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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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 프란츠 크사퍼 빈터할터, 1852년 | ||
이름 |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 |
생몰년 | 1808년 4월 20일 ~ 1873년 1월 9일 (64세) | |
출생지 | 프랑스 제1제국 파리 | |
사망지 | 영국 켄트 치슬허스트 | |
재위 기간 | 프랑스의 대통령 | 1848년 12월 20일 ~ 1852년 12월 2일 (3년 348일) |
프랑스의 황제 | 1852년 12월 2일 ~ 1870년 9월 4일 (17년 280일) |
제국은 곧 평화다.[1]
1 개요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자 프랑스 제2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3세.
프랑스 역사상 첫 대통령[2]이자 마지막 황제(군주). 동시에 역사학자들의 평에 따르면 '최초의 근대적 독재자'. 그리고 보나파르티즘#의 충실한 계승자이자 사실상의 창시자.
2 가족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 루이가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와 결혼하여 얻은 아들로[3]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유전자 검사 결과 나폴레옹과 유전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4] 오르탕스가 바람피운 애인의 자식인 것이 확실해졌다.[5] 그리고 당시에도 나폴레옹 3세가 혼외자식이란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므로 누가 진짜 생부인지는 알 수 없다. 3세인 건 나폴레옹의 친아들이었던 로마 왕 나폴레옹 2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원이라고 굳게 믿었고 당시에는 유전자 검사도 없었으니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물론 이는 역사의 해석에서 달라진 게 없다는 거지[6] 정서적으로는 충분히 충격적이긴 하다.
3 정계진출
루이 필리프 1세 치하에서 몇 번 반란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체포되어 수감된 직후에 탈출해서 망명해 있었다. 그러다가 1848년 2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무너지고 제2공화정이 수립된다. 이때 갑툭튀한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주의의 계승자', '프랑스의 영광의 재현'을 내걸고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보통선거에서 70%가 넘는 지지율로 대통령이 된다.[7] 그의 대통령 임기 동안, 그의 정적들 대부분은 그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에 의지할 뿐인 얼간이 정도로 생각했기에 갈수록 황제같아지는 그의 언행에도 별 반발을 하지 않았다고.
4 프랑스 황제
헌법 개정을 통한 중임을 시도했으나 의원의 3/4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후 1850년 국민의회가 300만 명에 이르는 빈곤층 유권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병크를 일으켜 지지가 떨어지자 이들로부터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1851년 대통령 임기가 끝나가자 삼촌처럼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후 국민투표로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 그의 쿠데타는 친위 쿠데타의 전형이 된다.
강력한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펴 베트남 침공, 제2차 아편전쟁, 병인양요, 크림 전쟁, 이탈리아 통일 전쟁 등을 치뤘고, 1864년에는 멕시코에도 개입하여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 1세를 황제로 추대하여 친프랑스 멕시코 제국을 세우려 책동했다. 북아프리카-중동에서는 이집트에 적극 진출하고 남미에서는 안데스 산맥 일대를 통괄하는 친프랑스 국가를 세우려 하는 등의 확장책을 펼쳤으나 대부분의 경우 다른 열강들과의 갈등이나 황제 개인의 허영으로 인해, 대부분의 해외 원정에서 프랑스군이 크게 선전했음에도 결국 실리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는 사르데냐를 지원해 안시나 니스등의 사보이 지방의 영토를 획득했고,[8] 이게 그나마 제대로 된 대외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가 이때 뺏긴 영토때문에 어느 쪽에 붙을까 고민을 하게 만들기는 했다. 남북전쟁 때 목화 때문에 잠시 남부를 승인하는 듯이 행동했지만, 공식적으로 승인한 적은 없었다.
외교면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루이 나폴레옹은 큰아버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실패한 원인이 영국을 적대한 것이라고 보고 영국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서유럽의 양대 강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오랜 경쟁과 갈등이 없어질 수는 없었지만, 아편전쟁이나 크림 전쟁 등에서 그런대로 협조가 가능했고, 이것만으로도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베트남 등으로의 확장을 시도할 때도, 영국은 촉각을 곤두세우기는 했지만 강하게 제동을 걸지는 않았다. 다만 이는 이 당시의 프랑스의 확장이 영국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에도 집적거렸다는 말이 있는데 프랑스가 조선에 집적거린 일의 대표적 주자로 뽑히면 1846년 개항요구는 루이 필리프 1세 시절이다. 하지만 1866년의 병인양요는 그의 치세에 벌어진 일이 맞으니 조선을 탐내고 있었던 것이 맞긴 하다.
오히려 그의 치세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내치에 있는데, 밥빵값을 안정시켰고, 극빈층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한 복지 정책을 정비하여 위생시설을 갖춘 노동자주택 건설 등Shift을 실시했으며, 경제 진행 및 "파리 개조 사업"(파리 시가지의 가도망 정비) 등의 치적을 세웠다. 사실 이런 복지정책이 이르게 도입된 이유에는 프랑스가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낮은 인구성장률과 고령화국가의 특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훗날의 보불전쟁 이후의 프랑스군 안습 전설은 이런 인구구조에서도 비롯되었던 것.
그런데 파리 개조 사업은 단순하게 수도로서의 위엄을 높위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시민봉기가 일어났을 때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한 공간을 확보한다는 측면도 강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파리의 도로망은 상당히 좁아서 바리케이트가 일단 형성되면 해방구처럼 되어 진압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좋은 예가 레 미제라블에 나온다.) 실제로 훗날 파리 코뮌이 진압당할 때, 너무 넓은 주요 도로의 폭으로 인해 바리케이트의 방어력이 저하된 것이 큰 원인이라고. 예언 갑
비록 정적에 대한 탄압은 혹독했고, 언론의 자유 또한 억압되었지만 제정 중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내치 정책은 비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극빈층은 복지 때문에, 중산층은 그가 부풀린 사회주의의 위협 때문에 그를 지지했다.파시즘이 이렇게 등장했지 후반에는 야당이 정치적 우위를 보이자 입헌군주적 요소를 헌법에 도입해 이들을 달래기도 했다. 이런 입헌군주적 요소에는 1864년 결사의 자유 승인, 1868년 집회의 자유 인정, 의회의원 권리확대, 언론 자유화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단서가 너무 많았다.
해군의 전략적 지위를 인정하고 체계적인 해군증강계획을 세워 세계 최초의 철갑함과 증기추진 전함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건조 중인 것을 포함하여 전열함 51척(그 중 범주함 37척, 스크류함 14척), 프리깃함 82척(범주함 40척, 스크류함 23, 외륜함 19척), 코베트함 38척(범주함 18척, 증기함 20척)을 주력으로 하는 336척까지 도달했고, 이러한 막강한 함대를 바탕으로 프랑스는 18세기 이후 다시 한번 영국해군과 경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부르봉 왕조의 후계가 끊기자 발생한 스페인 왕위 계승문제에서 노련한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끌려다니는 외교로 프랑스의 국제적 고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여기에 멕시코 원정의 실패와 병환의 악화로 나폴레옹 3세는 1860년대 후반부터 입헌 군주로의 변혁을 꾀하고 권력을 하나둘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후 1870년 보불전쟁 전야에 이르르면 권력의 대부분이 황제의 손을 떠난 상태였고, 실권은 의회가 쥐고 있었다.
1870년 보불전쟁을 개전한 뒤, 프로이센의 몰트케 원수에게 패해 스당에서 굴욕적으로 포로가 되었다.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전선에 나아가 지휘했으나 군데군데 들리는 포성과 함성 소리, 병사들이 죽어가는 소리에 늙은 황제는 사색이 되었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보다 못한 측근들이 얼굴에 혈색이 돌게 보이게끔 립스틱으로 화장을 하라고 조언했다. 병든 황제는 전장에서 전사할 곳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항복했다. 그와 동시에 파리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포로황제는 폐위되었다.
패전과 함께 나폴레옹은 영국으로 망명, 방광 결석[9] 제거 수술을 받은 후 죽었다. 유해는 햄프셔 북동쪽 판버러(Farnborough)에 있는 세인트 미카엘 교회(St Michael's Abbey)에 안장되었다.
죽기 전에 주치의와 대화는 스당 전투[10]에서 자신은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내용일 정도로 사람들에게 겁쟁이로 매도당하는 걸 마음에 두고 죽었다.
나름대로 여러가지를 했고 큰아버지보다 두 배는 더 오래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1세에 비해 인지도가 매우 떨어진다. 지못미. 그가 죽자 공화국으로 돌아온 프랑스는 그에게 아첨하던 무수한 인물들을 숙청하거나 매장했는데 그중 한 인물이 바로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쏴죽인 조르주 당테스였다. 나폴레옹 3세를 지지하여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그의 폐위와 몰락 이후 숨어서 살며 20년 넘게 비참하게 살다가 83세인 1895년에 쓸쓸하게 죽었다.
5 평가
나폴레옹의 가장 큰 치욕은 워털루 전투 패배도 아니고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것도 아니다. 어릿광대가 그의 이름을 빌려 권좌에 오른 일이다.- 빅토르 위고, 나폴레옹 3세를 평하며
내정에서는 상당히 업적을 남겼지만 외정에서 대차게 말아먹었다. 지식은 많았으나 그리 지혜롭진 않았다. "독일어 같은 프랑스어, 프랑스어 같은 독일어, 이탈리아어 같은 영어, 영어 같은 이탈리아어를 구사했다"는 괴상한 말이 있다. 다만 인간적인 매력은 상당했던 것 같다. "인간 아편"이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로 사람을 끌어들이는데 능란했고, 호기심 또한 왕성해서 보나파르트주의를 내세워 제정을 다시 세운 주제에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다고.(...)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자신의 남편인) 앨버트 공 다음으로 매력적인 남자"라고 평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다만 지도자의 인간적인 매력은 곧 지도자의 사생활(…)로 연결되는 것인지, 색욕이 매우 왕성하여 나폴레옹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유럽을 전전하던 중에도 각지에 자신의 정부를 두고, 감옥에 유폐되었던 당시에도 리 백작 부인과 그 하녀에게 아이를 갖게 했으며 탈옥하여 런던으로 망명 중일 때에도 헨리에타 하워드라고 하는 여배우를 정부로 삼았었다. 그 결과 매독 크리…반대로 아내는 이집트 총독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국정 운영 능력은 썩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순수한 정치적 능력, 즉 인기를 확보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능력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하여 근현대 포퓰리즘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경우도 있다. 이를 두고 비꼬는 사람 중에는 그가 '가난한 자들에게는 부자의 재산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하고, 부자들에게는 가난뱅이들로부터 그들의 재산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지지를 얻어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또한, 카를 마르크스 같은 인물도 그가 국가주의자들에게는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약속하고, 부자들에게는 안전을 약속하고, 왕당파에게는 자신 역시 군주의 혈통임을 자랑하고, 노동자들에게는 공정한 분배를 약속하고 농민들에게는 안정적이고 평온한, 동시에 가부장적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를 약속함으로써 지지를 얻어냈다고 분석하면서 그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또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즉 다양한 욕망을 가진 집단들을 포괄한 지지층에게 (실제로 그 모든 약속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음에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믿게 만들 수 있었다는 것. 강렬한 카리스마와 대중적 호소력을 통해 실체없는 약속을 남발하고, 이로써 현실성 없는 기대와 추상적인 국가적 영광의 이미지를 통해 집권했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을 휩쓴 파시즘적 광풍의 효시로 평가받는 경우도 있다. 히틀러의 선배격.
그리고, 위에서 정적들이 그를 나폴레옹의 후광에 의존한 광대라고 평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당대의 지식인들에게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즉, 대중에게는 상당히 폭넓은 인기와 지지를 얻었던 데 비해 지식인이나 교양인들에게는 평가가 극히 나빴던 것. 당대 최고의 비평가(또는 아가리 파이터)였던 마르크스 같은 경우 '역사는 반복된다'는 헤겔의 담론을 인용하여 '역사는 반복된다. 단, 한 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무리의 병정들에 둘러싸여 있던 1804년의 꼬마 하사관 다음에는 한 무리의 부르주아지에게 둘러싸인 1851년의 콧수염쟁이.'라고 그를 조롱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 스타일을 파시즘의 효시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당대의 지식인들이 보인 이와 같은 태도는 선동가를 지나치게 경멸하고 진지하게 대응하지 않다가 근현대사 최대의 참극을 불러온 파시즘에 대한 경멸적이지만 미온적인 대처의 효시라고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내치에서는 제법 업적을 남겼는데, 물가를 안정시켰고 극빈층 복지 정책을 정비하여 위생 시설을 갖춘 노동자주택 건설 등의 정책을 실시했으며, 벨기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의 주요 유럽 국가와 자유 무역을 위한 관세 협정을 맺어 무역을 크게 증진시키기도 했다. 또한 "파리 개조 사업"(시가지 가도망 정비) 등의 치적을 세워 훗날 벨 에포크 시대에 세계인이 선망하는 '빛의 도시'로서의 파리의 기초를 닦았다. 큰아버지처럼 대제국을 건설해보겠다는, 능력 밖의 허영심만 안부리고 조용히 내치에만 주력했으면 적어도 큰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평가는 안받았을 테지만...
보통 큰아버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키가 작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나폴레옹의 키는 당대 평균보다 오히려 약간 컸고,진짜로 키가 작은 사람이 바로 루이 나폴레옹. 당시로서도 작은 키여서 160cm도 안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최근에 Lucotte 교수가 나폴레옹 1세와 3세의 유전자 검사를 시행했는데, 이 둘은 실제로는 아무 혈연 관계가 없었음이 확인되었다.
6 보나파르트의 후손들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
Napoléon Eugène Louis Jean Joseph Bonaparte
1856년 3월 16일 ~ 1879년 6월 1일
나폴레옹 3세의 유일한 아들인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는 황태자였으나, 보불전쟁으로 부친이 폐위당해 영국으로 망명하자 따라가서 영국군대에 자원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유제니 황후를 설득하여 안전할 것임을 보장한 다음에야 그는 줄루 전쟁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참관인 자격으로 정찰하던 도중 40명의 줄루족 전사들의 습격을 받아 맹렬하게 맞서싸웠지만 결국 다리와 어깨에 창을 맞고 쓰러졌고 후손을 남기지도 못하고 전사했다. 당시 줄루족의 전쟁 관례에 따라 그의 시신을 창으로 열여덟 군데나 찔러 심하게 훼손[11]했다. 그의 호위병들도 모두 죽거나 실종되었다. 그의 시신은 아버지가 묻힌 세인트 미카엘 교회에 안장되었다. 루이는 황제가 된 적이 없지만 보나파르티스트들이 그를 황제로 예우하여 나폴레옹 4세라고 호칭된다. 그런데 불과 50야드 떨어진 곳에서 영국군 클레이 중위와 그의 병사들은 황태자가 죽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고 후에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니 여왕과 황후의 중재로 풀려나지만 온 유럽 대중의 비난을 받아야 했고 결국 그는 불명예제대를 당한 후 인도로 떠나서 7년 후에 봄베이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줄루족은 자신들이 죽인 백인 장교가 보나파르트 황가의 후계자이자 명목상 프랑스의 황태자임을 알고 경악하여 알았다면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줄루족의 왕 랑갈레발레레가 불과 한달 후인 7월에 영국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영국은 명목상이지만 백인 황태자가 유색인종에게 살해되었단 사실에 분노하여 줄루 전쟁에 박차를 가해 결국 줄루랜드 전체를 식민지화했다.그냥 줄루랜드 식민화를 위한 포석이자 버리는 돌이었다
- ↑ L'empire, c'est la paix.
- ↑ 프랑스 제1공화국에서는 '대통령'직이 없었다. 아울러 프랑스 최연소 대통령이다.(40세에 취임)
- ↑ 오르탕스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가 전 남편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보나파르트 가에서 조제핀을 싫어했던 관계로 루이 보나파르트 역시 아내인 오르탕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다. 참고로 오르탕스가 남편과 별거한 후 애인이던 플라오 백작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모르니 백작으로 이부형의 집권에 큰 도움을 주었다.
- ↑ 나폴레옹과 그 후손들의 하플로그룹검사는 하플로그룹 I2a2였는데 루이 나폴레옹의 머리카락과 후손을 대상으로 한 하플로그룹 검사는 E1b1b이 나왔다고 한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이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남동생'의 아들이니까 하플로그룹이 동일하게 I2a2가 나와야 한다.
- ↑ 출처: http://www.eupedia.com/europe/Haplogroup_I2_Y-DNA.shtml
- ↑ 당시에는 혈통에 의심이 없었을 뿐더러, 나폴레옹 3세는 제위를 세습받은 게 아니다.
- ↑ 여기에 임시정부 기간 동안 공화주의자들의 삽질도 한몫해서 노동자들의 표도 루이 나폴레옹에게 쏠렸다고 한다.
- ↑ 그 전까진 사르데냐의 영토였다.
- ↑ 비둘기의 알과 비슷한 크기였다고 한다.
- ↑ 스당 요새에서 황제 본인이 사로잡혀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패하는 결정타가 되었다.
- ↑ 죽은 자가 이승에 미련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