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스팅스 전투

헤이스팅스 전투 (The Battle of Hastings)
날짜
1066년 10월 14일
장소
잉글랜드 동 서식스의 헤이스팅스 북서쪽 11 km 지역
(현재의 배틀(Battle) 마을 )
교전세력 1교전세력 2
교전국노르망디 공국(노르만 족)잉글랜드(앵글로색슨 족)
지휘관윌리엄 1세
윌리엄 피츠오스번
유스타스 2세
해럴드 고드윈슨
거스 고드윈슨
러프와인 고드윈슨
병력7,000~12,000명 추정약 5,000~13,000명 추정
피해 규모불명불명
결과
사실상 노르만 정복의 성공
기타
윌리엄 1세의 영국왕 즉위 - 노르만 왕조의 시작

1 개요

1066년 10월 14일에 잉글랜드의 헤이스팅스에서 벌어졌던 영국의 역사적 전투.

프랑스 계열의 노르만 족 군대를 이끄는 윌리엄 1세앵글로색슨의 왕 해럴드 2세가 맞붙은 전투다. 전투는 런던 동남부에서 85 km 떨어진 헤이스팅스의 근방에서 벌어졌으며, 병력 규모는 노르만군이 7,000에서 12,000명, 앵글로색슨계 잉글랜드군이 5,000에서 13,000명으로 추정된다.

전투 결과는 윌리엄의 승리로 끝났다. 잉글랜드의 해럴드 2세는 전투가 끝나갈 쯤에 죽었고, 해럴드가 이끌던 잉글랜드군은 패했다. 승자인 윌리엄은 1066년에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였으며 이는 노르만 왕조의 시작이 되었다. 윌리엄은 후대에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으로 불리게 된다.

헤이스팅스 전투는 윌리엄이 영국 정복에 사실상 성공했음을 뜻하는 전투로서 영국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2 배경

윌리엄이 이끌던 군대는 잉글랜드 내의 병력이 아니라 프랑스노르망디에 있던 병력이다. 바다 건너 프랑스의 군대가 영국으로 진격한 데에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관련되어 있다.

전투로부터 150여년 전인 911년에 프랑스 카롤링거 왕조의 "단순왕" 샤를 3세는 노르망디에 바이킹들이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고, 그 후 노르만 족, 즉 바이킹의 후예들은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노르망디의 서쪽 먼 곳에는 영국이 있다.

아울러,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에드워드 왕 또한 노르망디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노르망디에서 오랜 추방 생활을 보냈던 경험이 있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노르망디에도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심지어 에드워드가 당시 노르망디의 공작이었던 윌리엄에게 왕위를 물려받으라고 부추겼을 가능성도 있다. 에드워드는 자식이 없었기에 자신이 죽고 나면 왕위는 다른 가문으로 넘겨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에드워드는 당시 매우 유력한 가문이었던 고드윈슨 가와 원수라이벌 관계였기에 그들에게 왕위가 넘어가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을 바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노르만 족은 잉글랜드의 정치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3 왕좌의 게임

이런 상황에서, 1066년 1월, 에드워드 왕은 자식이 없는 채로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에드워드 왕은 일부러 자식을 갖지 않았던 것이라 한다. 아내 쪽 가문이 매우 야심찬 가문이었는데, 아내에게 자식이 생기면 아내 쪽 세력이 더 힘을 얻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라 한다.[1]

자식이 없는 채로 왕은 죽었고, 누가 왕위를 이을지 모호해진 상태. 야심에 찬 인물들이 저마다 자신이 승계자임을 주장했다. 이 왕위쟁탈 경쟁에 뛰어든 선수들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 해럴드 고드윈슨 (Harold Godwinson, 해럴드 2세) - 웨식스백작(Earl of Wessex)이자, 에드워드 왕의 라이벌인 고드윈의 아들. 가장 세력이 강했고, 가장 부자였다.
  • 하랄 3세 (Harald III) - 이름은 하랄 하르드라다(Harald Hardrada).[2] 노르웨이의 왕인데, 덴마크 왕 자리를 넘본 적이 있고 이제는 잉글랜드 왕도 넘보는 야심찬 인물. 노르웨이 왕이 되기 전에 15년 간을 추방되어 지냈다. 추방 생활 당시 직업은 용병.
  • 윌리엄 1세 - 노르만 공국공작. 노르망디 태생이다. 교포

먼저, 가장 부자이면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웨식스의 백작 해럴드 고드윈슨이 요크 대주교를 동원해 잽싸게 왕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고분고분 인정할 경쟁자들이 아니었다. 당시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예전에 에드워드 왕이 나에게 왕 자리 준다고 약속했음. 님도 그때 동의하지 않았음?"이라고 딴지를 걸었다. 노르웨이의 왕 하랄 3세도 "이거, 나의 선왕하고 잉글랜드의 하레크누드 왕이 이미 합의본 것임. 자식 없이 죽게 되면 서로의 자식을 데려다가 왕 시켜주기로 했음. 그러니까 왕은 나임."이라며 왕위를 주장했다. 문제는, 두 양반 모두 말로만 주장할 성격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4 헤럴드 VS 하랄 3세

해럴드에게는 토스티그 고드윈슨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자신의 자리를 안 내놓으려고 에드워드 왕을 귀찮게 하다가 플랜더스로 추방당해 있었다. 추방 과정에서 토스티그는 에드워드 왕의 심복이었던 형 해럴드와 싸워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고, 형에 대한 복수를 꿈꾸게 되었다. 에드워드 왕이 죽은 지 얼마 뒤인 1066년 초, 토스티그는 마침내 플랜더스에서 모집한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동남부를 침략했다. 그러나 해럴드 형제들은 힘을 합쳐 왕따 토스티그를 물리쳤고, 패배한 토스티그는 스코틀랜드로 튀었다. 토스티그는 그곳에서 재기를 노리던 중, 하랄 3세를 만나 잉글랜드 침공을 하도록 꼬드기는데 성공한다. 그 해 9월 18일, 하랄 3세는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토스티그의 지원을 업은 하랄 3세는 해럴드의 형제들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물리치고 요크 시에 진격하였고, 9월 20일, 도시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그해 여름, 해럴드는 윌리엄 1세의 침략에 대비하며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해럴드의 군대는 농민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을 추수철이 다가오자 군대를 해산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 때가 9월 8일. 하랄 왕의 노르웨이 군대가 북부를 침략했다는 소식을 들은 해럴드는 병력을 모집해가며 부랴부랴 북진하여 기습 공격을 가했다. 9월 25일에 벌어진 스탬포드 다리???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노르웨이군을 박살내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하랄드 왕과 토스티그까지 사망했으니 노르웨이의 완벽한 패배였다. 하지만 해럴드 측 병력 또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어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태가 되었다. 바다 건너의 윌리엄은 공짜로 큰 이득을 보게 된 셈이었다.

5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공

윌리엄은 거의 9개월 전부터 병력을 준비하고 있었다. 노르망디브르타뉴, 플랑드르 지역에서 대규모 병력을 일으켰는데, 그 목적은 당연히 잉글랜드 침공이었다. 윌리엄은 외교적으로도 협조를 구했고, 교황의 지지를 얻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때마침 핼리 혜성이 지나간 것을 가지고 잉글랜드 왕위 계승에 문제가 있다는 징조라고 언플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윌리엄은 8월초에 병력 집결을 마쳤으나 날씨가 안 좋아서인지 아니면 잉글랜드 해군이 무서워서인지 출발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해럴드가 노르웨이 군대를 이긴지 며칠 후인 9월 28일, 해럴드의 해군 병력이 흩어진 틈을 타서 마침내 영국 해협을 건넜다. 길을 잃은 몇 척을 빼고 윌리엄의 함대 대부분이 무사히 잉글랜드 남부 서식스의 페번시(Pevensey)에 상륙했고[3], 인근의 헤이스팅스에 목제 성을 쌓아 주변 침공을 위한 기지로 삼았다. 상륙한 군대의 정확한 병력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당대의 기록에는 1만 4천에서 15만까지의 다양한 수치가 적혀 있지만, 모두 과장된 수치로 보인다. 현대 역사가들은 7,000~12,000 명의 선에서 여러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하랄 3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해럴드는 많은 수의 병력을 북쪽에 남겨둔 채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는 윌리엄군에 맞서기 위한 이동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해럴드가 침공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이미 이동을 시작한 후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해럴드는 하루에 43km를 진군하는 빠른 속도로 약 320km를 남하했고, 런던에서 1주일을 머문 후 다시 이동하여 10월 13일에 헤이스팅스의 윌리엄 측 근거지에서 13km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이런 빠른 진군의 이유 중 하나는 윌리엄의 군대가 상륙을 완료하여 교두보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해럴드는 윌리엄 측에 기습 공격을 가할 계획이었으나 상대방 척후병이 이미 알아차렸고, 윌리엄은 성으로부터 나와서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적 방향으로 이동했다. 해럴드는 10월13일 저녁, 윌리엄의 성으로부터 9.7 km 떨어진 센락 힐이라는 곳에 방어진을 쳤다. 이들 잉글랜드군의 병력 수 또한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현대 역사가들은 5,000에서 13,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기병이 일부 있었던 노르만군과는 달리 잉글랜드군은 전부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4] 잉글랜드군의 핵심 병력은 하우스칼이라 불리는 전업 군인이었다. 이들은 방패는 물론 호버크(hauberk)라 불리는 사슬갑옷에 원뿔형 투구까지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주무기는 전투용 도끼(배틀액스). 나머지 병력들은 일반인 징집병(fyrd)으로서 생업에 종사하다가 징집되어 온 병사들이었다.

6 헤이스팅스 전투

전투가 벌어진 곳은 헤이스팅스 북쪽 11km 지점이며, 이 일대에서 양측은 서로 다른 형태로 진영을 구성한다. 현재에는 일대의 두 언덕 사이 그곳에 마을이 들어서 있는데 이름이 "배틀(Battle)"이다. 당시 전투에 대한 기록들이 서로 엇갈리기 때문에 전황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아침 9시에 시작된 전투는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을 때까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6.1 병력 배치

잉글랜드군의 배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현대 역사가들의 대부분은 잉글랜드군이 언덕 위에 좁은 범위에서 밀집된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잉글랜드군은 옆 사람과 방패를 맞닿도록 하여 이른바 방패의 벽(shield wall)을 치고 있었다.

노르만군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사항이 알려져 있다. 노르만군은 출신 지역에 따라 세 그룹으로 군대를 나누어 배치했다. 왼쪽에 프랑스의 브르통족, 중앙에 노르만족, 오른쪽에 프랑스와 플랜더스 출신이 배치되었다. 맨 앞에 궁수들이 위치했고, 을 든 보병들이 그 뒤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기병은 예비대의 임무를 수행했다.


병력 배치 형태. 위쪽 붉은 선이 잉글랜드, 아래쪽 파란 선이 노르망디 공국군.

병력의 배치를 살펴보면, 아마도 먼저 궁수들이 을 쏘아 적을 약화시킨 후 곧이어 보병이 진격하여 근접전을 벌이게끔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으로써 보병이 잉글랜드 측 전열에 돌파구를 내고, 그곳으로 기병들이 침투하여 잉글랜드군의 전열을 무너뜨린 다음,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측은 진영을 갖췄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6.2 전투

10월 14일 아침, 노르만군의 궁수들이 잉글랜드의 방패 벽에 화살을 날리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언덕 위쪽에서 방패로 방어하고 있던 잉글랜드군에게는 화살 공격이 별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잉글랜드군에는 궁수가 별로 없었기에 노르만 궁수는 더더욱 힘을 쓰지 못했다. 적이 쏜 화살을 주워다 쏠 수 없었기 때문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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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만군은 궁수의 공격 후에 창병을 전진시켰다. 그랬더니 화살은 물론이고 투창, 도끼, 돌 등 온갖 것들이 노르만 창병에게 쏟아졌다. 게다가 잉글랜드 보병들은 방패를 옆사람과 나란히 맞대고 버티며 말 그대로 방패의 벽을 이루고 있었다. 노르만 보병은 이러한 잉글랜드 군의 방패벽을 뚫을 수 없었고, 대기하던 기병은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적을 향해 돌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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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벽으로 돌진하는 노르만 기병의 묘사한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일부분.

하지만 기병 또한 돌파에 실패했고, 기가 꺾인 노르만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윌리엄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여 노르만군은 더 심한 혼란에 빠졌다. 신이 난 잉글랜드군은 도망치는 노르만군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이대로 노르만군이 털리려는 순간…

6.3 절정

죽었다던 윌리엄이 햇살을 가르며 등장한 간달프 마냥 노르만군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윌리엄은 고함을 지르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과시했으며, 노르만군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에 다시 맞서 싸웠다. 양측의 치열한 싸움은 계속되었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잠시 소강 상태가 있었다. 아마 양측 모두 휴식과 식사를 위한 휴전이 필요했을 것이다. 특히 윌리엄 측에서는 새 낚시전략을 검토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잉글랜드군이 낚여서 털리는 것을 뻔히 봤기 때문이다. 오후 전투에서 실제로 거짓 후퇴 전략이 두번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거짓 후퇴가 전열을 흐트러뜨리지는 못했겠지만 잉글랜드의 방패 벽을 치고 있던 병사의 수를 줄이는 성과는 있었을 것이다.


오후의 전투 역시 치열하게 이어졌다. 궁수들은 다시 화살을 날리고, 양측 기병과 보병은 여러 차례 다양한 방식으로 공격을 가했다. 전투 중에 윌리엄이 타고 있던 이 두마리, 일설에 의하면 세마리나 죽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이렇듯 양측은 열심히 치고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가 전사했다! 당대 기록에는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엇갈리므로 명확한 사실은 알 길이 없다. 해럴드가 한쪽 눈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이 쪽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를 뒷받침하는 권위있는 기록은 없으므로 확정하기 어렵다. 반대로 아미앵의 주교였던 기(Guy)가 저술한 Carmen de Hastingae Proelio(이 전투를 기록한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에서는 윌리엄을 포함해서 적어도 네 명 이상의 기사가 해럴드를 둘러싸고 잔인하게 난도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피스트리에 해럴드의 전사를 묘사한 그림이 전해지고는 있으나, 여기에는 눈에 화살을 맞은 사람과 기사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직접 보자. 하여간 해럴드는 죽었고, 잉글랜드군은 지휘관을 잃었다. 지휘관을 잃은 잉글랜드군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소수의 가신들이 시신 근처에 모여 끝까지 싸웠으나 이미 전황은 기울었다. 잉글랜드 측의 병력 다수가 도망쳤고 노르만군은 도망치는 병력들을 추격하여 섬멸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전투는 실질적으로 끝난 것과 다름 없었다. 노르만군 승, 잉글랜드 패.

해럴드의 시체는 전투 다음날 발견되었다. 윌리엄은 그 시체를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했으나, 시신이 진짜로 던져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7 잉글랜드의 패인

왜 홈그라운드 이점, 그리고 방어 측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가 졌을까?

잉글랜드 측이 충분한 수의 병력을 모으지 않고 서둘러 진격해서 졌다는 의견이 있으나, 과연 수가 모자랐는지는 확실치 않다. 국내 인터넷 상에서는 해럴드의 군대가 무기나 훈련이 부족한 상태였다는 내용이 보이나 그에 대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불과 한달 전에 강적인 하랄 3세의 침략군을 물리친 군대이니 최소한 훈련이 부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잉글랜드군이 영국 북부에서 하랄이랑 큰 싸움을 치르고 다시 영국 남부의 헤이스팅스까지의 긴 행군에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하루 온종일 박터지게 싸웠던 것으로 보아 잉글랜드 병력이 지쳐 있었던 것도 잉글랜드군의 전력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윌리엄은 더 경험이 많은 지휘관이었고 노르만군에는 강력한 기병이 있어서 다양한 전술을 펼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 밖에 잉글랜드군이 윌리엄이 죽었다는 헛소문을 듣고 노르만군을 추격하러 가다가 전열의 측면을 노출시켰고, 그곳을 공격받게 된 것이 패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상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원인은 해럴드의 죽음이었다. 리더를 잃은 군대는 순식간에 와해되기 마련이다. 특히 중세 시대에 왕위계승의 이유로 벌여진 영지 전투는 당사자가 죽거나 붙잡히면 병사들 입장에선 싸울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

8 헤이스팅스 전투 그 후

윌리엄은 살아남은 잉글랜드 지배층이 당연히 자신에게 항복해 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잉글랜드 정복이 그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았다. 캔터베리 대주교를 비롯한 지배층은 재빨리 웨식스의 왕족 에드가 애설링을 새 왕으로 내세우며 저항을 계속했다. 윌리엄은 런던으로 진격해서 잉글랜드 저항 세력을 진압해야 했다. 그는 몇 차례의 교전 끝에 2달 후 버크햄스티드(Berkhamsted)에서 에드가 애설링(Edgar Aetheling)을 복속시킴으로써 잉글랜드의 왕위를 쟁취강탈해냈으며, 1066년 12월 25일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 때 항복한 건 지배층 뿐이었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나도록 지방에서는 크고 작은 저항이 이어졌다.

그 이후에도 꾸준히 현지의 앵글로색슨 영주(Earl)들과의 기나긴 전쟁을 벌여야만 했었다. 현지의 앵글로색슨 영주들은 끊임없이 반란에 반란을 벌이며 정복자 윌리엄의 지배에 저항했고, 윌리엄은 그러한 현지 영주들의 저항을 뿌리뽑기 위해 현지의 앵글로색슨 영주들의 작위와 영토를 몰수하고 윌리엄에게 충성하는 노르만 영주들과 항복한 앵글로색슨 귀족들에게 새롭게 땅을 분배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러한 정복자 윌리엄과 앵글로색슨 충성파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의 가장 유명한 사건은 1069-1070년간 잉글랜드 북부를 휩쓴 '북부 대학살(Harrying of the North)'이다.

특히 1069년에는 노섬브리아의 반란, 덴마크족의 노략질, 잉글랜드 남부와 서부의 반란 등 윌리엄에 대한 저항이 잦았다. 이에 대한 윌리엄 1세의 대응은 닥치고 진압, 진압, 진압, 그것도 초강경 진압. 워낙 잔인하게 찍어눌렀기에 진압이라기보다는 보복에 가까웠을 정도다. 진압이 절정에 달했던 1069년 말부터 1070년 초에 걸쳐 잉글랜드 북부를 아주 그냥 밟아 버렸다. 저항군은 물론이고 무고한 주민들도 닥치는 대로 죽여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진군할 때는 길 양 옆의 밭을 엎어버리고, 마을에 도착하면 집과 곡식, 심지어 농기구들까지 싹 다 불태워버리는 행패를 저질렀다. 막대한 수의 백성들이 살 곳과 먹을 것을 동시에 잃어버렸고, 이로 인해 10만명 이상이 굶어죽었다고 전해진다.

윌리엄은 1067년 초, 막 잉글랜드 왕국의 통치를 시작했을 무렵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앵글로색슨 귀족 콥시(Copsi)라는 인물을 새로운 노섬브리아 영주(Earl of Northumbria)로 임명하며 잉글랜드의 북부를 통치하도록 파견했다. 하지만 콥시는 노섬브리아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않아 오슬프(Osulf)라는 현지 귀족에게 살해당한 후 노섬브리아 영주직을 찬탈당했고(...) 이 오슬프라는 귀족은 다시 사촌 코스패트릭(Cospatrick)에게 살해당한 후 다시 영주직을 찬탈당했다(...). 그리고 이 코스패트릭이란 인물은 1068년에 다른 앵글로색슨 귀족들과 힘을 합쳐 윌리엄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즉, 노섬브리아 통치하라고 충성스러운 애 하나 보내뒀더니 현지의 웬 귀족한테 살해당한 다음 작위를 찬탈당했는데 이놈도 다시 사촌한테 살해+찬탈당하고 이 사촌은 노섬브리아를 기반으로 윌리엄에게 반란을 일으킨거다. 그것도 불과 1년만에(...). 윌리엄은 '느금마 가죽장이 ㅇㅇ'라는 말만 듣고도 빡돌아서(...) 대항하던 요새를 사람 한명 남기지 않고 깨끗이 청소해버린 인물인데(요새 수비병을 모두 산채로 가죽을 벗겼다는 말도 있다), 이 개판 오브 개판을 보고도 빡돌지 않으면 윌리엄이 아니다. 윌리엄은 1068년에 대군을 이끌고 북부의 심장부인 요크로 진격해 반란군을 모조리 쓸어버렸고, 이번엔 노르만 영주 로버트(Robert)를 새로운 노섬브리아 영주로 놓았다. 그런데, 아마 이쯤되면 뒷일이 쉽게 예상이 되겠지만, 이 로버트도 현지민들의 저항을 맞이해 죽었다(...). 그것도 요크에 들어간 바로 그날 하루만에(...).

그런데 앵글로색슨 저항군은 막장폭주가 이정도나 됐는데도 부족하다고 여겼나보다(...). 앵글로색슨 저항군의 구심점인 에드가 애설링(저 위에 복속됐다고 나온 그 에드가 애설링 맞다. 윌리엄한테 잡혀있다가 기회를 포착하고 북부로 도망쳤다)은 덴마크 왕 스벤 2세에게 도와달라 부탁했고 스벤 2세는 함대와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이 저항군 놈들이 요리조리 발버둥 치다보니 이번엔 정말 위험한 군대를 잉글랜드로 불러온 것이다. 그런데 스벤 2세는 윌리엄의 군대가 만만찮다는 것을 보자마자 윌리엄한테 돈 좀 받고 본토로 돌아갔다(...). 이 자식들 보통이 아니야 결국 저항군은 윌리엄 성깔을 아주 지대로 긁어놓긴 했는데, 정작 윌리엄과 싸울만한 군대는 하나도 가지지 못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윌리엄 성깔 + 윌리엄 군대 + 정치적 필요성 + 스벤 2세 군대 ㅌㅌ = 대학살(...). 윌리엄은 북부가 초토화될 때까지 군대를 이끌고 다니며 마을과 농지를 잔뜩 불태웠고 기회를 포착한 국경 너머의 픽트족도 옳커니 하고 끼어들어서 같이 약탈을 벌였다(...). 그 결과 북부는 거의 완전히 초토화됐고, 1080년에 한번 더 불태운 결과 북부는 사실상 앵글로색슨들이 대다수 죽어나간 공터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앵글로색슨들이 죽어나가면서 만들어진 공터에 노르만 정착자들이 새롭게 도착해서 사회의 상류층을 장악하고 통제함으로서 앵글로색슨 저항의 심장부이던 북부는 더 이상 봉기할 수 없었다.

한편 이런 참상에도 아랑곳 없이 잉글랜드를 철저하게 벗겨먹기 위해 당시에 만들었던 토지대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둠스데이 북(Domesday Book).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저항들을 차례차례 진압하고 결국 잉글랜드 정복에 성공하였다. 이는 노르만 정복이라 불리며, 당시 영국의 정치, 사회, 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6] 윌리엄 1세를 정복왕 윌리엄이라 부르는 것도 이 노르만 정복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후 윌리엄의 정복을 기념하여 헤이스팅스 전투를 포함한 잉글랜드 정복과정을 묘사한 그림을 직물 형태로 만든 인증샷 작품이 만들어졌고, 노르망디 바이외에 있는 한 성당에 봉헌되었다. 이것이 현재까지 남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전해지는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다.[7] 현재 남아있는 부분만 해도 70m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이고, 중세 당시의 풍속이나 무장을 고증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었다.
  1. 하지만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어차피 아내에게서 자식을 얻지 않으면 생판 남에게 왕조가 넘어간다. 그냥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2. 정식 명칭은 하랄 시구르드손(Sigurdsson)이고 하르드라다는 폭군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 실제로 노르웨이인들이 그 덴마크의 강압통치를 그리워할 정도로 가혹한 통치를 했다.
  3.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윌리엄이 배에서 내리다 발을 헛디뎌 얼굴을 처박고 넘어지자(...) 병사들이 불길한 징조라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러자 윌리엄은 넘어지면서 움켜쥔 해변가 흙을 들어올리며 "보아라! 나는 이미 해럴드의 땅을 손에 쥐었도다!"라 외쳐서 사기를 다시 높였다고 한다.
  4. 토머스 애스브리지에 따르면 1066년 당시까지도 잉글랜드군은 마상전에 익숙하지 않아서 헤이스팅스 전투 때는 말을 타고 왔던 앵글로색슨 병사들이 하마하여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잉글랜드군은 말이 없어서 기병을 운용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마상 전투에 익숙한 기사 계급이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5. 초반의 전략 자체는 확실히 노르만군의 오판이었다는 평이 있다. 해럴드는 웨일즈의 왕 그뤼피드(Gruffydd ap Llywelyn)를 박살내면서 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는데, 이 웨일즈 지역은 악명높은 잉글랜드 장궁병의 원조들이 드글대는 곳이었다. 궁병들과의 전투에 이골이 난 지휘관에게 그보다 못한 궁병으로 들이댔으니(...).
  6. 로마의 정복 이후로 반쯤은 유럽과 분리되었던 영국의 역사를 '유럽사'의 한 분류로 끌어들였다는 평가가 있다.
  7. 여기에 그 유명한 핼리 혜성이 그려져 있다. 연초에 혜성이 지나갔는데 그 후에 결과를 보고 "왕이 바뀔 징조"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