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구려의 역대 국왕 | ||||
3대 대무신왕 고무휼 | ← | 4대 민중왕 고해색주 | → | 5대 모본왕 고해우 |
시호 | 민중왕(閔中王) | |
성 | 고(高) 혹은 해(解) | |
휘 | 색주(色朱)/해색주(解色朱)[1] | |
생몰년도 | 음력 | ? ~ 48년 |
재위기간 | 음력 | 44년 10월 ~ 48년 (5년) |
고구려의 제 4대 군주.
1 소개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뒷날의 모본왕)의 나이가 어려 즉위했다. 삼국사기에서는 대무신왕의 동생이자 유리명왕의 아들, 삼국유사에는 대무신왕의 아들이자 모본왕의 동생으로 적었다. 하지만 후자가 맞다면 태자가 어려서 즉위했다는 말이 모순이니 오기로 보인다.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2 성씨 논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성이 해씨라고 한다. 이름이 해색주(解色朱)라 실제로는 고씨가 아니라 해씨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해씨였으면 고구려에선 계루부 고씨가 아니라 소노부 해씨가 왕을 했다는 셈. 일부의 기록이라 정확하지는 못하다.
현재 학계의 흐름은 추모왕부터 이미 고구려의 정치적 중심은 계루부로 넘어갔다고 본다. 애초에 첫 수도이자 동명왕묘가 있는 오녀산성이 계루부에 있는데 소노부가 그런 데서 왕노릇을 했겠나?
추모왕 즉위년 기사의 송양이 있었다는 비류국=소노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미 추모왕 때에 왕권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넘어갔다. 그렇다고 소노부가 해씨라는 건 아니고 '해씨=고씨'라고 보면 좋을 수도 있다
3 내정
5년동안 즉위했는데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자연재해 때문에 민심도 흉흉했고 잠우부락(蠶友部落)의 1만 가가 한나라의 낙랑에 귀부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석굴에 매장된 것이다. 민중원에서 사냥하다가 스스로 석굴에 장지를 정했다고. 별로 남긴 업적도 없어서인지 왕호조차 능침이 자리잡은 민중원의 지명을 따서 그냥 민중왕이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月 민중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一月 민중왕이 대사면을 실시하다
二年春三月 민중왕이 잔치를 베풀다
二年夏五月 홍수로 백성이 굶주려 창고를 열어 구제하다
三年秋七月 왕이 노루를 잡다
三年冬十一月 남쪽하늘에 혜성이 나타나다
三年冬十二月 겨울의 국내성에 눈이 오지 않다
四年夏四月 민중원에서 사냥을 하다
四年秋七月 왕이 석굴에 장사지내달라고 하다
四年秋九月 동해사람이 고래 눈을 바치다
四年冬十月 만여가가 낙랑으로 가서 후한에 투항하다
五年 민중왕이 붕어하다
- ↑ 해가 성씨일 수도 있고 또 고가 성씨일 수도 있다. 고가 성씨일 때는 고해색주가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