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솔로스 영묘

안티파트로스세계 7대 불가사의
쿠푸왕피라미드
(이집트)
바빌론의 공중정원
(이라크)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그리스)
아르테미스 신전
(그리스)
마우솔로스 영묘
(터키)
로도스의 거상
(그리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이집트)

Mausoleum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실물 크기의 24분의 1로 축소된 복원 모형.

1 소개

마우솔로스의 영묘는 할리카르나소스(현재는 터키의 남서쪽 해안 도시 보드룸)에 있었던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으며, 그 때문에 오늘날 마우솔레움은 무덤건축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이곳의 유물들 상당 런던대영박물관에 있다. 유명한 유물중 하나가 그리스인과 아마존족의 전투장면을 새긴 프리즈와 마우솔로스 상으로 보이는 높이 3m의 조각상 등이 있다.

마우솔로스의 영묘에는 기원전 350년 무렵 할리카르나소스의 통치자였던 소아시아의 페르시아인 총독 마우솔로스와 그의 아내[1]아르테미시아가 안치되었었는데 그 당시에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뺀다면 무덤 건축물 중엔 최대 규모였다. 무덤 주인의 이름을 따서 마우솔레움이라고도 하는데, 대규모 무덤 건축물의 대명사가 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우솔레움 아우구스티.

2 건설

전설에 따르면 마우솔로스가 죽자 그의 누이이자 아내인 아르테미시아 2세는 비탄에 잠겨 그를 화장한 재를 포도주에 넣어 마시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겠노라 맹세했으며 본인도 결국 죽은 뒤 이 무덤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건축가는 피티우스(또는 피테오스)였고 4명의 뛰어난 그리스 예술가 스코파스·브리악시스·레오카레스·티모테오스 등이 조각을 맡았다. 로마의 저술가인 대(大) 플리니우스(23~79)에 따르면 이 영묘는 거의 정사각형으로서 그 둘레가 125 m에 이르렀다고 한다. 36개의 기둥이 둘러싸고 있고 24단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꼭대기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4두마차가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크고 아름답군

건설을 추진한 당사자인 마우솔로스는 공식적으론 소아시아에 있는 페르시아 제국령 카리아의 사트라프였지만, 사실상 군사와 내정권을 모두 장악해서 그 지방에선 왕이나 다름없었다. 마우솔로스는 헬레니즘 국가였는데, 할리카르나소스로 천도한뒤 헬레니즘식의 건축물을 많이 건축하였다. 그가 죽기 전 영묘를 건축하기 시작하였으나 완공되기 전에 죽고, 그의 아내이자 여동생이였던 아르테미시아가 계속 진행하였으나 영묘는 그녀가 죽은 뒤인 기원전 350년 후반쯤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3 파괴


망했어요

마우솔로스의 영묘는 11~14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1409년 십자군이 여기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는 이미 폐허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굴러다니던 돌덩이들은 1494년 십자군 원정 때 보드룸 요새를 짓고 보수하는데 사용된다. 지못미 그렇게 1900년간 원형이 보존되었던 영묘는 완전히 사라지게됐다. 일부 파편들은 남겨져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사실 마우솔레움 지상의 유적이 소멸된 후에도 지하 부분은 1507년경까지 지하는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었다. 이 곳을 방문했던 프랑스 리용의 클로드 기샤르는 1581년 발간한 책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러 방을 연결하는 복도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흰 대리석으로 장식된 무덤을 발견했다.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어 다음날 뚜껑을 열기로 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와서 보니 무덤은 열려져 있고 황금 조각과 옷 조각이 사방에 떨어져 있었다. 이것들은 우리가 철수한 후 약탈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누군가 밤에 와서 관을 열고 매장품을 도굴했을 것이다. 그 무덤 속에는 엄청난 보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기록을 가지고, 도굴한 범인은 기독교인이며, 이는 기독교인들의 탐욕을 나타낸다고 규탄하는 주장이 있었지만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헛소리. 애초에 할리카르나소스의 영묘는 십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굴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체는 유골항아리에 보관되어 있었기에[2] 관에 대해 기록하고있는 저 기록은[3] 신빙성이 없다. 생각해보면 거대하고 복잡한 피라미드들이나 왕가의 계곡의 파라오의 묘들도 도굴꾼에게 뻥뻥 털렸는데, 눈에 잘 띄고, 내부구조도 별로 복잡할 수가 없는 마우솔레움이 1700년간 멀쩡히 봉인되어있다가, 하필 잠깐 그 지역을 점유했던 십자군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털렸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그간 할리카르나소스가 포함된 이오니아 지방을 점령했던 세력만 10개가 넘을 텐데(…).
  1. 이전 항목에는 '왕비' 라 되어 있었으나, 마우솔로스는 왕이 아니라 총독이었으므로 왕비라 할 수 없다.사실상 왕이긴 했지만
  2. 참고로 남편의 유해는 발견해서 연구 중인데 아내인 아르테미시아의 유골은 잃어버렸다고...남편 유골은 술에 타서 마섰다면서? 먹다 남겼나보지. 사람 뼈 술에 타서 다 먹으려면 알콜중독으로 죽을듯
  3. 고대사를 보면 페네키아나 그리스 같은 해양민족은 항아리, 이집트나 히타이트 같은 농경민족은 관, 스키타이나 이스라엘같은 유목민족은 천이나 가죽에 시체를 넣는 경향을 보인다. 즉 해양민족은 교역품을 보관하는 커다란 도자기물론 배의 재료인 나무도 흔한 편이지만 바다 한 가운데서 사람이 죽었을때 배를 뜯을 수는 없잖아, 농경민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 유목민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가죽을 택하는 식으로, 할리카르나소스는 민족이고 문화고 그리스였으므로 유골항아리에 망자를 집어넣는 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