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타가하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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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타가하라 전투를 대표하는 그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미카타가하라 전역화상(徳川家康三方ヶ原戦役画像)>. 흔히 '이에야스의 우거지상(家康のしかみ像)'이라고 불린다. 이 괴이한 초상화의 경위는 아래에 서술되어 있다.

1 개요

その時歴史が動いた 「徳川家康 三方ヶ原の大ばくち 敗れて学ぶ 覇者の哲学」 (2002年)

三方ヶ原の戦い

겐키 3년(元亀, 1573년) 12월 22일(1월 25일), 다케다 신겐의 2만 7천과 오다 · 도쿠가와 연합군 1만이 도토미(遠江) 국[1]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전투. 이 전투에서 오다 · 도쿠가와 연합군이 대패하면서 도쿠가와는 멸망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갑작스러운 신겐의 급사로 인해 구사일생 했다. 미타기하라 시에서 일어난 전투가 아니다.

2 배경

2.1 이마가와의 몰락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사하고, 그 뒤를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이었다. 그러나 우지자네가 워낙 무능한 바람에 이마가와 가문은 점점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가이(甲斐)[2]와 그 위의 시나노(信濃)를 영지로 하던 다케다 신겐은 영지인 두 지역이 산골짜기라 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밀약을 맺고 이마가와 가문의 영지였던 스루가(駿河) 국을 차지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가미(相模)의 호조 가문과 갈라지게 되나[3], 호조 가문의 침략을 막아내고 오히려 이를 격퇴하며 스루가를 안정시켰다.

2.2 노부나가 포위망

겐키 원년(1571년), 무로마치 막부의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秋)는 마침내 오다 노부나가 토벌령을 내린다. 이에 다케다 신겐은 이를 구실로 상경을 개시하면서 노부나가의 협력 세력인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 미카와(三河)와 도토미를 공격한다. 더군다나 이 해의 말에 호조 우지야스(北條氏康)가 죽고, 다케다와 호조의 동맹이 새로 체결되면서 도쿠가와 가문은 위기에 빠지게 된다.

2.3 신겐의 상경

1572년, 신겐은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 아키야마 노부토모(秋山信友)에게 각각 5천 씩을 주어 각각 미카와와 오다 가문의 영지인 미노(美濃)를 침략하였다. 신겐 자신은 본대 2만 2천을 이끌고 진군하여, 바바 노부후사(馬場信春)의 5천 별동대를 편성해 도토미 서쪽의 다다라이 성을 공략하게 하고, 자신은 후타마타 성으로 향했다. 신겐이 약 3만이나 되는 대군을 파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관동의 호죠와는 동맹을 맺었고, 에치고(越後)의 숙적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은 엣추(越中)의 일향종 신도들이 막아 주겠다는 밀서를 전에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한편, 도쿠가와 가문의 총 군사 동원수는 1만 5천 정도 였는데, 그것도 반 이상을 미카와로 침공하는 야마가타 마사카게를 막느라 파견시켜 7천 정도 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원병을 요청하지만, 노부나가 또한 포위망을 막아내느라 여유가 없던 상황이었다.

1572년 12월, 신겐은 후타마타 성을 낙성시켜 도토미 북부의 지배권을 차지하였다. 후타마타 성 낙성 직후 노부나가가 파견한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와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의 3천이[4] 도착하였으나 시나노 정벌 과정에서 단련된 다케다의 고후군을 상대하기엔 양과 질 모두 부족하였다.

이에야스는 도토미의 본성인 하마마쓰에서 농성을 하였고, 이에 신겐은 하마마쓰 성을 무시하고 호리에를 향해 서진, 이에 이에야스는 서진하는 신겐의 배후를 치고자 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미카타가하라로 출진하였다.

3 전개

그러나 신겐은 미카타가하라 평원에 어린진(魚鱗陣)을 치고 만발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도쿠가와 · 오다 연합군도 이에 맞서 학익진(鶴翼陣)[5][6]을 선택하여 포위섬멸을 시도하였으나개형적인 포진도, 포진부터 불리하였던 데다, 병력의 양과 질 모두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였던 연합군의 진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유능한 가신들과 2천의 군사를 잃는다. 이에 반해 다케다군 사상자는 겨우 2백 정도였다.

이에야스는 목숨만 겨우 보존하여 겨우 하마마쓰 성에 도착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신겐의 추격이 두려운 나머지 패주하면서 말 위에서 똥을 지렸다고 한다. 입성 후 패주를 잊지 않기 위해 화공을 불러 그렸다는 것이 상단의 시카미 그림. 여담으로 이에야스는 하마마쓰까지 추격해온 추격군에 야습을 걸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나, 기록의 신뢰성이 떨어지며 이는 이에야스를 미화하기 위해 조작될 가능성이 크다.

4 결과

신겐은 도쿠가와를 토토우미 남부에 묶어놓은 채 미카와를 침공하였다. 미카와를 넘으면 바로 오다의 본진인 오와리이니만큼 오다 · 도쿠가와 가문의 심각한 위기 였으나 신겐이 진중에서 병사하면서 결국 다케다군은 철수하였다. 신겐의 죽음을 틈 타,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추방하며 막부를 멸망시키고, 아사쿠라와 아자이를 차례로 멸문시키면서 세력을 안정시키기에 이른다.

한편, 다케다 가문은 다케다 카츠요리가 가독을 승계하여 이에야스가 나가시노를 탈환하는 등 일부 회복을 하였음에도 도토미 북부를 장악한 구도는 유지되던 중 나가시노 전투로 이어진다.

5 기타

전국 시대의 전투중에 드물게 양쪽의 진법이 상세히 기록되고 그 충돌로 결과가 나온 전투라 주목할만하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양측다 비상식적인 점이 많아 의문을 남긴 전투이기도 하다.

어찌되었건 배후를 잡힌 다케다군이 수비 진형을 취하지 않고 순식간에 반전해서 가장 공세적인 어린진을 친것도 의문이지만, 배후를 잡은 도쿠가와군이 적은 병력에 기동력을 살릴수 있는 진법 대신 포위 섬멸을 목적으로 하는 학익진으로 공세를 취한것도 의문을 남기고 있다.

굳이 전쟁사나 전략/전술의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관점에서 봐도 상식적으로 양측이 취한 진법은 서로 정반대가 되었어야 타당하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설들이 존재하는데 현재까지는 정확하게 밝혀진바는 없다.

센고쿠에서는 해당 전투가 다케다군의 소수 병력의 유인으로 인해 좁은 길로 접어든 도쿠가와군이 함정에 빠져 말이 학익진이지 실제로는 각 부대의 각개전투였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람의 닌자에서는 도쿠가와군이 학익진을 치면 다케다군이 더 큰 학익진으로 포위를 하려 진형을 바꿀것이고, 그때를 노려 소수인 도쿠가와군이 먼저 어린진으로 진법을 바꿔 돌파하려는 의도였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현실은 그냥 다케다군 닥돌로 참패.

아무튼 일각에서는 이러한 다케다군의 공세 지향적인 전술을 통한 승리 덕에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철포대와 방책이 있는 오다-도쿠가와군의 진지에 달려들었다 몰살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분석도 있는듯. 신겐 : 아들아! 전에는 우리가 더 병력 많았다고!

어쌔신 크리드 메모리즈에서는 이 전투 중 신겐이 한조와 타다카츠에게 죽었고, 신겐이 갖고 있던 에덴의 조각 '검'을 가져가 노부나가가 입수했다고 한다.

전국무쌍 4에서는 도쿠가와의 장 마지막 스테이지로 등장하며 오다 가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무리한 공격을 한 이에야스가 퇴각 도중 신겐의 함정에 걸려들고 가신들을 잃어가며[7]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간다. 이후 이에야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가신들의 투구를 쌓아가며 통곡한다.
  1. 오늘 날의 시즈오카 현 서쪽
  2. 오늘 날의 야마나시 현의 해당.
  3. 당시 다케다, 이마가와, 호조. 이하 세 가문은 삼국동맹을 체결하고 있었으나 이 일로 깨어진다
  4. 비록 노부나가의 친정은 아니었으나 이들은 노부나가의 최측근에 있었으므로 노부나가가 성의없는 지원군을 보낸건 아니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주로 다루는 매체에서는 성의 없다고 표현되는게 다수이다.
  5. 진 모양이 학이 날개 편 것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상대방보다 자기 군대의 숫자가 많을때 학이 날개로 감싸듯이 쌈싸먹기 하는 작전이다. 한국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쓴 진법으로 유명.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은 정확히는 그 변형이다.
  6.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해전으로는 한산도 대첩이 유명한데, 이 때도 조선 수군이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학익진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민첩한 기동이 어려운 해전에서 상대보다 우월한 원거리 화력을 바탕으로 사용한 것이다. 근거리 육박전의 상황에서 학익진이라는 연합군의 선택은 만용으로 판단된다.
  7. 이 중 2명은 이에야스를 자칭해가며 시간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