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케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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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역대 대칸
3대 정종 구유크 칸4대 헌종 몽케 칸5대 쿠빌라이 칸
묘호헌종(憲宗)
시호환숙황제(桓肅皇帝)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 / 패아지근)
몽케(ᠮᠣᠩᠺᠡ)
(夢哥 / 몽가)
칸호[1]몽케 칸(ᠮᠣᠩᠺᠡ ᠬᠠᠭᠠᠨ)
(夢哥汗 / 몽가한)
생몰기간1209년 1월 10일 ~ 1259년 8월 11일
재위기간1251년 7월 1일 ~ 1259년 8월 11일


현대 몽골어: Мөнх хаан
한자: 蒙哥汗
영어: Mongke Khan
(1208–1259)

1 개요

몽골 4대 대칸. 그의 시대에 몽골 제국은 최대 판도에 이르렀다. 건국 후 받은 묘호헌종(憲宗). 칭기즈 칸의 4남인 툴루이의 큰아들이자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 일 한국의 창시자인 훌라구의 큰형이다. 젊은 시절에는 바투, 구유크 등과 함께 서방 원정에서 상당한 전공을 세웠다.

사촌인 구유크 칸이 사망한 후 주치家의 바투와 제휴하여 쿠릴타이에서 칸의 자리에 추대되었다. 툴루이의 부인 소르각타니는 자신의 아들 몽케의 즉위를 위해 바투에게 오고타이 군대의 동태를 전달하는 등 주치 울루스와의 친밀도를 다져나갔고, 자신의 남편툴루이는 보르테 소생의 아들들 중 말자이며, 제국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다며 툴루이家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바투는 구유크 칸 사망 직후 툴루이家와의 연대감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다. 1250년 알라카마크에서 툴루이家와 주치家의 주도아래 쿠릴타이가 개최되었으나 반대세력의 비판을 의식해 오난-케틀란 지역에서 즉위 후 쿠릴타이를 재소집한다. 1251년 여름 코데아랄에서 모든 가문이 참석한 공식적인 쿠릴타이가 개최되었고 몽골 4대 대칸으로 추대되었다. 코데아랄은 1206년 칭기스 칸이 쿠릴타이를 연 곳으로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2]

동생 훌라구로 하여금 중동 지방을 침공하게 하고 동생인 쿠빌라이 칸으로 하여금 을 치게 했지만 쿠빌라이가 독립적인 세력으로 움직이려는 모습을 보이자 쿠빌라이를 뒤로 물리고 본인이 쳐들어갔다가 사천지역에서 병[3]을 얻었고 사망했다.[4]

그의 즉위 과정에서 몽케의 후견인 격이었던 바투와 구유크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바투가 구유크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

기독교, 정확히는 경교를 믿었다고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의 어머니 소르각타니가 경교도(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였지 뭉케 그 자신은 기독교도가 아니였다.

툴루이의 후손들이 오고타이 칸의 시대에 엄청난 핍박을 받은 탓에 툴루이 울루스는 제자 울루스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았다. 바투가 구유크 칸 사후에 몽케를 칸으로 세운 까닭 역시 이 때문이었다. 바투는 '얘들은 너무 약하니까 내가 몽케를 칸으로 세우면 몽케는 내게 의지하느라 주치 울루스에 참견 못 하겠지' 정도 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5]

단 바투는 예전부터 구유크를 위시로한 오고타이, 차가타이 쪽과 사이가 안 좋았다. 서방 원정 도중에는 대놓고 구유크가 술자리에서 깔본 일도 있었고 한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차가타이가 주치를 아버지 면전에서 대놓고 무시했던 일도 있다. 심지어 구유크는 바투를 정벌하려는 찰나에 사망해버렸으니... 몽케의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도 한몫해서 이미 예전부터 이런 바투와 구유크의 알력 다툼을 알고 따로 라인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툴루이 가문이 상당히 약했기 때문에 몽케는 즉위 후 곧바로 숙청을 행하게 했다.[6] 그리하여 몽케가 행한 숙청은 몽골 제국에서 전무후무한 규모였다.(...) 집사에 의하면 최고위층의 77명이 사사되었다. 특히 칭기즈 칸으로부터 왕권을 영구히 부여받은 오고타이계가 당한 숙청[7]

그래서 그들을 보호하려는 몽골 귀족들이 없었다.(...) 덕분에 오고타이계는 시망.(...) 이후 오고타이의 후손들 중 가장 잘 나간게 카이두였는데, 그나마 카이두도 차가타이 울루스의 바락이 몰락하기 전까지는 반 쿠빌라이파 가운데 최약체였다.

이 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동안 칭기즈칸의 피를 이은 일명 황금 씨족을 공개적으로 숙청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는데 몽케는 이 숙청을 단행하면서 권력 기반을 다지는 한편 이 숙청을 뛰어넘을 업적을 이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기에 급하게 남송 정벌을 서두르게 된다. 이 때문에 충분한 준비 없이 남송 정벌을 단행하게 되었는데 중간에 한 군을 이끌어야 하는 만주의 타가차르는 약탈 문제로 양양을 공격하다가 휙, 돌아가버리고 결국 자신이 좌천시켰던 동생, 쿠빌라이를 다시 부르는 등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사천 지방에서는 성도를 점령하고는 1년도 넘게 고전하게 된다.[8] 많은 장군들이 퇴각을 건의했음에도 듣지 않다가 결국 그 자신이 사망하게 된다.

그의 치세때 프랑스의 사자 자격으로 온 사제가 있었고 그는 몽케 칸에게 교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했지만 몽케 칸은 당연히 그런거 신경쓰지 않았고(당시 몽골 제국은 세계 최강이라 봐도 좋을 정도였다.) 대신 기독교 사제들과 이슬람 교도들과 불교 승려들로 하여금 토론으로 서로와 겨루어 보라고 시켰다. 당연히(...) 이 세 종파들은 서로를 성공적으로 교화시키지 못했고 결국엔 기독교인들은 마유주를 마시다 취해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고 무슬림들은 질세라 쿠란을 외우고 불교도들은 조용히 명상을 시작했다.(...)[9]

그리고 이 프랑스인 사제가 돌아갈때 몽케 칸은 신이 손에 다른 손가락들을 내려주셨듯이 인간에게도 다른 방식들을 내려주었다며 몽골인들의 포용성을 설파했다. 근데 중국의 다른 기록을 보면, 그 뒤에 스님에게 가서 "다른 종교가 손가락이라면, 불교는 손바닥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는 막내 동생인 아리크 부케를 아껴서[10] 자기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가 죽은 후 계승다툼에서 승리한 것은 생전 그가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했던 바로 아랫동생인 쿠빌라이였다. 그의 아버지인 툴루이가 막내였고, 둘째였던 오고타이에게 제거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심지어 방식도 비슷하게 죽었다. 참으로 애꿎은 일이 아닐 수 없다.

2 그 외

신조협려에서는 친히 몽골군을 이끌고 양양성을 공격하다가 양과가 던진 돌에 맞아 죽는 안습한 꼴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칭기즈 칸의 후예답게 용맹히 맞섰다는 묘사도 있긴 하다만... 게임에서는 더욱 묘사가 이상해져서 갑자기 프리더 마냥 변신을 한다. 그것도 2번이나.

게임 징기스칸 4에서는 파워업키트에서 등장. 능력치가 정치:86 전투:84로 높고 지모는 91을 찍는다. 평균 능력치가 동생 쿠빌라이를 능가한다. 기하학이나 외국어에 능했다는 사실 때문에 지모 고득점을 받은 모양.

여담이지만 자신과 남에게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라 그의 치세에 몽골에는 '금 항아리를 든 여성이 제국의 끝부터 끝까지 걸어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11]

몽케의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는 여러모로 대단한 여걸로 손꼽힌다. 케레이트 부족 출신에, 칭기즈 칸의 후원자이면서 훗날 대립하다 죽은 옹칸의 조카딸로 전리품처럼 툴루이에게 넘겨졌다가 남편이 죽은 후에는 칸으로부터의 혼인 명령이 내려왔으나 거절, 수없이 정치공작을 펼치고 힘을 기른 끝에 아들 넷을 전부 칸으로 만들었으니...[12]

  1. 몽골식 군주 칭호
  2. 몽케가 바투의 지원을 받아서 카간이 되었기 때문에, 바투의 울루스는 독립적인 위치를 갖게 된다.
  3. 이질이라고 추측된다.
  4. 남송의 격렬한 반격에 의해 화살을 맞고 조어산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몽케 칸이 이끌던 우익군의 장수들 다수가 남송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걸로 봐서 가능성이 없진 않다.
  5. 구유크 칸의 시대부터 바투가 잘 나가서 반독립적인 칸국을 세웠다고 세간에는 알려져 있는데, 이는 몽케 시대의 일을 소급한 것이다. 단, 몽케 시대에도 바투의 권한은 해당 울루스 소속의 유목민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하위 칸들의 권력이 정착민들에게도 행사된 것은 쿠빌라이 칸 시대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바투의 지배지역, 후일 킵차크 칸국의 영역은 스텝 지역으로 몽골 정복 이전부터 많은 유목민이 살던 곳이라...
  6. 복수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 아버지인 툴루이의 일도 일이고, 큰 아버지인 오고타이는 아예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를 자기 아들인 구유크와 혼인시키려고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가 이 순간을 위해 이를 갈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7. 전대인 구유크 칸이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추구한 결과 오고타이계는 인망을 잃었다.
  8. 이게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이쪽이 엄청나게 더울 뿐 아니라 지형도 험난한 곳이라 몽골군이 불리할 수 밖에 없는 지형인데다가 수비군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고 돌아간 타가차르 대신 다시 데려온 쿠빌라이는 아주 느릿느릿 진군해서 몽케를 고립시켜버린다.
  9. 당시 몽골의 관습에선 싸움이 끝날때 마다 마유주를 한 잔씩 마셨는데, 그 관습에 따라 토론이 한 회전씩 끝날때 마다 마유주를 한 잔씩 마셨고 기독교인들이 먼저 취해버리는 바람에 정상적인 토론이 불가능해지자 기독교도들이 찬송가를 불러대고 불교와 이슬람교는 명상과 코란 암송으로 대응한것.
  10. 심지어 어머니조차도 무척 아꼈다.
  11. 이런 점을 보면 큰 아버지인 차가타이를 닮았다.
  12. 아리크 부케도 어쨌든 칸은 칸이다. 오히려 정통성 면에서는 이쪽이 쿠빌라이보다 훨씬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