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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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대 국왕
4대 민중왕 고해색주5대 모본왕 고해우6대 태조대왕 고궁
시호모본왕(慕本王)
고(高) 혹은 해(解)
해우(解憂) / 해애루(解愛婁)[1]
생몰년도음력?[2] ~ 53년 11월
재위기간음력48년 ~ 53년 11월 (약 5년)

고구려의 제5대 . 민중왕과 마찬가지로 해씨 고구려설 떡밥에 들어간다.

1 소개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대주류왕)의 아들이라 하나, 『광개토대왕비』나 《삼국사기》 여러 부분의 기록으로 보아 대주류왕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나 증손자로 추측하지만... 일단 사서의 기록은 그를 대무신왕의 아들로 부르니 현재까지의 정설은 대무신왕의 아들.

2 내정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모본왕 기록에는 재위 2년에 군사를 동원했다고 나오고, 그 뒤 관련 내용은 없이 그저 후일의 폭정만 말한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따르면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침략하다가 제융이 은신(恩信)으로 부르니 다시 항복하였다.'라 하고 《삼국사기》에는 '재위 2년 장수를 보내 후한(後漢)의 우북평(右北平)(《삼국사기》에는 북평으로 나오나 이는 우북평의 오기인 듯),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이에 후한의 요동 태수 제융(祭肜)이 화친을 청해와 화친하였다.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음력 8월에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삼국사기》와 《후한서》의 내용을 종합하면 선비족과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켜 후한 동북방 지역에 큰 위협을 주었으며, 고구려 내부사정으로 더 전쟁을 잇기 어려워 화친을 맺었다고 볼 수도 있다. 덕분에 다음 왕인 태조 때부터 한나라와 승패를 거듭하여 피터지게 싸운다.

3 폭군

모본왕은 인간베개[3]였던 두로가 못 참고 휘두르는 에 죽었으며, 이후에 신하들이 불초하다며 태자를 폐하고 종실에서 고궁이란 아이를 왕으로 세우니 이 사람이 태조대왕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두로는 "대장부가 왜 우느냐?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쓰다듬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로다.'[4]고 하였다. 지금 왕의 행함이 잔학하여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다. 네가 그를 죽여라."라는 말을 어떤 사람에게 듣고 분기하여 죽였다고 한다.

한때 후한 동북방 일대를 위협할 만큼 군사적인 능력이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학정을 일삼다 암살을 겪은 폭군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는 논란이 있다.

해씨 고구려설에 따르면 모본왕을 소노부 계통의 마지막 왕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 그를 바탕으로 일부는 모본왕이 후세에 음해를 겪었다고도 주장한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 모본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홍수가 나다
一年冬十月 왕자 익을 태자로 삼다
二年 후한과 화해하다
二年春三月 거센 폭풍이 불다
二年夏四月 여름에 서리가 내리고 우박이 떨어지다
二年秋八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四年 모본왕이 사납고 잔인해지다
六年冬十一月 두로가 모본왕을 죽이다

  1. 여기서 가 이름일 수도 있지만 성씨일 확률도 있다. 해씨 고구려설의 주요 떡밥
  2. 위키백과에선 32년, 다른 곳에선 생년미상으로 나오니 정확한 내용을 아시는 분은 수정 바랍니다.
  3. 삼국사기》에서 '왕은 날이 갈수록 포악해져, 앉을 때는 언제나 사람을 깔고 앉았으며, 누울 때는 언제나 사람을 베고 누웠는데, 그 사람이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다. 신하 중에 잘못을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죽였다.'라고 했으니, 두로는 모본왕이 베고 잤던 사람이다.
  4. 撫我則后 虐我則讎. 《서경(書經)》〈주서(周書〉태서편(泰誓篇)에 있는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