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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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역사
Historia de Españ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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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백작령
후우마이야무라비트무와히드나스르
718년 ~ 1492년1492년 ~ 1931년1931년~
스페인국
Estado Español
국기국장
1936년 ~ 1975년
국가척탄병 행진곡(Marcha Granadera)
위치오늘날의 스페인
아프리카 식민지
수도부르고스 (1936년~1939년)
마드리드 (1939년~1975년)
정치체제왕정(명목상)[1]
일당독재
국가원수(명목상)
정부수반총통(Caudillo)
언어스페인어[2]
주요사건1936년 스페인 내전
통화에스파냐 페세타
성립 이전스페인 제2공화국
멸망 이후스페인 왕국

1 개요

1936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군부 세력이 공화정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뒤 세운 정부조직. 공식명칭은 스페인국 혹은 에스파냐국이지만 보통 '프랑코의 스페인(España franquista)'이라고 많이 부르는 편이다. 3년의 걸친 내전끝에 1939년 스페인 전역을 장악했으며, 이후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할 때까지 일당독재[3]를 펼쳤다. 프랑코 사후 프랑코의 유언에 따라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한 이후로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2 정치

나는 오로지 하느님과 역사 앞에서만 책임을 질 뿐이다. - 프란시스코 프랑코
위대한 스페인은 평등 선거나 의회 민주주의 때문에 망했다. - 프란시스코 프랑코
우리는 투표 행위 따위의 위선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얻지 않았다. 우리는 총칼로써 그리고 가장 훌륭한 동지들의 피로써 정권을 얻었다. - 프란시스코 프랑코

설명이 必要韓紙?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독재 그 자체였다.

2.1 권력의 집중

1938년 8월에 내전에서 승기가 굳어지자 프랑코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법률과 법령을 공포할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이어서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1939년에는 팔랑헤 당만이 유일한 스페인 내 합법정당으로 선포되었으며 1942년에는 정부조직법을 통과시켜 모든 권력을 중앙정부와 총통(Caudillo)에게 집중시킨다. 애초에 직접선거로 뽑히지도 않았던 의회는 단순히 자문기구로 전락해버렸고 모든 법률은 정부에 의해서 상정되었다. 기존 스페인 제2공화국이 카탈루냐, 바스크 지역에게 줬던 자치권 역시 당연히 폐지. 모든 지방 정권의 수장들은 프랑코에 의해서 임명된다.

2.2 권위주의

최근들어 몇몇 스페인의 사학자들은 프랑코 정권을 파시즘으로 분류하기보다 단순히 권위주의 독재 정권으로 분류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유는 프랑코 정권이 어떤 하나의 통일된 이념을 갖춘 것이 아니라, 지주/가톨릭/군부 등 다양한 세력들이 각자 다양한 목표를 갖지고 결합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장 프랑코 본인만 하더라도 무정부주의공산주의에 격렬한 반감을 드러냈을 뿐, 그 외에 딱히 특별한 정치적 지향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프랑코의 팔랑헤 정권은 권위주의적인 철권통치로 일관했다. 모든 정치적 결사와 노동조합은 폐쇄됐으며 좌파계열인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모조리 투옥되었다.[4] 언론의 자유 역시 존재할 리가 만무했다. 언론이 정부를 조금이라도 비판했다가는 바로 폐간 크리에다 코로 추로스를 먹을 각오를 해야했다. 여기에 프랑코가 직접 조직한 비밀경찰이 사회의 곳곳을 감시하면서 반정부적인 움직임이 나타나는지 안나타나는지를 감시했던 것은 덤.

2.3 민족주의

프랑코는 '하나의 스페인'을 만드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페인의 각 지역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심히 못마땅했던 프랑코는 기존의 제2공화국이 각 지역에게 부여했던 자치권을 뺏은 건 기본이고 바스크어, 카탈루냐어 같은 지방의 토착어까지도 '비스페인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철저히 탄압시켜버린다.[5] 반대로 '스페인적인 것' 혹은 스페인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투우플라멩코는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2.4 가톨릭주의

프랑코는 본인의 신앙심은 여지껏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지만[6] 팔랑헤 당원들 대부분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그들에게는 가톨릭이야 말로 스페인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주/가톨릭 신자/군부 등등 온갖 다양한 세력이 이합집산한 팔랑헤 당에서 가톨릭이야 말로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프랑코 정권은 굉장히 교회에게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해준다. 결혼과 이혼은 무조건 교회의 성사를 통해서 진행되어야 했으며, 제2공화국 시기 몰수된 교회의 재산을 반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시금 가톨릭 사제들이 스페인의 공교육을 담당하는 것까지 허락하는 파격적인 정책을 취한다. 막대한 금전적인 지원은 덤. 1953년에는 교황청과도 협상을 체결해 교황청이 직접 스페인의 주교를 임명하는 정책을 재개하기에 이른다.

2.5 역대 국가원수

2.6 역대 내각수반(수상)

  • 프란스시코 프랑코(1936~1973)
  • 카레로 블랑코(1973.1~1973.12)
  • 아리아스 나바로(1974.1~1975.11)[8]

3 사회

3.1 문화

스페인 내전을 거치면서 재능있고 망명있던 예술인들 대부분이 살해당하거나, 박해를 피해 해외로 망명을 떠나면서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심각한 문화적 공백에 시달리게 된다. 이를 메꿔준 것이 바로 3S 정책, 그 중에서도 영화와 축구였다. 프랑코 정권은 많은 수의 영화관을 건설하였고 그 결과 1950년대 후반에 이르면 스페인은 미국 다음으로 영화를 많이 소비하는 국가가 된다. 물론 그렇다고 영화를 자유롭게 제작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정권의 구미에 거슬리는 내용이 있으면 여지없이 뭉텅무텅 가위질을 당해야했다. 심지어 정권의 검열을 통과한 뒤에도 가톨릭 교회의 검열을 통과[9]해야했기 때문에 영화의 예술적 수준은 안습수준.

게다가 이 시절 언론, 문화 탄압 과정의 일부로 스페인에 들어오는 모든 해외 영화는 혹시나 외국어 할 줄 아는 시민이 '위험한 사상'을 접촉 할 가능성이 있는 자막이 아니라 소위 그 '위험한 내용' 자체를 아예 원천적으로 검열삭제 할 수 있는 더빙만 강제하여 현대 스페인인들의 영어 밑 외국어 구사 능력이 유럽에 있는 관광 대국 치고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

축구 역시 프랑코 정권에게 이용당했다. 레알 마드리드가 대표적. 이 시기 레알 마드리드UEFA 챔피언스리그를 5연패하는 기염을 토해내면서 스페인 대중들에게 암울한 정치 현실을 잊게 해주는 환각제로의 역할을 톡톡히 함으로써 프랑코 정권의 정당성에 이용되었다.

왜 그런지는 레알 마드리드 CF/오해 참조.

3.2 경제

20세기 이후로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프랑코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 스페인의 경제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특히나 3년에 걸친 내란은 스페인의 경제 상황을 19세기 수준으로까지 추락시켜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스페인의 경제, 특히나 식량 상황은 최악의 상황에 놓인다. 이러한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프랑코 정부가 처음에 채택한 정책은 바로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을 통한 경제 자립'자력갱생??이었다. 관세를 높여서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한편으로 무역과 환율 역시 시장의 원리가 아니라 국가의 통제하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1960년대에 이르면서 프랑코 정부는 자신들의 정책을 180도 전환시킨다.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을 포기하고 시장 원리에 경제를 맡기는 한편으로, 고립주의를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해외투자를 유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효과를 불러왔다. 특히나 관광업의 발달이 눈부셔서 프랑코의 사망 즈음에는 해마다 3,000만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스페인을 방문하여 관광업은 스페인 경제에 있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자리잡는다.[10]

3.3 민주화 운동

프랑코의 철권 통치하에 1950년대까지 각종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은 스페인 내에서 거의 일어나지 못했다. 이 시기 반체제 운동은 대부분 망명객들이 외부에서 조직한 반체제 운동, 아니면 반대로 외부와 연계나 구호의 가능성 없이 북부 지방의 산맥이나 대도시의 구석에서 고립 되어 소규모로 반프랑코 빨치산활동을 하다가 하나 둘 씩 격파 당한 희망 없는 옥쇄성 빨치산 활동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프랑코 내각은 경제성장하려면 외국의 눈치를 봐야해서 독재의 강도를 완화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사회 곳곳에서 각종 정치적인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다. 그리고 이 틈을 타 국외에 머무르던 공산당,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계열의 제 2 공화국 시절 부터 프랑코와 대립했던 오랜 숙적, 좌파 정당, 노조들이 재침투하여 다시 영향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을 시작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다시금 노조가 비밀리에 결성되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학생들 역시 반 프랑코 운동의 선두주자로 나서기 시작한다. 심지어 1969년에는 프랑코의 동상이 시위중이던 대학생들에 의하여 파괴되었으며 1972년에는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프랑코의 절대권력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프랑코를 가장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은 믿었던 교회의 배신이었다. 물론 기존의 꼴통 기성 사제들이야 변함없는 프랑코의 지지자였지만 젊은 사제들은 적극적으로 사회변혁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대놓고 표출하는가 하면, 노조 및 학생단체와 함께 사회 변혁 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바스크 지역에서는 바스크 족 출신 사제들이 ETA에 가입하는 가 하면 미사바스크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11]

4 프랑코의 사망, 그리고 독재의 종식

1975년 83세의 나이로 프랑코가 사망한 이후 프랑코주의가 계속 유지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프랑코 사망 직후에는 비밀경찰들이 계속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반대파들을 투옥하는 모습을 보여서 독재가 지속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팽배하였으나 국왕으로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주도하에 아돌포 수아레스가 총리로 임명되고 수아레스 내각이 정치범 석방, 공안 재판부 폐지, 바스크·카탈루냐 지방의 자치 허용과 같은 정책을 실시하면서 서서히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의회군주제 및 민주적 법치국가' 및 '스페인 전역의 자치권 허용'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헌법이 1978년에 통과되면서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최종적으로 안착된다.[12]
  1. 1947년에 공식적으로 왕정복고를 선언했다. 하지만 1969년 공식적으로 후안 카를로스가 계승자로 지명되기 전까지 왕실이 없는 왕정(...)이었다.
  2. 단순히 공식언어로 스페인어를 지정한게 아니라 카탈루냐, 바스크 지방에서 쓰이던 토착언어를 철저히 탄압해버렸다.
  3. 프랑코가 수장으로 있는 팔랑헤당만이 유일한 정당이었다.
  4. 심지어 단순히 민주주의를 옹호했다가 체포된 사람까지 있을 정도(...)이다.
  5. 한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프랑코 본인도 갈리시아어가 모국어인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조지아에서 태어났음에도 누구보다 러시아를 사랑했던 그 분이 생각나는 건 기분탓이다. 다만 프랑코 가문은 그 뿌리가 안달루시아에 기반하고 있으며 나중에 갈리시아로 이주했다. 프랑코는 갈리시아어도 잘 구사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운동 자체가 아예 없는건 아니지만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의 탄탄한 공업과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을 토대로 하나의 거대한 정치 운동으로 발전한 저 두 지방의 지방주의와 달리 갈리시아는 예나 지금이나 목가적인 어촌 중심에 개발도 별로 안 되었고, 산티아고 순례지가 위치한 곳으로 정치적 근대주의와 소원한 지방이다 보니 중앙 국가에 도전할만한 지방 민족주의 자체가 현저하게 약했다
  6. 어떤 사람은 독실한 신자였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정확히 하는 사람이 수정바람.
  7. 두번 다 프랑코가 위독해지면서 임시 국가원수 대행을 맡았다.
  8. 이후 스페인 왕국 체제에서 수상직을 유임하나 1976년 7월 1일 후안 카를로스의 압박으로 사퇴한다.
  9. 상술했듯이 프랑코 정권은 가톨릭 교회와 밀월관계였고, 이 밀월관계속에서 교회에게 선물한 것 중 하나가 영화 검열권. 덕분에 조금이라도 야하면 또 가위질이 뭉텅뭉텅(...).
  10. 여담이지만 외국관광객들이 비키니 입고 스페인 해변에서 놀러다니자 꼴통 가톨릭 주교들이 프랑코에게 '우리 스페인에서는 저런 모습 절대 허용할 수 없다'라며 거세게 항의를 했다고 전해진다.
  11. 이때 프랑코가 반정부 성향의 사제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하면서 내뱉었던 말이 일품이다. '나는 하느님에게 책임을 지지 교회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12. 물론 1981년에 극우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시도하는 등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현명한 대처 덕에 무난히 진압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