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왕사

1 개요

고구려의 역대 왕들에 대한 정보를 담은 문서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와 28명의 국왕을 가진 나라였다. 즉, 고구려 왕들의 평균 수명은 55세였으며, 평균 재위기간은 25년이었다. 참고로 이로부터 700여년 뒤의 왕조인 조선 왕조의 경우가 평균 47세, 평균 재위기간 19년인 걸 생각해보면 매우 놀라운 수명이다.

대다수의 왕들의 시호가 완전하게 전하지 않으며, 광개토대왕의 경우를 보건대 완전한 시호는 꽤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1] 광개토대왕의 경우에는 그나마 광개토대왕릉비가 남아 있어서 완전한 시호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흔히 왕이 묻힌 곳(장지명)으로 왕을 호칭하였다. 특히 그 가운데 광개토왕이 묻힌 '국강상'은 당시 수도이던 국내성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서에 나타나는 고국원왕의 '고국원', 고국양왕의 '고국양'과 같은 곳으로 보인다. 고국원왕의 또 다른 호칭이 바로 국강상왕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가 국내성에 도읍하던 당시에는 국내성 인근을 가리켜 국강(國崗)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평양으로 도읍이 이전한 뒤에는 옛 수도라는 의미에서 고국원(故國原)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2] 왕이 묻힌 곳으로 왕을 호칭하는 방식은 훗날 고려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표적으로 세종을 능의 이름을 따서 영릉(英陵)이라고 부른 것.

삼국 시대가 정복 국가 시대라서 고구려에도 정복 군주가 상당히 많았는데, 고구려의 대표적인 정복 군주로 대무신왕, 태조왕, 동천왕, 미천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이 있다. 이 중 한국 역사에서 꼽히는 대표적인 정복 군주가 바로 광개토대왕.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37년으로 보고 있고 남한 학계의 대다수는 이 설을 따르고 있다. 북한과 남한 소수 학설에서는 일부 고구려 왕력이 삭제되었다고 주장하며 고구려 건국 연도를 기원전 300년 근처로 보고 있다. 의 한 장수가 언급한 고구려 900년설을 따른 것. 그런데 사실 900년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일본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신뢰성 문제로 실제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태조왕 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3]

한편, 대부분의 고대 국가들이 그랬듯이, 왕위를 계승하는 형태에서 많은 변동이 일어났다. 대무신왕때부터 산상왕때까지는 형제간에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지만, 산상왕 때부터 점차 왕권이 강화되고 국가의 기틀이 안정됨에 따라 특별한 일이 없다면 대개 고구려의 왕위는 부자간에 계승되기 시작하였다.[4]

2 계보도

1. 추모
2. 유류 비류온조
도절해명3. 무휼여진4. 해색주재사백제/왕사
 호동5. 해우 6. 7. 수성8. 백고
 막덕막근추안9. 남무발기10. 연우계수
 11. 우위거
 12. 연불예물사구
 13. 약로달가일우소발
 14. 상부돌고
 15. 을불
 16. 사유
 17. 구부18. 이련
 19. 담덕
 20. 거련[5]
 조다승천
 21. 나운
 22. 흥안23. 보연
 24. 평성
 25. 양성
 26. 대원27. 건무태양
 환권28.보장
 복남임무덕남덕무안승

2.1 코마 씨

고구려 말기에 보장왕의 아들이라는 약광이 일본에 귀화하여 고려씨를 내려 받는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현무약광이라는 자가 고려약광과 동일인물이라면, 현무가 외척을 의미하기 때문에 약광이 왕족이 아니라는 설도 있기는 하다. 물론 현무라는 말을 반드시 외척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외척으로 해석할 경우 그렇게 볼수도 있다는것. 아무튼 이처럼 약광이 보장왕의 아들이거나 왕족이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고구려 왕실 인사에 대한 사료가 원체 부족해서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힘든 게 현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록에 남지 않으니... 그냥 왕이 된 사람들에 대한 기록만 남아있고,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다른 왕족이 언급되는 수준. 가령 태자 내정자였다가 요절한 조다라든가,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고구려를 갈아엎어버린 발기라든가...

3 연표

순서왕호시호재위기간비고
1대동명성왕(東明聖王)추모
주몽
BC 37년~BC 19년 9월 (18년)추모왕(鄒牟王), 추모성왕(鄒牟聖王), 동명왕(東明王)
2대유리명왕(瑠璃明王)고(해)유류
유리
BC 19년 9월~18년 10월 (37년)유리왕(瑠璃王), 유류명왕(孺留明王)
3대대무신왕(大武神王)고(해)무휼18년 10월~44년 10월 (26년)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 북국신왕(北國神王)
4대민중왕(閔中王)고(해)해색주44년 10월~48년 (4년)
5대모본왕(慕本王)고(해)해우48년~53년 11월 (5년)
6대태조대왕(太祖大王)53년 11월~146년[8]국조왕(國祖王) (93년)
7대차대왕(次大王)수성146년~165년 (19년)
8대신대왕(新大王)백고165년~179년 (14년)
9대고국천왕(故國川王)남무179년~197년 (18년)국양왕(國襄王)
10대산상왕(山上王)연우197년~227년 (30년)
11대동천왕(東川王)우위거227년~248년 (21년)동양왕(東襄王)
12대중천왕(中川王)연불248년~270년 (22년)중양왕(中壤王)
13대서천왕(西川王)약로270년~292년 (22년)서양왕(西壤王)
14대봉상왕(烽上王)상부292년~300년 (8년)치갈왕(雉葛王)
15대미천왕(美川王)을불300년~331년 (31년)호양왕(好壤王)
16대고국원왕(故國原王)사유331년~371년 (40년)국강상왕(國罡上王)
17대소수림왕(小獸林王)구부371년~384년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해미류왕(解味留王)
18대고국양왕(故國壤王)이련384년~391년국양왕(國壤王)
19대광개토왕(廣開土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담덕391년~412년 10월연호: 영락(永樂)
20대장수왕(長壽王)거련412년 10월~491년 12월[9]부련왕(夫連王)
21대문자명왕(文咨明王)나운491년 12월~519년명치호왕(明治好王)
22대안장왕(安臧王)흥안519년~531년
23대안원왕(安原王)보연531년~545년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 향강상왕(香岡上王), 안강상왕(安岡上王), 안악상왕(安岳上王)
24대양원왕(陽原王)평성545년~559년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양강왕(陽崗王)
25대평원왕(平原王)양성559년~590년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 평강왕(平崗王), 평국왕(平國王)
26대영양왕(嬰陽王)대원590년~618년평양왕(平陽王)
27대영류왕(榮留王)건무618년~642년
28대보장왕(寶臧王)보장642년~668년마지막 왕이라 시호가 없음.
29대(?)보덕왕(報德王)
안승왕(安勝王)
안승670년(674년[10]) ~ 684년부흥운동 때 추대.
보덕국왕 재위
고구려 자치정부(소고구려)-덕무왕(德武王)덕무755년 ~ ?안동도호
(安東都護)

4 고구려의 왕호

고구려 임금의 공식 칭호가 멀쩡하게 남아있는 용례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이 유일하다. 여기서 '국강상'은 임금이 묻힌 장지명으로, '광개토경 평안'은 임금의 공을 기리는 훈적형 왕호[11], 호태왕은 공식 존호나 시호 끝에 붙이는 ~신대왕, ~선제, ~명제 등과 같은 미칭으로 파악된다.

삼국사기일본서기에 전승되는 고구려 임금들의 여러가지의 이명들이 위에 언급된 양식의 일부가 파편적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는 단서가 된다. 다만 국초부터 제정되어 통용된 양식으로 보이지는 않고 일부 왕호는 당대에 쓰이지 않고 후대에 별칭으로 전해지거나 추봉된 왕호로 보이기도 한다.

4.1 휘형 왕호

말 그대로 휘, 이름 그대로 지칭한 왕호를 일컫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동명성왕을 추모성왕, 주몽왕 등으로 표기한 것이나 유리명왕을 유류왕, 대무신왕을 대주류왕 등으로 일컫은 것 등이 있다. 또한 마지막 임금인 보장왕 역시 나라가 망하고 존호가 전하지 않기에 이름으로 불린다.

4.2 장지형 왕호

임금이 묻힌 곳을 부르는 발상은 묘호나 능호와 비슷한데 건국시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가장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왕호 양식이다.

민중왕, 모본왕은 민중원, 모본원 등에서, 고국천왕,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등은 특정 하천에서, 소수림왕은 소수림에 묻힌 것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국강상성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부터 고구려 평원왕에 이르기까지 전해진 이명들 역시 대부분 묻힌 곳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4.3 훈적형 왕호

대무신, 광개토, 평안, 장수, 문자, 명치 등등 고구려 중기, 광개토왕 이래로 기록에 등장하는 왕호로 생애의 훈적(업적)을 기린 것으로 추정된다.

4.4 기타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경우나 평양왕, 무양왕, 대양왕[12] 등 역시 일정한 기준이 있었을 것으로는 보이지만 추정이 어려운 왕호들도 있다.

5 기타 정체불명의 왕들

  • 대흥왕 : 영양왕으로 추정
  • 손연전왕
  • 연나왕
  • 안유왕(安劉王)
  • 능기왕(能祁王)
  • 안악상왕(安岳上王) : 안원왕으로 추정
  • 구사기왕(久斯祁王)
  • 부련왕
  • 여안기왕
  • 일토복귀왕
  • 보륜왕(寶輪王)
  • 수모기왕(須牟祁王)

6 기타 왕족

  • 복귀군 : 일본 측 기록에만 나오는 인물로, 안장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게 사실이면 안장왕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 되는 셈.[13]
  • 고부려 : 복귀군의 아들.

7 여담

  • 삼국사기 상 태조왕의 재위기간과 생몰년이 매우 길다.(94년 재위, 119세) 또한 이후 왕인 차대왕, 신대왕 또한 '형제'로 기록되어 있으면서 지나치게 나이가 많다. 이는 후대의 기록조작일 가능성이 높다.
  • 세간에는 장수왕이 광개토왕의 독자인 것마냥 알려저 있지만 장수왕에게는 남동생이 있었다.
  • 시호가 투박하고 재미있는 왕들이 많다. 미천하게 살다가 왕위에 오른 미천왕, 땅을 넓혀서 광개토왕, 오래 살아서 장수왕. 영양왕 같은 경우는 대하사극 연개소문에서 영양'제'로 나와주시는 바람에 안그래도 웃긴 시호가 더 코믹. 잘보면 동, 중, 서천왕 시리즈도 꽤 웃기는 작명센스를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몇몇 왕의 경우는 장지명에 따라 시호가 지어져있기 때문이다. 숲(소수림)이 근처에 있으면 소수림왕, 중천의 들에 장사지냈으니 중천왕. 이런식으로 시호를 붙였다. 게다가 시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도 있는데, 광개토왕릉비에서 보이는 시호와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시호가 많이 차이난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14]
  • 보장왕이 연개소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고나서 그의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데 시호가 다름이 아니라 태양왕(....)

8 참고항목

  1. 이는 고려나 조선 시대의 왕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려 태조의 시호는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인데, 후대로 내려갈수록 후대 왕들이 두 글자씩 덧붙이거나 한 것. 이 긴 시호를 줄인 것이 신성왕(神聖王)/신성대왕이다. 아니면 묘호만 써서 태조라고 부르거나 왕이 묻힌 능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2. 羅神,「有關高句麗王號制度的幾點推測(고구려 왕호제도에 관한 몇 가지 견해)」,『고구려 광개토왕과 동아시아』, 한국고대사학회, 2012 참조.
  3. 현행 한국 국사 교과서는 대무신왕의 이름까지도 등장하기는 한다.
  4. 이렇게 왕위 계승 형태가 변동되는 과정에서 왕의 형제들이 왕위를 노리고 모반을 일으키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5. 삼국사기 문자명왕 원년조에 "종숙 승천"의 존재가 나온다. 문자명왕의 종숙은 조다의 사촌, 장수왕의 조카가 된다. 즉 광개토왕에게 다른 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6. 보장왕의 아들로 추정
  7. 현대인이다.
  8. 93년의 치세, 즉 탄생~사망의 실제 삶은 그보다 더 길다는 이야기(...)
  9. 79년 치세! 나이는 거의 98세.
  10. 보덕국왕
  11. 일각에서는 '"평안'" 부분을 임금의 휘, 본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2. 보장왕의 추존된 아버지
  13. 이라고는 하지만 왕이 되기에는 세력이 너무 미미해서(어머니 신분이 천했거나 혹은 정쟁 등으로 왕위 계승 자격을 잃었거나) 혹은 왕이 되기도 전에 요절해버려서 기록에 빠졌을 수도 있다. 조선 후기 족보에도 일찍 죽은 아들을 족보에 싣지 않은 사례가 많은데, 조선 후기 선산 출신의 무관이었던 노상추는 자신의 일기에 어린 아들 하나가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고 적은 기록이 있지만 정작 노상추의 집안인 선산 노씨 족보에는 그 아들의 이름은커녕 존재도 수록되지 않았다.
  14. 물론 이 차이라는 것도 한문 표기 방식의 차이라는 것일 뿐이고. 한 사람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다른 한자를 써서 적는 것은 고려 시대까지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