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us Antonius
(BC 82? ~ BC 30)
1 소개
고대 로마의 무장으로, 평민 출신이지만 조부 때부터 나름 명성을 쌓아올린 집안 출신.
2 초기 행적
안토니우스 본인의 군대 경력은 혈연 관계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니라, 훗날 적대하게 되는 폼페이우스의 막료였던 가비니우스 휘하에서 복무한 것으로 시작된다. 유대 왕국과 이집트에서 기병장교로 복무하여 여러 전투에 참가, 늘 선두에 서서 굉장한 용맹을 떨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시작하자 여기서 경력을 쌓으려고 했는지, 전출 신청을 내서 이후로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종군했다. 장교로서는 제법 훌륭한 경력을 쌓았고, 카이사르와 인척 관계이기도 해서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여겨졌다.
갈리아 전쟁이 끝난 뒤에는 호민관으로서 카이사르의 권익을 지키려 애썼지만, 원로원 세력의 강력한 대응에 밀려 본국에서 도망친 뒤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하'에 동참한 뒤 계속 카이사르 휘하에서 폼페이우스 군대와 싸웠다.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패하고 이집트에서 암살된 뒤, 안토니우스는 '부(副)독재관'으로서 카이사르 대신 이탈리아의 통치를 맡았다. 하지만 이때 실정뇌물과 여색을 엄청 밝혀을 하여 카이사르의 실망을 샀고, 이후로는 정치 경력에서 중용되지 않았다.
3 카이사르 암살 이후
BC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권력투쟁을 일으켜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했지만, 결국 서로의 윈-윈을 위해 손을 잡고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 키케로와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포함한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뒤, 그리스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하고 동방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딱 낚인 것으로 여겨지며, 옥타비아누스가 서방에서 착착 세력권을 확대해 나가는 가운데 이집트의 세력과 자기 군대의 힘을 이용해 파르티아 원정을 강행했으나, 기병대를 제공하기로 했던 아르메니아 왕이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기병전력의 부재로 패배한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유능했기에, 큰 병력손실을 보지 않고 퇴각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왕의 도주를 배신으로 여겨 아르메니아를 공격, 승리한다.
그 이후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한다. 그런데 개선식은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바치는 행사였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한다는 것은 로마가 아니라 다른 나라나 도시의 신들에게 영광을 바친다는 의미였고, 이는 로마의 수호신들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이건 로마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결혼한 상태였는데 그녀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으며, 클레오파트라와 자신이 낳은 아이[1]에게 동방을, 카이사리온 [2]에게 이탈리아와 서방의 통치권을 물려주겠다고 했다. 즉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이 로마 전역을 지배해야 한다는 말. 이에 전 로마 시민들이 빡쳤다. 거기다 유언장에는 사후 로마가 아니라 이집트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했는데, 옥타비아누스가 이걸 까발리자 그냥 매국노+배신자+ 천하의 개쌍놈으로 확정. [3] 옥타비아누스는 이 행동들을 명분으로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다.
안토니우스의 이런 행동들은 당시 로마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수도 받아들일수도 없는 터무니 없는 일이였다. 그래서 로마 등에 있던 안토니우스의 지지자들은 처음에는 "미치거나 클레오파트라의 주술에 걸리지 않고서야 설마 그럴리가?", "이건 조작이다" 라며 믿지 않았으나, 모두 사실이였다. 어쨌든 안토니우스가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자 그의 지지자들, 그 해의 집정관들과 원로원의 약 1/3 정도가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가 있는 동방으로 왔다. 또 사실여부가 밝혀지자 안토니우스의 지지율은 상당히 떨어졌다. 그래도 강력한 군사력과 군사적 능력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악티움 해전 에서 패하면서 '군사력도 이제 별거 없다' 라는 이미지가 생기자 마자 지지 세력, 중립을 지키고 있던 세력 대부분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어버린다.
4 내전의 양상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열린 아르메니아 원정 개선식에서 자신과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나은 첫째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에게 아르메니아와 메디아, 파르티아를, 딸인 셀레네에게 키레나이카와 리비아를, 막내 아들인 필라델포스에게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준다는 발표를 한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에게 다스리던 이집트의 왕과 함께 왕중의 왕이라는 칭호를 바친다. 이를 지도로 보자면 다음과 같다.
다시말해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동지중해 속국, 동맹국 할 것없이 모조리 클레오파트라와 자기 자식들에게 준다는 말이다. 당시 로마인이라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한 일임에 틀림없으나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조작한게 아니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개선식에 모인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이집트에서 교역하던 상인들을 통해 지중해 전 지역에 알려지게 된다. 여기에 더해 안토니우스는 로마를 동서로 분할하자는 제안을 옥타비아누스에게 한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발행한 은화 - 안토니우스쪽에 새겨진 "Antoni Armenia devicta"는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를 정복했다는 뜻이므로 그러려니 해도 클레오파트라 쪽에 새겨진 "Cleopatra Reginae regum filiorumque regum"는 클레오 파트라는 왕중의 여왕이자 왕자들의 여왕이라는 뜻으로 이는 당시 로마, 그리스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모를리 없는 고대 페르시아 황제의 칭호다. 안토니우스는 이런 엄청난 칭호를 잘해야 로마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동맹국 여왕에게 바쳤다. 로마인들이 어이없다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발표했음으로 사실상 옥타비아누스가 지배한 서지중해도 카이사르의 유산으로 보아 상속권을 주장할 수도 있게 되는 셈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한 일은 안토니우스의 이 발표로 로마인들이 경악한 가운데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공개한 것 정도로 이는 이미 안토니우스에 대한 로마인들의 반감이 활활 타오른데 장작을 더한 정도일 뿐이다. 동지중해 영토 전체의 지배권과 안토니우스의 무덤 위치 중 어느게 큰 일인지는 구태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옥타비아누스는 당장 원로원들을 모아서 2차 삼두정치를 백지화하고(=안토니우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안토니우스가 발표한 사항이 전부 무효라고 공표하고, 로마 양분제안도 단칼에 거절한다.
따져보자면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의 결별을 선고하고 새로운 동맹인 클레오파트라를 맞이한 셈으로 볼 수도 있다. 일단 클레오파트라는 왕가를 신으로 모시는 이집트의 공주(혹은 여왕)이다. 게다가 당시 이집트는 본국 이탈리아에 곡물을 수출할 정도로 꽤나 비옥한 곡창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를 통해 이집트를 얻는다는것은, 옥타비아누스와의 내전 도중 기대할만 한 군사력과 곡물지원, 이탈리아에 대한 압박을 기대할수 있다는 점이 된다. 클레오파트라에게도 이 동맹은 나쁘지 않았을터인데, 안토니우스는 경험 많은 장군이며 로마 절반을 통치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재능은 상당한 편이었는데다가 10만에 가까운 병력 까지 있었으니 옥타비아누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있었다고 믿었던듯 하다. 어찌되었든 내전에서 승리한다면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공동 통치자로 동방의 황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안토니우스의 병력은 로마 시민권을 지닌 로마군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뜬금없이 본적도 없는 이집트 여왕을 위해 로마의 영토를 갖다 바치러 조국을 상대로 칼을 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졸지에 아무 명분도 없는 전쟁에 끼어들어 반역자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사기가 오를레야 오를 수가 없었다. 이들을 묶어둘수 있는건 이집트 왕가의 재물뿐이었는데 로마군이 원래부터 돈만 주면 누구하고도 싸우는 용병집단도 아니고, 이래서야 목숨걸고 싸울 맛이 날리가 없었다. 그 결과 탈영병이 속출했고, 심지어 10년넘게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장군인 퀸투스 델리우스는 악티움 해전 직전에 안토니우스의 전쟁계획까지 홀랑 들고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 사실 악티움 해전의 패배는 안토니우스 군에게 치명적인 병력 손실을 가져온 것은 아니라서 비록 일패도지했지더라도 안토니우스군의 주력은 건재했고 자금도 충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악티움 해전에서의 패배는 안토니우스군에 그나마 남아있던 사기마저 박살냈고, 그 결과 안토니우스 휘하 19개 군단과 1만 2천이나 되는 기병이 단체로 탈영, 혹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 병력만이 아니라 지휘관들조차 속속 투항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전쟁의 신이라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똑같은 내전이라도 안토니우스군은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의 폼페이우스군과 비교되는데, 폼페이우스군에는 로마 공화정의 재건이라는 충분한 명분이 있었고, 다수의 원로원마저 지지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폼페이우스군은 파르살루스 전투(BC 48)에서 대참패를 당한 이후에도 쉽게 사기가 꺾이지 않아 북아프리카에서 패배(타프수스 전투 BC46)와 스페인에서의 패배(문다 전투 BC45)까지 겪고도 포기하지 않고 시칠리아까지 건너가 끈질기게 저항했다. 이들의 저항이 최종적으로 막을 내린 것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의 패배에서 12년이나 지난 기원전 36년(나우로쿠스 해전)[4]의 일이었다. 여기에 반해 안토니우스군은 악티움 해전을 겪은지 얼마되지도 않아 산산히 와해되고 만다. 안토니우스가 절망해 빠져 자살한 것은 악티움 해전 패배로부터 1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명분없는 전쟁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지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고, 안토니우스의 상황 오판이 심각했다는 뜻이기도하다.
5 몰락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 진출을 시도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그리스에서 저지하려 하면서 그리스에서 충돌했는데 이것이 악티움 해전이다. 전염병+ 심복의 배신으로 인한 전략 누출 + 클레오파트라의 삽질 삼단 콤보로 인해 안토니우스는 여기서 패배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비보(오보?)를 듣고 자결을 시도했다. 허나 클레오파트라는 죽지 않았고, 빈사 상태로 클레오파트라에게 이송되어 사랑한 여인의 품 속에서 죽었으니 약간의 위안일지도.
이집트에 도착한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까지 죽자, 안토니우스의 유언대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나란히 묻어줬다.
6 기타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재능은 상당한 편이었다. 다만 간댕이를 전당포에 맡긴 듯한 대담함과 선두에 서서 무쌍을 찍는 용맹함은 '군단장'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소양이었지만 모든 상황을 냉정히 아우러야 하는 '총사령관'으로서는 단점으로 작용했고 결정적으로 상대 총사령관인 아그리파는 천재 카이사르가 일찍이 그 재능을 알아보고 옥타비아누스의 평생 친구이자 수족으로 붙여준 인재.[5]
이후 안토니우스 가문에서는 마르쿠스라는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 법안을 제정한 사람은 키케로의 아들이었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이를 통해 하늘은 키케로의 집안이 안토니우스에게 최후의 벌을 내리도록 하였다."라고 평하였다.
7 대중 매체에서
드라마 ROME에서는 영국인 배우 제임스 퓨어포이가 역을 맡았는데 정말 유들유들하면서 호탕한 인물로 나온다. 여기서는 역사와는 다르게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인 아티아와 연인관계다. 작중에서는 옥타비아누스의 전략을 대충 파악했지만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려서 미처 대비를 못 하고 역사처럼 클레오파트라의 사망 소식을 듣자 보레누스에게 칼을 들게 한 후 스스로 몸에 꽂아넣어 자살한다.- ↑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 이중 클레오파트라는 나중에 마우레타니아 왕 유바 2세의 왕비가 된다.
-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 ↑ 남의 유언장을 미리 까발리는건 로마의 상식, 전통, 법에 어긋나는 일인데, 안토니우스의 행동들이 워낙 대단한지라 묻혔다.
- ↑ 처음에는 옥타비아누스가 나섰으나 역시 군사적 재능은 없었던지 패하고, 아그리파가 나서서야 이길 수 있었다.
- ↑ 다만 폼페이우스는 안토니우스를 애송이로 여기며 그 능력을 얕보았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를 상대로 지구전을 구사하며 싸우지 않고 있을 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군대를 공격하려고 했고, 카이사르는 번번히 이를 막으러 달려왔다. 당시 폼페이우스 입장에서 애송이가 아닌 장군이 몇이나 있었겠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