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리파

1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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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초상화가 많은 사람
국내 미술학원 한정, 발음을 아그리, 아그립빠라고 하기도 한다.
밤에 보면 가장 무서운 사람 [1]

Marcus Vipsanius Agrippa(BC 63~BC 12), 로마제국의 정치가이자 군인.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이자 절친한 친구이자 사위였다. 카이사르가 군사적인 재능이 결여된 옥타비아누스를 군사적인 면에서 보완하기 위해 젊고 재능있는 동년배의 군인이었던 아그리파를 붙여줬다. 보좌가 아니라 보완이라고 표현한 것은 워낙 옥타비아누스의 군사적 재능과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전장에서 실제로 군대를 지휘할 대리 수준의 인물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옥타비아누스는 전략까지는 제대로 수립했지만, 막상 전장에 나서면 복통등으로 인해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거나, 직접 지휘봉을 잡으면 패전하거나 고전하는 경향이 있었다.를르슈?

신기하게도 아그리파는 이런 중임을 맡기에는 신분상 크게 떨어지는 평범한 평민 출신이었는데, 굳이 평민 출신을 선발해 붙여준 것은 아그리파가 옥타비아누스의 영향력을 뛰어넘으면 곤란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아그리파는 출신의 한계 때문에 평생 옥타비아누스의 그림자에 머무른다. 하지만 그 선택은 탁월했는데,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가 숙적 안토니우스를 꺾는 것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영어권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대놓고 "아그리파가 없었으면 옥타비아누스는 황제가 되지도 못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의 정적들이 옥타비아누스를 비판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뻗어있는 채로 아그리파가 승리를 가져다주길 기다린다고 할 지경이었다.

내전이 끝난 이후에도 아우구스투스의 조력자 역할을 하면서 평생 충성했다. 그는 제국 군대를 재편성하고 도나우 강 방위선을 확립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 건축 면에서도 업적을 남겨 판테온을 지었으며[2] 비르고 수도와 율리아 수도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아그리파 목욕탕을 지었으며, 이는 이후 지어지는 대형 목욕탕의 시초가 되었다.[3]

아우구스투스는 사위 마르켈루스가 죽자 그를 후계자로 내정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을 것을 대비한 포석이다. 아우구스투스에 비해 아그리파는 무척 강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계자의 위치를 다지는 의미이기도 하고, 아우구스투스의 자손을 늘리기 위한 목적에서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결혼시켰다. 나이차가 크게 나는 결혼이었지만, 아그리파는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식을 보아서 이 점에서도 아우구스투스에게 제대로 기여해주었다.

아이러니는 아우구스투스가 아그리파보다 무려 26년을 더 살았다는 것이다. 신체가 강건했던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훨씬 전인 BC 12년에 급사했는데, 죽기 1년전에 이미 몸이 갑자기 수척해진 모습이 신전에 조각되어있다. 하지만 암살은 아니었으며, 오랜 전장생활과 내정으로 인해 아우구스투스보다 몸관리를 충실히 할 시간이 적었다는 것이 급사의 사유로 짐작된다. 오늘의 교훈 : 아무리 튼튼해도 몸 관리 잘못하면 훅 간다. 술 세다고 방심하지 말자

그는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모두 다 최후가 좋지 못했다. 장남, 차남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의문사했고, 삼남인 포스트무스는 비행을 이유로 외딴 섬에 유폐당해 죽임을 당했다. 딸인 소(小) 율리아는 간통 혐의로 역시 유폐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아그리파의 자식들이 전부 좋지 않은 최후를 맞았던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그들이 전부 건강이 나빠 일찍 죽거나 정상인의 기준에 부적합할 정도로 행동에 문제가 많았을까? 차라리 리비아와 티베리우스가 중심이 된 음모에 희생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있는 설명으로 볼 수 있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딸 대(大)아그리피나게르마니쿠스와 결혼해 여섯 명의 자식을 낳는데, 게르마니쿠스는 동방에서 의문사를 맞고, 아그리피나는 반역 혐의로 역시 섬에 유폐당한 후 죽음을 맞는다. 3대 황제 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의 후처이자 네로의 어머니인 소(小)아그리피나가 이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1.1 석고상

그리고 미대 지망생들이 그리는 석고상인 아그리파가 이 사람이다. 특이한(?) 얼굴 형태로 전세계의 미술학도라면 이 사람 얼굴은 모두 한 번씩 그려봤으리라. 사람에 따라선 이 얼굴에 한이 맺힌 사람도 있고 이 얼굴이 오히려 친숙한 사람도 있다.

데생의 기본기를 닦으면서 그리는 만큼, 얼굴 형태 자체는 간단하고 크게 어려운 부분은 별로 없다. 그 만큼 제대로 치려면 노력이 필요하지만.

문외한이라도 생김새는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비교할 만한 것이 있다면 '생각하는 사람' 정도) 정치가이니만큼 얼굴에도 위엄이 느껴지고 해서 미술이나 조각 관련해서 유머 요소로 등장하기도 하며, 게임에서는 몬스터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그것도 만날 머리만. 안습.

1.2 셰도우 오브 로마의 아그리파

캡콤의 역사왜곡사지절단쓸데없는잠입혼합액션게임(?) 셰도우 오브 로마에선 액션 파트의 주인공으로 사실상 데드 라이징의 프랭크의 프로토 타입이라고 봐도 좋다. 아버지가 갑자기 카이사르의 암살범으로 몰려 아버지를 구하기위해 검투사로 성공하려는 인물(...) 게임내에서 아우구스투스 파트가 워낙 재미없기 때문에 액션 파트가 더 빛난다.

2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풀네임은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폰 네테쉼.

르네상스독일의 인물로, 직업은 마술사이자 군인이자 신학자이며 법률가이자 연금술사, 점성술사이며 오컬트 작가(...). 쾰른 출신으로 아버지가 쾰른의 건설자였던 1번 인물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생존하던 시기(15~16세기)에는 상당히 특이한 신학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다른 학파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여러 차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 마녀로 오해받은 한 여성을 법정에서 변호해서 무죄방면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그 때문에 보수적인 도미니코 수도회에게 이단자 딱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여성의 우월성과 뛰어남에 대한 책을 쓴다거나, 오컬트 집대성인 <Three Books of Occult Philosophy>을 집필하는 등 당시로서는 굉장히 눈에 띄는 활동을 보인다.
한편 마법을 사용했다거나, 거대한 검은 개아카드사역마로 부렸다거나, 악마를 사용해서 사자를 소생시켰다는 오컬트 마니아들을 가슴설레게 하는 괴담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말년에는 이단 딱지때문에 각지를 전전하다가 객사하는, 꽤나 안습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러한 대활약(?) 때문에 여러 창작물에서 자주 언급된다. 특히 호러 게임 암네시아 : 더 다크 디센트에서는 아예 불로불사의 시체 마법사로 등장한다.

3 아그리파 멘테나

∀건담의 등장인물. 항목 참조.
  1. 미술실 괴담의 대표적인 케이스다. 예를 들면 아그리파 라고 해서 봤더니 사람이라던가...
  2. 다만 판테온은 완전히 소실된 후 하드리아누스가 완전히 다시 지었다. 판테온에는 아직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건축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지만 이는 하드리아누스가 원 건설자를 배려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하드리아누스가 다시 지은 판테온의 양식은 아그리파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3. 이후 로마에는 네로 목욕탕, 카라칼라 목욕탕,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이 지어진다. 목욕탕에 대해서는: "오! 네로보다 나쁜 것이 무엇인가? 오! 네로 목욕탕보다 좋은 것이 무엇인가?"라고 풍자시인 마르티알리스가 비꼬았을 정도이다. 한 마디로 로마인들이 환장을 하고 좋아했던 로마 문명의 상징. 하지만 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