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왕조


프랑스의 역사
Histoire de France
~18세기19세기20세기~
고대 ~ 중세앙시앵 레짐프랑스 근대 정부 체제현대





/






프랑크 왕국프랑크 왕국서프랑크프랑스 왕국
1



1







7



2



2


3


자유



4



5


부르군트 왕국메로빙거 왕조카롤링거 왕조카페 왕조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비시
서고트 왕국독일령
아르모리카브르타뉴아키텐 왕국노르망디 공국1차 프랑스 식민제국2차 프랑스 식민제국


dynastie des Cafe Capétiens

200px-Arms_of_the_Kingdom_of_France_%28Ancien%29.svg.png[1]

1 개요

커피숍을 뜻하는 그 카페가 절대 아니다

프랑스 왕국의 왕조이자 유럽 최대 규모의 가문.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고 공작 Dux Franciae 이었던 위그 카페가 987년 프랑스 왕에 선출된 것을 기원으로 한다. 카페라는 이름은 라틴어 Caput에서 나온 것으로, 수장을 의미하는 뜻이 있는데 당시에는 가문이라기 보단 일종의 별명이었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샤를마뉴 시절부터 궁정을 보좌했던 히스베니아의 로베르의 후손들이다. 샤를마뉴의 아들 루이 1세 시절부터 왕비를 배출했고, 위그의 큰 할아버지 외드와 할아버지 로베르는 카롤링거 왕조가 약화되자 바이킹의 침략을 스스로 격퇴하며 인망을 모아 서프랑크의 왕이 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위그는 샤를마뉴의 손녀 아델라이드와 결혼하여 위그 카페르 낳았다. 이런 식으로 카페 가문이 왕좌를 차지했던 것 가능한 이유는 이 시기가 아직 중세적 상속 체계가 자리 잡히기 이전의 거진 고대와 중세 사이 단계의 시절이었고 군주란 전임 군주의 명백한 직계 장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역 영주들이 합심해서 다른 가문 사람을 선출할 수도 있었기에 외드가 서프랑크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 즉, 요약하자면 서프랑크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이다.[2]

초창기에 프랑스 왕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처럼 프랑스 지역 내 여러 유력 귀족들 사이에서 '선출된 왕'에 지나지 않았고 카페 왕조 직할로는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좁은 일드프랑스 지역과 오를레앙 정도 밖에 지배하지 못했다. 다른 영주들로부터는 형식상으로만 왕의 권위를 인정받는데 지나지 않았으며 대영주들의 권력에 휘둘리는 처지였다. 하지만 서서히 왕권을 강화하고 다른 영주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면서 왕 다운 왕으로 발전해나간다.

비슷한 시기의 신성로마제국 초창기의 왕조가 단절과 재선출을 거치는 과정이 많았던 반면 카페 왕조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단절을 거치지 않고 쭉 적장자로 이어진 것이 매우 운이 좋았으며 왕조의 권위를 누대에 걸쳐서 높여나갈 수 있었다. '일부일처제임에도 부계계승이 수백년간 끊어지지 않는' 거의 기적적인 카페 왕조의 연속계승은 라이벌 왕조들에 비해서 대단한 장점이었는데, 만일 카페 왕조 초창기에 후계자가 단절되었다면 프랑스 왕국 역시 신성로마제국처럼 선거왕제로 돌아가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국내 혼인을 통해 영토를 넓혔으며 11대 국왕 필리프 4세 떄까지 모든 국왕이 40대 이상을 살거나 근접하게 살아 왕권이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1316년 12대 국왕 루이 10세가 26세의 나이로 사망, 그해 13대 국왕 장 1세생후 5일만에 사망, 1322년 14대 국왕 필리프 5세가 29세의 나이로 사망, 1328년 15대 국왕 샤를 4세가 33세의 나이로 사망하는 등 요절 징크스가 연달아 터졌다. 다만 루이 10세와 장 1세는 정황상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 필리프 5세에 의한 고의적 죽음일 확률도 있다.

샤를 4세가 적자 없이 사망하여[3] 결국 방계인 발루아 왕조로 인계되었다. 하지만 뒤를 이은 발루아 왕조[4], 부르봉 왕조[5], 부르봉-오를레앙 왕조[6] 모두 부계 혈통으로 이어지는 카페 왕조의 방계다. 또한 나바라의 에브뢰와 달브레 왕조, 헝가리시칠리아 왕국의 앙주 왕조, 포르투갈의 보르고냐 왕조 라틴 제국의 쿠르트네이 왕조 까지도 모두 카페 왕조의 혈통이며, 사생아 출신 왕조까지 합하면 더 늘어난다. 이들을 묶어 Capetian Dynasty로 부른다. 일부일처제를 고수하고 사생아에게 계승권을 주지 않았던 당시 유럽에서 카페 가문에 이렇게나 많은 수의 부계 계승이 유지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대단한 업적(?)이다. 2013년 기준 카페 가문은[7] 스페인의 왕위와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가지고 있다.

참고로 독일의 비텔스바흐 가문하고도 부계쪽으로 먼 친척이다. 다만 이쪽은 카페 가문이 왕조로 등극하기도 이전, 프랑크 왕국의 로베르 시기에 서로 분가했으므로 아주 큰 연관성은 없다. 천 년 전 조상이 같다는 것 정도.

2 배출한 군주

카페 왕조는 방계 혈통까지 포함하여 2015년까지 다음과 같은 국가원수들을 배출하였다. 이것은 공작 이하의 작위는 생략한 것이다. 유럽 최대의 가문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보르고냐 가문이 단절된 이후 사생아가 왕위를 이은 아비스 가문과 브라간사 가문까지 합치면 20명의 포르투갈 국왕과 2명의 브라질 황제까지 추가된다.
  1. 카페 왕조의 문장인 푸른 바탕에 노란 백합, 특히 이 백합 문양은 혁명 이전까지 프랑스의 국기로서 쓰였다. 다만, 샤를 5세(재위: 1364~1380) 때에 작은 백합을 여럿 늘어놓은 것에서 큰 백합 세 개를 그려넣는 것으로 약간 바뀌었다.
  2. 카페 가문이 나름대로 명망있고 유서 깊은 가문인 것은 사실이나 지배지의 범위만 놓고보면 서프랑크에서 가장 강한 귀족 가문은 아니다. 남프랑스의 거진 1/3을 가지고 있던 툴루즈 가문이나 푸아티에를 중심으로 루아르 강 일대를 휘어잡고 있던 푸아투 가문이 지배지와 동원 병력 규모만 놓고 보면 카페 가문보다 더 강한 집안이었다. 본문에서도 후술하 듯이 카페 가문의 직할지는 초기에는 오를레앙과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일 드 프랑스 일대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이야 이곳이 프랑스의 핵심이지만 당시에는 그저 좀 인구가 밀집한 지역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다만 푸아투 가문은 얼마 안 가서 가문이 단절되었고 툴루즈 가문은 후일 카타리파 이단 문제와 연루되어 발생한 알비즈와 십자군 운동으로 인해 영지 지배력이 쇠퇴하면서 몰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도를 중심으로 남프랑스의 패권을 휘어잡은 아키텐 가문이나 필리프 1세의 숙부가 시조인 부르고뉴 가문(포르투갈의 보르고냐 왕조와 동일 가문이다.)이 프랑스 동부의 핵심 요충지인 부르고뉴 일대와 플랑드르의 상당부분, 심지어 포르투갈 왕위까지 차지하게 되었기에 카페 가문은 필리프 2세 등장 이전까지는 직할 영지 규모나 군사력에서 상당한 약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3. 공주들만을 남겼다.
  4. 발루아 왕조는 필리프 3세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카페 왕조의 방계다. 시조 필리프 6세가 루이 10세의 외손녀 블랑슈와 결혼하여 딸 잔느를 낳았다. 그래서 모계 쪽으로도 계승이 되었지만 잔느는 요절하여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5. 루이 9세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카페 왕조의 방계다. 시조 앙리 4세가 앙리 2세의 딸 마르그리트와 결혼하여 모계 쪽으로 발루아 왕조를 계승할 수 있었으나, 결국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6. 오를레앙 왕조는 루이 13세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부르봉 왕조의 방계다.
  7. 정확히는 방계인 부르봉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방계(...)인 부르봉-파르마 가문
  8. 1801년부터 1807년까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존재했던 나폴레옹의 괴뢰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