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잉글랜드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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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헨리 2세 (Henry II of England) |
부친 | 제프리 백작 |
모친 | 마틸다 황후 |
생몰년 | 1133년 3월 5일 ~ 1189년 7월 6일(56세) |
재위기간 | 1154년 12월 19일 ~ 1189년 7월 6일 |
대관식 | 1154년 12월 19일 |
1 개요
영국(잉글랜드)의 왕으로, 플랜태저넷 왕조의 창시자. 노르망디 공작, 앙주 백작, 아키텐 공작.
아버지는 앙주 백작 제프리, 어머니는 헨리 1세의 유일한 적녀인 마틸다[2].
2 왕위에 오르다
마틸다는 잉글랜드 왕위를 놓고 사촌인 스티븐 왕과 오랜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스티븐 왕은 자신의 상속자가 될 외아들을 잃자 다 포기하고 마틸다와 화해,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한다.
그 후 스티븐 왕이 실의로 일찍 죽자, 즉위한 헨리 2세는 어머니와 외당숙이 벌인 내전 탓으로 개판이 된 잉글랜드를 다시 안정화시키고 혼란기 동안 잉글랜드를 넘보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군주들을 데꿀멍 시킨다.
그는 결혼과 군사, 두 가지를 통해 잉글랜드 영토 확장에 기여했다. 21세에 결혼을 하게 되는데아내는 9살 연상 프랑스왕 루이 7세의 전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그녀가 프랑스 왕비였던 시절, 남편과 쌓인 불화와[3] 프랑스와 고향 아키텐의 정치적 갈등 등으로 결혼이 파탄에 이르렀다. 시대가 시대라 이혼이 아니라 교황에게 로비해서 혼인무효(?)판결을 받았는데 웃긴건 엘레오노르와 프랑스 루이 7세는 10촌[4]이라 근친상간이라며 혼인이 무효 처리가 되었는데 몇 달 후 결혼한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는 더 가까운 8촌이었다(...)[5]
이미 결혼 전부터 정부가 있었고 결혼 후에도 늙은(?)처에 만족 못하고 대놓고 바람을 피워서[6] 왕비와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와의 사이에서 8명의 자식을 두었고, 아들이 넷 있었는데 그 중 왕이 된 리처드 1세와 존 왕이 유명하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보다 영지가 넓다는 아키텐 공작의 상속녀였는데, 헨리 2세와 재혼하면서 푸와티에, 아키텐 지방이 영국으로 넘어왔다. 여기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 지방까지 합치니 영국+프랑스 서쪽 절반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의 군주가 되었다.[7] 그리고 엘레오노르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유럽 왕가에서 혼인관계를 맺어 시칠리아, 독일, 카스티야의 영지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말콤 1세를 조져서 충성서약을 받아내고 노섬벌랜드 등의 영토를 되찾았다.
3 업적
그리고 내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능한 재판관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을 등용해 행정과 사법 제도를 정비해 봉건 군주국에서 관료군주국으로 잉글랜드를 탈바꿈시키게 한다. 위의 토머스 베켓은 헨리 2세의 충신이었으나, 헨리 2세가 주선해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자 헨리 2세와 대립한다. 이 시기는 잉글랜드 왕국 내 교회의 영향력을 두고 왕권과 교황권이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는데, 내 편 해달라고 기껏 임명한 놈이 뒷통수를 거하게 때려버린 셈이니... 결국 헨리 2세는 아오 시밤 저 놈 쳐죽여주는 부하 하나 없는 나는 인생을 헛살았음("Will no one rid me of this turbulent priest?")[8]이라는 발언을 했고, 즉시 부하 넷이 잉글랜드로 건너가 토마스 베켓을 쳐죽여 복수했다가 교황청에서 토마스 베켓을 성인 시성해버리는 바람에 큰 낭패를 본 적이 있다.[9][10][11]
4 안습한 말년
말년에 막내인 존을 총애해 존에게 아키텐 지방을 물려주려 둘째 제프리의 상속분을 빼앗으려 하자, 아내 엘레오노르를 포함해 존을 제외한 아들들의 반발을 불러와 내전이 일어났다. 이 때는 헨리 2세가 이겨서 엘레오노르는 감금당했지만, 아들들이 약 18개월 정도나 끝까지 버티고서 화해하면서 존에게 아키텐 지방을 물려주는 걸 포기했다.
그렇게 화해하고 난 뒤에 아들들끼리 신나게 쌈박질을 해댔다. 서로 부유한 아키텐 땅을 둘러싸고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가 각각 리처드 1세와 신나게 싸워대다가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도 모두 병으로 급사해버는 바람에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가 된다. 몇 년 후 헨리 2세가 아키텐 땅을 둘러싸고 리처드 1세와 또 다투게 되는데, 리처드는 "아키텐은 어머니가 물려주는건데 아버지가 왜 간섭이냐"라며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이번 싸움에는 헨리 2세 쪽이 수세에 몰렸다. 결국에는 어찌어찌 화해했지만 문제는 계속 남아 있었기에,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가 대립하고 있을 때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었고, 우스꽝스럽게도 아내와 다른 아들들과 전쟁을 벌이던 와중에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막내아들 존마저 부하 기사들과 함께 형 리처드의 편을 들어버렸다. 이로 인하여 크게 상심한 헨리 2세는 결국 홧병으로 투르에서 사망했다. 전설에 의하면, 리처드 1세가 아버지의 시신을 보러 방안에 들어가자 피가 쫙하고 튀어나왔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헨리 2세가 리처드를 저주하며 죽어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5 자식들
자식들이 하나같이 후레자식웬수들이다(...)
프랑스의 왕 루이 7세나 필리프 2세가 정치적인 이유로 부자들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막내인 존 왕 빼고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12] 다만 막내 존 왕은 아버지를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알토란 같은 내 땅헨리 1세부터 부지런히 모은 프랑스 쪽의 영토를 날린 일등 공신. 리처드 1세의 공격을 받은 헨리 2세의 주변에 남은 아들은 오로지 서자 제프리 뿐이었다고 한다. 헨리 2세는 제프리에게 '그놈들은 후레자식들이고 너만이 내 진정한 자식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6 평가
통치는 잘했지만 아버지로써는 영 아닌 왕이였다영조?
통치는 잘하긴 했다. 그의 치세 아래 잉글랜드는 부유했고, 나라안의 국민들도 안심하고 살 수 있었으며,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크게 탄압하거나 대대적인 숙청 같은 것들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파멸하게 된 이유는 가족관계에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여자들과 바람이 나서 엘레오노르와 자식들과의 관계가 멀어졌고, 다른 아들들은 생각하지 않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존 왕만 사랑했다는 것에 있다. 그것 때문에 아내 엘레오느와 다른 아들들, 특히 리처드 1세하고 가장 척을 졌다. 끝내는 아들들끼리 내전을 벌이게 만들고, 이로 인해 그 동안의 많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헨리 2세를 좋게만 평가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그러고서도 자신은 끝까지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좋은 아버지와는 거리가 있던 아버지였고, 그 때문에 파멸했다. 한마디로 집안 관리를 못해서 폭망한 왕이라고 하겠다.
7 트리비아
- 34년 재위 중에 그가 잉글랜드에 체재한 건 14년 정도라고 한다. 어찌 보자면 아들 리처드 1세와 비슷한 기록. 마틸다가 헨리 1세의 임종 당시 잉글랜드 국내에 없었던 탓에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 자리를 강탈당한 것처럼, 잉글랜드의 왕이 가지고 있는 프랑스 영지는 프랑스 왕의 신하라는 미묘한 위치[13] 때문에 프랑스에 있던 시간이 길어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쪽에 더 가까웠던 듯하다[14].
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겨울의 사자(The Lion in Winter)라는 희곡/영화는 헨리 2세와 아내, 자식들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명작이라고 하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번씩 보는 것도... 영화로도 두 차례 만들어졌는데 두 작품 모두 캐스팅이 화려하다. 주인공인 헨리 2세부터 당대의 명배우인 피터 오툴과 패트릭 스튜어트가 각각 맡았으며, 히로인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또한 당대의 명배우인 캐서린 헵번과 글렌 클로스가 열연했고, 1968년판에서는 앤서니 홉킨스가 헨리2세의 차남 리처드 1세로, 티모시 달튼이 프랑스 왕 필립 오귀스트로 출연했다.
- 대지의 기둥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의 어머니 마틸다가 모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헨리가 태어난 후, 모드는 헨리를 데리고 스티븐을 피해 프랑스로 도피한다. 잠깐 모드가 우세를 점해 잉글랜드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다시 프랑스로 도망갔다가 장성하여 역공을 걸어 스티븐의 아들인 유스타스를 죽여버리고 왕위에 앉는다.
- ↑ 재위기간 1170년~1183년. 헨리의 아들이며 공동왕. 왕으로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루었기에 잉글랜드의 공식 국왕 중 한 명으로 인정받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기에 헨리 3세로 불리지는 않는다.
- ↑ 그녀는 결혼을 2번했는데, 첫번째 남편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5세였으므로 모드 황후라고 부르기도 한다. 헨리 1세의 아들, 즉 왕세자가 사망한 탓에 딸인 마틸다가 후계자가 되고 여자인 그녀의 안전을 생각한 헨리 1세는 노르망디 남쪽의 앙주 지방의 유력자 앙주 백작을 데릴사위로 들인다.
- ↑ 둘 사이에 아들이 없었던 이유도 컸다.
- ↑ 중세 교회법상 동양식으론 친외가 12촌이면 혼인 무효다. 무효 결혼이지만 둘 사이에 낳은 딸 둘은 적자라 인정하는 정치적 배려도 있었다.
- ↑ 유럽 왕실 사이에서 근친혼은 흔했다. 교황청에서는 '기독교 군주 사이의 결합'이라는 대의를 인정하여 면책했기 때문에 결혼 자체는 별 문제 없었는데, 대부분 혼인무효(이혼) 사유를 들어서 이혼 해달라면 또 들어주는 명분이기도 했다.
- ↑ 서자도 많았다.
- ↑ 브르타뉴 제외
- ↑ 원문을 직역하면 "저 말썽쟁이 성직자를 내게서 없애줄 이는 없단 말인가?" 정도의 늬앙스. 여기서 "베켓식 부탁"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즉 높으신 분이 직설적이진 않지만 핵심을 찌르는 발언(예시 : ~했으면 좋겠는데)을 하여 부하들에게 명령한다는 뜻.
- ↑ 여담이지만 이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캔터베리 대성당은 제프리 초서가 쓴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에서 주인공 일행의 목적지가 된다.
- ↑ 다른 여담으로 베켓이 죽은지 361년 후인 1531년, 당시 영국 국왕인 헨리 8세는 토마스 베켓을 반역죄로 기소하고 30일 안에 법원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연히 베켓은 법원에 출두하지 않았다 (...) 법원은 궐석 재판에서 베켓에서 유죄를 선고하고, 켄터베리 대성당에 있던 베켓의 무덤을 부수고 유해를 불태운 후 순례객들이 두고 간 보물들을 몰수했다.
- ↑ 또다른 여담으로 퇴마록에서 박신부가 사용하는 베케트의 십자가의 베케트가 바로 이 토머스 베켓이다.
- ↑ 아들 리처드 1세의 약혼녀를 중간에서 가로챘다는 의혹도 있다. 이 설을 따르면 본인도 잘못이...
- ↑ 잉글랜드 왕위는 프랑스 왕의 신하에 해당되지 않는다.
- ↑ 이건 윌리엄 1세가 영국의 왕이 되면서 시작된 거다. 그러나 친숙했든 어쨌든 저런 입장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계속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