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케 마스폴리

MASPOLI.jpg
우루과이를 구한 세이버

이름로케 가스톤 마스폴리 아르벨비데
(Roque Gastón Máspoli Arbelvide)
생년월일1917년 10월 12일
사망년월일2004년 2월 22일
국적우루과이
출신지몬테비데오
포지션골키퍼
신체조건189cm / 85kg
등번호1[1]
소속팀나시오날(1933~1939)
리버풀(1939~1940)
페냐롤(1940~1955)
국가대표38경기 / 0골(1945~1955)
감독페냐롤(1955)
페냐롤(1963~1967)
엘체(1968~1970)
페냐롤(1970~1971)
에콰도르(1975~1977)
페냐롤(1976)
스포르팅 크리스탈(1977~1978)
우루과이(1979~1982)
페냐롤(1985~1986)
바르셀로나 SC[2](1987)
페냐롤(1988)
페냐롤(1992)
우루과이(1997~1998)

1 선수 생활

1.1 초기 선수 생활

우루과이 대표팀과 월드컵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마스폴리였지만 시작부터 그리 빛을 보지는 못했다. 처음 입단한 클럽인 나시오날에서 6시즌을 보냈지만 그는 6년 동안 단 한번도 주전 자리를 잡지 못했고, 이러한 생활에 지친 그는 결국 리버풀[3]로 이적하게 된다. 리버풀에서 드디어 마스폴리는 주전으로 도약하였고 리버풀은 5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이런 그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 팀이 있었으니 그 팀이 바로 페냐롤이었다. 페냐롤은 그 이전부터 라이벌 나시오날에 비해 총 실점이 조금씩 더 많았다. 그런데 1940년 시즌에서 4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는데 그 위의 상위 3팀이 22실점 정도를 기록할 때 페냐롤은 중위권 팀과 비슷한 38실점을 하여 거의 2배에 가까운 실점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페냐롤은 전력, 특히 수비 보강을 위해 새로운 선수를 찾아다녔고, 팀의 레이더망에 걸린 선수가 바로 마스폴리였다.

마스폴리의 이적 후 1941년 시즌부터 실점을 줄여나가기 시작한 페냐롤은 1942년에는 라이벌 나시오날과 비슷한 수준까지 실점을 끌어내렸고 결국 1944년에는 6년 만에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타이틀을 되찾아오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결승전에서 페냐롤은 마스폴리의 활약에 힘입어 2차전 총 전적 3:2로 나시오날을 꺾었고 이 활약으로 마스폴리는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되었다.

하지만 1945년 이후 페냐롤은 1948년 파업 때까지 내내 나시오날에 밀려 우승에 실패했고, 마스폴리 역시 플라비오 나테로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나테로는 1949년 시즌에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였고 마스폴리는 다시 페냐롤의 골문을 지켰고 생애 첫 월드컵에도 나가게되었다.

1.2 1950년 월드컵

마스폴리는 4경기를 모두 치르면서 대단한 선방들을 보여주었다. 특히 브라질과의 결승 최종전에서 브라질은 전반에만 17개의 슈팅을 날리며 우루과이의 골문을 맹폭격했지만 마스폴리를 축으로 우루과이의 수비수들이 효과적으로 브라질의 공세를 막아내었다. 특히, 아데미르의 헤딩 슈팅을 막아낸 슈퍼 세이브가 백미였다.

후반 2분에 계속되는 브라질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프리아사에게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지만 우루과이는 전열을 가다듬고 후안 스키아피노알시데스 기지아의 연속골로 역전을 이끌어내었다.

훌륭한 선방을 보여주며 팀의 우승을 이끌어낸 마스폴리에겐 골든 글러브가 수여되었다.

1.3 이후

마스폴리는 이후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도 3차례 더 소속팀을 우승시키면서 우루과이 최고의 골키퍼로 명성을 드높였다. 특히 수비형 미드필더 옵둘리오 바렐라와 함께 튼튼한 수비를 구축하였고, 페냐롤의 기세는 대단하였다. 하지만 1952년에는 아쉽게 우승을 놓치고 말았는데 결승전에서 나시오날에게 1차전에서 4:2로 패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 경기에서 마스폴리는 출전하지 못했고 2차전에서야 뒤늦게 나왔지만 망했어요.

1954년 월드컵에도 우루과이 대표팀으로 출전하였고,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좋은 활약을 펼치며 팀을 준결승까지 이끌었다. 준결승의 상대는 당대 최강의 팀 매직 마자르. 우루과이는 결국 연장에서 산도르 코치슈에게 2골을 허용하고 4대 2로 패배하고 말았다.

1955년 코파 아메리카를 마지막으로 마스폴리는 장갑을 벗었다.

2 감독 생활

감독 생활을 여러 팀에서 많이 했지만 가장 그의 지도력이 돋보였던 시기는 1960년대 중반이었다. 그는 페냐롤을 이끌면서 리그 우승 3회와 함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2번째 우승을 이끌어냈고,[4] 특히 유럽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2차전 합계 4대 0의 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1967년에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지만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 이후는 이 시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다.

1982년에는 우루과이 대표팀을 맡아 월드컵 본선을 노렸지만 페루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탈락. 마스폴리는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고 말았고, 페냐롤에서 몇 차례 우승을 더 맛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97년 80세의 나이로 다시 우루과이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고 월드컵 본선을 목표로 했지만 그 때에도 진출에는 실패하였다. 이후에 감독에서 은퇴한 마스폴리는 2004년 12월 10일, 심장 문제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12일 후인 22일에 숨을 거두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민첩성과 반사신경이 좋은 골키퍼였다. 하지만 1950년 월드컵에서는 캐칭 미스를 몇 차례 선보였고 그로 인해 실점하기도 하는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4 수상

4.1 클럽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9회: 1933, 1934, 1939(이상 나시오날), 1944, 1945, 1949, 1951, 1953, 1954(이상 페냐롤)

4.2 국가대표

FIFA 월드컵 우승 1회: 1950

4.3 개인

FIFA 월드컵 베스트 골키퍼 1회: 1950

4.4 감독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6회: 1964, 1965, 1967, 1975, 1985, 1986(이상 페냐롤)
에콰도르 세리에 A 우승 1회: 1987(이상 바르셀로나 SC)
인터컨티넨탈 컵 우승 1회: 1966(이상 페냐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1회: 1966(이상 페냐롤)
  1. 1950년 월드컵 당시에는 등번호가 포지션에 의해 정해졌다. 1954년 월드컵에서도 1번을 달았다
  2. 에콰도르의 클럽이다. 바르셀로나 출신이었던 창립자 에우티미오 페레스가 그의 고향 클럽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3. 우루과이의 리버풀로 잉글랜드의 리버풀 FC와는 다른 팀이다
  4. 페냐롤 최초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은 1961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