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티움 해전은 기원전 31년 로마 공화정 시대에 벌어진 전투로 옥타비아누스 측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이끄는 해군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연합함대와 싸운 해전이며, 오랜 로마의 내전을 종식시키는 전투였다.
1 전조
2차 삼두정으로 알려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간의 정치적 야합은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동생인 옥타비아와 이혼한 뒤 클레오파트라와 결합하기 위해 이집트로 가면서 깨지게 된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로맨스는 정치적인 스캔들로 번졌으며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하여 이집트를 중심으로한 동방의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 한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정치적인 배경은 모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일한 양자였으며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밑에서 군사적인 명성을 떨친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는 초기엔 옥타비아누스와 협력하여 키케로와 공화정 복위 세력을 제거하는데 전념한다. 이 일이 끝나자 그는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낸다. 그는 결혼한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인 옥타비아를 로마에 남겨두고 알렉산드리아로 향한다. 그곳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만나 그녀와 카이사르 사이에 생겼다고 알려진 당시 13세였던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내세울 움직임을 보인다. 따라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리온에게 왕중왕이라는 칭호를 준다. 이러한 행위는 표면적으로 공화정을 유지하고 있었던 로마의 정책에 반하는 것이었고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국가의 적임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리온을 꼭두각시로 삼은 뒤 로마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로마의 왕 노릇을 하려고 한다며 비난한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 공화국의 수도로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로 삼으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2차 삼두정의 기간이 만료된 기원전 33년,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에게 그의 직위를 연장하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그동안 보인 직위에 대한 집착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동안 둘의 사이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는데,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다른 삼두정의 일원인 레피두스를 무시하고 있다고 말하며 또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서 빼앗은 땅을 그가 멋대로 소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게다가 새로 징집한 병사의 절반을 그에게 보내지 않고 있다고 불평하였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제멋대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처형한 것을 비판하였고,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제멋대로 머무는 권한이 없으며 또한 동방에서 거둔 전리품의 절반을 그에게 보내지 않았다고 불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친아들로 알려진 카이사리온의 권한을 강화하였고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있어 큰 위협이었다.
기원전 32년, 대략 3분의 1 정도의 원로원 의원들과 두 명의 집정관들이 안토니우스의 편에 섰다. 이들 집정관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없는 틈을 타 안토니우스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고 다음날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에게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와 합류하라고 말한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에페소스로 이동한 뒤 클레오파트라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상당수의 함대를 모은다. 그 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를 아르메니아에 보내 그곳에 있는 안토니우스의 주력 부대를 배에 싣고 오게 한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전쟁 준비에 서두른다.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의 장군인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의 동맹도시인 메토네라는 그리스 도시를 점령한다. 옥타비아누스는 뒤이어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을 공식화하기 위해 원로원을 설득하여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에 대한 선전포고를 종용한다. 그 결과 원로원은 마침내 선전포고를 결의하고 안토니우스가 갖고 있는 모든 권한을 몰수한다.
2 전투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곧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음을 발견하였고 따라서 파트라이라는 그리스 도시로 철수한다. 그 뒤 그의 육군 본대는 악티움 도시의 근교로 이동하였고 그의 함대도 육군 근처에 정박한다.
이에 대응하여 옥타비아누스는 곧장 안토니우스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많은 장군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리고 그 해를 넘긴다. 기원전 31년 초엔 아무런 군사적 마찰없이 지나갔는데 그 동안 아그리파의 육군 본대는 그리스 서부 도시들을 점령해 나갔다. 이는 안토니우스의 주의를 분산시기키 위해서였다. 이러한 조용한 흐름은 8월 말까지 지속되었고 마침내 아그리파의 육군 본대가 안토니우스 본대의 맞은 편에 도달하게 된다. 안토니우스가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한 이유는 안토니우스의 본대는 동방 전역에 흩어진 상태였고 이들을 집결하는데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본대가 도달하자 안토니우스는 그의 본대를 북쪽에서 철수 시킨 뒤 남쪽에 집결한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진언하길 이 지역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고 따라서 육군을 단단히 요새화 된 도시들에 주둔시킨 뒤 해군은 알렉산드리아로 철수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클레오파트라가 제공한 함대는 안토니우스 군의 주력이 되었으므로 클레오파트라의 조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안토니우스는 이 의견에 동의한다.
이 소식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해 논의를 벌였다. 그 결과 9월 1일, 그는 자신의 선박에게 전투 준비를 갖추도록 명령하였다. 9월 2일, 안개가 끼고 파도가 거센 날,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함대에게 안토니우스 함대의 우측으로 이동토록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함대가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옥타비우스의 함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두 선단은 악티움 해협 밖에서 만나게 된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500척이었고 그 중 230척은 전함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250척의 전함이 있었다. 옥타비우스의 함대는 해협 밖에 있었고 좌익에 위치한 아그리파가 지휘하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우익을 지휘하였고 클레오파트라가 이끄는 선단은 맨 뒤에 위치하고 있었다.
전투는 오후 내내 지속되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거대하였고 커다란 충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배는 충돌하여 충격을 주는 방식에 유효하였으나 충돌에 실패했을 경우 위치한 충각의 무게로 인해 병사들은 한동안 작은 배의 병사들의 투창, 혹은 화살 공격에 노출되게 된다는 약점이 있었다.
안토니우스에겐 불행히도 많은 그의 배들은 정원수가 부족하였다. 안토니우스 군이 옥타비아누스의 군을 기다리는 동안 말라리아가 유행하여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따라서 안토니우스는 많은 배들을 비운 뒤 불태울 수 밖에 없었다. 많은 노잡이들이 죽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거대한 전함의 장점을 살리는 전투방식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반해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작은 배들로 구성되었고 또한 숙련된 사공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런 작은 배들의 우수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이들은 선회하여 투창을 하는 방식의 전투에 능하였다. 이들은 안토니우스가 갖고 있는 커다란 전함을 우회하여 충돌한 뒤 뒤이어 투석, 투창을 하며 싸웠다.
전투하기 직전 안토니우스의 장군 중의 하나인 퀸투스 델리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로 배신한 뒤 안토니우스의 전략을 폭로한다. 안토니우스는 그의 거대한 전함들로 아그리파의 북쪽 측면을 공격하려고 계획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계획을 파악한 뒤 거리를 두면서 머무르고 있었다. 마침내 안토니우스는 그의 함대의 전열을 넓힌 뒤 전진하여 옥타비아누스와 싸웠다. 후방에 있언 클레오파트라는 전투의 긴장감과 격렬함을 견디지 못하여 자신의 함선에 후퇴를 명령한다.[1] 그러자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그들의 기함을 따라 퇴각하기 시작한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철수 신호를 못보았다. 때문에 그는 그가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하였으며 철수하는 이집트 함대를 따라간다. 지휘관이 이탈하자 안토니우스 군은 혼란에 빠졌고 공포심은 병사들 사이에 전염되었다. 이에 반해 옥타비아누스 군은 기세를 타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한다. 어둑해질 무렵 안토니우스 함대의 대부분은 파손되거나 불태워지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작은 배로 갈아탄 뒤 달아났으며 이를 소수의 몇몇 함대가 따라갔다. 뒤에 남겨진 함대는 옥타비아누스의 군에 붙들리거나 파손되고 말았다.
전투가 끝나자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직접 병사들과 함께 난파된 선원들을 구하느라 배 위에서 날밤을 지샌다. 다음날 아침 안토니우스의 남겨진 육군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의 사절을 보낸다. 뒤이어 안토니우스 군의 진영이 점령되었으며 이렇게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는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3 전황에 대해
해군으로 승부를 하겠다는 안토니우스의 전략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안토니우스의 세력은 풍요로운 동방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다 클레오파트라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금력에 의해 무장의 질이 좌우하는 해군에 의존하는 것은 안토니우스에게 있어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악티움 해전의 결과는 안토니우스의 참패였다. 여러가지 불운이 겹쳤으나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이탈과 뒤 이은 안토니우스의 이탈이었다. 이수스 전투나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의 이탈이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 처럼 악티움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 둘이 이탈하기 전엔 아그리파가 지휘하는 옥타비아누스 군은 우세하지도 않았고 또한 전술적으로도 우수함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는 아그리파의 군사적 재능이 안토니우스를 능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는 과거 공화정 파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상대로 한 회전에서 안토니우스가 승리한 반면 아그리파는 패배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이 전투에 대해 결정적인 오판을 하였는데 그는 이 전투를 대수롭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는 이 전투를 단지 알렉산드리아로 철수하는데 벌어진 시시한 교전이라 생각하였고 따라서 악티움을 빠져나가면서 옥타비아누스의 해상 봉쇄가 실패했음을 비웃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판단과는 달리 로마의 시민들과 속주민들은 이 교전을 사실상 패권을 다투는 결전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악티움의 패전은 모든 이들이 등돌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로마인들의 민심을 크게 잃은 상태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제국을 삼분하여 클레오파트라의 아들들에게 공동통치하게 하겠다는[2] 계획을 발표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안토니우스에 대한 지지는 그가 단지 막강한 병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악티움의 패전의 소식이 전해지자 안토니우스의 세력은 계속해서 이탈한 것이었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의 의미와 그 패전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었고 따라서 태연하게 철수한 것이었다. 그가 클레오파트라를 전투에 동행한 것도 미심쩍은데 클레오파트라의 진언인 알렉산드리아로 철수한 뒤 싸울 것 역시 굉장히 소극적인 작전이었기 때문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해군전력이 노잡이를 그리스에서 충분치 공급할 수 없음을 보고 그랬을 것이나 당시 엄청난 경제력을 자랑하던 그리스를 싸움없이 내주고 철수하는 일은 당시 안토니우스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었던 군사적인 강력함의 이미지를 그냥 내던지는 일로 현명한 조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에서의 정치판에 오래 굴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에서의 완벽한 판단미스로 인해 결코 패배할리 없어 보였던 악티움 해전을 이탈함으로써 패배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 결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그의 자식들은 일년뒤 모두 목숨을 잃고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의 독재정이 시작된다.
4 그 후
두 정치가들에게 있어서 악티움 해전의 결과가 끼친 영향은 상당하였다. 악티움 해전 이전 안토니우스는 19개 군단과 1만 2천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해전 이후 이들의 대부분이 탈영해 버린다. 안토니우스는 로마 원로원에 의해 반역자로 규정되었고 모든 공직에서 추방된 상태였으므로 동방에 대한 명령을 집행할 권한이 없어진 상태였다. 이를 파악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쫒지 않았고 그 대신 그해 겨울을 그리스에서 보낸다. 이 지역에서 그는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그에게 항복을 하러 온 사절을 맞이하며 분주히 지낸다.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머물던 그리스 도시 사모스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사절을 맞이한다. 클레오파트라는 그에게 자신이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며 그를 회유하려 하나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는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큰아들인 안틸루스를 보내 은퇴한 뒤 아테네에서 소시민으로 살겠다고 말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이것에 대해서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옥타비아누스는 양측의 군대로 안토니우스는 압박한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안토니우스가 있던 파래토니움에 진격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다른 군대를 이끌로 페루시움으로 향하였다. 안토니우스는 갈루스 군을 상대하지만 격파당하고 이집트로 향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는 소규모의 옥타비아누스 군을 맞아 승리를 하였으나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우스 휘하의 병사들은 계속 탈영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다시 군대를 소집해 옥타비아누스의 주력 군과 회전을 치르나 그는 이 싸움에서 철저하게 패배한다. 안토니우스는 배를 타고 달아나는 도중에 클레오파트라가 생포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을 기도한다. 그는 그의 몸을 칼로 찔렀으나 바로 죽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자신이 머물고 있던 영묘로 데리고 오는데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그 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탄원하기 위해 영묘에서 나와 궁전으로 간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아들을 살려줄 생각이 없었고 이에 따라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8월 12일에 자결을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뒤 곧 카이사리온을 죽이고 자신이 유일한 카이사르의 아들임을 천명하게 된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의 악티움에서의 승리는 그를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게 하며 따라서 그는 마침내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된다. 따라서 악티움 해전은 로마 공화정을 붕괴시키고 로마 제국으로 가는 것을 결정짓는 전투가 되었으며 또한 이 전투의 결과로써 이집트가 멸망하고 최후의 헬레니즘 국가는 종말을 고한다.
5 미디어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비극을 다룬 많은 작품에서 반드시 묘사되는 부분이다. 가장 드라마틱하게 그린 부분이 바로 플루타르코스의 대비열전 안토니우스 부분, 이야기 자체는 간략하지만 인물들의 심리를 잘 나타내고 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온 영화에서는 상당히 돈을 들여서 재현하고 있지만 난데없이 등장한 깜찍한(?) 전황설명용 모형배가 이미지를 망치고 있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처참한 대결전이 벌어지고 안토니우스의 배가 손수 옥타비아누스의 기함을 제압하는[3] 장면을 보여준다. 의외로 전투신 연출은 영 아니라는게 평.
미드 ROME에서는 많은 시청자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제작비 문제로 해전 끝난뒤의 폐허만을 보여줘서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콜린 맥클로우의 Masters of Rome 시리즈 마지막편에서는 이 전투를 안토니우스의 시각대로 위에 설명한 것처럼 해상 봉쇄를 뚫고 그리스를 포기하는 사건으로 그리고 있다. 의견충돌 끝에 철수한 클레오파트라와 그를 따라서 봉쇄선을 돌파한 안토니우스, 그리고 돌파에 실패해서 항복하거나 파손된 부하들을 그리고 있으며 말 그대로 시시하게 생각되었지만[4] 이 전투 결과로 세력균형이 확실히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 ↑ 이 부분에 대해서 클레오파트라에 옹호적인 의견으로는 긴장과 격렬이 문제가 아니라 단순 후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클레오파트라는 여러 전투를 실제로 참관한 적도 많았고 오래전에는 실제 내전때문에 죽을뻔하기도 했었다. 단순히 후방에서 긴장감때문에 후퇴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
- ↑ 클레오파트라의 세 아들들은 한명은 카이사르의, 두명은 안토니우스의 자식들이었다.
- ↑ 물론 거기 타고 있는 사람은 일종의 가케무사였다.
- ↑ 작중에서 옥타비아누스도 이 해전이 너무 시시하게 끝나서 후세 역사가들은 장황하게 각색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