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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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커리 테일러 | ← | 밀러드 필모어 | → | 프랭클린 피어스 |
공식 초상화 | |
풀네임 | Millard Fillmore |
출신정당 | 휘그당 |
생몰년 | 1800년 1월 7일 - 1874년 3월 8일(74년 2개월 1일) |
재임기간 | 1850년 7월 9일 ~ 1853년 3월 4일(2년 7개월 가량) |
서명 |
전임자 테일러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1 생애
뉴욕 주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옷감 제작 기술을 배워 재단 견습을 했었다. 고졸 출신. 1819년부터 판사 월터 우드의 밑에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결혼 후에는 그에게서 떠나 변호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또한 멕시코와 전쟁이 터지자 그는 뉴욕 주 민병대에 입대하였다.
1828년 주의원으로 선출된 것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되었으며 그 후 하원의원으로 6년간 재직하다가 1844년 뉴욕 주지사에 도전했지만 패하였다. 대신 감사관이 되어 뉴욕의 금융 시스템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고 1848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를 내세우면 인구가 많은 뉴욕 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부통령이 되었는데 취임한지 1년여 만에 테일러 대통령이 사망한다. 그리하여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중요한 문제를 결정해야 했는데 1850년의 타협안과 도망 노예법이 그것이었다. 그는 테일러와 달리 노예제에 우호적이었고 그는 2가지 법안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도망 노예법 같은 경우 남부의 노예 소유주가 맘대로 남의 주에 들어와 노예를 다시 잡아갈 수 있게끔 한 법이었고 북부는 이에 대항해 이러한 노예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하는 법을 만드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이로인해 북부의 지지를 잃게 되어 재선을 위한 후보 지명에 실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그의 외교 정책은 기존과 달리 태평양, 특히 아시아에 치중되어 있었다. 매슈 페리 제독을 일본에 파견하여 [쿠로후네 사건으로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게 대표적이다. (다만 일본과의 조약은 후임자인 피어스 때 체결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하와이에 관심을 보이자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막아버렸다.
미국 국회의사당(캐피톨)을 지금의 모습에 가깝게 증축하도록 명령을 내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돔이 바로 그의 시대에 설계되었고, 이후 십수년의 세월을 걸쳐 완성되었다.
백악관을 떠난지 3년 뒤인 1856년 휘그당 내 개혁파들이 공화당으로 떠나버리고 남은 휘그당의 후보로 출마했지만 표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 선거에서도 패한 휘그당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짐에 따라 그는 마지막 휘그당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2 인물됨과 일화
장로교도인 아버지와 달리 그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유니테리언이었다고 한다.
버팔로 대학을 창립하는데 공헌한 인물이기도 하다.
1853년 첫 아내이자 대통령 시절 영부인 애비게일이 죽은 후 1858년에 부유한 과부와 재혼을 하게 되었는데 새로 얻은 집이 꽤나 넓어서 한동안 그 지역 사교계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첫 아내 애비게일은 자신을 가르쳤던 교사였다고 한다. 사제결혼을 이룬 케이스. 실제로 애비게일이 필모어보다 2살 많다. 말하자면 미국 대통령 계의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인셈?
남북전쟁 중에는 링컨을 지지했는데 이른바 '연방대륙군(Union Continentals)'를 조직하여 신병 모집과 전쟁물자 조달을 위한 자금운동모금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자 입장을 바꾸어 공화당과 링컨을 비판했고, 링컨 재선 때에는 그 상대 후보인 조지 매클랠런을 지지했다.
전반적으로 대통령 인기 순위에서는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이게 다 링컨 때문이다. 해리 트루먼은 그를 평하기를, "그는 페리 제독을 서부로 보내 일본을 개항시키는 위대한 일을 했지만 남북전쟁을 막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사실 트루먼은 피어스 항목에서도 보듯이 남북전쟁 직전 혼란기의 대통령들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