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현재. 늙은 김선우
이름 | 무라카미 마사노리(村上 雅則) |
생년월일 | 1944년 5월 6일 |
출신지 | 일본 야마나시 현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63년, 난카이 호크스 |
소속팀 | 난카이 호크스(196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1964~1965) 난카이 호크스(1966~1974) 한신 타이거즈(1975) 닛폰햄 파이터즈(1976~1982) |
1 소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출신 메이저리거 [1]
일본에서의 성적만 본다면 리그를 지배한 레전드는 아니지만, 아시아 최초의 메이저리거라는 타이틀과, 이중계약문제로 인한 비운의 일본 복귀등으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남은 투수.
2 선수시절
2.1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다
일본의 야구명문고로 이름을 날렸던 헤이 영쑤! 돈두댓! 호세대학 제2고교 출신으로 고교 시절에는 큰 두각을 내지 못했다. 당시 고교 1년 선배였던 시바타 이사오라는 에이스의 백업 투수로서 활약한것이 전부였으며 고시엔 기록도 1961년 전국고교야구 춘계대회에서 구원투수로 등판 1이닝을 소화한게 전부였을 정도였다. 심지어 시바타 이사오 졸업 후 고시엔 본선에 진출하지도 못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고교 졸업 후 프로입단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본인도 대학진학 후 프로 진출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고.
그러나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이었던 츠루오카 카즈토(鶴岡一人)가 그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고 입단 제의를 했는데 무라카미는 대학진학을 원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이에 난카이 호크스 측은 "좋다 그럼 우리팀 입단하면 미국 유학 시켜줄께"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고교야구에서 부상 등으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자신에게 이런 파격적인 제안과 더불어 미국 유학이라는 제안에 1962년 9월, 난카이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데뷔 시즌이었던 1963년에는 3경기에서 2이닝을 소화하였고 시즌 후, 입단 계약을 지키라는 요구를 하게 되어 팀내 유망주 2명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싱글 A 팀이었던 프레스노에 입단하게 되었다.[2] 이때 영어 한마디 할 줄 몰랐던 그는 동료들과 사전을 들고 다니며 대화를 나눴다고.
최초에는 1964년 6월까지만 프레스노에서 뛰기로 계획을 잡았으나, 당시 난카이 호크스 측의 전력이 막강했기에 복귀하지 않았다. 마이너리그 싱글 A에 남은 그는 그의 특기인 커브를 활용해 11승 7패 ERA 1.78 162.0이닝 200K의 성적을 기록하며 캘리포니아 리그 신인왕으로 선정되면서 그의 잠재력을 인정 받았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깜짝 놀랄만한 제안을 받게 된다. 바로 메이저리그 승격 요청이 온것이다.
2.2 아시아 최초 메이저리거가 되다.
1964년 8월 31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측에서 싱글 A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 콜업을 요청한다. 샌프란시스코는 당시 뉴욕 메츠와의 원정 경기를 위해 뉴욕으로 떠난 상태였기에 뉴욕으로 가는 항공표를 전달했으며, "뉴욕에 도착하면 계약서에 사인을 해라"라는 말을 듣고 명문도 모른 채 뉴욕으로 날라가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1일, 동양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게 되었는데 구원투수로 등판해서 1이닝 무실점으로 막아 내면서 데뷔 경기를 무사히 마친 그는 중간 계투로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9월 29일 휴스턴 콜트 45'S전에서는 9회 동점 상황에서 등판해 11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냈으며 팀이 연장 11회 말, 끝내기 승리를 기록하며 동양인 메이저리그 첫 승리를 기록해 냈다.
1964년 한해 동안 9경기에 출전해 1승 1세이브, 1.80, 15탈삼진 3자책점을 기록하며 무난한 데뷔시즌을 보냈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그와 정식계약을 맺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계약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게 되었으니...
2.3 이중계약문제
1964년, 대활약에도 일본 내에서는 1964 도쿄 올림픽 준비와 개최로 인해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해 시즌후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때 자신의 활약이 아닌, 이중계약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난카이 호크스측에서는 "우리 유망주인데 왜 님들이랑 계약함? 이계약 무효여!"라고 주장했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측에서는 "우리가 처음 계약할때 1만달러 주면 선수권리를 판다고 안했냐? 그래서 니들에게 1만달러 줬는데 뭐가 문제?"라고 반박하는 동시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당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였던 포드 프릭[3]는 일본야구기구에 항의서한을 보내며 단순한 선수계약문제가 아닌 미일 야구계 간의 분쟁으로 번져갔다.
결국 일본야구기구의 커미셔너 였던 우치 히로유키가 "1965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소속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1966년부터 소속팀을 난카이로 변경한다."라는 중재안을 내세웠다. 결국 시즌 시작후인 1965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가 난카이에 지급한 1만달러를 돌려받고, 1년간만 선수를 보유하는 것으로 절충하며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1965년 개막하고 1개월 후에 팀에 합류한 무라카미는 중간계투로 맹활약하며 45경기 74⅓이닝 4승 1패 8세이브 3.75 84탈삼진과 아시아인 최초의 안타를 기록했다. 1965년 10월 1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를 떠나 일본으로 복귀하게 된 그는 2년 간 54경기, 89⅓이닝 5승 1패 9세이브 방어율 3.43 100탈삼진을 기록한 후 일본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미국 통산 성적(베이스볼 레퍼런스)
2.4 일본으로의 복귀
1966년, 난카이 유니폼을 입고 일본프로야구로 복귀한 그는 그해 46경기(선발출전 2경기)에 출전, 96⅓이닝동안 6승 4패 3.08를 기록하며 무난한 복귀전을 치뤘으나 이듬행인 1967년에는 80⅓이닝 3승 1패 4.03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체면을 구기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에 40경기중 19경기를 선발로 등판하며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미친듯한 혹사를 견뎌내며 177⅔이닝 18승 4패 2.38의 방어율 9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난카이의 에이스로 우뚝 선 그는 1969년 부진했지만 이후 3년 연속 두자리 승수를 거뒀고 1973년에는 7년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어 내며 팀 에이스로서의 활약을 해냈다.
그러나 슬럼프에 빠진 그는 1973년에는 심각한 슬럼프에 빠졌고, 1974년에는 경기마저 제대로 뛸수 없게 되자, 난카이는 가차없이 한신 타이거즈의 아이바 요시히로와 트레이드를 했다. 한신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무라카미는 불펜으로 뛰었지만 19⅓이닝 1승 5.12이라는 썩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고 다시 2:1 트레이드로 닛폰햄 파이터스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는데 닛폰햄에서 53이닝을 뛰며 회복세를 나타낸 그는 2년째인 1977년에 112⅓이닝 7승 4패 6세이브 2.32라는 중간계투로서는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다시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1978년에는 130⅔이닝 12승 11패 10세이브 3.03라는 선발급 스탯을 찍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해 혹사로 인해 부진에 빠지게 되었고 1982년, 2경기 2이닝 9.00의 방어율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3 은퇴 후
1984년부터 3년간 일본방송의 해설자로 활약한 후 닛폰햄 2군 투수코치(1987~1988), 다이에이 2군 투수코치(1989~1990)로 지도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후 NHK BS1에서 야구해설자로 활약한 후 1993년~1994년에 세이부 2군 투수코치로 활약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극동 담당 스카우트로도 활약했고 현재는 NHK의 야구해설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2014년 5월 15일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요청으로 AT&T 파크에서 열린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경기전 시구를 맡기도 했다.
2014년 11월 16일에 도쿄돔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일본 올스타 간의 경기에서도 시구자로 나섰다.영상- ↑ 그의 진출 이후 두 번째 아시아출신 메이저리거(1994년 LA 다저스 입단)가 나타날 때까지는 무려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야 했다.
-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측에서는 메이저리그로 승격하면 난카이 호크스측에 "만약 3명의 유망주 중 메이저리그로 콜업하게 되면 1만 달러를 난카이 호크스에 지급하고 선수에 대한 권리를 샌프란시스코에 양도한다"라는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훗날 이중계약 파문으로 이어진다.
- ↑ Ford Christopher Frick, 1894년 12월 19일~1978년 4월 8일. 로저 매리스의 홈런 문제로 유명해진 커미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