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화칭

  • 간체: 刘华清
  • 번체: 劉華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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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2011. 중국군인. 한국의 해군참모총장에 상당하는 4대 해군사령원을 지냈으며, 재직중에는 물론 이후에도 중국 해군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오늘날 전 세계의 주목, 혹은 경계를 받고 있는 중국 해군의 대양세력화를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주인공. 이 점에서 냉전 시절 소련 해군을 세계 정상급의 규모로 성장시킨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제독과도 자주 비교된다.

1916년 후베이성에서 태어났고 1929년에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1]에 가입했다. 이듬해인 1930년에는 홍군에 입대했다. 국공내전 당시에 제2야전군 소속이었다. 제2야전군의 정치장교덩샤오핑이었다.[2]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자 그는 인민해방군 해군에 배치되었다. 1954년에 소련 레닌그라드의 보로실로프 해군사관학교로 유학을 갔고,[3] 1955년에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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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해군사령원 재직 시절

1982년에 예페이에 이어 해군사령원이 된 그는 중국 해군의 현대화를 주장했고, 오랫동안 연안 경비에 치중했던 중국 해군의 대양세력화에 박차를 가했다. 항공모함 도입을 본격적으로 검토한 것도 그의 재임 기간에 이루어졌을 정도. 특히 그는 '근해(近海) 방어'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중국 해안으로부터 200해리 이내의 제1도련(island chain), 600해리 이내의 제2도련을 중국 해군의 작전범위로 확대해야 한다는 장기 발전구상을 제시했다. 이는 오늘날까지 중국 해양전략의 기초로 남아있으며, 근래에는 아예 제1/제2도련에 대한 미국 등의 해군력 개입을 저지하기 위한 '반접근-지역거부'(A2/AD: Anti-Access/Area Denial) 전략으로 발전하는 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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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제2도련의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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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미 해군 항공모함을 방문한 류화칭. 이 시절 미국과 중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적 제휴 관계에 있었고, 때문에 중국 해군 사령관이 미 항공모함을 우호적으로 방문하는 것은 그다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겪은 덩샤오핑은 정적들을 견제하기 위해 정치적 야심이 없는 그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했다.[4] 덕분에 그는 항공모함 추진 업무를 계속 할 수 있었다. 해군 출신으로는 처음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된 것이었는데, 이는 인민해방군 내에서 해군의 발언권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해군사령원 후임자는 잠수함 출신인 장롄중이었다.

다만 장쩌민과 사이가 좋질 않아 장쩌민 시절엔 항모 반대파들에게 공격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후진타오가 부상하면서 항모 보유로 중국 정부의 방향이 바뀌었다. 여러 면으로 하이먼 리코버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물론 엔지니어로 직접 연구를 수행한 리코버와 관료에 가까운 그의 행적은 차이가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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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직에서 떠나면서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2004년에 회고록을 출간했는데, 제1/제2도련 개념에 입각한 해양전략 발전과 항공모함 도입 추진 등 그의 해군사령원 재임 시절 활동에 관한 내용을 다수 포함하여 중국 해군력의 발전을 살펴보는 데 의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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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중국 공산정권 수립 50주년 기념 군사퍼레이드에 참석한 모습.

2011년에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향년 94세로 대단히 장수했지만, 끝내 숙원인 항공모함의 완성은 보지 못했다. 항공모함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유언이 수많은 후배 제독들의 눈시울을 적셨다고. 이후 랴오닝급이 도입되며 그의 노력은 사후에나마 결실을 보게 되었다.
  1. 21세기에도 중국 공산당의 3대 세력으로 남아있는 집단이다.
  2. 중국의 지도자들은 북한군김일성 등과는 달리 정치장교 이상의 보직을 지내지는 않았다. 즉 야전지휘관들의 작전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일이 드물었고 마오쩌둥 조차도 일단은 정치장교였다. 대신 정치장교가 총참모장을 지내는 게 가능하긴 했다.
  3. 유학 시절 그를 지도했던 인물이 바로 고르시코프 제독이었다. 한마디로 그 스승에 그 제자.
  4.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인민해방군의 군 통수권을 보유하며, 때문에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역대 실권자들은 공통적으로 군사위원회 주석의 지위를 차지했다. 1980년대 덩샤오핑도 공산당 총서기, 국가주석이 아닌 군사위 주석 자격으로 중국을 통치했을 정도. 다만 장쩌민부터는 국가주석이 겸임하도록 제도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