보이는 것이다. 즉, 왕이 자기 자신의 업적을 쓰면서 안 좋거나 불리한 내용을 집어 넣었을 리가 없다는 점이 문제. 교차 검증할 만한 다른 사료라도 있다면 비교하면 되겠지만 그런 것도 없다.

무엇보다 직접 기술했다는 것보다 더 문제는 이 비문 자체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초반부와 중반부 이후에 서술자의 인칭이 변화하고, 문체마저도 바뀌는데다, 내용상으로나 시기적 이질성 등이 여러 군데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과연 이게 진품이냐 하는 논쟁이 일었다. 게다가 중반이후에는 영어식 문체의 영향을 받은 점도 있어서 19세기 이후에 쓰여진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아예 통째로 조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중간이후부터 조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언어의 경우 현대 태국어와 분명히 다르긴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말이 많은지라.

어쨌든 학계에서는 아직 정확한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사실 이 문제는 태국 사람들의 민족주의에 큰 영향이 있기 때문에 학자들도 함부로 조작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다만, 설사 조작을 했다하더라도 19세기 유럽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태국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고양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날조했다는 식의 비난은 좀 곤란하다.

5 기타

람캄행은 막장제조 게임으로 유명한 문명 5시암 문명의 지도자로 나온다. 선전포고 때 한다는 소리가 "이제 세계는 나의 것!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드리겠소"간디 Ver 2가 따로 없다

사실 문명5 플레이들 가운데에는 거듭된 패치로 약화된 간디보다 이쪽이 더 강력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람캄행 대왕의 외교 능력을 모티브로 한 시암의 특성이 대단히 강력해서, 초보자가 고난이도에 도전할 때 추천받는 문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

태국 방콕에는 람캄행 대학교가 있다. 한국으로 치면 세종대? 특이하게도 이 학교는 국립대학이며 그야말로 누구나 공부할 수 있는 개방형 대학교이다. 정원이 없기 때문에 심지어 한국어 붐이 불 때 람캄행 대학교의 한국어 수업은 학생 수가 무려 천 명에 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 1317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2. 반독립적인 몬족의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