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추축국 의 주요 지도자들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아돌프 히틀러카를 되니츠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베니토 무솔리니피에트로 바돌리오
일본 제국
쇼와 덴노고노에 후미마로
(전쟁 이전)
도조 히데키고이소 구니아키스즈키 간타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역대 국왕
움베르토 1세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움베르토 2세
220px-Vitorioemanuel.jpg
이름비토리오 에마누엘레 페르디난도 마리아 젠나로 디 사보이아
(Vittorio Emanuele Ferdinando Maria Gennaro di Savoia)
생몰년1869년 11월 11일 - 1947년 12월 28일
출생지이탈리아 왕국 나폴리
사망지이집트 왕국 알렉산드리아
왕조사보이아 왕가
재위기간1900년 7월 29일 - 1946년 5월 9일
종교가톨릭
배우자옐레나 페트로비츠 녜고스

1 개요

사보이 왕가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3대 국왕이자 에티오피아의 황제(1936~1941), 알바니아의 왕(1939~1943)을 겸임했다. 다만 이탈리아 국왕 외의 지위는 추축동맹국 말고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실상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나 공식적으론 아들 움베르토 2세가 34일동안 재위를 했기에 마지막 국왕은 아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당원들이 로마로 진군하며 폭동을 일으켰을 때는 이에 대한 진압을 거부하고, 무솔리니에 협조함으로써 그의 집권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1] 이후 무솔리니의 독재와 침략을 방관하여 끝내 패전이라는 파국을 맞이하였고, 이후에는 책임 회피를 위해 어떻게든 노력하였으나 왕정 종식이라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2 즉위 전

나폴리에서 태어났기에 나폴리의 왕자라는 별명이 있었다. 사실 그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 의해 이탈리아 통일이 거의 완성된 상태였으며 태어난 후 2년만에 이탈리아 통일이 공식적으로 완료되면서 그의 미래에는 신생 열강국가인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차기 지도자라는 빛나는 미래가 열려 있었다.

이후 왕실 교육을 받으며 평범하게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 움베르토 1세는 건장했기에 특별한 일이 없었으면 그의 즉위는 40대 즈음 되어서야 가능했을 것이었고 본인도 특별히 왕위에 목매달라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왕세자 시기에 에티오피아 침략의 실패[2] 및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세력의 발호를 지켜보았다.

즉위 전 그는 성격이 너무 좋으셔서 조금만 더 심지가 굳었으면…하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격이 너무 유유부단하고 소극적이라는 거였다. 이탈리아 왕국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었지만 동시기 입헌군주국이었던 영국에 비교해서 왕의 권한이 매우 강하여 총리 임명권 및 의회 해산권에 총리 및 의회가 내놓은 제안에 대한 거부권 등이 있었다. 사실 의회 정치가 잘 돌아가면 왕이 유순한 것이 오히려 좋은 경우이다. 왕이 의회가 하는 일에 태클 안 걸고 조용히 얼굴마담이나 하면 되는 거니… 그러나 이탈리아의 정치 환경은 그렇게 좋지는 못했고, 에마누엘레 본인도 그렇게 행동할 만한 인사는 아니었다.

3 즉위 및 초기 집권기

그가 30세가 되던 해인 1900년, 못해도 10년은 더 살을거라 의심치 않았던 부친 움베르토 1세가 무정부주의자가 쏜 탄환에 맞고 절명하면서 그는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로 즉위했다.

그가 즉위했을 때 이탈리아는 낙후된 노동환경에 이어 좌파정당의 힘이 강해졌고, 열악한 경제여건에 몇 년 전 에티오피아 침략전쟁의 참패가 겹쳐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자본가와 이들을 대표하는 의회 우파 세력은 에티오피아에서 된통 깨진건 그새 잊고 다른 열강처럼 식민지 획득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의회 및 자본가 세력이 주도한 식민지 전쟁을 묵인했고, 덕분에 이탈리아는 1912년에 다 죽어가는 병자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걸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은 대체로 무능함을 보였다. 리비아의 해안을 점령한 이탈리아군은 내륙의 적군을 상대하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적군이었던 오스만 군대 역시 내륙에 짱박힌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결국 리비아가 아닌 에게 해의 도데카니사 제도가 이탈리아 해군에 의해 점령된 이후 오스만 제국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어 어떻게든 승리는 할 수 있었고, 지중해 건너 리비아와 도데카니사 제도를 식민지로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이정도로 자본가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고, 식민지 확대를 요구하던 우파세력은 계속해서 날뛰었다. 당시 좌파였던 사회당은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한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탈리아는 중립을 선포하였다. 선왕 시절에 맺어진 삼국동맹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지중해를 장악한 영국과 리비아의 주권을 인정해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기는 힘들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정치권은 자유주의 세력과 가톨릭, 사회주의 세력이 중립을 지지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중립에 유리하게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유순하다던 국왕이 나서서 비상대권을 발동하겠다고 위협하였고, 살란드라 내각을 이용해 연합군과 동맹군 각 측에 참전을 골자로 한 비밀 회담을 하게 했다. 당연히 의회는 분노해 날뛰었고, 국왕은 의회의 절차를 무시한 채 이탈리아의 참전을 추진하였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엄청난 식민지를 약속받고 이탈리아는 1915년에 독일-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했으나 전쟁기간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다.

4 집권 중반기 : 무솔리니 정권기

국왕과 내각에 의해 추진된 1차대전은 결국 이탈리아가 가담한 연합국측의 승리로 끝났으나 이탈리아 입장에선 원하는 만큼 충분한 대가를 얻지 못했다. 이탈리아가 획득한 영토는 아드리아해 북부의 약간의 일리리아 지방과 남부 티롤에 그친 반면, 60만 명이 넘는 전사자와 수십만 명의 부상자라는 막대한 인명피해, 그리고 심각한 전비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이처럼 말이 좋아 승전국이지, 막대한 희생에 비해 얻은게 없다는 인식이 이탈리아 전역에 들끓었고 지들이 지지리도 못싸워서 그렇단 생각은 못한다[3]1920년부터 이탈리아 사회와 정치권은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특히 의회는 어느 당도 안정적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채 좌우파간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총리가 심심하면 바뀌는 등 지도력 부재의 상황에 빠져 있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역시 1차대전의 참전에 책임이 있었고, 이탈리아에서 왕에게 부여되던 권한을 엉뚱한 데 써버린다

1922년 10월 22일, 파시스트당 당수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를 추종하는 4만 여명의 검은 셔츠단이 수도 로마로 진군을 시작했다. 루이지 팍타(Luigi Facta) 총리는 어영부영 망설이다가 뒤늦게 강경 대응으로 방향을 잡고 국왕에게 계엄령 선포와 진압 부대 동원을 요청했다. 사실 검은셔츠단이 로마에 도착한 10월 말엽 그 수는 7천 여명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도 즉시 진압이 가능한 상태였다.[4]

그리고 이들을 확실하게 진압하기 위해 총리가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해 재가를 요청하자, 국왕이 재가를 거부하여 검은 셔츠단 진압을 막았다! 국왕은 약 3달동안 의회가 정부구성도 못해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판국에 검은셔츠단이 끝내 로마까지 들어온 점에 주목했고, 의회 내 정당들이 정부를 구성할 것을 기다리며 언제까지 임시 총리 체제로 갈수도 없다고 제멋대로 판단했다. 더군다나 이탈리아 사회주의 세력은 7월 31일부로 전국적 총파업에 돌입, 안그래도 선왕의 암살로 좌파 세력을 멀리하던 국왕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우려까지 부추기고 있었다.

이러한 기존 정치권의 혼란과 사회주의 혁명의 우려 속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사회주의 세력의 준동을 막고 정치권의 혼란을 막아줄 인물로 로마 진군을 단행한 베니토 무솔리니에 기대를 걸었고, 국왕의 권한으로 베니토 무솔리니를 총리에 지명해 버렸다! 사실 무솔리니도 의회 내 우파 정치권의 혼란과 분열을 틈타 파시스트당 우위의 연립내각을 구성하려는 목적이었는데 느닷없이 국왕이 직접 너님 총리 해보시졈? 했던 것.

이후에는 국왕의 현안정치 개입권한을 발동하지 않고 조용히 잘 살았다.(…) 가끔 무솔리니랑 사진도 찍어주며 무솔리니 파시즘 독재체제의 기반이자 얼굴마담 역할도 충실히 해주었고, 무솔리니도 정치현안에 개입하지 않은 국왕에게 충분한 예의와 대접을 보여주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로선, 무솔리니 기용으로 좌파도 다 척결되어 사회주의 혁명 걱정도 없어진 데다가 지긋지긋한 정치적 혼란도 수습되었기에 매우 만족스러웠던 것.

이후 무솔리니의 침략 전쟁 수행과정에서 에티오피아 황제와 알바니아 국왕을 겸하게 된다.

5 집권 말기 : 축출된 군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독일의 동맹으로서 연합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이탈리아는 다시 전쟁에 휘말렸다. 그리고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에서 보여주듯 신나게 털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침공 실패에 일종의 에피소드 정도로 웃어넘길 수 있었으나 사실상 건드릴 필요가 없던 그리스 침공에서 약소국가 그리스에게 털려서 독일의 구원을 받아야 하질 않나,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20만 대군이 2만에게 뼛속까지 털리면서 본진인 리비아까지 모두 토해내고 독일군이 와서야 겨우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롬멜이 점령하려고 그렇게 애쓴 토부록 요새는 애시당초 이탈리아 것이었고, 영국군이 점령한 상태였음을 상기하자.(…)

이처럼 전황은 심각하게 불리해져만 가는데, 1943년에 들어 북아프리카 전역이 종결되며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리비아 등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의 모든 식민지를 상실하였고, 북아프리카 전역을 종결지은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침공하는 일은 기정사실화되었다. 결국 연합군은 남부 시칠리아 섬에 상륙, 이탈리아 전선이 시작되었다.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고, 노동자들은 종전을 희망하는 총파업에 나서고 있었다. 뒤이어 7월 19일에는 연합군 공군에 의한 대규모 로마 공습이 이뤄져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7월 24일, 연합군이 로마에 대규모 공습을 단행한 직후 열린 대 파시스트 평의회에서 19 대 7로 무솔리니 축출을 결의했다. 이에 격분한 무솔리니는 너님들 다 뒤져씀!! 국왕 폐하가 너님들 다 혼내줄 거임!!하면서 국왕을 알현했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위기를 느껴 21년만에야 무솔리니에게 클레임을 걸었다. 21년 전 무솔리니를 총리로 기용한 그 권한으로 이번에는 그 무솔리니를 실각시킨 것이다. 국왕은 무솔리니에게 이제 그만두는 게 어떤가?하며 실각을 선고했고, 마지막 동아줄로 믿은 국왕에게 버림받은 것을 깨달은 무솔리니는 얌전히 실각당하고, 즉시 국왕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연금당했다.

이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국왕 권한으로 새로운 총리로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임명한 다음 연합국과의 강화를 지시하는 등 항복과 종전을 주도했다. 이때가 국왕으로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가장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선 때였다. 결국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한 다음 그는 정부 지도부와 함께 독일군을 피해 연합군이 점령했던 이탈리아 남부로 피신했다.

1944년 6월 로마 탈환 이후 로마로 귀환했으나 왕가는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이후의 대독전 수행에 있어서도 이탈리아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패전국 대우를 받았으며, 전 국토는 전쟁으로 황폐화되었다. 이런 일을 벌인 주범인 무솔리니는 종전 직전에 처단되었으나 국민들(특히 북부)은 무솔리니 다음으로 책임이 막중한 국왕에 대해서도 원망했다.

6 퇴위와 말년

결국 공화파가 주도하여 1946년 6월 2일 왕정 폐지 찬반 국민총투표가 예정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어떻게든 왕정을 유지하기 위해 인기가 없는 자신이 퇴위하는게 낫다고 보고 5월 9일 퇴위 후 아들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했으나 결국 국민투표는 46:54로 왕정 폐지로 결론이 났다.

200px-Italian_referendum_1946_support_for_republic.svg.png
무솔리니 실각과 함께 연합군에 점령되었던 남부는 군주제 지지 여론이 강했던 데 비해, 독일군이 개입하여 주전장이 되었던 북부는 공화제 수립 여론이 강했다.

이후 다른 왕실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로 망명하였고,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래도 전범재판에 서는 일은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7 기타

187px-Albert_I_and_Victor_Emmanuel_III.jpg
키가 불과 153cm였다. 위는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와 찍은 굴욕샷사진.

키 때문에 다른 굴욕을 당한 적도 있었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에마누엘레 3세의 단신을 놀리기를 좋아했다. 에마누엘레 3세가 독일을 방문하자 빌헬름 2세는 일부러 체격이 큰 장병들을 선별해서 의장대를 구성해 방문 행사에 동원했다. 에마누엘레 3세의 키가 더욱 돋보인(?) 것은 물론이다.

kingandmussolini.png

제2차 세계대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추축국의 지도자 중에서 독보적으로 인지도가 낮은데다 풍자도 덜 당한 인물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연합국에서 만든 프로파간다를 보면 풍자되고 있는 것은 아돌프 히틀러, 히로히토,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보면 알겠지만 저 셋 중에서 무솔리니만 국가원수가 아니다. 연합국에서는 입헌군주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보다는 파시스트 당의 지도자인 무솔리니가 훨씬 더 전쟁의 주동자에 가깝게 보였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도 그렇긴 했다. 히로히토 역시 마찬가지로 입헌군주였으나 일본군이 허구헌날 전장에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다보니 자연스레 연합국 측에서는 덴노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일본군과 히틀러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독일군이 겹쳐보인 것이다. 이 때문에 전쟁 중에는 히로히토가 히틀러, 무솔리니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풍자되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모든 전범 조사가 끝난 뒤에는 태평양 전쟁의 실제 기획자였던 도조 히데키가 히틀러, 무솔리니와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고 히로히토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같은 위치 정도로 밀려났다. 그러나 도조가 전쟁의 원흉이였다고 해도 전쟁을 허가한 히로히토 역시 책임이 있듯이, 설령 무솔리니가 전쟁의 원흉이었다고 해도 전쟁을 허가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역시 책임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히로히토 이상으로 힘 못쓰는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풍자를 당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당시 헌법상으로는 둘의 권한이 거의 동급이였지만, 오히려 실질적인 권한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더 강했던 면도 있다. 히로히토는 도조와 군부의 눈치를 보며 행동하느라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것이였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그냥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당을 신뢰했기에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고 그들에게 맡겨둔 것이였다. 또한 히로히토를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보고 있던 도조와는 달리 무솔리니는 진심으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충성하고 있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이제 그만하는 것이 좋겠네.'라는 한마디에 무솔리니는 그토록 고집스럽게 진행하던 전쟁을 스스로 그만두고 포기해버렸을 정도였다. 또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권한을 직접 행사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엄연한 이탈리아 군의 통수권자로서 전시상황을 모두 보고 받았고, 이탈리아 군의 작전도 빠짐없이 그대로 보고받아 무솔리니만큼이나 전시상황을 정확하게 잘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비록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탈리아 군이 저지른 잔혹행위가 많지 않았지만, 이탈리아가 직접 확장한 달마티아, 알바니아, 티롤 등에서 이탈리아 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들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모두 알고 있었으나 그냥 방관했다. 그리고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허가하여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 군이 생화학 무기를 사용하는 것까지 허가했다. 한마디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고한 꼭두각시가 라기보단 전쟁의 방관자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1. 파시스트들의 로마 진군은 충분히 진압이 가능한 수준이었고,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로마 진군 소식을 듣고 스위스로 도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2. 1896년에 단행된 에티오피아 침공전쟁에서 이탈리아 원정군이 대참패해 궤멸당하고 에티오피아에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맺은 바가 있다. 명불허전 이탈리아군이랄까.
  3. 저 60만 전사자가 다 이손조 하나를 12차에 걸친 공격에도 뚫지 못해서 발생한 것이다
  4. 일단 제대로 무장을 갖춘 인간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