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국

프랑스의 역사
Histoire de France
~18세기19세기20세기~
고대 ~ 중세앙시앵 레짐프랑스 근대 정부 체제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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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프랑크 왕국서프랑크프랑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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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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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군트 왕국메로빙거 왕조카롤링거 왕조카페 왕조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비시
서고트 왕국독일령
아르모리카브르타뉴아키텐 왕국노르망디 공국1차 프랑스 식민제국2차 프랑스 식민제국
프랑스-나바르 왕국
Royaume de France et Navarre
[1]
어기국장[2]
[3]
843년 ~ 1792년
표어Montjoye Saint-Denis[4]
(생드니 만세)
La Nation, la Loi, le Roi[5]
(국가, 국법, 국왕)
국가앙리 4세 만세!
하느님, 왕을 지켜 주소서 (왕실가)
위치서유럽
수도파리[6] -> 베르사유[7] -> 파리[8]
정치체제전제군주제[9]→입헌군주제[10]
국가원수
언어프랑스어
바스크어
카탈루냐어
알자스어
발롱어
종교가톨릭
주요사건843년 건국
1789년 프랑스 혁명 시작
1791년 헌법 제정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 발발
1792년 멸망
통화프랑,리브르,루이도르,에퀴,아시냐
성립 이전서프랑크 왕국
멸망 이후프랑스 제1공화국

[11]

1 개요

근대 이전 유럽 초강대국

843년에서 1791년 혹은 1792년까지 존속한 프랑스왕국. 역대 왕조로는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가 있다.

2 역사

일반적으로는 카페 왕조가 카롤링거 가문을 누르고 왕위에 집권한 987년 시기부터 프랑스 왕국의 시작이라보지만, 일부 시각에 따라서는 서프랑크 왕국도 프랑스 왕국의 역사의 일부라 보기도한다. 한마디로 저 위의 왕조에 카롤링거 가문도 껴놓아야 한다는 말.

어찌되었건 결국 카페 가문이 카롤링거 왕조를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집권한 배경부터가 찬탈이니 이들의 정통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될 수준이였다. 기존의 지배자인 카롤링거 가문과는 그다지 연관도 없고 가문의 역사가 길다거나 한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초창기의 카페 왕조는 자칫 실수 한번하면 그대로 목날라가는 위험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 당시 남부와 서부 동부에는 카페 왕조보다 몇배 몇십배는 더 큰 영지를 지닌 영주들이 있었고 카페 왕조는 이들의 명목상 왕일 뿐이지 제대로된 실권은 없다시피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계속해서 적장자를 낳으며 점점 가문의 정통성을 쌓아가고 결혼 상속 때로는 과감한 영지 몰수등을 강행하여 점점 왕권을 높이는것을 꾀하였다. 그러나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갑자기 영국으로 쳐들어가더니 그곳의 왕이 되어버렸고 노르망디와 프랑스 서북부 일부를 통채로 가지고 날라버린다. 명목상으로는 윌리엄도 프랑스 왕의 신하였으나 감히 프랑스 왕으로서 윌리엄과 그의 후손들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되었다.

그러나 필리프 2세 루이 9세와 같은 명군주들을 배출하여 지속적으로 대영주들과 영국 왕의 영향력과 권력을 조금씩 빼았어 왕의 힘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거기다가 대영주들이 십자군 전쟁에 투자했다가 파산하여 몰락하는등 프랑스 왕으로써는 최고의 행운이 따라준다. 그렇게 야금야금 잉글랜드 왕과 대영주들을 견제하던 와중 샤를 4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부계 분가인 발루아 왕조가 왕위에 즉위하며 그 당시 영국왕이던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에대한 야심으로 인하여 백년전쟁이 시작된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완승으로 끝났으며 그 결과로 영국은 대륙의 영토를 모두 잃어버리게된다. 그리고 100년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소비되었으나 오히려 이는 새로이 집권한 발루아 왕조에게는 호기가되었다. 끝없는 전쟁에서 결국 승리해냄으로 그 누구도 의문을 품을 수 없는 정통성을 가지게되었고 몰락한 영주들을 일방적으로 깨부셔 그들의 영지를 빼았고 관료들을 등용해 절대 왕정의 체제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발루아 왕조는 마지막 왕이 후사를 남기지못해 사라져버리고 만다.

하지만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의 집권으로 왕국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외-내적으로 그 당시 유럽의 그 어떤 국가보다 강력해 인터넷 별명으로 왼쪽 퍼런거가 탄생한다. 거기에 최근 재평가를 받고있는 루이 13세의 집권하에 절대왕정 체제는 완전히 프랑스에 뿌리내린다.

그러나 루이 14세 이후 무리한 전쟁과 그로 인한 재정 악화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며, 거기다 루이 15세 루이 16세같은 암군들이 줄줄이 배출되어 폭정과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주다 결국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정이 붕괴되고 프랑스 대혁명 이후 온갖 내홍들을 겪었다.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루이 18세가 즉위함으로 부르봉 왕조가 복고되었으나 나폴레옹의 백일천하에 밀려 잠시 부르봉 왕조가 종식되고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여 다시 퇴위한 이후 루이 18세가 복위했으며 그의 동생 샤를 10세가 즉위함으로 십여년간 부르봉 왕조가 지속되었으나 샤를 10세의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제 복구 시도가 결국 혁명을 촉발하여 샤를 10세는 퇴위하고 루이 필리프 1세가 즉위하게 된다. 하지만 루이 필리프 1세도 혁명으로 퇴위하였고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제정 시기를 거쳐 보불전쟁에서 제정 폐지 이후 공화국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행정

루이 14세를 필두로 한 절대왕정 시기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이 시기 프랑스의 중앙집권화 및 전문관료들의 등장은 사실이 아님을 1960년대 이후 연구 결과가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행정 조직은 인원이 제대로 갖춰져 있기는 커녕 기본적인 조직 틀조차 정립되지 않아서 푸케, 콜베르와 같은 초기 관료들이 골머리를 앓게 했다. 또한 과세, 사법[12], 입법 등 많은 행정 영역에서 실제적인 통치는 국왕보다는 귀족과 가톨릭 사제들의 의중에 의하여 행해졌으며, 몇몇 도시들[13]프랑스 혁명 직전까지도 각종 봉건적인 특권을 보유하고 있기까지 했다.

한편 지방 통치의 경우 샤를 6세 시기였던 16세기 말부터 국왕은 총독(gouverneur)이라고 불리는 행정관을 지방에 파견했지만 그것조차 전국적으로 파견된 것은 아니었으며, 왕의 대리인이라는 규정과 달리 이들은 왕의 의사를 멋대로 무시하고 자신들의 의중대로 지방을 통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심지어 총독직을 자신들의 아들들에게 세습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심지어 17세기 무렵 총독들이 각종 정치적 음모를 계속 꾸미자 이에 질려버린 리슐리외 추기경이 이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과세, 사법 각종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갖춘 관리인들을 파견했을 정도.[14]

4 경제 및 인구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유럽 최강의 강대국. 그 당시 웬만한 강대국 두세개를 합친걸 넘는 최고의 경제력과 인구수를 자랑했다.[15]

프랑스는 이미 르네상스 시기에 국토 대부분이 광활한 평지라는 이점을 이용하여 각종 다양한 농산물[16]을 재배하는 한편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중요성이 증대한 광업 및 대장간과 같은 가내 수공업을 바탕으로 유럽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국가였다. 다만 이 시기의 농공업 기술은 전반적으로 후진적이었던 중세의 그것에 의존했던 탓에 생산성이 크게 떨어졌고, 그로 인해 공급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측면이 강했다.[17]

이후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소빙하기가 끝나면서 작황사정이 호전됐고, 명군 앙리 4세가 국채 경감, 농민층의 세금 부담 완화, 화폐 개혁 등 일련의 경제 개혁 정책을 시도하면서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놓았으며, 비록 내부적으로는 정쟁으로 혼란스러웠지만 루이 13세리슐리외 추기경의 통치 시기를 거치면서 프랑스의 경제력은 절정에 오른다.[18] 그리고 이렇게 선대 군주들이 차곡차곡 쌓은 과실을 달콤하게 따먹은 인물이 바로 프랑스의 재정을 다 태워먹어서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루이 14세. 그렇지만 활발한 대외 정복과 베르사유 궁전 건설과 같은 루이 14세의 정책은 더 많은 돈을 요구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이 14세는 인두세, 소득세, 재산세 등을 도입한다. 한편 루이 14세의 재정 담당 장관이었던 콜베르중상주의 정책을 도입한다. 각종 공업을 왕실 차원에서 유치하면서 외국의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보호무역를 실시하여 외국 상품의 프랑스 침투를 적극적으로 견제했다. 또한 중앙으로의 세금 징수 및 전국적인 물산 유통의 원활화를 위해 프랑스 전역으로의 교통망을 정비하기 시작한 것도 콜베르의 업적이었다. 그렇지만 루이 14세가 워낙 돈을 흥청망청 써댔고, 급기야 1685년에는 낭트 칙령을 폐기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위그노들이 국외, 특히 네덜란드와 프로이센으로 탈출하기 시작한다. 이들 위그노들은 프랑스 내 상공업인들의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이탈은 프랑스 경제에는 그야 말로 뼈아픈 타격이었다. 결국 루이 14세의 사망 무렵 프랑스의 경제 상황은 파탄 지경에 이르고 만다.

다행히 루이 15세 시기 국정에 관심이 없어서 아무것도 안해서 경제가 느리지만 천천히 회복되는가 싶었다. 화폐가치는 다시 안정됐고, 생산과 인구도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다소간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지만, 물가 만큼이나 임금도 올랐기에 큰 사회적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런데... 루이 15세 말기 7년 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모든게 루이 14세 시기로 원상 복귀됐다. 7년 전쟁으로 빚은 빚대로 졌는데, 전쟁까지 지면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를 잃으면서 프랑스의 경제는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에서도 라이벌 영국을 어떻게든 물먹여보겠다고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면서 프랑스의 경제적 사정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흉년이 몇년에 걸쳐 일어났고 민중들, 특히 수도 파리의 빈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어간다. 당시 국왕 루이 16세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재정 총감 자크 네케르를 등용하면서 세제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기득권 층의 거센 반발과 본인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제대로 개혁이 되지도 못했고 마침내 수 세기에 걸쳐 쌓인 모든 모순과 불만이 폭발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만다.

인구의 경우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추정상 1700만 정도의 인구를 가져서 여타 유럽 국가와 큰 격차가 없는(그래도 여전히 많은)편이었으나 르네상스 시기부터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해 프랑스 혁명 전야에 이르면 2800만의 인구로, 당시 시점에서 중국과 인도를 제외하면 세계 최고의 인구수를 지닌 국가였다. 후일 독소전쟁에서 스팀롤러라고 불릴 정도의 무지막지한 인적 동원력을 자랑했던 러시아보다도 이 시점에서는 인구수가 더 많았고[19]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 같은 주변의 라이벌 국가보다는 인구가 두 배 혹은 그 이상으로 많았다. 수도였단 파리는 이미 18세기 후반에 65만명의 거주자가 있어 유럽 최고의 대도시 중 하나였고, 마르세유리옹같은 도시들도 무역 및 금융업의 중심지로 번성해나갔다.

5 역대 국왕

역사 관련 정보/프랑스 역대 군주 항목 참조.

6 기타

  • 이 시기 부르봉 왕가의 임금들은 정말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다. 정부를 둔 거는 거의 기본 스펙급이고 심지어 근친상간과 같은 루머들까지도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사실 여부를 떠나 왕실의 사생활에 대한 민중들의 불신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척도. 예외가 있다면 마리 앙투아네트만을 사랑한 루이 16세지만 루이 16세 고자설과 마리 앙투아네트 악처설만 번져 왕가에 대한 평판이 떨어지는 기현상을 보여주었다.(...)
  • 주언어가 프랑스어인걸로 많이 알지만, 사실 프랑스어는 파리와 그 일대에서만 통하는 정도였고 지방으로 갈수록 각종 방언과 기타 언어들이 통용되었다. 바스크어, 카탈루냐어, 알자스어, 발롱어 등등. 심지어 절대왕정 시기를 통해 한세기 이상의 중앙집권화를 거친 뒤인 프랑스 혁명 시기에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마르세유에서 온 대표단이 파리에서 행한 연설을 파리 시민들이 도통 못 알아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7 관련 문서

  1. 1791년부터 1792년까지는 '프랑스 입헌왕국/Monarchie constitutionnelle française'
  2. 왼쪽의 노란색 백합 배경의 푸른 문장은 프랑스를 상징하고 오른쪽의 윷판(?)같이 생긴 그림 배경의 빨간 문장은 나바르를 상징한다.
  3. 남부에 뚫려있는곳이 바로 그 유명한 아비뇽 유수 사건이 일어난 아비뇽이다.
  4. 1791년 이전
  5. 1791년-1792년
  6. 900~1682
  7. 1682~1789
  8. 1789~1792
  9. 1791년 이전
  10. 1791년~92년
  11. [1], [2], [3]
  12. 대체로 북부지방에서는 관습법을 남부지방에서는 로마 시대의 법에 의거해서 재판이 행해졌다고 한다.
  13. 대표적인 예가 몽펠리에.
  14. 그리고 이게 먹혀들어서 관리인 파견 이후 총독들의 힘이 대폭 약화됐다.
  15. 그래서인지 묘하게 유럽의 짱깨중국이란 별명이 있다.
  16. 특히 16세기부터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감자, 담배 등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17. 다만 이는 단지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마찬가지 현상이었다.
  18. 특히나 리슐리외 추기경은 중동 및 아프리카 국가들과 활발한 교역을 시도해서 무역으로 꽤나 많은 부를 프랑스에게 선사했다.
  19. 일단 인구를 효율적으로 동원할 행정체계가 러시아는 없고 프랑스는 있었기에 전시에는 더더욱 인력 차이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