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십자군 전쟁
역대 십자군 원정 | |||||||
사건 | 제3차 십자군 원정 | → | 제4차 십자군 원정 | → | 제5차 십자군 원정 | ||
벌어진 일 | 레반트 지역 확보, 십자군 국가들의 생명연장 | → | 동로마 제국의 멸망과 분열, 라틴 제국 성립 | → | 이집트 공략 실패 |
중세 동-서유럽 관계 역사상 최악의 막장 드라마
가장 추악한 십자군
1 개요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확보하지 못하고, 위기에 몰린 예루살렘 왕국의 안전을 보장치 못하게 되자 촉발되었다. 이집트를 목표로 한 십자군은 탈선 끝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함락 시켰고, 결국 라틴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망명국들이 성립되었다.
2 배경
2.1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
한 때 레반트 해안일대를 장악하고 다마스쿠스, 이집트 등을 위협하던 왕국은 비참했다. 영토는 아크레 등의 해안 일대로 쪼그라 들었고, 트리폴리와 안티오키아의 상황도 마찬가지여서 본거지와 해안지대 일부만을 보전하고 있었다. 마누일 1세 시절 혼인동맹 등으로 이끌어낸 동로마 제국의 지원도 헛되이 날려버렸고 이젠 더 이상 지원을 받긴 힘들어 보였다. 결국, 얼마 전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성공했음에도 다시 서유럽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2 동로마 제국의 상황
종이호랑이[2]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프리드리히 1세와 갈등을 벌이던 동생 이사키오스 2세를 끌어내리고 제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3세가 황제였으나, 이미 안드로니코스 1세 시절을 시작으로 내부상황은 물론 외교까지 파탄 나버린 상황이었다. 마누일 1세 시기의 제국은 한 때 단독으로 십자군을 주도할 정도로 막강했으나, 이미 하인리히 6세의 협박에 굴할 정도로 국방력이 망가진 제국은 십자군의 결성을 지켜보며 그저 자신들이 마지막까지 보전하고 있던 부(富)와 쪼그라든 영토에 불똥이 튀지않게 처신 할 수 밖에 없었다.
2.3 신성 로마 제국의 상황
제3차 십자군 원정 때 프리드리히 1세는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으나, 본인의 죽음으로 원정을 망쳐버렸다. 뒤를 이은 장남 하인리히 6세는 아버지가 확보하지 못했던 상징적인 땅, 이탈리아[3]를 확보하여 진정한 '로마 제국'으로서 유럽세계를 주도하고자 했고 실제로 군사력과 시칠리아 왕국과의 혼인동맹으로 이를 실현하였다. 야심많은 황제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자신의 동생과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질녀[4]를 결혼[5]시켰으며, 십자군 원정을 위해 군비를 동로마에 요구하는 등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황제는 1197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렸으며, 그의 작위와 영토들은 동생과 어린 아들에게 계승되었다. 이렇게 제국 내부가 혼란스러워지자 십자군 원정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2.4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의 상황
두 왕국은 제3차 십자군 원정 때의 주요한 참가국이었으나, 이번에는 참가할 형편이 못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 서부일대에 프랑스 왕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명목상의 상위군주인 프랑스 왕들은 이를 못 마땅해 하고 있었다. 특히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필리프 2세는 주변의 백안시에도 불구하고 3차 원정 도중에 귀국, 아직 원정중 이던 리처드 1세와 왕제 존 사이의 알력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고자 하였다. 한때 리처드 1세가 살라딘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서둘러 귀국하여 계획이 무산되는 듯 하였으나, 1199년 리처드가 어이없게 사망하여 존 왕이 왕위에 오르자 이를 기회로 삼아 1202년부터 전쟁을 벌여 프랑스내의 영국 영토를 되찾기 시작했다.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준비기간은 1198~1202년이었으므로, 사실상 양국의 왕들은 원정 참여가 불가능했다.
2.5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상황
1198년 1월 37세의 젊은 나이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인노첸시오 3세는 야심만만한 사나이였다. 전 교황인 첼레스티노 3세는 막강한 하인리히 6세에게 짓눌려 힘겨운 임기를 보냈으나, 인노첸시오 3세에게는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된 3세의 어린 프리드리히 2세의 섭정이 되는 등 행운이 따라주었다.
하인리히 6세의 동생인 로마왕[6] 필립은 이탈리아 전역을 다시 확보하고 싶었지만, 막 제위에 오른데다 대관식을 치르지도 못했고, 그 대관식을 치러줄 교황이 시칠리아 왕국을 등에 업고 있었으므로 어려움을 겪고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과 기독교의 권위를 높이고 주변 군주들의 주의를 돌릴 수 있을 뿐더러 자신의 명예도 높일 기회가 찾아왔다. 빈사상태의 예루살렘 왕국이 성지 회복을 외치며 원조를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지 회복은 전임 교황이 이루지 못한 일이었기에 야심많은 교황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비추어졌다.
2.6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황
베네치아는 당시 막강한 부와 강력한 해군력을 갖춘 알짜배기 강국이었다. 바실리오스 2세, 알렉시오스 1세 등 동로마 황제들에게 해군력을 지원해준 대가로 통상 특혜를 부여받은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으로 엄청난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고, 한 때 상업 공화국으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베네치아의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다. 제노바, 피사, 아말피, 안코나 등 경쟁자들이 십자군 전쟁을 발판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이들은 동로마 측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주요한 항로와 거점, 상품 등을 쥔 동로마와의 관계도 문제였다. 막강한 부와 해군력을 가진 베네치아는 1121~1126년간 해군력으로 동로마측을 압도하기도 했었으나 상업활동간의 갈등으로 촉발된 1171~1172년간의 재전에서는 재건 동로마해군에게 패퇴당했다. 또한, 118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인 대학살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후 1185~1186년에 해군력을 지원하는 대가로 다시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상업활동을 지속하고 투자도 재개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으나, 내심 자신들의 생명선인 상업활동을 좌우할 수 있는 제국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베네치아는 태생이 해운도시국가 였기에 타국에 대해 해군력과 자금력 이외의 강제력을 가지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력의 근간인 상업 이익을 도모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 딱히 적대하지를 않고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태도를 십자군 전쟁 시기동안 취했다.
때문에 베네치아 측은 1198년 교황이 4차 원정을 외칠 때 동년 동로마 제국 측과 통상조약 갱신을 알렉시오스 3세의 금인칙서를 통해 확인한 상황이었다. 동시에 서유럽 영주들의 십자군의 수송을 1201년에 받아들였고 이집트를 목적지로 1202년 6월 24일경에 출발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면서 1202년 막 술탄의 자리에 오른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알 아딘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즉, 상업적인 이득을 위해서는 양다리든 그 이상이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러한 장사치들의 '손님'이 빚쟁이가 되자, 베네치아는 칼자루를 쥐게 되었다.
3 준비
3.1 하느님이 원하신다!
119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성지 회복을 외치며 조서를 발하였다. 그러나 유럽 군주들의 상황이 원정을 떠날 상황이 아니었고, 가장 열성적으로 많은 것을 투자한 리처드 1세 등 2, 3차 원정 참가자들의 결과가 썩 좋지 않았기에 반응은 차가웠다. 교회가 가라는 대로 가봤자 돈과 인력을 날리고 이득도 못 건질텐데 왜 가겠는가?
그러나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꾸준히 선동을 펼쳤고, 결국 프랑스계의 기사와 영주들이 주축이 되어 그럭저럭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상파뉴, 블루아, 아미앵, 플랑드르, 부르고뉴 등 프랑스 동북부계가 주축이 되었고, 추가로 몽페라 후작 보니파시오가 신임 사령관이 되면서 몽페라도 합류하게 되었다. 기사 4,500명, 종자 9,000명, 보병 2만 등 33,500명의 대병력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교황은 기뻐하며 대사, 은사 등을 약속하였다.
3.2 이집트에 가자!
십자군 인사들의 회의를 통해, 목표는 아이유브 왕조의 근거지인 이집트가 되었다. 성지 회복을 타이틀로 내걸었으나 성지를 회복하더라도 가까운 이집트에 적의 근거지를 둔다면 유지하기 힘들 것으로 보였고, 또 부유한 이집트는 많은 전리품을 약속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7] 이동 경로로는 해로가 채택되었다. 이전까지의 원정을 돌이켜 봤을 때 육로원정은 각종 위험과 원정로 상의 현지 세력과의 갈등을 야기한다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해로가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였다. 이처럼, 과거의 십자군 규모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학습을 통해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원정이 계획 되었다.
그러나 해로를 택하고 보니 탈 배가 없었다. 실어나를 자체적인 함대가 없었기에 해군력이 강력한 상업 공화국들이 물망에 올랐는데, 제노바 공화국이 이를 거절하여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상하게 되었다. 십자군 인사들은 1201년 5월에 베네치아에서 엔리코 단돌로 원수를 만나 협상하였다. 33,500명의 병력을 이집트로 실어다 주고 9개월 분량의 보급을 책임지는 대신, 은화 8만 5천 마르크와 점령지의 영토 일부를 대가로 지불하기로 한 것이다. 베네치아 측은 상업활동을 축소하면서 까지 약속을 지키고자 하였고 500여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갖췄다.
3.3 돈이 ㅇ벗다
그러나 약속한 날짜인 1202년 6월이 돼도 집결한 병력이 부족하자 문제가 되었다. 10월이 되기까지 십자군 지휘부는 집결을 기다렸는데, 그럼에도 절반에 못 미치는 1만 2천여명 밖에 모이지 않았다. 협상 당시 허세를 부려서인지 실제로 영주들의 사정이 악화 되었던지 간에 전체적으로 비협조적인 분위기로 인해 병력이 모자랐고 수송비 조달은 영주들이 내는 돈은 물론 병사 개개인이 조금씩 가져올 돈으로 계획했었기에 돈이 모자라게 된 것이다.
결국 교황청은 자산을 파는 등 돈을 쥐어짰으나 5만 1천여 마르크 밖에 모으지 못했다. 그러자 출병조차 못한 채 빚쟁이가 될 위기에 처한 십자군 측은 마찬가지로 손해를 보고있던 베네치아 측이 8월 경에 가져온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당시 달마티아 지방의 헝가리 보호령인 자라[8]를 공격하여 부족한 돈을 충당하고, 또 부족한 돈을 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되면 십자군 측은 놀고있는 대병력을 써서 돈을 벌 수 있었으며 베네치아 측은 헝가리 왕의 보호를 받는데다가 지상전력이 부족하여 공략하기 곤란한, 요충지의 경쟁도시를 이참에 제거해서 좋았다. 물론 같은 기독교계 도시를 돈이 없다는 이유로 십자군이 공격하여 약탈한다는, 상식을 벗어난 행위임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9]
이에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이 떠나기도 하였으나 결국 9월이 되어 베네치아 측의 제안을 받아들인 십자군은 집결을 기다린 끝에 10월 8일 출발하였다.
4 진행
4.1 성스러우신 십자군입니다.
한달여의 항해 끝에 11월 10일 십자군은 자라에 도착하였다. 복잡한 해안선과 절벽 등 험한 지세가 지휘부를 난감케 했지만, 성벽에 걸린 십자가와 같은 기독교인들을 공격한다는 사실, 그리고 교황 특사의 맹비난이 더욱 공격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출병해야했고, 출병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베네치아 측이 이집트의 해안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준비한 특수상륙선을 동원한 끝에 23일 자라는 함락되었고 흥분한 십자군은 약탈을 벌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격분했다. 자라는 엄연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교황인 자신의 제안으로 소집 된 십자군이 같은 기독교계 도시를 공격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자 교황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황은 얼마전에 대사·은사를 내린 십자군은 물론 공범인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파문을 날렸다. 베네치아와 십자군 측은 반발하며 필사적인 통사정을 하여 사정을 알게 된 교황은 십자군에 내린 파문은 취소하였으나, 이미 십자군은 돈의 맛을 본 상황이었다.
4.2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한다!
그리고 자라를 함락시키고 월동 중이던 십자군 지휘부에 폐위된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이자 현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조카인 알렉시오스 황자가 찾아왔다. 당시 로마왕 -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 이던 슈바벤의 필립[10]의 협조 속에 십자군을 찾아온 알렉시오스는 아버지와 자신의 제위를 되찾아 달라고 요청했으며 대가로 엄청난 조건을 내걸었다. 바로...
1. 십자군이 지고 있던 빚 탕감과 이집트 원정을 위한 비용으로 20만 마르크(!)를 지불한다.
2. 이후 성지 수호를 위해 병사 1만과 기사 500여명을 파견한다.
3. 교황수위권을 인정하고 동방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의 산하로 통합시킨다.(!)
제위를 되찾아 달라는 요청은 곧 중세 유럽 최대의 도시이자 난공불락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이라는 엄청난 요구였지만 대가 역시 엄청났다. 교황측은 이미 이 황당한 제안을 거부한 상황이었으나, 물자도 부족했고 병력부족으로 이집트 원정을 고민하고있던 십자군 측은 사령관 몽페라 후작의 개인적인 사정[11][12]까지 더해져 승낙하고 만다.
베네치아 측 역시 이를 환영했다. 일단 성공하면 손해를 더 보지 않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간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13] 동로마 제국이 허약해진[14] 틈에 친 베네치아적인 인물을 제위에 올리고 특혜를 얻어 경쟁자들과의 차이를 벌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해 관계가 얽힌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연합군은 1203년 4월 자라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알렉시오스 앙겔로스 황자는 디라키온과 코르푸에서 알렉시오스 4세로 추대 되었다.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었다.
4.3 1차 공격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본래 출정일이었던 1202년 6월 24일 로부터 정확히 1년이 지난 1203년 6월 24일, 십자군-베네치아 연합군의 대함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앞 마르마라 해에 도달했다. 규모도 규모거니와 그 목적 역시 저지되어야할 것이었지만, 이미 해군이 붕괴해서 베네치아의 해군력을 지원받던 동로마 측은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처음 연합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반대편에 있는 칼케돈에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방비가 갖춰져 있어서 결국 교두보 확보에 실패했고, 소규모지만 요격군이 나타나 배후를 위협하자 이를 격퇴시킨 연합군은 곧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일면을 차지하는 금각만 너머의 갈라타를 먼저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갈라타 공략을 위해서는 금각만을 막고있는 쇠사슬을 끊는 것이 우선이었다. 알렉시오스 3세도 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쇠사슬을 지키기 위해 이를 관리하는 망루를 수비했는데 결국 패퇴, 갈라타 지구가 점령되고 금각만과 도시 북쪽 6km에 달하는 지역이 위험에 노출되어버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완료한 연합군은 굳이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았고 알렉시오스 3세의 인기가 낮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들이 추대한 알렉시오스 4세를 동로마 측이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라틴인들에 대해 뿌리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던 동로마 측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금각만 방향에서 연합군 육해군이 공격하는 공성전이 개시 되었다.
7월 11일에 1차 공격이 있었으나 격퇴 되었고 7월 17일 2차로 총공격이 감행 되었다.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가 직접 지휘하는 등 공방전은 격렬했다. 연합군 측의 상륙선을 동원한 공성능력은 강력했으나, 난공불락의 성벽과 방어자로서 이점을 가진 동로마 측의 수비력이 이를 능가했다. 엔리코 단돌로의 격려로 한 때 25개의 망루를 점령 하는 등 성공적으로 흘러 가는 듯 했던 전투는 바랑기안 친위대가 투입되는 등 격전 끝에 마지막에는 동로마 측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화재와 전투의 혼란 속에서 겁을 집어먹은 황제 알렉시오스 3세는 도망쳐버렸고[15]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유리하게 전투를 끝맺을 수 있었던 동로마 측은 결과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최고 책임자가 사라져 버리자 동로마인들은 어처구니 없음을 느꼈지만 나름대로 쾌재를 불렀다. 맘에 안들던 황제가 사라졌고, 다른 황제를 대신 내세워 명분이 없어진 연합군을 쫒아내리라 기대한 것이다. 연합군 측은 사태의 급진전에 당황했으나, 자신들이 내세운 알렉시오스 4세를 제위에 올리라고 주장했고 결국 동로마인들이 과거 옹립한 황제 이사키오스 2세와 연합군이 내세운 알렉시오스 4세 부자를 공동 황제로 올리기로 합의했다. 어차피 부자가 공동으로 황제에 오르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어서 표면적으로는 이상할게 없었고, 동로마 측은 더이상 공격받을 여지가 없어서 좋았으며, 연합군 측은 맹인이 된 이사키오스 2세와는 달리 자신들이 추대한 알렉시오스 4세가 선임황제가 될 것이었으므로 좋았다.[16] 그렇게 일단락 되는 듯 했다. 그러나...
4.4 막간
제위를 되찾은 알렉시오스 4세는 곧 난관에 봉착했다. 십자군-베네치아 연합군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었으니 대가를 치렀어야 했는데, 어느 것 하나 들어주기 어려웠던 것이다. 군사력 파견은 불가능했고 교회 통합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나마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해 보였고 연합군 측도 가장 원했던 조건인 은20만 마르크[17]를 지불하려고 창고를 열어 재정상태를 확인해보니 아뿔사, 돈이 없었다.
마누일 1세 시절 같았으면 무제한으로 비유될 자금력과 마르지 않는 재정이 실재했었겠으나, 알렉시오스 4세의 아버지가 말아먹고 삼촌이 들고 도망친 뒤였다. 자신도 빚쟁이였던 연합군 측은 체납에 짜증나서 닥달하였고 이에 못 이긴 황제는 결국 세금을 추가로 물리고, 황실의 보물과 성물을 팔고, 교회의 재산을 징발하여 돈을 마련하려하였다. 새로운 황제가 전임 황제마냥 돈을 긁어모으자 당연히 시민들은 불만스러워했고, 동로마 정교회는 재산이 침해되는 와중에 교회 통합에 대한 밀약까지 듣게 되어 분개했다.
그럼에도 돈이 부족했다. 닥닥 긁어 모았음에도 절반인 10만 마르크 정도 밖에 못 마련한 것이다. 황제는 막대한 재화를 들고 도주하여 복위를 노리는 삼촌을 잡아들이고자 하여 수도를 비웠는데, 그 동안 폭동이 터져서 라틴인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버렸다. 동로마 시민들의 도발에 분노한 연합군 측은 보복을 위해 무슬림 지구를 목표로 공격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기 살던 수많은 무슬림뿐만 아니라 정교회인들까지 연합군에게 학살당하거나 약탈되었다. 이와중에 지른 불이 대화재로 번져 수일간 도시를 태우는 사건이 발생했고(1203년 8월),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했다. 시민측과 연합군 측의 갈등은 폭발직전에 달해 있었다.
양측의 책임자인 알렉시오스 4세가 겨울에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도시는 대화재와 폭동, 연합군의 약탈로 황폐해져 있었고 황제에 대한 불만은 살의에 이르고 있었다. 1204년 1월 이사키오스 2세가 사망하여 단독 황제가 된 알렉시오스 4세는 사태를 해결도 못하고 공포에 질려 황궁에 틀어박힐 지경이 되었고, 그런 황제에게 크게 실망한 시민들은 새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열어버렸다.
그 와중에, 반 라틴 계열의 인물인 Protospatarios라는 직위의 알렉시오스 두카스[18]가 알렉시오스 4세를 속이고 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시민들은 일단 인기없는 황제가 죽자 이를 환영하며 이 의사(?)를 황제로 추대했고, 알렉시오스 5세 황제가 되었다.
반 라틴파인데다 보상금을 지불하려던 황제를 죽이고 추대되었기에 신황제의 태도는 명확했다. 알렉시오스 5세는 연합군을 쫓아내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고 성벽을 수리하는 등 전투 준비를 당연한 일인데 전임들이 개판이라 대단해 보이는 기적 서둘렀고, 사태의 급진전에 당황한 연합군은 계약 이행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로마 측은 계약 당사자가 죽었으니 배째라며 당장 나가라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분기탱천한 연합군 측은 재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휴식은 끝났다.
4.5 2차 공격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다시 겨울을 세는 와중에도 회의감를 느끼고 탈주자가 이어졌던 십자군 측이었으나,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자 강경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베네치아 측의 대표인 엔리코 단돌로가 연합의 주도권을 쥐게되었고, 전리품 분배와 사후계획 따위를 논하게 되었다. 십자군 측은 돈도 못받고 성지구경도 못하게 된 판이었으나, 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전리품을 얻고 빚도 갚자는 의견이 대세가 되었다.
베네치아 측의 생각도 이때 굳어지게 되었다. 당초에는 계산 착오로 인한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탈선을 저질렀지만, 폭주하는 군사력을 주도하게 된 상황에서 본래 동로마에 대한 고민이 결합되자 이후의 계획을 생각하게 되었다. 주요한 도시와 섬, 항구 등을 가지게 되면 각종 상품을 독점적으로 취급할 수 있었고, 항로도 통제할 수 있었다. 당장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 경쟁 상대인 피사와 제노바를 동로마에서 쫓아내고 흑해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4월 8,9일의 이틀동안 서전을 벌인 연합군은 생각보다 동로마측의 방어태세가 단단한 것을 보고 당황하였다. 연합측은 10,11일 간 갈라타로 물러나 다시 준비를 하였다. 그 때 교황이 보낸 특사가 도착하여 기독교인의 도시를 공격하지 말라고, 자라를 반복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오히려 연합측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반동로마 감정과 전투에 흥분해있던 연합측은 전부 동로마가 약속 불이행으로 초래한거라며 특사를 논박해 쫓아버리고 최후의 공세를 가했다.
황제가 직접 지휘하고, 시민들도 같이 저항하고 다시 바랑기안 친위대가 투입되는 등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으나, 한번 함락된 성벽은 1차 공격 때 만큼의 역할을 못했다. 4월 12일이 되자 연합군은 성벽을 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고, 알렉시오스 5세는 저항의지를 상실하여 다른 인사들과 함께 황도를 빠져나갔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었다.
4.6 아!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시의 여왕, 겁탈당하다
"소름끼쳤다" -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Geoffroi de Villehardouin), 콘스탄티노플 정복(De la Conquête de Constantinople) 中 -
운명의 4월 13일, 성내를 살펴본 연합군은 방어군의 저항 의지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동로마 측에서는 십자군 영주를 새 황제로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연합군에는 약탈에 굶주리고 악에 받힌, 로마인들을 증오하는 1만여의 사람들이 관례대로의 3일간의 약탈을 바라고 있었다. 지휘부 역시 자신들을 엿먹인 로마를 증오하며 약탈을 강하게 욕망하고 있었으므로 약탈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그야말로 대약탈이 시작되었다.
눈에 띄고 손에 닿는 모든 것들에 대해 파괴, 약탈, 방화가 베풀어 졌다. 조금이라도 값나가 보이는 물건은 약탈되었고 교황의 사전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성소 역시 오물이 갈겨지고 파괴되고 불살라졌다.[19]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귀족, 성직자들을 가리지 않고 폭행, 살해, 강간, 납치 등이 가해졌다. 고대 로마로부터 물려져내려온 예술품, 유물, 성물도 마찬가지였으며 황제들의 무덤 또한 마찬가지였다. 판토크라토 수도원의 묘역에 있는 황제의 관들이 끄집어 내져 부장품들이 약탈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유골 조차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햅도몬 궁전에 안장되어있던 바실리오스 2세의 묘역은 파헤쳐지고 시신은 내버려졌다. 천여년을 이어지던 많은 성당 성화들도 이교도가 그렸다고 하여 파괴되고 긁혀져 손상됐다. 그리고 새롭게 가톨릭 화가가 그린 성화가 채워졌다가 나중에서야 탈환한 동로마 정교회인들이 다시 지우고 그려야 했다.
3일간의 지옥이 구현 된 끝에, 연합군은 은 90만 마르크[20]에 달하는 전리품을 약탈해 본전을 넘어선 큰 수익을 벌었다. 남은 것은 수십만의 시신과 난민, 폐허만 남은 도시였다. 가장 부유하고 유서깊은 황제의 도시는 그렇게 몰락했다.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은 동로마와 정교회가 십자군과 가톨릭에 대해 강한 악감정을 자기게 되는 계기가 된다. 오죽하면 '초승달 이교도(무슬림)도 악랄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사람이지만 십자가 든 악마들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동로마인들은 할 정도였다.
5 결과
5.1 라틴 제국의 성립
베네치아 측에 3/8의 영토를 분배하고 나서, 나머지 5/8의 영토에는 자칭 "로마 땅의 제국(Imperium Romaniae)"이 들어섰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도가 되었으며, 테살로니키, 펠로폰네소스 반도 등이 왕국과 공국으로 배분되었다.
몽페라 후작 보니파시오가 황제위를 바랐으나, 비교적 제국령에 가까운 영지를 가진 황제를 바라지 않았던 베네치아 측은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밀어주었고 5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치러 보두앵 1세가 되었다.
5.2 망명국들의 성립
5.2.1 니케아 제국
테오도로스 1세가 세운 동로마 제국의 망명정권이며, 미카일 8세의 치세 때 라틴 제국을 몰아내고 동로마를 부흥시켰다.
5.2.2 트레비존드 제국
-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 알렉시오스는 콘스탄티노플이 십자군에게 함락되어 동로마가 분열되자 근거지인 트레비존드(오늘날의 트라브존)에서 자립, 알렉시오스 1세로 칭제했다. 하지만 니케아 제국에 막혀 서쪽으로 더 세력을 키우지 못한 채 지역 소국에 머물렀고 훗날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했다.
5.2.3 이피로스 공국
5.3 동지중해의 여왕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드리아해의 여왕' 정도가 아니라 "'동지중해의 여왕"'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갈라타 조계지역이 갈라타 따위가 될 만큼 많은 요지를 분배받았다. 아드리아 해에 접한 코르푸, 케팔로니아 섬 등은 물론 에게해에 있는 크레타를 필두로하는 수많은 섬들이 베네치아의 몫이 되었고 그 외에도 육지의 주요한 항구 및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하는 칼리오폴리스 까지 획득하여 흑해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도박에 가까운 모험 끝에 가장 큰 이득을 보아서 기존의 '베네치아 공화국' 이자 '달마티아의 공작'이라는 칭호는 물론, '로마 제국의 3/8의 주인'이라는 명칭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5.4 그 외
6 평가
- ↑ 이슬람의 바다속에 갇힌 고립상황이었다. 전성기에도 해로를 통한 지원에 크게 의존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안티오키아를 점유해서 육로로 기독교 국가와 이어졌을 때가 교류하기 그나마 더 쉬웠다.
- ↑ 내부상황은 알렉시오스 3세 참조.
- ↑ 고대 로마의 본거지였고, 교황에게 직접 간섭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로마 측이 1156년 브린디시에서, 신성 로마 측이 1176년 레냐노에서 각각 패배하여 양 로마의 의지는 좌절되었었다.
- ↑ 동생인 이사키오스 2세의 딸. 이리니 앙겔리나.
- ↑ 동로마 제국의 제위가 모계로도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가치를 가진 사건이다.
- ↑ 독일왕으로도 불린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 받고 대관식을 치르지 못하면 로마왕 칭호로 그쳤다.
- ↑ 실제로 예루살렘 왕국은 자생을 위해 이집트를 공략하고자 단독으로, 혹은 동로마 측과 연합으로 이집트를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 Zadar(zara) : 현재 크로아티아령 자다르. 본래 달마티아 지방은 명목상의 군주인 동로마 측이 내린 공작위 덕에 베네치아령이었고, 자라는 베네치아 측의 식민도시였으나 독립하여 헝가리 왕에게 충성했다.
- ↑ 같은 기독교도도 이질적인 민족이거나 문화권이면 남취급하고 공격하는 일 자체는 흔했으나, '십자군'이라는 공개적인 간판을 내세우고 같은 기독교도를 공격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미....
- ↑ 하인리히 6세의 동생이자 이사키오스 2세의 사위. 결국 알렉시오스 황자의 누이 이리니의 남편으로 자형이 된다.
- ↑ 십자군에 참가한 영주들은 재산과 영토를 저당잡혀 있었고 베네치아에 빚까지 지고 있어서 자금이 절실했다. 더군다나 병력이 부족한 차에 이를 지원해주고, 교회 통합으로 대의적인 면에서도 부족한 명분을 취할 수 있는 제안이었으니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 ↑ 몽페라 후작 보니파시오의 아버지 굴리엘모는 5남 3녀를 두었는데 보니파시오는 3남 이었다. 그 중 5남 레니에는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 마누일 1세의 장녀 마리아 황녀와 결혼했었으나, 권력 다툼에 휘말려 살해당했다. 때문에 동로마 제국에 원한을 가지거나 다른 몫을 요구하기 좋은 입장이었다.
- ↑ 베네치아가 뛰어난 상술로 동로마 제국의 경제를 쥐고 흔들자 동로마는 제노바 등의 다른 상업 공화국을 끌어들여 견제하였다. 거기다 마누일 1세 시절에는 전면전을 벌여 굴욕적인 패배를 겪었고, 안드로니코스 1세 등극시에는 라틴인 대학살로 많은 베네치아인이 죽어 동로마에 대한 반감이 굉장한 상태였다.
- ↑ 당시 제국은 내분과 권력다툼, 대 불가리아 전쟁, 대 이슬람 전쟁, 세수 감소 등으로 국방력이 망가져 있었고, 해군력의 경우 아드리아해 연안의 방위를 베네치아 측이 대신 제공할 정도였다.
- ↑ 수도 탈환을 위해 딸과 재위기간 동안 쌓아놓은 재화를 전부 들고 도망쳤는데, 이는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후일 많은 드라마(...)를 연출하게 된다.
- ↑ 동로마에서는 황제가 후계자를 공동황제로 지명했고 주로 형제나 자식 혹은 황제와 가까운 관계의 유능한 인물이 그 대상이 되었다. 물론 실권은 지명자가 선임 황제로서 쥐었고 피지명자는 후계자로서 대우받았다. 때때로 시민들의 동의나 다른 독특한 조건들이 요구 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은 고대 로마로 부터의 전통이었다.
- ↑ 당시 제국 최고액화 히피르피론(Hyperpyron) 200만닢에 육박하는 거액이었다.
- ↑ 진한 눈썹덕에 무르주플로스라는 별칭이 있었다. 당시 황제의 신임을 얻어 신변책임자였다.
- ↑ 당시 정교회는 로마가톨릭에서 이단으로 간주했기에 정교회의 교회와 성소를 파괴하는 것은 죄가 아니었다.
- ↑ 히피르피론 800만 닢에 육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