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7세

프랑스의 역대 국왕
루이 6세루이 7세필리프 2세
이름소 루이(Louis le Jeune)
생몰년도1120년 ~ 1180년 9월 18일 (59세)
재위기간1137년 8월 1일 ~ 1180년 9월 18일
출생지불명
사망지프랑스 알리에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의 6대 왕으로 루이 6세와 모리엔의 아델라이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즉위 직후 추종자 중의 한 주교를 대주교로 승격시키려다가 교황과 상파뉴 백작과 대립하게 되었다.

원래 아키텐 공작의 상속녀인 엘레오노르와 혼인하였으나, 1152년 이혼했다. 엘레오노르는 아버지 기욤 10세로부터 아키텐 공국과 푸아티에 백작령의 광대한 영지를 15세에 계승했다. 아키텐 지방의 영주들의 충성서약에도 불구하고 훗날이 걱정된 기욤 10세는 영지를 지켜줄 유력한 사윗감으로 상위 주군인 프랑스 왕 루이 6세의 아들 루이 7세를 점찍고는 루이 6세를 후견인으로 지명했다. 아버지가 죽은 지 3개월 후 루이 7세와 결혼한 엘레오노르는 루이와 함께 파리로 이동하던 중 루이 6세의 죽음과 함께 프랑스의 왕비에 올랐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의 왕비 시절 제2차 십자군에 참가했으나, 다마스쿠스 공략에 실패하고 철수했다. 그 원정은 가장 실패한 원정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결과로 끝났고 이전부터 쌓여왔던 둘 간의 불화가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엘레오노르는 이후 각종 중세 문학에서 살라흐 앗 딘과의 염문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선 이에 대한 증거가 없는데다, 엘레오노르가 십자군 원정에 참가할 당시 살라흐 앗딘은 많이 잡아야 10살 내외의 소년이었으므로 후대의 창작에 불과하다.

이후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했으나,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엘레오노르에게서 아들을 얻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루이 7세는 이혼에 합의한다. 결국 1152년 3월 11일 교황은 10촌의 근친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무효화했다. 하지만 결혼 무효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딸들은 적녀로 인정받았고 양육권은 루이 7세에게 넘어갔다. 대신 그녀는 결혼 전의 영지를 되돌려받기로 했다. 결혼 취소가 승인되자마자 엘레오노르는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이며 자신의 친척이었던 9세 연하의 헨리 플랜태저넷과 약혼했다. 이 헨리가 바로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2세가 되었다. 즉, 잉글랜드의 국왕이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프랑스 내의 노르망디와 앙주, 아키텐의 방대한 영지를 가진 셈이 되어서 후에 지속적으로 전개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대립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루이 7세의 치세 기간 중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건축도 시작되었다. 1180년 알리에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