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페이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해군사령원
2대 샤오징광3대 예페이4대 류화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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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체: 葉飛(섭비)[1]
  • 간체: 叶飞

1 개요

중국군인, 제독.

엄밀히는 해군 장성으로서의 계급은 받지 못 했다. 그가 받은 계급은 육군 대장이었고 1960년대에 계급이 사라지고 1988년에 부활하던 사이인 1981년부터 1982년에 해군사령원을 지냈기 때문이었다. 1982년에 전역했고 1988년에 계급 부활이 이뤄져 해군으로 계급을 받지는 못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맡았던 보직의 위상 등을 볼 때 제독으로 볼 수 있어 제독 항목에 포함하였다.

2 생애

1914년 5월 7일에 미국필리핀에서 화교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때 이름은 식스토 메르카도 티옹코(Sixto Mercado Tiongco)이었다. 아버지 얍순위(葉蓀衛, Yap Sun Uy)[2]복건성 출신의 상인이었고 1900년에 필리핀으로 이주하여 필리핀식 이름은 티옹코를 사용하였다. 어머니 프란시스카 메르카도(Francisca Mercado)는 필리핀인이었고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어릴 적에 지은 중국식 이름은 예치헝(葉啟亨)이었다. 1919년에 아버지가 그와 형을 중국 복건성으로 데려가 학교에 보냈다. 1928년에 지하조직이었던 중국 공산주의청년단[3]에 가입했다. 1932년 중국 공산당에 참여했고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국적이 필리핀이어서 곧 추방조치되었다. 어머니 프란시스카가 인수하러 홍콩에 왔을 때 석방되었는데 이때 겨우 18세였다. 어머니한테 일본가서 공부한다고 하고는 게릴라에 참여했다.

1934년에는 대장정에 참여했고 중일전쟁에도 참전했다. 소속은 신4군(新四軍)이었고 당시 중국군의 상황이 그랬지만 당연히 육군이었다. 국공내전 당시에는 맹량고(孟良崮) 전투 때 인민해방군 10집단군 사령관을 지냈다.

국공내전이 끝난 뒤에는 복건성의 성장을 지냈고 남경군구 부사령관도 지냈다. 1955년엔 불과 41세 나이로 중국 육군대장에 오른다. 중국은 10명의 대장을 이때 임명하고 그 후에는 제복군인의 최고계급으로 정해버렸다.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해외 출신이란 이유로 박해를 당했다가 덩샤오핑에 의해 재등용되었다. 1979년에는 해군 경력이 없었음에도 덩샤오핑이 총참모장을 하던 시절에 해군담당 보좌관을 지냈다. 그 덕분에 1980년에 샤오징광에 이어 3대 해군사령원에 올랐다. 후임자는 류화칭이었다. 1982년에 전역했다. 1989년에는 고향인 필리핀을 70년만에 방문하기도 했다.

1989년에 천안문 사태 당시에 예비역 장성인 장아이핑, 샤오커(蕭克), 양더즈(楊得志), 천자이다오(陳再道), 쑹스룬[4], 리쥐쿠이(李聚奎)와 함께 중국 공산당은 중국 인민의 편이어야 한다며 중국 중앙군사위원회에 군부에 의한 진압을 반대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서한은 묵살되었고 강경진압되었다.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1. 葉이란 한자는 일반적으로 '엽'으로 읽으나, 성씨는 예외적으로 '섭'으로 읽는다. 또한 葉과 叶(협)은 본래 다른 글자였으나 두 글자를 叶으로 간화했기 때문에 정체자로 변환시 주의가 필요하다.
  2. 葉은 표준 중국어로는 '예'라고 읽지만 민남어(閩南語)로는 '얍'이라고 읽는다.
  3. 약칭 공청단으로 21세기에도 중국 공산당 내에 공식조직으로 살아있다. 태자당에 밀리자만.
  4.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 인민지원군 9병단을 지휘하며 미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힌 장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