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대 국왕 | ||||||
루이 7세 | ← | 필리프 2세 | → | 루이 8세 |
이름 | 필리프 존엄왕(Philippe Auguste) |
생몰년도 | 1165년 8월 21일 ~ 1223년 7월 14일 (57세) |
재위기간 | 1180년 9월 18일 ~ 1223년 7월 14일 |
출생지 | 프랑스 고네스 |
사망지 | 프랑스 망트 |
1 개요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 7대 왕으로 루이 7세와 상파뉴의 아델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별칭인 존엄왕최고존엄[1]에서 짐작할 수 있듯 플랜태저넷 왕조의 앙주 제국에게 눌려 국가 자체가 희미해져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도 할 수 있었던 프랑스를 음모와 술수, 전쟁 등 온갖 방법을 통해 중앙집권화시키고 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왕. 야금야금 왕권을 확대해나갔던 중세 프랑스와 카페 왕조의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 초기 생애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자 카페 왕조의 전통에 따라 1179년 공동왕으로 즉위하였으며, 1년 후 아버지가 죽자 단독왕으로서 즉위하게 되었다. 그의 즉위 초기에는 샹파뉴 백작이 섭정으로 통치하였지만 점점 자라면서 그를 억제하여 친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3 플랜태저넷 왕가와의 대립
그 때부터 그는 인생 전체에 걸친 숙적이 될 플랜태저넷 왕가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대립각의 이유는 프랑스 왕국의 구 영향권을 되찾고 국력을 강화하려는 필리프 2세의 목표에 부합하는 타겟이 플랜태저넷 가문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 플랜태저넷 가문은 오랜 기간 동안, 결혼을 통한 상속권 등을 이용해 꾸준히 프랑스 내에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던데다 헨리 2세 시기에는 아키텡 여공작 엘레오노르[2]와의 결혼으로 강대한 아키텡 공작가의 넓은 영지를 잉글랜드 산하로 끌어들이면서 과장 좀 보태서 프랑스 문화권 영토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는 필리프 2세에게는 분명한 타도 목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필리프 2세는 계략을 써 잉글랜드 왕이자 아키텡 여공작 엘레오노르의 남편인 헨리 2세부터 무너뜨리고자 헨리 2세의 아들들과 헨리 2세 사이를 이간질하여 마침내 헨리의 아들들이 자신들의 아버지를 유폐시키게끔 유도해내었고 잉글랜드 왕위에 헨리 2세의 아들인 리처드 1세를 즉위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리처드와 오래 전부터 쌓은 인연 및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3차 십자군 전쟁에 동참하였으나 지독한 현실주의자[3]였던 그는 종교적 열정이나 기사도와는 거리가 멀었고, 병까지 걸리자 아크레를 함락시키자마자 리처드의 비난을 무시하고 병을 이유로 프랑스로 귀환하였다.
프랑스로 돌아온 필리프는 잉글랜드의 국왕인 리처드가 시리아에서 살라딘과 충돌하느라 국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틈을 이용해 자신의 목표인 플랜태저넷 가문 타도[4]를 위해 다시금 플랜태저넷 왕가를 분열시켜 약화시키려 하였고 그 계략의 타겟은 리처드의 동생 왕제 존이 되었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평화 협정을 맺고 예상보다 빠르게 귀국하여, 자신이 부재 중인 틈에 필리프에게 빼앗긴 영토를 다시 되찾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자 필리프는 이번에는 아키텡 공작가를 선동하여 리처드와 싸움을 붙여 리처드의 발목을 잡았고 그러던 중 리처드가 브르타뉴에서 조카 아서와 싸우다 전사하자 리처드의 동생인 왕제 존이 존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렇듯 플랜태저넷 가문을 우환에 빠뜨려 약화시킨 필리프 2세는 존의 실정을 명분으로 삼아 봉건법 위반에 따른 존의 대륙령의 몰수를 선언했으며[5] 노르망디로 상륙한 존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이후 앙주, 멘, 푸아투, 투란 등 대부분의 노르망디와 아키텡 영토를 점령하여 왕령지로 삼았다.
이후 복수의 칼을 갈던 존은 당시 필리프 2세의 계략에 의해 자신의 영역을 왕실 직할지로 빼앗기게 된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6]가 필리프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된 것을 알고 그와 연계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4세를 끌어들이고 이 외에도 판 플란데런 가[7], 레히나르 가[8] 등의 여러 영주 세력들을 끌어들여 대규모 연합군을 구성, 약 3만에 달하는 전력으로 프랑스를 침공하였다.
이 때 프랑스 남부 지방을 순회 중이어서 자신의 본거지이자 수도인 파리를 비우고 있던 필리프는 존이나 오토 4세의 예상과는 달리 재빠르게 남부 친국왕파 영주 세력들을 규합하여 1만 5천여명에 달하는 병력을 구성하고 굉장한 속도로 북쪽으로 진군, 느려터진 진군 속도로 파리 북부를 제압하고 발랑시엔 인근에나 와있던 오토 4세의 연합군을 부빈 평야에서 맞닥뜨림으로써 결전을 강제하였다.[9]
이 부빈 평야에서 필리프 2세의 총 지휘 하에 유드 드 부르고뉴, 로베르 드 드뢰 등의 영주들이 가세한 1만 5천여명의 프랑스 군이 오토 4세의 총 지휘 하에 윌리엄 롱제스피[10],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 용기공 앙리 레히나르, 르노 드 다마르탱 등이 참전한 신성 로마, 잉글랜드, 플랑드르 3만 연합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으며 연합군은 다마르탱이 인솔하던 장창병들이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용전을 선보인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완벽한 졸전을 선보이고 프랑스 군에게 압도당하며 대패했다. 이 전투를 부빈 전투라고 하며 이 전투에서 패한 연합군 측은 오토 4세를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 수뇌부만이 도주에 성공하고 연합군의 나머지 핵심 수뇌 인원들의 상당수가 필리프에게 사로잡혀 감옥살이를 하거나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11]
이 전투는 전쟁사 부분에서도 나름의 의의가 있는데 이전까지의 사람들의 관념 속에 프랑스 군은 딱히 강한 군대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지 않았으나 이 전투를 기점으로 프랑스 군은 대단히 강하다는 평판을 전 유럽에 지속적으로 인식시키는 효과를 낳았다.물론 파비아 전투는 그말싫
이 전투 이후, 프랑스와 카페 왕조의 위용은 전 유럽에 드날리게 되었으며 필리프 2세가 원했던 왕권 강화 계획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필리프에게 거의 모든 프랑스 내의 영지를 빼앗기게되고 잉글랜드 본토 외에 남은게 없게 된 존이 계속 잉글랜드 국내에서 찌질거리다 잉글랜드 귀족들이 도저히 참지 못해 들고 일어나 존 왕을 협박해서 얻어낸 것이 마그나카르타, 대헌장이다.
4 내정
그의 치세 대부분이 플랜태저넷 왕가와 싸워 땅을 뜯은 것으로 점철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국가 내정 운영 면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군이었다. 오히려 국토의 확장보다도 필리프 2세를 높이 평가하는 더 큰 요소는 바로 그의 유능한 행정 운영과 선진적인 정책 시행이었다. 이는 옆 나라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는 상당히 대조되는 요소이다.보고있나 시오노 나나미[12]
필리프 2세는 치세 동안, 자치 도시(코뮌)를 조성하였고[13] 영주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는 관료 집단[14] 및 직속 슈발리에[15] 들을 육성하였다. 그리고 일종의 재지 영주층인 '프레보'[16]들을 억제하고 직할지의 관료 위주 행정 체계 구축을 이룩함으로써 초기 봉건제의 문제점을 최소화하며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왕령지의 대대적인 확대와 더불어 왕실에 직접적인 세수 수입 증대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부의 증진은 필리프 2세가 시도한 여러 건설 사업, 정책 시행 등에 차질없는 재정적 바탕이 될 수 있었다.[17] 또한 도시의 발전과 관료 집단의 직할지 통제, 프레보 세력의 약화라는 효과들과 맛물려 국가의 전반적인 경제적, 정치적 발전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자신의 본거지였던 파리를 수도로써 크게 확장시켰으며 대학을 대대적으로 지원 및 보호하는 등[18] 파리의 도시 미관에도 신경을 써 카페 왕조의 권위를 대내외적으로 더욱 크게 신장시켰다.
5 평가
본격 플랜태저넷 분쇄기
말 그대로 제대로 된 정치가. 오늘날 프랑스의 토대를 세웠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현실적인 정치가로서, 낭만적이고 여러 서사시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정치나 국가 내정은 개판 5분 전으로 처리한 리처드 1세와는 달리 욕을 먹을지언정 정치적 술수와 계략을 동원하여 프랑스 왕실 직할지를 넓혀 왕권을 강화시키고 프랑스에서의 잉글랜드의 영향력을 크게 축소시켰다. 전쟁에서도 비록 그리 많은 전투를 하지는 않았지만 부뱅 전투와 같은 굵직한 결정적 전투에서 으레 승리를 거두며 거의 패하지 않는 지휘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내정 분야에 있어서는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선진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도 성공하였기에 이는 이후의 1세기 간 카페 왕조가 경제적, 정치적 전성기를 맞이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19] 옆 나라 독일이 14, 15세기가 될때까지 계속 깡촌으로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20][21]
개인적인 정략과 계략의 정교함도 대단한 수준으로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인 리처드, 존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자신은 손 하나 까딱 안하고 까다로운 적수인 헨리 2세를 제거한 것을 비롯, 남프랑스의 대영주 가문인 툴루즈 가문을 이용하여 플랜테저넷과 카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강대한 아키텡 가문을 견제하였고 이러한 아키텡 가문의 일문 인사들을 선동하여 헨리 2세가 죽고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 원정에 종군하자마자 잉글랜드령 남프랑스를 혼돈스러운 상황으로 몰아갔으며, 상대적으로 약한 일대의 프레보들을 제거하며 다량의 토지를 왕령지로 입수함에 따라 그 자신의 군사력을 증진, 이를 바탕으로 주변의 영주 세력들의 영지를 강압적으로 전봉시키거나 반발할 경우 무력으로 짓밟아 제거하면서 자신의 직할지를 지속적으로 늘려나갔으며[22] 브르타뉴 지역에서 봉기하여 리처드에게 대항하여 끝내 리처드의 죽음을 초래한 아서의 궐기 배후에도 필리프가 있었다는 설이 제기될 정도였다. 실로 권모술수의 천재라고 할 수 있는 부분.
전쟁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대부분 승리하였는데 동 시대의 명장들에 비해서 필리프 본인이 전술적으로 특출나다고 하기는 어려우나이 부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분이 워낙 압도적이라 리처드 1세는 대단한 용장이었을뿐, 전략이 뛰어났다고 보기는 힘들다 기본적으로 상대하는 적수에 맞춘 대국적인 견지와 전략 행보는 탁월하기 그지 없었다. 강대한 플랜테저넷 왕조를 무너뜨림에 있어서도 다짜고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닌, 혈통과 클레임 명분을 이용하여 지방 영주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거나 최소한 플랜테저넷 왕조에 반항하게 만들며 자신이 유리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조성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끝내 살라딘과의 승부를 내지 못하고 프랑스로 복귀했을 때에는 희대의 괴물인리처드 1세의 실력을 정확하게 판단하여 그와의 전면전을 최대한 회피하면서 끝내 차도살인의 형식으로 리처드 1세의 죽음을 유도하였으며 리처드가 사망하자마자 곧바로 플랜테저넷 가문에 대한 전략을 전면적인 공세로 순식간에 전환하면서 이제 막 즉위한 존 왕의 군대를 철저하게 박살내고 잉글랜드의 프랑스 대륙령 영토를 거의 모조리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부분은 필리프 2세 본인의 전략적 식견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유리한 위치에서 결전을 강제했다고는 하나 분명 수적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열세에 있었던 부빈 전투에서조차도 신성로마제국과 잉글랜드 연합군을 격파하는 장면은 필리프 2세가 전술적으로도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모자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증명하는 부분.
다만 어떤 로마 동인녀의 눈에는 멋쟁이 리처드와 적대하는 찌질이A로밖에 안보이는듯
6 대중문화에서의 존엄왕 필리프
일반적으로 라이벌 격으로 묘사되는 리처드 1세에 비하자면 중세, 근세의 기사 문학에서는 거의 항상 악역 배역. 낭만적이고 기사의 의무, 기사도 등에 가치를 무겁게 두며 행동한 리처드에 비해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적이며 종교에 열정적이지도 않은 권모술수의 숙련가라는 점에 있어서 좀 비열한 이미지가 강했던 모양새다.
파일:Attachment/필리프 2세/필리프2세.png |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 ↑ 오귀스트. 라틴어로 하면 그 유명한 아우구스투스. 다만 오귀스트라는 별칭은 그가 8월에 태어나서 붙었다는 말도 있다.
- ↑ 이 엘레오노르 때문에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법적 모계 상으로는 필리프 2세와 리처드, 존이 형제 관계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 필리프 2세의 아버지인 루이 7세가 바로 엘레오노르 여공작의 전 남편이었기 때문. 다만 필리프 본인은 본문에 기술되어 있듯이 엘레오노르의 친아들이 아니며 엘레오노르는 남편인 루이 7세와 불화를 겪은 끝에 이혼하고 다시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재혼한 것이다.
- ↑ 실제로 필리프는 성격이나 종교에 대한 열정이 상당히 냉정하고 시니컬했다고 전해진다.
- ↑ 정확히는 프랑스 내에서의 플랜태저넷 가의 영향력 분쇄
- ↑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므로 플랜태저넷 가문의 대륙령, 즉 프랑스 내의 영지를 몰수하겠다는 그런 논리
- ↑ 플랑드르의 영주였다.
- ↑ 당시 불로뉴를 통치하던 백작 가문
- ↑ 당시 브라반트를 통치하던 공작 가문
- ↑ 아마도 존이나 오토 4세는 필리프가 북부를 포기하고 남부의 친국왕파 영주들과 연계하여 장기전으로 몰고 가거나 병력을 규합하더라도 산지나 요새에 틀어박혀 공성을 유도했으리라 예상했던 듯한데 오토가 필리프의 군세를 맞닥뜨리고 예상치 못함으로 인해 당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이후 오토는 결전을 원하는 필리프를 상대로 수 차례 휴전 협정을 맺고저 시도했다. 결국 실패했지만.
- ↑ 부빈 전투에서 존 1세의 대리로 잉글랜드 군을 지휘했다.
- ↑ 부빈 전투는 양 군주들이 모두 죽을 위기를 한번씩 만났던 상당히 치열한 전투였다. 필리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보병들이 본진까지 밀고 들어와 말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왕의 위기를 보고 몰려온 기사들의 도움으로 살아남았고, 오토 4세도 프랑스 기사들에게 말고삐를 붙잡히고 말이 칼을 맞아 낙마했다 근위병들의 희생에 더해 다른 귀족이 얼른 자기 말을 내줘서 빠져나갈수 있었다.
- ↑ 이 취소선이 왜 붙었는가 간략히 설명하면, 최신작인 '십자군 이야기' 에서 덮어놓고 리처드를 찬양하면서 그와 대립했던 필리프를 깎아내렸기 때문.
- ↑ 이 코뮌에서 징발할 수 있게 된 직속 보병 전력은 이후 부뱅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 ↑ 후술할 대학 지원을 통해 많은 인재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 ↑ 당시 프랑스의 일종의 궁중 수석 기사들로 근대적 상비군의 개념이 많이 미비했던 중세 시기의 프랑스에서 실질적인 국왕 상비군 장교 전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직속 슈발리에들은 부뱅 전투에서도 중앙에서 필리프 2세를 보좌하며 많은 활약을 펼쳤다.
- ↑ 일전의 설명에서 '행정 재판관'이라고 표기되어있으나 이는 근세, 근대에 쓰이던, 행정관, 재판관, 장교 등의 의미를 함유한 프레보라는 명칭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이해력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필리프 2세가 살아가던 중세 프랑스에서의 프레보는 근세나 근대 시기에 쓰이던 위의 의미가 아닌 토착 재지 영주층, 즉 호족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다. 공작이나 백작과 같은 정식 작위를 받고 지방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대영주들과는 달리 뚜렷한 작위는 없으나 자신과 자신의 집안이 특권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일대의 자그마한 지역을 암묵적으로 다스리던 토호 세력들이 바로 중세 프랑스의 프레보들이며 필리프 2세는 이러한 프레보들을 무력으로 제거하거나 회유책으로 그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그들의 토착 권한을 제거하는 방식을 사용, 그 세력을 축소시킨 것이다.
- ↑ 역사적으로 여러 토목 사업과 혁신적 정책을 재정적 밑바탕도 없이 시행하다가 국정 말아먹은 나라가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자.
- ↑ 이 대학에 대한 지원도 결국 카페 왕조에 유익한 쪽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법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프랑스 왕들은 영주들의 단순한 암묵적 대표가 아니라 국가의 최고 통솔자라는 성문화된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으며 동시에 과거 로마 시대의 최고 원수의 의미를 지닌 임페라토르의 직함도 겸할 수 있었다.
- ↑ 이 때 프랑스의 경제 성장률은 산업혁명 전까지 한번도 깨지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기에도, 부르봉 왕조의 전성기에도!
- ↑ 이 무렵 신성 로마 제국은 땅만 넓었지 인구상으로는 프랑스의 3분의 1도 안되는 빛좋은 개살구와 같은 국가였다. 필리프 2세 이전까지의 프랑스와 달리 꽤 강력한 황권 덕분에 대외적인 위상을 갖출 수 있었던 것뿐... 지금의 독일 인구를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 ↑ 참고로 현대 독일의 위엄쩌는 인구는 14세기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독일 지역의 상공업 덕분이다. 13세기 이후 17세기까지 독일의 인구는 무려 3배 이상 증가하는 반면 프랑스의 인구는 불과 20% 정도 증가하는데 그친다
하지만 30년 전쟁 크리... - ↑ 플랑드르 지역의 영주였던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가 이에 반발하여 부뱅 전투의 단초를 제공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 ↑ 모르는 사람에게는 설명하자면 같은 코에이 사의 게임인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등장하는 군웅 다케다 신겐은 시리즈 중 천상기, 창조를 제외하고 나머지 전 시리즈 능력치 1위이다. 그리고 징기스칸 4의 필리프 2세 역시 종합 능력치가 1위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최소 능력치 1위로 최소 능력치인 무력이 89이다. 필리프 4세 역시 최소 능력치인 전투가 90으로 역시 최소 능력치도 1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