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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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 Marcia su Roma
영어: March on Rome

1 개요

1922년 10월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당과 산하 검은 셔츠단이 집권을 위해 일으킨 쿠데타. 당시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진압을 선택하는 대신 무솔리니가 총리대신 직에 오르는 것을 승인하면서 별다른 유혈사태 없이 종결됐으며,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2차대전 종전 시까지 파시스트 당의 일당독재 체제에 놓이게 된다.

2 진행

1차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심각한 이념대립으로 인해 극도의 사회혼란이 빚어졌고, 이런 상황에서 1919년 전직 사회주의자 출신이었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전투 파쇼(Fascio di Combatimento)라는 알쏭달쏭한[1]정치 단체를 결성한다. 그리고 이 단체를 호위하기 위한 사설 경비 조직으로 행동대(Squadra d'Azione)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이 조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셔츠단이라는 이름의 단체로 재탄생하게 된다.

전역자, 실업자 출신으로 이루어진 검은 셔츠단은 1920년 밀라노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자비하게 때려잡았고, 이에 실업가와 지주들은 이탈리아 전투 파쇼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한다. 이를 기반으로 1921년 있었던 총선에서 무솔리니와 전투 파쇼는 원내에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1922년이 되면 전투 파쇼는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가미하여 파시스트 국민당(Partito Nazionale Fascista)으로 명칭을 바꾼다. 계속된 사회 혼란에 지쳐있었던 이탈리아인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로마 제국의 부흥'과 같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무솔리니에게 열광했고 1922년 중반이 되면 파시스트 국민당은 70만 이상의 당원을 자랑하면서 급속히 세를 불린다. 거리마다 검은 셔츠단이 좌파세력들을 두들겨 팼던 것은 덤.

이런 상황에서 좌파세력들의 최후의 반격으로 총파업이 1922년 여름 발생됐지만 무위로 돌아갔고 같은 해 10월 22일, 나폴리에서 진행중이었던 전당대회에서 무솔리니는 '우리의 목표는 간단하다. 이탈리아를 통치하자.'라며 검은 셔츠단과 당원들에게 로마로 진군할 것을 명령한다.[2] 대놓고 쿠데타 감행하는 배짱 당시 이탈리아의 총리였던 루이지 팍타는 '뭐 기껏해야 집권 파트너로 내각에 입각하길 원하는 거겠지. 설마 일당독재를 원하는 거겠어?' 라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자신감을 갖고 초기 파시스트 당원들의 행진을 수수방관한다. 그러다가 뒤늦게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부랴부랴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할 것을 요청하였지만[3] 국왕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팍타는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만다. 국왕이 왜 군대동원을 거부했는지를 둘러싸고는 다양한 견해들이 나오지만 정설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군대동원이 전면적인 내전으로 발전할 것을 국왕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파의 근간을 차지하던 자본가와 민족주의 세력들이 무솔리니를 만만히 본 채 그를 꼭두각시로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국왕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나치의 집권과정 이랑 이리도 똑같을 수가 10월 28일 국왕이 무솔리니에게 총리직에 취임하여 내각을 구성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로마 진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3 결과

전제독재의 시작

그래도 초기에는 좌파와 중도 세력이 의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민주주의는 운영됐지만 그거도 오래가지 못했다. 검은 셔츠단은 치안유지대로 이름을 바꾸어 공권력을 차지했다. 당연히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하지는 않았고 공권력을 빙자한 사적인 폭력이 사회 곳곳에서 빚어졌다. 또한 선거법도 파시스트 당 입맛대로 개정되어 최다정당에게 전체 의회 정원의 2/3를 준다는(...) 정신나간 내용으로 변경됐고, 파시즘에 반대하는 정치인들과 언론사에 대한 탄압은 백주대낮에도 자행됐다. 또한 파시스트 정권은 청소년들의 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썼는데[4] 교과서가 정권 입맛에 맞게 대폭 수정된 것은 물론이고 교사들은 무솔리니에게 충성 맹세를 해야했다. 또한 유벤투스라는 이름의 군대식으로 마개조된 단체에 학생들이 억지로 가입해야했던 것은 덤.[5] 이탈리아 판 히틀러 유겐트?
  1. 애초에 파시즘이라는 정치이념 자체가 도무지 갈피없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특성이 있지만 아직 최소한의 이념 정리도 안된 초창기에는 이런 애매모호함이 더 컸다. 굳이 특징을 꼽아보자면 팽창주의적인 대외정책을 주구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체제를 주장했다는 점이다.
  2. 여담이지만 진군을 명령하기 직전에 무솔리니는 주이탈리아 미국 대사에게 미국이 파시스트 당의 집권을 환영하는지에 대해서도 물어봤다고 한다. 물론 답은 No Problem(...)
  3. 이때 검은셔츠단의 무장상태는 정말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개인화기조차 제대로 구비가 안되서 몽둥이같은거를 들고 있던 사람들도 무척 많았다고(...) 즉 정규군만 동원하면 진압하는 것 자체는 무리가 없던 상황. 이렇게 준비도 똑바로 안한 상태에서 한 나라를 홀랑 먹어버리니 세계대전에도 아무 생각없이 참가했다가 개쪽을 당하는거지
  4. 이는 단순히 이탈리아의 경우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프랑코 스페인을 비롯한 전체주의 국가에서 매우 자주 보이는 성향이다. 이미 글러먹은(?) 기성 세대들은 포기하더라도 자라나는 새싹들에게는 자신들의 이념을 철저히 세뇌시키겠다는 것.
  5. 축구구단이 떠오르겠지만 그 축구구단이랑은 전혀 상관없다. 애초에 유벤투스는 라틴어로 청년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고대 로마 시절에도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동명의 청소년 단체가 운영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