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 도쿄 올림픽

역대 하계올림픽
(Citius, Altius, Fort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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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로마 올림픽1964 도쿄 올림픽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1 개요

Games of the XVIII Olympiad
第18回オリンピック競技大会(東京オリンピッ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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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날짜 : 1964년 10월 10일[1] ~ 10월 24일
개최장소 : 일본 도쿄

같이보기 : 신흥국 경기 대회

1964년에 개최된 아시아 지역에서 최초로 열린 올림픽. 일본은 원래 1940년에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중일전쟁으로 개최권을 반납 한 뒤에 24년이 지나서야 겨우 올림픽의 개최권을 얻어서 개최할 수 있었다. 현대의 서구 문화권에 자리잡은 일본의 이미지는 거의 이 당시에 생겨난 것. 신칸센 개통을 필두로 여러 부분에서 일본의 경제 부흥을 세계에 알렸다. 또한 최초로 정지위성을 통해 미국 전역에 실시간으로 중계되거나, 컬러 텔레비전을 대응하는 등 기술적으로도 발전이 큰 올림픽이다.[2]

1964년 하계올림픽 투표 결과
국가도시1차
일본도쿄34
미국디트로이트10
오스트리아9
벨기에브뤼셀5

2 대회 진행

대회 전의 이슈는 신흥국 경기 대회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신흥국 경기 대회 참가선수에 대한 자격정지처분을 둘러싸고 논란중이었던 북한인도네시아를 참가시키기 위해 대회 위원회에서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두 나라는 대회 개최 전날에 취소통보를 내린 뒤에 올림픽을 참가하지 않았다. 특히 북한은 이른바 "가네포" 사건#으로 자국의 주요 선수들이 출전을 박탈당했다. 이 때문에 북한의 첫 출전은 (국호 문제 등으로) 1972 뮌헨 올림픽까지 미뤄진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간에도 역시나 논란이 일어났는데,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이 IOC를 탈퇴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참가하지 않았고 대신 중화민국청천백일만지홍기를 당당히 앞세우고 출전한다.[3] 남아프리카 공화국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중이었고 이게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고 판단한 IOC로부터 제명당해서 불참. 이후 남아공은 28년 뒤,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고 나서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되어서야 올림픽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올림픽 개막식도 구설수에 휘말렸다. 개막식의 절정을 장식하는 성화봉송 최종주자는 1945년 8월 6일[4]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사카이 요시노리라는 청년이었는데, 이러한 인선은 일본이 전범국가가 아니라 전쟁의 피해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다. 개막식 도중 원폭 피해자에 대한 묵념을 전 관객과 선수들에게 요구한 것은 이 의심을 더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퍼포먼스라는 것.

올림픽 중이던 1964년 10월 16일, 중화인민공화국핵실험을 하기도 했다. 대륙의 패기 공교롭게도 2008년 그 중화인민공화국이 올림픽 중일 때 러시아조지아선제공격으로 전쟁을 할 때, 중국인들이 징징거리자 일본인들은 어이없어했다.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던 유도배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일본은 유도에서 3개의 금메달과 여자 배구에서 금메달을 따오게 되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유도에서 전종목 석권을 할 수 있었으나 백인인 네덜란드의 안톤 헤싱크가 우승하게 되자 전 일본이 경악했다고 한다[5].

1960 로마 올림픽에서 맨발로 뛰면서 마라톤 우승을 차지한 에티오피아아베베 비킬라는 이번에는 운동화를 신고 뛰어서 세계신기록을 내면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급성 충수염 때문에 수술을 해서 훈련량이 줄었음에도 운동화 버프 덕분에 자신이 세운 기록에서 3분을 앞당기면서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그런데 수술을 받고 바로 뛸 줄은 몰랐던 탓인지, 대회 조직위에서 그만 시상식에서 에티오피아의 국가를 준비하지 않아서 기미가요를 틀고 대충 시상식을 마무리하는 희대의 병크가 있었다. 일본은 당연히 죽도록 까였다.

그 외에 야구무도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대회이기도 하다.

소련의 체조 선수인 라리사 라티니나는 이 대회에서 금 2, 은 1, 동 2개를 획득하여 올림픽에서만 총 메달을 18개(금 9, 은 5, 동 4)를 가져갔으며 그녀는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를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2012년 딥 원 마이클 펠프스에 의해 깨질 때 까지 48년 동안 보유한 올림픽 메달 신기록이기도 했다.

선수촌에서 불가리아 선수들끼리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것은 사상 최초의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올림픽 대회에 픽토그램[6]이 최초로 도입된 대회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선수촌으로 쓰이던 건물들은 지금 현재 국립올림픽청소년센터로 쓰이고 있으니 개최 이후에도 놀리지 않고 나름 잘 써먹고 있는 편. 최근에는 사키 -Saki-에서 키요스미 고교의 숙소와 경기장으로 등장한 바 있으며 현실에서는 2011년과 2012년에 한국의 청소년단체가 청소년 캠프를 개최하기도 했던 장소다.

3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 약진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이자 일본 최초의 신칸센도카이도 신칸센은 이 올림픽 개막 직전인 1964년 10월 1일에 개통되었다.

이때 건축된 올림픽 경기장은 여러가지로 유명한 건축물. 일본 스포츠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도쿄국립경기장이나 일본의 건축 영웅 단게 겐조의 작품인 요요기국립체육관은 일본의 현대 건축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도 도쿄 올림픽의 홍보물을 통해 일본의 수준높은 디자인 능력을 세계에 알리게 된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국이자 서구의 흉내만을 낸다고 평가절하 받던 것이 기존의 일본과 그 디자인이었다면, 올림픽 이후로 독특한 일본색을 가진 독자적인 그래픽 디자인 문화를 가졌다고 평가받으며 그 위상이 재정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올림픽 포스터[7]를 담당한 가메쿠라 유사쿠 등 세계적인 일본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알려진 것은 이 도쿄 올림픽이 계기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인 올림픽의 몸값의 배경이기도 하며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 '날생선 먹는 국가에서 올림픽을 치르는 건 말도 안된다'라는 서구 국가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본은 이후 회와 초밥을 국제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 결과 현재 유럽과 미국에서 이들 음식의 위상은 상류층이 즐기는 별식 수준으로 높아졌다.

일본은 8년 후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도 개최하는 등 동하계 모두 3번이나 개최하는 사례를 남겼다.

그리고 56년 후인 2020년 다시 한번 올림픽을 유치하게 되었다. 다만 잃어버린 10년을 필두로 빌빌대는 일본이므로 과거와 같은 영광스러운 일본을 알리는 이벤트가 될지는 의문이다. 일단 일본 국민들은 아베노믹스보다 이쪽을 경제 부흥의 원동력으로 먼저 의식할 정도로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어떻게 될 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한국 역시 24년 후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이 당시 일본이 누린 것과 같은 이미지 약진 효과를 톡톡히 누리게 된다.

4 남과 북

이 당시 남북한은 공동출전을 논의하고 있었다. 한국은 '아리랑'을, 북한은 아랫동네 국가윗동네 국가를 25초식 붙인 50초짜리 짬뽕 국가를 주장했다. 만약 짬뽕 애국가로 하면 어느 쪽 애국가가 먼저 나와야 하는지가 또 문제가 될 텐데? 간신히 짬뽕시킬 순서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아리랑으로 되었더니 됐는데 이번엔 북한이 남북한 국기를 양면으로 붙여서 쓰고 나가자라고 해서 결렬되었고, 게다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북한이 출전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 남북의 대결은 그 뒤의 올림픽에서도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1990년대 들어서서야 비로소 완화된 편이다.

휴전 이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던 대회다. 신흥국 경기대회에서 북한대표로 금메달을 수상한 육상선수 신금단[8]이 올림픽 참석을 위해 도쿄까지 갔다가 북한의 불참 결정으로 돌아갔다. 사실 신금단은 1.4 후퇴 때 남한으로 간 아버지와 헤어진 이산가족. 그녀의 올림픽 출전 사실을 알고 신금단의 아버지 신문준은 도쿄까지 갔지만 북한의 올림픽 불참 결정으로 북한 선수단이 일본을 떠나기 위해 니가타행 열차를 타기 직전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은 7분 남짓이었고, 부녀는 이후 다신 만날 수 없었다.

한국은 북한과의 경쟁, 일본에 사는 많은 동포, 그리고 일본에 사는 동포들의 한국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민단총련의 대결에서 민단의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를 위해 1964년 당시의 나라 살림치고는 상당히 과할 정도인 임원 59명, 선수 165명이라는 선수단을 꾸려서 일본으로 건너갔다.[9] 그러나 성적은 간 선수단의 규모에 비해 영 좋지 않은 은메달 2개와 동메달 1개 정도였다. 복싱의 정신조와 레슬링의 장창선이 은메달을, 유도의 김의태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래도 당시로선 최고 성적은 맞다. 기대를 못 따라가서 그렇지. 뭣보다 4년 전 로마 대회의 노메달 수모를 설욕하는 효과는 있었다. 그리고 이 때 레슬링과 유도에서 최초로 메달을 획득하면서 그 이전 올림픽에서는 오로지 복싱과 역도에서 밖에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던 한국에게 메달 저변 다각화의 가능성을 비친 첫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즉 당시 레슬링의 장창선과 유도의 김의태는 각각 한국의 첫 레슬링, 유도 메달리스트인 것이다.

하지만 축구에서는 한국은 아랍 공화국(현재 이집트)에게 무려 0:10이라는 대패를 당했고 브라질에게 0-4,체코슬로바키아에게 1-6으로 지면서 3전전패 1골 20실점으로 참가국 14개국 가운데 꼴지를 차지해버렸다...이 10실점은 1948 런던 올림픽에서 스웨덴에게 0:12로 진 뒤로 한국 축구 역사상 국제대회 2번째 최다 실점패 기록이다..아랍공화국은 브라질을 제치고 조 2위로 8강에 진출해 가나를 5:1로 이기며 첫 4강에 올라갔지만 금메달을 받은 헝가리에게 0-6으로 지고 3,4위전에서 독일(사실상 동독팀)에 1-3으로 지며 4위를 기록했다.

5 여담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주제로 한 노래도 있다! 노래 제목은 《東京五輪音頭》
(도쿄 올림픽 온도). 여기서 '音頭' (온도) 는 일본의 전통 가락 중 하나로 우리나라로 보면 강강수월래같은 둥글게 서서 추는 춤에 쓰이는 리듬이다. 당시 일본의 중장년층에게 큰 인기가 있었던 가수 미나미 하루오 (三波春夫, 1923 ~ 2001)가 부르고 작곡가 고가 마사오 (古賀 政男, 1904 ~ 1978)가 작곡하여,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가수 김연자가 부른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노래와 매치된다고 할 수 있다.

이 해는 조선 통신사 조엄[10]이 일본을 방문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일본의 시계 메이커인 세이코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공식 타임키퍼로 선정된 세이코가 시간 측정용으로 쿼츠로 동작하는 정밀시계를 내놓았던 것.# 이 시계는 3kg이나 나가는 물건이었으나 5년 뒤 세이코는 이 시계의 손목시계 버전을 출시하는 기염을 토함으로써 스위스 시계 업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쿼츠 파동이 이 사건.

세이코 역시 쿼츠 시계 가격이 급속도로 낮아지는 바람에 크게 재미는 못 봤지만, 이 일로 스위스 시계 업계는 아주 초토화됐다. 인력이 4분의 1 토막으로 감원되고 유수의 시계 회사들이 망하거나 다른 그룹의 산하로 들어가게 된 것이 이 시기. 고급화 전략으로 어찌어찌 살아남기는 했지만 아직도 스위스 시계 회사들 중 독립 회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덕질하는 사람들한태도 의미가 있는 올림픽이기도 한데, 수영 경기 당시 미국팀에서 슴가 사이로 고인 물이 빠져나가게끔 설계한 수영복을 처음으로 선수용수영복으로 도입했다. 이것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구형 스쿨미즈이다.
  1. 이후 일본에서 체육의 날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부터 해피 먼데이 제도가 적용되어 10월 둘째 주 월요일로 변경되었다.
  2. 다만 당시 일본 내에서도 컬러TV로 도쿄 올림픽을 본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다. 하나다 소년사를 보면 알 수 있듯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산다는 일본에서도 컬러 TV는 수십년치 봉급에 해당될 정도로 비싼 가전제품이었고 컬러 송출 자체도 대도시와 그 근교지역에서나 이뤄지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요거리나 주요 기차역, 백화점에 설치된 컬러TV를 통해 올림픽 경기를 컬러로 본 사람은 꽤 있지만 대도시나 그 근교지역에서나 볼수있었고 지방도시나 시골의 경우에는 얄짤없이 흑백으로 봐야했다.
  3. 일본어로는 중화민국(中華民国)으로 표기되었으나 영어로는 대만(TAIWAN)으로 표기.
  4.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태평양 전쟁말기 광기로 치닫던 일본 제국의 전쟁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린 새로운 폭탄이 투하된 날이다.
  5. 당시 유도는 지금보다 체급이 적어서 3개였다. 남자부 체급별 경기와 체중에 관계없이 출전할 수 있는 무제한급이 열렸다. 3개 체급을 모두 일본이 싹쓸이했는데, 무제한급 경기에서는 헤싱크가 결승에서 일본 선수를 누르고 우승한 것.
  6. 간이 아이콘. 예를 들면 신호등에 있는 사람 모양의 그래픽 같은 것
  7.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에 등장한다
  8. 금메달 수상이 유력했지만, 신흥국 경기대회에 나갔기 때문에 올림픽 경기 출전이 금지됐다.
  9. 전 대회인 1960 로마 올림픽은 임원 31명, 선수 36명이고, 다음 대회인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은 임원 21명, 선수 55명이다.
  10. 일본에서 고구마를 들여온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