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딘이라고 추정되는 그림
1 개요
Ṣalāḥ ad-Dīn Yūsuf ibn Ayyūb (1137 ~ 1193.3.4)
정의와 신념[1]
이슬람 세계에서 강력함과 관대함으로 대표격되고 심지어는 적이었던 기독교 세계에서도 회자되는 영웅
'살라흐 앗 딘(صلاح الدين)'이라고 표기하지만 '앗'은 보통 온전히 읽히기보다 이전 음과 합쳐져 'ㅅ'받침처럼 발음되므로 '살라 흣 딘'이라고 읽힌다고 보면 되다. 빠르게 발음하면 우리가 아는 표기인 살라딘과 가까워진다. 참고로, 킹덤 오브 헤븐에서 살라흐 앗 딘 역을 맡은 시리아 배우 가산 마수르는 "살라 훗 딘"에 가깝게 발음한다. 원어를 잘 아는 사람이 추가바람.
십자군 전쟁에서 이슬람군을 이끌었던 지도자이자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이며 인류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장.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름을 전부 쓰면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아부 알 무자파르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이븐 샤디 이븐 마르완 알 아이유비(الملك الناصر ابو المظفر 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ابن ايوب ابن شاﺬي ابن مروان الايوبي)'. 이를 해석하자면 '승리의 왕(알 말리크 안 나시르), 승리의 아버지(아부 알 무자파르), 신념(이슬람)의 정의인(살라흐 앗딘), 아이유브 일가의 마르완의 아들인 샤디의 아들인 아이유브의 아들 유수프'. 즉 유수프(يوسف)가 본명이다. 쿠란의 등장 인물인 유수프와 아이유브가 이름에 들어있다.
2 일대기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에서[2] 쿠르드족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대부터 모술과 알레포의 영주인 이마드 앗 딘 장기(عماد الدین زنكي, Imad ad-din Zangi)와 그의 아들 누르 앗 딘(نور الدين, 일명 누레딘)을 섬겼다. 누르 앗 딘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지하드의 기치 아래 무슬림들을 단합시켰고, 십자군과의 전쟁에서도 많은 승리를 거두며 '성왕(聖王)'으로 칭송받았다.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 아이유브는 지략으로,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는 뛰어난 용병술과 무용으로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살라흐 앗 딘 역시 젊어서부터 누르 앗 딘의 측근이 되었다.
살라흐 앗 딘의 이름이 처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집트 정복 때였다.[3] 살라흐 앗 딘은 삼촌 시르쿠의 부관으로 이집트군과 십자군을 동시에 상대하며 4차례에 걸친 어려운 전쟁 끝에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총사령관인 시르쿠가 식사 중 폭식하다가 급사하면서(...) 권력의 공백이 생겼고, 이집트 관리들에 의해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의 새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이집트 관리들이 살라흐 앗 딘을 지지한 것은 그가 순전히 삼촌의 빽으로 성공한 우유부단한 젊은이라고 판단해서였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살라흐 앗 딘은 대단히 민첩한 대응으로 순식간에 이집트 전역을 자신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후 살라흐 앗 딘은 겉으로는 누르 앗 딘에게 충성을 바치는 한편 군대를 보내 수단과 예멘 일대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한다.[4] 이후 살라흐 앗 딘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이를 경계한 누르 앗 딘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쳐들어가려고 했지만 60세가 넘은 고령이었던 탓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사망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오히려 살라흐 앗 딘은 누르 앗 딘의 아들의 보호자로 자청하고 누르 앗 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조금씩 지지기반을 다지다가 누르 앗 딘의 영토를 날름 집어삼켜 버렸다.
이후 누르 앗 딘 세력의 잔당을 처리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아라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다. 그 역시 누르 앗 딘의 정책을 이어받아 지하드의 기치를 계속 내걸었지만, 이집트에서 거병한 1174년부터 이라크 북부의 모술을 점령하는 1186년까지는 십자군과는 휴전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른 이슬람 반발 세력들을 흡수, 통합하는 시기로 삼았다.
하지만 르노 드 샤티용[5]의 무력 도발로 인해 휴전은 깨졌고,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 왕 기 드 뤼지냥 휘하의 십자군 주력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킴으로써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켰다.[6] 그 여파로 3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 3차 십자군에 불행히도 '사자심왕(Lion Hearted)' 리처드 1세가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못 봤다. 하지만 십자군은 하나로 뭉치지 못했고 전략적인 안목 또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의 승리에 비해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3차 십자군은 해안 여러 도시들을 다시 점령했지만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예루살렘 진격을 시도했을 때도 보급로 확보 문제와 내부 불화로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해야 했다.
2.1 십자군 전쟁의 끝에서
3차 십자군이 야파에서 살라흐 앗 딘의 공격을 물리친 직후,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가 리처드의 동생 존과 짜고 리처드의 프랑스 내 영토를 박탈하여 리처드도 더 이상 원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에게 '부활절까지 돌아올 테니 그때 결판을 내자'라고 약속하였고 살라흐 앗 딘도 그에 응했다. 아쉽게도 살라흐 앗 딘은 약속일인 부활절 3주 전에 다마스쿠스에서 병사했다. 리처드도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유시에 맞아 죽었다.[7]
이때의 휴전 조건이 예루살렘 순례자를 박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기독교도 쪽에서도 십자군 전쟁의 명분을 살렸다고 할 수 있고, 이슬람 쪽에서는 살라흐 앗 딘의 치세 이후로 순례자를 박해한 적이 없으므로 문제 될 것이 없는, 그런 대로 원만하면서도 별 내용 없는 타협이었다고 할 수 있다.[8]
3 능력
그 자신의 능력과 카리스마만으로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이뤄낸 인물답게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굉장히 뛰어났다.
당시 십자군의 주요 도시들은 레반트 해안가를 따라 길쭉하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전선이 길게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전적으로 살라흐 앗 딘이란 거인에게 의존했던 아이유브 왕조인지라 살라흐 앗 딘은 여러 개의 부대를 편성해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한 적이 드물었다. 대부분의 전투는 자신의 주력군을 이끌고 각 거점을 순차적으로 공격하는 식으로 이루어졌고, 자연히 길게 뻗은 전선을 오가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십자군이 다양한 소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 왕국만 신경 쓰지 못하고 에데사 백국, 안티오크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 많은 기독교 소국들에게 신경을 분산시켜야 했다. 더군다나 이때의 십자군은 협소한 영토에 병력난, 물자난에 시달렸던 12세기의 십자군들과 달리 꽤나 강성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살라흐 앗 딘은 기독교계 소국가들 뿐만 아니라, 장기 왕조의 여러 공국들에게도 늘상 신경써주어야 했다. 누르 앗 딘의 세력은 대부분 흡수했지만 모술에 중심을 둔 장기 왕조의 다른 왕자들은 건재했기 때문.
그래서 어떤 때는 무력으로 어떤 때는 조약을 통해 기독교 소국들 및 이라크의 장기 왕조계 소국가들과의 관계를 조율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전술적인 패배는 있을지언정 전략적으로 큰 실패를 경험한 적은 없다.
4 인품에 대한 평가
기독교도측에서 보면 적의 수괴였지만, 놀랍게도 당시 기독교 세계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관련 소설 'Amulet' 등을 보면 십자군의 누구보다도 신사적이고 기사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도 살라흐 앗 딘을 지옥이 아닌 림보에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9] 또 3차 십자군 이전까지는 적인 십자군 포로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살라흐 앗 딘의 누이를 포함한 죄 없는 대상들을 공격하였으며 메카와 메디나까지 약탈하려고 시도했던 르노 드 샤티용 정도. 그는 예루살렘 탈환에 큰 영향을 준 전투인 하틴 전투가 끝난 후, 살라흐 앗 딘에게 직접 처형당했다. 물론 당장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 주변에 있던 라틴 국가들을 점령하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재앙 취급을 받았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기록자인 티레의 기욤은 그의 관용함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그 관용에서 나오는 병크[10]를 크게 묶어 까는 것을 잊지 않았고, 어떤 수도사의 기록에서는 '안티 크라이스트 이전의 마지막 재앙' 중 한 명재앙되기 참 쉽죠?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그 시기에 나온 살라흐 앗 딘을 그린 기록을 본다면 푸른 피부를 가진 악마처럼 그리는 기록도 있다. 즉, 살라흐 앗 딘이 호의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건 엄연히 3차 십자군 전쟁 이후라는 것.
그러나 풀려난 포로들이 곱게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부분 다시 십자군에 합류해서 살라흐 앗 딘과 싸웠기 때문에, 이 점에서는 기독교도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오히려 무슬림들 쪽에서는 무자비한 바이바르스를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살라흐 앗 딘도 사람인지라 리처드를 상대로 고전할 때에는 포로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죽였다. 인간의 군대가 아니니까[11] 심지어 포로로 잡힌 십자군 기사들 중 여성이 있었는데도 같이 죽여버리라고 했을 정도. 그나마 갑옷을 벗기기 전엔 여성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사실 살라흐 앗 딘은 19세기 이후 반식민지 운동에 의해 유명해진 면도 있다. 살라흐 앗 딘의 네임밸류는 적이었던 유럽인들에게는 유명했을 뿐, 19세기 이전까지 이슬람 세계에서는 그렇게까지 인기가 많은 영웅은 아니었던 듯하다. 제국주의가 이슬람 세계를 유린하게 되자, 일제 치하의 우리가 그랬듯이 과거의 영웅이 재발견된 것이다. 물론 유럽에서는 여전히 유명했지만...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던 영웅은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바이바르스였다. 소수민족인 쿠르드 출신의 영웅 따위... 사실 같은 시기에 진정한 지하드를 이끄는 사람으로서의 위용은 누르 앗 딘이 압도적으로 고평가 받았을 정도. 재미있는 점은, 정치적인 행보에서 살라흐 앗 딘과 누르 앗 딘은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두사람다 자신의 군사행동을 지하드임을 강조했고, 점령한 지역에 이슬람식 정치 및 교육체계를 확고히 하는데 힘을 썼다.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무슬림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살라흐 앗 딘의 온정을 '연약함'으로 표현하고 저항하는 적군을 보내준 것을 겁을 먹은 것이라고 깠던 것이다. 이는 기존의 지배자였던 누르 앗 딘의 세력을 흡수한 살라흐 앗 딘을 왕위 찬탈자라고 간주하던, 누르 앗 딘 계열 역사가들의 감정이 이입된 경우다. 대표적인 인물이 모술의 이븐 알 아시르.[12]
살라흐 앗 딘은 또한 정과 눈물이 많은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는데 대표적인 일화로 프랑크족 여인의 아이가 유괴되어 노예시장에 팔려가자 사연을 들은 살라흐 앗 딘이 노예시장에 기병들을 보내 아이를 찾아오게 한 것이다. 여인은 눈물을 쏟으며 크게 감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예루살렘 공성전 당시에는 이벨린의 발리앙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도록 허용해서 예루살렘 방어전을 지휘하게 했다. 사실 이건 방어전을 지휘하라고 들여보낸 것은 아니다. 발리앙은 어디까지나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고 예루살렘에서 살라흐 앗 딘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마땅한 지휘관이 없던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발리앙에게 살라흐 앗 딘과 맞서도록 설득했고, 발리앙은 이에 대해 사과 편지를 보내면서 다시 자기 가족들은 예루살렘에서 나가도록 통행을 허용해 달라고 했다. 약속을 깬 측의 뻔뻔스러운 부탁이었지만 살라흐 앗 딘은 발리앙의 아내가 타고 갈 말을 보내주는 것으로 답했다.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에도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을 약간의 몸값만으로 도피할 수 있게 허가해주었고, 그것도 병자나 노인, 아이 등은 무료로 보내줬다. 몸값이 부족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몸값을 내어주기도 했다고. 게다가 계속되는 예루살렘 왕국의 무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무료로 보내주었고, 가는 길에 노잣돈까지 쥐어주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대주교는 막대한 재산을 싹싹 긁어서 떠나는데 그놈에게까지 낮은 몸값을 받고 호위병을 붙여줘야 하느냐"는 등 무슬림들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이후로 계속되던 십자군 전쟁에 그의 지나친 관대함이 문제라는 지적도 크다. 그로부터 100년쯤 지나 바이바르스가 아크레를 점령할 때, 살라흐 앗 딘과 정반대로 이 도시에 살던 십자군이나 기독교인들을 다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어 팔아버리면서 살라흐 앗 딘의 관대함이 결국 나중에 무슬림들의 피를 흘리게 한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그 중 특히 짐은 관대하다 급의 포스를 풍기는 예는 다음과 같다.
살라흐 앗 딘은 격무에 지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한 노예(맘루크)가 와서 서류를 내밀고 서명을 요구했다. 살라흐 앗 딘은 "나는 너무 지쳤다, 나중에 다시 와라"라고 말했지만, 맘루크는 물러서지 않고 "지금 서명해야 합니다!" 하며 서류를 살라흐 앗 딘의 코 앞까지 밀고 흔들며 재촉했다. 살라흐 앗 딘은 궁여지책으로 "잉크가 없어서 서명할 수가 없잖아." 하고 말했고, 맘루크는 "저기 잉크병 있잖아요" 하고 응수했다. 살라흐 앗 딘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아 잉크병이 저기 있었구만..."이라며 손수 잉크병을 들고 와 서명을 했다. - 바하 알 딘, 살라흐 앗 딘의 비서. |
하지만 여기에서의 노예 '맘루크'를 말 그대로의 노예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맘루크가 원래 노예 계급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전쟁이 거듭되는 사이 군인 노예로 큰 군사적 힘을 지니게 되어 차츰 대우가 좋아졌기에 나중에는 하나의 계급으로 자리잡은 일종의 친위대 내지는 특권계층에 가깝게 되었다. 그러니까 일개 노예가 살라흐 앗 딘에게 깝죽댔던 것으로 생각하는 건 오류. 그래도 최고 지도자에게 저렇게 대하고도 괜찮았다는 점에서 살라흐 앗 딘 치하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최고 지도자고 뭐고 현대의 한국 사회를 생각해보자. 대통령까지 갈것도 없이 바로 위 상사나 선배한테 직장에서 저러는게 상상이 가는가(...)
또 그의 관용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 겨울날, 어떤 사람이 온실에서 기른 장미꽃 한 바구니를 살라흐 앗 딘에게 바치자 감동한 살라흐 앗 딘이 2백 브장[13]을 그 사람에게 하사하겠다며 왕실 재정관에게 명하여 즉시 어음을 끊게 했는데, 실수로 2백 브장이 아닌 3백 브장으로 기재하였고 실수를 알아차린 재정관이 즉시 잘못 기재한 어음을 파기하고 다시 지급하려 하자, "아니, 그럴 것 없다. 사백 브장 짜리로 다시 끊으라. 그대의 펜이 나보다 더 후해서야 되겠느냐..."라면서 오히려 가격을 올려 하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덕분에 로또 터진 장미꽃 주인 오오 역시 대인배 오오.
그는 사자심왕 리처드와 협정을 맺은 후, 리처드와 약속했던 부활절 3주 전에 몸 상태가 악화되어 병상에 누웠는데 병세가 호전되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다. 살아 생전 굉장히 검소했던 탓에 그의 장례식 때는 돈이 없어 일가친척의 지원을 받아 장례를 치뤘다. 다마스쿠스를 방문한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14]가 살라흐 앗 딘의 무덤이 초라한 목제 관인 것을 보고 대리석으로 된 고급 관을 기증했으나 여전히 그의 시신은 목제 관에 안치된 상태이다.
5 현대의 살라흐 앗 딘
살라흐 앗 딘은 이라크 북부의 소수민족 쿠르드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르빌에는 살라흐 앗 딘 대학도 있다. 사담 후세인은 자기 자신에게 살라흐 앗 딘의 이미지를 덧씌우기를 즐겨했다. 그러면서 살라흐 앗 딘의 출신 민족인 쿠르드족은 씨를 말리려 했으니... 시리아 다마스쿠스에는 살라흐 앗 딘의 동상이 서 있는 살라흐 앗 딘 광장도 있다.
살라흐 앗 딘은 이슬람에서 '무함마드', '알리'와 함께 항상 거론되는 최고의 영웅이며, 이런 그의 상징성 덕분에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뒤 시리아를 점령한 프랑스군의 앙리 구로 장군은 그의 무덤에 찾아가 기독교도의 승리를 선언한 일이 있다.
살라흐 앗 딘, 당신은 우리를 쫓아냈지만 우리는 다시 돌아왔소. 여기 서 있는 내 존재가 바로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증언하는 것이오.
찌질해 보인다 그런데 천년 가까이 지난 뒤에 웬 듣보잡이 이래봤자 자신들의 찌질함만 드러내고 살라흐 앗 딘의 위대함만 증폭시킬 뿐이다. 그리고 그 말한 지 반 세기도 되지 않아서 시리아는 다시 독립하고, 그 외의 다른 대부분의 프랑스 식민지도 독립한 걸 봤으면 말 꺼낸 게 무안해질 지경이다.
일세를 풍미했던 그의 유언은 "이제야 유수프가 그의 감옥에서 해방되는구나"였다.
한편, 스탠리 레인 풀(Stanley Lane Poole, 1854~1931)의 살라딘(Saladin: All-Powerful Sultan and the uniter of Islam, 1898)에서는 위와는 다른 유언을 하고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화요일 저녁, 그 충실한 서기와 대법관은 성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술탄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술탄 옆에서는 신학자가 신앙 고백과 코란 구절을 반복해 읽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그분은 유일신이신 하느님이시며 (영계와 속계를 아시는) 자비와 동정의 신이시라"는 구절을 읽자 술탄도 "그 말이 맞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다"는 구절에 이르자 병자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고, 그의 영혼은 하느님께로 올라갔다.(...)
2014년 9월, 천하의 무뢰배 집단 ISIL이 살라흐 앗 딘의 요새를 폭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ISIL이 쿠르드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라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반달리즘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6 대중문화에서의 살라흐 앗 딘
대인배라고 알려져 있던 덕에 과거 유럽에서도 평이 좋은 편이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는 제1옥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등 다른 비기독교인 위인들과 함께 있었다. 다만 홀로 외로이 서있어서 아웃사이더 같아 보인다. 다만 신곡에서의 제1옥이 림보와 동급인 곳이란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대우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선량한 비기독교인"이다. 그 외에도 그의 기사도적인 면 때문인지 서구의 십자군 기사문학 등에도 종종 그 이름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7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왕비였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의 염문설도 나오지만 루이 7세의 왕비 자격으로 그녀가 참여했던 2차 십자군은 1147~1148년에 있었고 당시 20대 중반의 엘레오노르와 달리 살라흐 앗 딘은 겨우 열 살의 소년에 불과했으니 그냥 기사문학 특유의 뻥으로 봐야 할 것이다.
파일:Attachment/살라흐 앗 딘/살라딘.png |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게임 《칭기즈 칸》 시리즈에선 라이벌격인 리처드 1세가 세계정복 시나리오에서 플레이 가능이었는데 비해 별로 운이 없었다. 그나마 원조비사에서 일판에서는 유저 시나리오로 플레이 가능했지만 한국에 정발되며 살라흐 앗 딘은 플레이 불가가 되고 고려가 플레이 가능이 돼버렸다. 하지만 징기스칸 4에선... 굇수. 부하가 다소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전체적인 능력치는 지역 내 최강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정치 83, 전투 91, 지모 84에 전투 특기도 돌격, 연사, 화공, 공성 등 필요한 건 다 있다. 살라흐 앗 딘 한 명과 카이로 등의 도시의 능력 때문에 몽골과 함께 가장 쉬운 국가이다.
다만 수명이 시작할 때부터 52세이다. 수도 카이로가 의학 수치와 학술 수치가 높아서 카이로에 있는 한은 사실보다 조금 오래 살지만, 친정을 나가 카이로를 벗어나면 수명 때문에 죽어버리는 불상사도 생기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운용하기 조금 애매하다. 어차피 자식들도 다 있지만 자식들은 별 볼일 없고 아우 알 아딜이 능력치가 우수하고 수명도 길어서 살라흐 앗 딘이 죽으면 대개 알 아딜에게 후계시키는 경우가 많다. 취향에 따라서는 살라흐 앗 딘의 능력치와 카이로의 도시 수치를 이용해서 우수한 가공아들을 만들 수도 있다.
"아무것도 아냐. .....하지만 모든 것이기도 하지." ("Nothing. .....Everything.")- 예루살렘은 어떤 가치가 있느냐?("What is Jerusalem worth?")는 발리앙의 질문에 답하며.
영화《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시리아의 국민 배우 갓산 마수드(Ghassan Massoud)가 살라흐 앗 딘 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최근 대중문화에서 보여주는 살라흐 앗 딘 이미지는 킹덤 오브 헤븐에서 갓산 마수드가 연기한 살라흐 앗 딘이 기본 토대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그 무시무시한 존재감은 주인공인 이벨린의 발리앙을 페이크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릴 정도. 특히 죽은 사라센 군인들을 묻을 때 슬픔을 참지 못하는 장면이나 예루살렘 탈환 후, 보두앵 4세의 무덤을 밟지 않도록 옆으로 피해서 걷고 방 안에 떨어져 있던 십자가를 탁자 위에 다시 똑바로 세워주는 장면은 유럽 세계에 관대하고 자비로운 군주로 알려진 그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케렉 성 앞에서 철수한 것을 따지는 젊은 이슬람 성직자에게 "물론 승패는 신께서 결정지어 주시오. 하지만 준비와, 병사의 숫자, 전염병의 유무, 그리고 식수확보 여부도 승패를 결정해 주지"라고 대답할 정도로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위에 서술했듯이, 예루살렘의 가치에 대한 발리앙(올랜도 블룸)의 질문에 "아무것도 아냐(Nothing)"라고 답하고 걸어가다가 다시 뒤돌아서서 "Everything(하지만 모든 것이기도 하지)"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명장면. 발리앙의 질문은 크리스찬, 무슬림에게 있어 예루살렘의 가치를 묻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아내를 잃은 허무함을 달래는 한편 신을 찾고자 이곳으로 온 발리앙의 고뇌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명대사.
또한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이 개발살난 이후, 케락의 영주 르노 드 샤티용이 참수당하는 장면이 있다. 원래부터 무슬림에게 강경한 인물이었고, 살라흐 앗 딘과 맺은 조약을 여러 차례 깨고, 심지어 살라흐 앗 딘의 누이를 죽인 죄가 있으며, 또한 영화에서는 안 나왔지만 르노 드 샤티용은 메카와 메디나를 약탈하려다 이를 알고 달려온 살라흐 앗 딘의 군대에 아슬아슬하게 저지당한 일도 있다. 살라흐 앗 딘은 이때를 포함해서 두 번에 걸쳐서 르노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했었다. 이전에도 무슬림들을 조약을 어겨 가면서 공격해서 예루살렘 왕이 엄중히 경고할 정도였다. 이 때 마침내 맹세대로 응징을 한 셈이다. 그런데 영화상에도 표현되었지만, 단칼에 죽인 것은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에서 살라흐 앗 딘이 직접 칼질을 한 후 호위병들이 끌고 나가서 처형했다. 다만 영화상에서는 처형까지 직접 한 것으로 처리.
참수한 후 살라흐 앗 딘이 이야기를 건네는 인물은 예루살렘 왕국의 찌질이 국왕 기 드 뤼지냥이다. 살라흐 앗 딘이 기에게 물을 주자 기가 다시 르노 드 샤티용에게 그 물을 건네는데, 이때 살라흐 앗 딘이 엄격한 태도로 "그에게 물을 준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말한다. 이는 당시 이슬람의 관습으로는 포로에게 물을 주는 것은 살려주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르노가 처형되자 기는 자기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공포에 떨었지만 살라흐 앗 딘은 그를 살려주고 얼마 후 풀어준다.[15] 이 에피소드도 영화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독일의 극작가인 고트홀트 레싱이 쓴 희곡 '현자 나탄'에선 나탄에게 종교의 진리에 대해 묻는 역으로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선 어째 찌질하게 나온다(...). 나탄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중에 어느 종교가 참종교인가'를 물어 본 것. 이에 대해 나탄은 반지 설화[16]를 인용하며 어떤 종교든지 간에 '공평하고 편견 없는 사랑'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준다.
중세시기를 다루고 있는 게임 스트롱홀드 : 크루세이더에서 AI 군주로 등장한다. 같은 이슬람권 군주지만 호구같은 이미지를 가진 술탄과 아랍 노상 강도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칼리프와 다르게 현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 아군으로 동맹을 맺었으면 플레이어를 고취시키고 함께 나아가는 동반자의 느낌을 준다. 반면 플레이어와 적이라면 플레이어를 골치덩어리로 여긴다.[17] AI를 만들때 하틴전투를 참고하였는지 게릴라 전을 자주 시도하면서 자신의 성과 병력을 안정화 시키고 아차 하는 사이에 물량으로 밀어붙인다.
고전 영화 《아라비안 어드벤처》에선 크리스토퍼 리 옹이 연기하셨다.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선 에이지 오브 킹의 3번째 캠페인으로 접할 수 있다. 여기서도 매우 신사적이고 뛰어난 인물로 나오지만 정작 영웅유닛으로 구현화되지는 않았다[18].
우리나라의 SRPG 《창세기전 3》에서는 살라딘이란 이름으로 오마주되었다. 십자군 전쟁 역시 크림슨 크루세이드(피의 십자군)로 나와서 화끈하게 한판 붙는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
미니어쳐 게임 인피니티에서는 생전 살라흐 앗 딘의 인격과 행동을 토대로 재구축한 존재가 등장한다.
불스원의 차량용 에어컨 살균제(훈증캔)의 브랜드이기도 하다.아무리 봐도 디즈니 판 알라딘의 지니다
문명6에서 아라비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종교와 과학을 모두 취하는 전형적인 명군의 이미지.
- ↑ 살라흐 앗 딘의 뜻.
- ↑ 사담 후세인의 고향도 티크리트라서 홍보용으로 많이 써먹었다.
- ↑ 그나마도 알렉산드리아의 지휘관이 아니였으면 아예 이름도 안 나왔을 것이다.
- ↑ 이는 여차하면 누르 앗 딘이 공격해 올 경우를 대비해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 ↑ Renaud de Châtillon. 불어식으로 르노 드 샤티용이고, 샤티용의 레이날드 혹은 레지날드(Reginald)라고도 한다.
- ↑ 사실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다. 기 드 뤼지냥은 석방되어 키프로스 섬으로 도망갔고, 그 후손들이 키프로스를 계속 통치하면서 '예루살렘과 키프로스의 왕'이라는 직함만 유지했다.
- ↑ 둘의 관계는 꽤 신사적인 편이었다. 물론 약간의 경쟁심도 있었겠지만... 리처드가 병에 걸렸을 때 살라흐 앗 딘은 자신의 의사에게 치료받을 것을 권유했으며, 약으로 쓰라고 시원하게 눈 속에 덮어놓은 과일을 리처드에게 보냈다. 리처드가 말을 잃었을 때 살라흐 앗 딘은 대신하라고 말 두 마리를 보냈다.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에게 자신의 누나 조안을 살라흐 앗 딘의 형제에게 결혼시킴으로서 무슬림과 기독교인을 화해시키고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고 제안했다. 둘은 실제로 얼굴을 마주대고 만난 적은 없고 사신이나 편지로 교류했다. 둘은 서로를 상대방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리처드가 돌아올 땐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하자 살라흐 앗 딘은 "기왕 뺏길 거면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뺏기는 게 낫다"고 대답했다.
- ↑ 사실 파티마 왕국의 한 명의 칼리프가 유독 기독교인(주민, 순례자 전부 포함해서)을 박해했을 뿐이지, 십자군을 중용하는 성직자들의 선전처럼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박해하는 문화는 예전부터 없었다. 정말로 큰 의미가 없는 셈.
- ↑ 신곡에서 림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처럼 (기독교의)신을 알지 못한 위대한 인물들이 지내는 곳이다.
- ↑ 실제로 살라흐 앗 딘은 승리로 얻은 제물들을 아낌없이 부하들에게 나누어줘서 죽을 때 쯤에는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무일푼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 ↑ 리처드 1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리처드가 이슬람 군의 전열을 마구 뭉개버리자, 이를 보던 살라흐 앗 딘이 어이가 없어 저 XX 사탄 아님? 라는 농담을 던진 슬픈 일화가 있다(...)
- ↑ 누르 앗 딘은 그 관대함이 살라흐 앗 딘에 맞먹는 정도였는데, 어느 정도냐면 아내가 1년에 겨우 20디나르 먹고선 살아갈 수 없다며 부부싸움을 벌인 기록이 있다. 누르 앗 딘은 3개의 가게를 갖고 있었지만 그 매상에서 나오는 수익이 1년에 겨우 20디나르였던 것이다. 아내가 투정하자 누르 앗 딘은 말했다. "그 외에 어떻게 돈을 벌어오란 말이오? 비록 나는 돈을 쓰는 것을 명령하는 입장이지만, 나는 단지 무슬림들의 보물창고일 뿐이오. 난 그들을 배신할 수 없고, 아내의 투정 때문에 지옥불에 떨어지고 싶진 않소." -by 이븐 알 아시르
- ↑ besant - 당시에 통용되던 동로마 은화.
- ↑ 자칭 '무슬림과 아랍인 보호자'.
- ↑ 여기서 "왕은 왕을 죽이지 않는 법이지. 자네는 위대한 왕의 곁에 있었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나?"라고 일갈하는 부분도 일품이다.
- ↑ 어느 부유한 상인인 아버지가 보물 반지를 하나 갖고 있었는데, 세 아들 가운데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아들에게 이 반지를 물려주려다 다른 두 아들이 실망할까봐 솜씨 좋은 장인을 시켜 반지와 크기도 모양도 똑같이 생긴 반지 두 개를 더 만들어서 세 아들에게 각각 나눠주게 했고, 장인의 솜씨가 너무 뛰어난 덕분에 세 아들이 받은 세 개의 반지 가운데 어떤 것이 진짜 아버지가 원래 갖고 있던 보물 반지인지 끝내 구분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
- ↑ 보통 AI들이 자신의 공격이 저지되면 플레이어를 욕하는데 살라딘은 "아! 그대는 정말 나를 귀찮게 하는군"하면서 디스한다
-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더 포가튼》에서 드디어 영웅 유닛으로 구현되었으나, 정작 미션에서는 여전히 등장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