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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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대 국왕
2대 유리명왕 고유리3대 대무신왕 고무휼4대 민중왕 (고)해색주
시호대무신왕(大武神王) / 해주류왕(解朱留王) / 대주류왕(大朱留王) /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고(高)
무휼(無恤) / 미류(味留) / 막래(莫來)
생몰년도음력4년 ~ 44년 10월 (41세)
재위기간음력18년 10월 ~ 44년 10월 (26년)

1 소개

고구려 제 3대 임금.

호는 여러가지가 전해져 오는데 유래는 다음과 같다.

  • 대무신왕(大武神王): 삼국사기
  • 해주류왕(解朱留王):
  • 대주류왕(大朱留王): 광개토대왕릉비
  •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삼국사기

이름 역시 여러가지가 전해지는데 '무휼'은 삼국사기, '미류'는 삼국유사, '막래'는 중국 사서인 위사에 전해진다.

삼국사기에서는 유리명왕의 셋째아들이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인 북사에선 유리명왕을 여달(閭達)이라 한다. 그리고 위서에

閭達死 子如栗代立

여달(閭達)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이 대를 이어 즉위했다.
如栗死 子莫來立 乃并夫餘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莫來)가 즉위하였고 이어 부여(夫餘)를 아울렀다.

는 기록이 있다. 둘의 기록을 살펴보면 유리명왕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일 가능성이 있다. 어머니는 고구려의 땅인 다물도의 영주이자 비류국의 전 왕인 송양의 딸이다.

2 왕자 시절

유리명왕의 장남 도절은 요절, 차남 해명태자는 자결했다. 그래서 삼남 무휼이 태자에 옹립되었다.

삼국사기에 첫 등장한 것은 유리명왕 재위 28년 8월인데, 동부여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게 복속을 명령하자, 고구려의 세력이 아직 약한 것을 염려한 유리명왕은 복속하겠다는 회답을 보냈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무휼은 동부여의 사신을 만나 중국 고사 누란지위에서 따온 대소에게 보내는 경고를 남겼다.

유리명왕 32년 겨울 11월에 부여가 쳐들어오자, 무휼은 적은 군사로 복병을 써서 학반령이라는 곳에서 부여군을 격파하고 모두 죽였다.

유리명왕 33년 봄 정월에 태자에 올랐다. 참고로 이때 나이가 11살. 근데 기록이 뭔가 이상하다. 앞에서 32년에 부여군을 대파했다는데 그럼 10살때 뛰어난 전술로 적을 죽였다는게 된다.

그리고 대무신왕의 어머니가 다물후 송양의 딸이라고 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유리명왕 3년에 송양의 딸이 사망한다. 만약 유리명왕 3년에 무휼이 태어났다면 태자일 때 나이는 30살.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37살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유리명왕이 송양의 다른 딸과 다시 결혼해 무휼을 낳았냐는 의견도 있다.[1] 하지만 황조가에 있는 기록에는 송양의 딸이 아닌 다른 이가 왕후였다. 그러므로 연구가 더 필요하다. 앞서 언급처럼 유리왕의 손자라면 해석이 차라리 쉽다. 이 경우라면 첫번째 태자였던 도절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송씨가 속한 비류부(후대의 소노부)가 고구려의 왕후족이니 후계자였던 여율이 송양의 딸 또는 손녀와 결혼해서 대무신왕을 낳았을 수도 있다.

유리명왕 36년엔 태자로서 국정에 참가했다.

3 왕위에 오르다

서기 18년, 유리명왕이 승하하자 1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고 재위 3년 봄 3월에 동명왕묘를 세웠고, 가을 9월에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마(神馬)를 얻어서 이름을 거루(駏䮫)라고 했다.

4 정복 전쟁

4.1 부여 정벌

10월에는 부여의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붉은 까마귀를 보내 왔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몸 하나에 머리 둘이 아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대소왕에게 바친 것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까마귀는 본래 검은 것인데 붉게 되었고,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이니 두 나라가 1명의 왕 아래에 합쳐진다는 의미라 하여 부여가 고구려를 차지할 징조라고 말하자 기뻐서 보내주고 그 말도 알려준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신하들은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인 붉은 색이 되었고, 또한 상서로운 물건인데 자신이 가지지 않고 고구려에 보냈으니 두 나라의 운명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풀이했다. 대소왕은 그 말을 듣자 크게 후회했다. 남방이 붉은 색이라든가, 북방이 검은 색이라든가 하는 것은 도교의 영향을 받은 설화로 보인다.(남주작현무사신도)

재위 4년 겨울에 군대를 내서 숙적 동부여를 공격했다. 이 때 여러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비류수 가에서 물가를 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가지고 있는 듯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솥만 있었다. 그 솥은 불을 피우지 않아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어 군대를 먹일 수 있었다.전기밥솥 나중에 한 장부가 나타나 그 솥은 자신의 누이가 잃어버린 것인데 왕이 찾았으니 자신이 솥을 지고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하여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하사했다.

이물림(利勿林)에서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서 밝은 뒤에 찾아보게 하니 금도장과 병기를 얻었으며, 왕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 했다.

길을 떠나려 할 때 북명(北溟) 사람 괴유라는 기인이 나타났는데 키가 9척에 얼굴이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그는 왕이 정벌을 하러 떠난다니 자신은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오겠다고 하여 왕이 따르게 했다. 또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라는 자가 나타나서 왕을 따라서 창으로 길을 열겠다고 하자 그렇게 하도록 했다.

재위 5년 봄 2월에 부여국의 남쪽으로 진군하였는데, 진흙이 많은 땅의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어 쉬었다. 그때 부여의 대소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하였으나 군대가 진창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 때 괴유가 공격을 개시하자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지고, 괴유가 대소왕의 머리를 벤다. 하지만 부여의 군대는 쉽게 굴복하지 않고 계속 고구려 군을 둘러싸 위기에 빠졌는데, 대무신왕이 하늘에 영험을 빌자 안개가 피어올라 7일간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고,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무기를 쥐여 거짓 군사를 군영에 만들어 놓은 다음 샛길로 군대를 이끌고 도망쳐 나갈 수 있었다. 이때 신마 거루와 비류수에서 얻은 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거루는 이듬해 3월에 부여의 말 100필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가을 7월에는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부여 사람 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오자,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掾那部)에 두었다. 이 연나부는 이후 절노부로 바뀌어 대대로 왕후족을 하였으며, 고추가라는 지위를 얻는 등 소노부와 함께 왕권 버금세력의 2톱을 달린다. 부여왕의 사촌 동생의 등에 줄무늬가 있어 낙(絡)씨 성을 하사했다.

4.2 개마국&구다국 정벌

재위 9년에는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고, 구다국(句茶國)의 항복을 받았다.

재위 11년에는 요동 태수가 공격해왔으나 을두지의 지략으로 굳게 지켜서 막아냈다.

재위 15년에는 사신을 파견해 후한에 조공을 바쳤고,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왕의 호칭을 회복시켰다.

4.3 낙랑 정벌

재위 15년, 최리의 낙랑국의 항복을 받았다. 호동왕자낙랑공주의 이야기는 이때의 일화. 이후 호동은 계모의 참소로 자결.

재위 20년에는 한나라의 낙랑군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나 대무신왕이 죽기 직전 도로 한나라에게 빼앗긴다...

낙랑 정벌 기록이 두개가 나온다. 낙랑이 두번 멸망하는 이상한 내용이다. 낙랑국과 낙랑군은 완전히 별개라는 주장도 있고, 연계가 있지만 다르다는 말도 있으며, 같다는 말도 있는 등 말 그대로 온갖 설이 난무한다. 낙랑군, 최씨낙랑국 항목 참조.

4.4 신라 침공?

삼국유사》에선 42년에 신라에 고구려가 쳐들어왔다는데 《삼국사기》에는 내용이 없다.

그리고 단재 신채호에 따르면 후한 광무제와 9년간 전쟁을 벌인 왕으로 지목받는데,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다. 대충 낙랑을 빼앗고 다시 털리는데 걸린 기간이 7년여 정도이니 이 즈음해서 전쟁을 벌였을 수는 있다.

모본왕 때 한나라의 북평 등을 공격한 걸로 보아선 북평 등의 주변 영토를 이미 차지했다는 것인데 그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서 기록하는데, 《후한서》에서는 이 공격의 주체를 동이전에서는 고구려라고 말하지만, 열전에서는 오환과 선비 등의 맥인으로 적고, 특히 태원은 너무 멀어서 불가능하리라고 주석에서 알린다.[2] 이 부분만 해도 오래인 떡밥.

게다가 민중왕 때에 동해인이 고래를 바쳤다고 하니 동해 부근의 영토를 이미 차지했어야 했는데 역시 《삼국사기》에 없다. 동예옥저 세력이 고구려에 복속한 흔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32년 이후 10년간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없다(...).

5 평가

아버지 유리명왕과 비슷한 점은 유력한 후계자를 죽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명태자가 사망할 당시 유리명왕에겐 유능한 아들(대무신왕)이 있었지만, 호동왕자가 사망했을 때 대무신왕에겐 어린 아들만 남아 있었으니 문제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첫째 왕후 소생이어서인지 일단 그 아들은 태자를 했지만, 대무신왕이 사망했을 때 워낙 나이가 어려서 대무신왕의 동생인지 친척인지 헷갈리는 민중왕이 대신 즉위했다.

내정과 외정 모두 심하게 모험을 즐겨 그만큼 뒤끝은 나쁘나, 고구려의 나아갈 방향(부여, 낙랑 공격과 한과의 전쟁 등)을 대강 제시했다는 뜻이 있다.

6 기타 창작물 속 모습

만화 바람의 나라의 주인공이다. 그 덕에 게임과 드라마, 심지어 뮤지컬까지 나왔기에 고구려 국왕들 가운데 가장 창작물로 조명을 많이 받았다. 바람의 나라는 유럽에서도 꽤 유명한지, 유럽 팬의 코스프레도 있어 어쩌면 유럽에서 그나마 가장 많이 아는 고구려 왕일 수도 있겠다.

바람의 나라가 모범적인 예이지만, 그대로 봐도 창작물에 나오기 좋은 서사인 왕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이은 부여와의 대립과 복수, 유리명왕-해명태자에서 대무신왕-호동왕자로 이어지는 비극의 연쇄라든가.

앞서 만화 바람의 나라를 모티브로한 드라마 바람의 나라(드라마)에서는 송일국이 아역(?)대 그대로 그 모습을 간다. 늙어보이지만 역사와 대비해보면 9~11살때 모습인 실존인물과 묘하게 위화감이 느껴진다. 당연한거아냐?

드라마 자명고(드라마)에서도 당연히 등장했다. 배우그것이 알고 싶다로 유명한 문성근. 중년과 노년의 대무신왕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호동왕자의 지지자이자 호동의 정적으로 상당히 이중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게 된다.

최근 재연재 중인 신비소설 무의 주인공 무당 낙빈이 사역하는 신으로 등장한다.

7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冬十月 대무신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국내성에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春一月 대사면을 실시하다
二年春一月 백제인이 투항해오다
三年春三月 동명왕 사당을 세우다
三年秋九月 왕이 신령스러운 말을 얻다
三年冬十月 부여왕이 붉은 까마귀를 보내오다
四年冬十二月 부여를 정벌하려고 출발하여 세 사람을 얻다
五年春二月 부여 정벌에 실패하다
五年春三月 신마 거루가 부여말을 데리고 오다
五年夏四月 부여왕 대소의 동생이 압록곡에 와서 갈사국을 세우다
五年秋七月 부여왕의 사촌동생이 투항해오다
五年冬十月 북명인 괴유가 죽다
八年春二月 을두지를 우보로 삼다
九年冬十月 개마국을 정벌하여 군현으로 삼다
九年冬十二月 구다국이 항복해오다
十年春一月 좌보와 우보를 임명하다
十一年秋七月 잉어를 적진에 보내 포위를 풀다
十三年秋七月 매구곡 사람이 투항해오다
十四年冬十一月 겨울에 천둥은 치는데 눈은 오지 않다
十五年春三月 백성들이 원망하는 구도 등 세 사람을 서인으로 삼다
十五年夏四月 최리의 낙랑을 정복하다
十五年冬十一月 왕자 호동이 자살하다
十五年冬十二月 왕자 해우를 태자로 삼다
二十年 낙랑을 멸망시키다
二十四年春三月 국내성에 우박이 내리다
二十四年秋七月 서리가 일찍 내려 곡식이 피해를 입다
二十四年秋八月 가을에 매화가 피다
二十七年冬十月 대무신왕이 붕어하다

8 참고항목

  1.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는 이 설을 채택하였다.
  2. 이 주석을 붙인 것이 당 고종의 태자로 측천무후 소생인 장회태자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