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슬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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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세기 말 서유럽 기사의 무장

    1 개요

    철사 따위로 만든 고리를 엮은 사슬 형태의 갑옷이다. 한국어번역하면 사슬 갑옷, 쇄자갑 등이 있다. 옛날부터 여러 나라에서 오랫동안 사용한 대표적인 철제 갑옷이다.[1]

    2 어원

    현대는 '체인 메일'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이나, 사실 'chain-mail'은 대략 1700년대 경에 고안된 신조어이며 역전앞, 족발처럼 동어반복이다. 'mail' 자체가 사슬로 만든 갑옷이라서 그냥 'mail'이 맞다. 영어에서 mail은 무조건 사슬 갑옷이나 그 친척이다.

    영어의 mail은 라틴어 macula가 이탈리아어 maglia를 거쳐 불어 maille로 변화한 것이 영어로 건너와서 mail, mayle, 또는 그냥 chain으로 불리기게 된 것인데, 로마시대에는 이 갑옷을 macula라고 불렀고, 노르만 인들은 그물(net)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his war-net, woven by cunning of smith" 같은 식이 된다. 즉 역사적으로는 chain-mail이라고 사용한 적이 없다.

    현대의 역사학자나 도검갑주의 연구가들은 영어 단어 'mail' 보다는 프랑스어 단어 'maille'을 더 애용하는데, 그 이유는 mail의 동음이의어(편지)가 워낙에 유명하기 때문. 영어권에서 평범한 일반인에게 mail이라고 하면 사슬갑옷이 아니라 편지를 먼저 떠올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 chain mail이라고 써도 행운의 편지(=chain mail, chain letter)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왈도체에서도 Elven Chain mail을 열 한개의 사슬 편지라고 오역한 것을 생각하면 답이 나오는 문제.

    그리고 Armour는 갑옷 전체의 통칭이다, 보통은 메일이 아닌 것에 대해, 대개는 판금 계열을 가리킬때 쓴다. 대한민국에서는 판금 갑옷을 플레이트(plate)라고 부르며 plate라는 표현에 더 비중을 두는 일이 많으나, 영어권에서는 그냥 armour라고 하는게 보통이고 아머라는 단어에 더욱 큰 비중을 둔다. 그리고 둘이 뒤섞인 플레이트 메일은 두 종류의 갑옷을 혼용한 과도기 갑옷이다.

    3 역사

    아시아와 유럽의 인간 모두 사슬 갑옷을 썼다. 사슬 갑옷을 고안한 시기는 동방이 유럽보다 앞서는 것으로 추정되나, 유럽 쪽에서는 BC 4세기 경 켈트 족장의 무덤에서 충분한 강도와 성능을 지닌 사슬갑옷을 만들어서 썼음이 확인되었으므로 동방에서 서방으로 전파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동방과 관련 없이 켈트족이 독자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 유럽에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3.1 유럽

    유럽의 갑옷은 크게 그리스로마 제국의 소위 '전통적인' 청동로 만든 갑옷과, 로마의 적인 '야만족'이 만든 가죽과 사슬로 만든 것으로 나뉜다.

    유럽 문화의 기초인 그리스와 로마에서 발달시킨 형태의 갑옷들은 중세 유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후대 르네상스 등에서 로마시대 갑주의 형태를 모방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 제조기술과 형태가 그대로 전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로마의 적들이 사용하던 사슬 갑옷이 그리스와 로마의 것을 누르고 그대로 이어져 중세를 평정했다.

    일단 현재 유물 중에서는 BC 5세기 스키타이 족의 사슬 갑옷이 제일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에서도 사슬이 사용되었다고 추정할만한 사료가 약간 있으며, 이집트 파라오의 복장 그림에서도 사슬 비슷한 것이 보이고, 사르마티아인과 페키니아 인들도 썼을 가능성이 있지만 명확한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확실한 건 사슬갑옷은 철기시대 이후 등장한 갑옷이기 때문에 이집트 19왕조 이전 왕조 군대처럼 청동시시대 군대는 사슬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청동과 철의 재질의 차이 때문인데 청동을 사슬 형태 갑옷으로 만들면 청동의 연성 때문에 사슬이 휘어지거나 뚝뚝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슬이 쉽게 끊어지지 않으려면 사슬을 당연히 철 같은 튼튼한 금속 재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 청동 재질 갑옷은 대부분 판금 형태거나 청동판을 가죽에 덧댄 형태[2]다. 당연히 사슬갑옷은 철기시대 이후 등장한 갑옷이며 청동기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누비아 왕조 이후라면 모를까 그 이전 이집트 왕조의 파라오가 사슬갑옷을 입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로마인은 BC 1세기 경 현재의 북부 이탈리아 지방에서 골(Gaul) 족과의 전투 뒤부터 이 갑옷을 쓰기 시작했다. 쓸만한 거라면 뭐든지 받아들이던 로마의 전통대로 골 족의 사슬갑옷을 받아들여 로리카 하마타(lorica hamata)라는 형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로라카 하마타 시절부터 이미 리벳링을 사용했었고, 내경 5mm에 외경 7mm의 청동이나 철제 규격 링을 3만개 정도 사용해서 한벌을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전파된 사슬갑옷이 13세기까지 계속 유럽에서 사용되었다. 사실 4세기 경의 고트족이 사용하던 것이나 12세기 십자군들이 사용하던 것이나 그 기초적인 것은 같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세부에 있어서는 시대 별로 변화가 분명히 있었다.

    3.2 아시아

    철판을 잘게 잘라 끈으로 엮은 찰갑이 영상물로 자주 나와 사슬갑옷은 잘 쓰이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쇄자갑(鎖子甲)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전기에도 백성들이 군역에 소집될 때 갖추어야 할 갑옷으로 쇄자갑이 있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잘 쓰이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지만, 중국에서는 서역과의 전쟁에서 이를 충분히 체험했고 전진왕 부견이 서역원정을 나섰을 때의 기록으로는 구원에 나선 서역의 회호국 병사들은 사슬갑옷을 입어 화살을 쏘아도 죽지 않았으며, 올가미를 던져 전진하던 병사들을 끌고 가버려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전한다. 명나라 시절부터 사슬갑옷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명나라의 군사백과사전인 무비지에는 사슬로 만들어진 투구로 추정되는 삽화도 남아 있다.

    일본은 원래 사슬갑옷을 주된 갑옷으로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팔을 방어하는 고테(籠手)나 종아리를 보호하는 스네아떼(臑当) 등의 보조 방호구의 철판의 틈을 연결하기 위한 보조로 사용했을 뿐이었다. 타다미구족이라고 하여 경번갑 같은 것이 있기는 하나, 이조차도 철판을 연결하기 위한 보조였을 뿐이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들며 사슬갑옷을 본격적으로 주된 갑옷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평복 아래에 간편하게 입을 수 있으면서도 칼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점은 당시 사무라이들로부터 각광을 받았다.복대? 특히 막부 말기의 험악한 치안 하에서 체인메일이 크게 유행하였다. 신선조도 사슬갑옷을 애용했다.

    3.3 중동과 인도

    중동과 인도는 체인메일을 굉장히 애용했으며 플랫&리벳링에서 관둔 유럽과는 달리 리벳을 2개를 박는 등 한수 높은 강화를 하기도 하고, 그들의 갑옷은 모두 체인 메일과 철판을 연결한 경번갑이 많다. 오스만 투르크(현 터키)는 유럽과 지속적인 전쟁을 벌여 높은 방어력의 유럽 갑옷에 대항하기 위해 벙어리장갑 건틀렛 등 이슬람세계에서도 특별히 방어력을 신경쓰는데, 그들조차도 경번갑을 쓰는 것은 똑같다.

    3.4 현대

    • 정육점에서 날붙이에 대한 보호복으로 사용하고 있다.
    • 잠수부들이 상어에 대처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
    • 경찰이나 안전 요원이 방검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 판타지 영화에서는 ABS 플라스틱으로 만들고 금속색 스프레이로 도색한 메일이 널리 쓰이고 있다. 진짜는 무게도 무겁고, 비싸기 때문에 클로즈업 장면에서만 사용한다고.

    4 형태

    사슬갑옷의 기본은 '사슬로 만든 셔츠'다. 북유럽계는 byrnie라는 단어를 쓰고, 나머지 유럽인들은 hauberk(호버크)라고 불렀던 사슬로 만든 셔츠는 보통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게 만들어서 상체와 하반신을 두루 보호했는데, 다리의 활동성과 말에 탈 때를 대비해서 앞과 뒷부분은 밑자락에서 가랑이까지 세로로 갈라놓았다. 짧게 만든 것은 haubergeon(호버젼)이라고 불러야 옳지만 호버크와 호버젼을 서로 혼동해서 쓰는 일이 많은 편이다.

    반소매 티셔츠마냥 짧고 헐렁하게 만들던 팔(소매) 부분은 1100년대에 이르면 손목까지 길게 이어지고 몸에 잘 맞는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1175년 이후부터는 팔 부분이 손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루 모양에 엄지만 따로 나와있는 벙어리장갑(mufflers)을 사슬로 만들어서 손을 덮을 수 있게 해놓았다. 벙어리장갑은 팔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이 되어있는 형태이고, 손바닥 쪽은 덮지 않기 때문에 벗기면 사슬갑옷의 손목에 매달려있게 된다. 머플러는 전투에 임박했을때에만 끼는 것이다. 나중에는 가죽장갑과 사슬을 꿰메어붙인 완전한 건틀렛 형태도 고안된다.

    1250년 이전까지 사슬로 된 후드(머리를 덮는 부위)는 호버크에 붙어있는 것이었지만, 1250년대부터 이 부분은 분리형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coif는 중세에 쓰던 머리가리개의 일종이므로 사슬로 만든 것은 mail coif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호버크와 코이프 둘 다 마찬가지로 목 부분은 끈이나 버클 따위로 단단하게 조여서 빈 틈이 없도록 단속했다. 사슬의 유연성 때문에 메일 코이프로만 머리를 보호하는 일은 드물었고 대개 코이프 위에 노르만 투구, 그레이트 헬름, 슈거로프 헬름, 케틀햇, 배시넷 등등의 투구를 썼다. 처음에는 코이프와 투구를 겹쳐서 사용했지만, 투구로 충분한 방어를 얻을수 있는 상태에서 굳이 투구가 가려주는 부분까지 사슬을 덮을 필요는 없기 때문에 투구에 사슬의 드림을 달아놓는 camail 또는 aventail 방식으로 변해간다. 사슬로 만든 목 주변을 덮어주는 방어구는 pixane이라고 한다.

    사슬의 시대 초창기에는 다리는 그냥 가죽이나 리넨의 바지로만 보호를 했으나, 1100년대 이후부터는 완전무장하는 맨앳암즈는 사슬로 된 스타킹 같은 형태의 다리 보호구를 입어서 발까지도 보호를 했다. 이 스타킹은 chausses라고 부르는데 허리에 맨 벨트에 끈으로 연결해서(가터벨트?!![3]) 고정을 했다. 현재는 다리 부분의 사슬 방어구는 쇼스라고 통틀어서 말하지만, 허벅지 부분은 chaussons, 무릎부터 그 아래부분은 chausses라고 분리했던 시절도 있었다. 호버크가 대개 무릎길이까지 오기 때문에 chaussons를 보기는 어려운 편이고, 둘을 합해서 그냥 쇼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조 상 쇼스나 코이프 같은 분리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체인메일의 모든 하중은 어깨에 실리게 된다. 체인메일의 무게는 보통의 갑옷 수준이며 유연하고 통기성이 좋기 때문에 행동을 제약하는 면은 없지만, 하중이 모두 어깨에 실리는 것은 착용자의 피로도를 높이므로 상당한 단점이다. 하지만 체인메일을 착용할때에는 벨트를 착용했기때문에 무게가 골반으로 분산되어서 무게가 전부다 어깨로 쏠리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호버크 바깥에 뭔가를 입는 일은 없었으나, 1190년 경 부터는 호버크 밖에 느슨한 외투 - jupon이나 surcoat를 걸치기 시작했다. 서코트는 소백의(cotta) 위에 입는다는 의미의 프랑스말에서 온 것이며, 사실 대부분의 복장과 마찬가지로 기사 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세에 일반적이던 보통의 외투 종류다. 대개 소매가 없거나 짧고, 다른 옷 위에 겹쳐입는 오버코트 형태이고 남녀가 모두 착용했다. 사슬과 마찬가지로 말에 탈때를 대비해서 앞뒤가 가랑이까지 트여있는 것이 보통이다. 사슬갑옷 위에 입은 서코트는 원래 비나 습기가 사슬에 바로 닿는 것을 막아주고 태양광선이 바로 사슬에 닿아서 달아오르는 것을 막아주는 외투의 역할에 충실했는데, 후에는 여기에 자신의 문장을 넣기도 한다. 이게 와전되어서 그냥 문장을 넣는 옷인 것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사슬은 베기에 대한 저항력이 우수하지만, 매우 유연한 갑옷이기 때문에 찌르기나 때리는 충격력을 흡수할 수 없는 구조다보니 현대의 방탄복처럼 죽을 것을 살려놓을 수는 있으나, 부상을 피할수는 없었다. 다만 통념처럼 찌르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슬을 촘촘하게 만들어 둔 웬만한 제대로 만들고 정비 잘 한 사슬 갑옷은 그 당시의 화살 등의 찌르는 공격이 사슬 틈 안에 잘 박히지 못했다. 그러나 찌르기에 치중한 검이나 보드킨 촉처럼 매우 뾰족한 날붙이는 사슬의 틈새로 밀려 들어가서 박히기 때문에 찌르기에 약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맨살 위에 입으면 사슬에 긁히고, 둔기 공격을 맞으면 둔기 타격에 더해서 사슬이 살에 파고 들어버리니 사슬 밑에는 거의 반드시 가죽으로 된 옷을 입거나(고전 시대의 로마의 적이 쓰던 방식) Wambais, Aketon, Gambeson 등으로 부르는 패드를 넣은 천 갑옷을 먼저 입고 그 위에 사슬을 걸쳤다. 물론 이것을 입으면 충격을 어느정도 흡수해줄 수는 있으나, 그래도 공격을 몸으로 완전히 받아낼 수는 없으니 방패로 막거나 움직여서 피해야 한다. 사슬 갑옷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상을 덜 입기 위해서 쓰는 것.

    물론 중세의 병사들에게 있어 사슬갑옷은 대체로 우수한 방어도구이며 있으면 아주 좋은 것임은 확실하다. 사슬갑옷을 전신으로 한벌 다 맞추고 투구와 방패를 구비하면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전신 세트를 한벌 맞추는 것은 몹시 비쌌기 때문에 부유한 맨앳암즈(평민 중기병 등의 기사의 부하 전사)나 기사계급 만이 사슬로 한 벌을 다 맞출 수 있었고, 가난한 하급 전사나 보통 병사들은 상의만 걸치거나 그냥 천으로 된 누빈 갑옷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녹이 잘 스는 물건이였고, 통 안에 모래,식초와 함께 넣고 굴려 모래로 겉을 갈아내는 방식으로 녹을 제거하고 손질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금속이 갈려나가는 거라서, 오래되면 처음에 비해 얇아지고 방어력과 내구도도 저하되었다고 한다.

    5 제조

    사슬갑옷의 제조 기법은 사슬끼리 어떻게 엮느냐의 '패턴'과, 각 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가 핵심이다.

    유럽에서 제일 흔한 패턴은 4-to-1(4-in-1으로 표기하기도 한다)인데, 하나의 링이 다른 4개의 이웃링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이 제일 쉬우면서도 사슬갑옷의 기본이다.

    이웃하는 링의 수를 늘리면 좀 더 촘촘하고 튼튼해지는데, 6-in-1, 8-in-1, 형태는 4-in-1과 같지만 하나의 링이 아니라 링을 두개씩 겹치는 이중겹침 방식인 double mail(king's mail) 같은 방식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촘촘해지는 만큼 무게가 늘어나기 때문에 사실상 4-in-1이 거의 지배적이다.

    대개 링은 연철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물렀지만 후대에 나온 링 중에는 열처리가 가능할 정도의 탄소함유량을 가진 연강이 쓰인 것도 있었다. 일정한 규격의 링을 만들때는 철사를 봉에 감아서 같은 크기로 절단해서 만드는데, 그냥 양 끝단을 연결하지 않고 맞붙은 상태로만 두는 것은 butted ring이라고 한다. 이 형태는 방어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았고 대개 이미테이션에서 쓰이거나, 역사적으로는 행사용으로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둥근 철사로 링 형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와셔처럼 단면이 평평한 형태로 만들어진 플랫링(Flat ring)도 있는데 플랫링은 둥근 철사링보다 구조적으로 더 강도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대개는 양 끝단을 겹치고 납작하게 누른 다음 리벳을 박아 연결하는 리벳티드 링(Riveted ring)이 쓰였는데, 리벳링은 로마시대 로리카 하마타부터 사용되었을만큼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온 방식이며 약점인 틈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그나마 나은 방식이다. 그냥 리벳이 아니라 쐐기 형태의 것으로 리벳팅하는 wedge riveted는 보통의 리벳보다 강력했고 보다 높은 방어력을 위해 리벳을 두개 박아서 고정하기도 했고 스테이플(Staple: U자 모양 못)을 쓰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다.

    그리고 제일 강도가 우수한 링은 철판을 찍고 구멍을 뚫어서 만들거나 양끝 단을 용접해놓은 solid ring(또는 close ring)이지만, 솔리드 링은 애초에 끊어진 부위가 없으므로 제일 우수한 강도를 낼 수 있는 반면에 링끼리 연결할 방법이 없으니까. 실제로는 리벳링과 솔리드링을 한줄씩 번갈아서 결합했다. 사슬갑옷 중에서는 이 타입이 가장 강력한 것이고 제대로 된 전투용 사슬갑옷이라 할 수 있다.

    사료에서 종종 언급되는 "double mail"은 현재로서는 유물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 정체를 확신할 수가 없다. 호버크를 두겹 겹쳐입은 것일 수도 있고, 링을 2개 더 사용한 것(6-in-1)일 수도 있고, 링을 두배 사용한 것(8-in-1)일 수도 있고, 링 두개를 겹쳐 하나의 위치에 끼워넣어 만드는 king's mail(킹스 메일이란 표현도 현대에 만들어낸 것이다) 8-in-2 패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형태야 어쨌든 더블 메일은 무거운 만큼 방어력이 확실히 우수해서 화살과 랜스에도 잘 뚫리지 않았다는 기록만은 확실히 존재한다.

    십자군 전쟁 시대의 이슬람 연대기 기록자인 우사마흐 이븐 문퀴드(Usamah ibn Munqidh)는 아랍계 시리아인 전사가 프랑크인 기사를 마상창으로 찔러 떨어트린 일화를 소개했는데, 그 아랍 전사는 상대가 분명 죽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후 죽은줄 알았던 인물이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온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그 프랑크인 기사는 더블 메일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중세 프랑스의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 보면 랜스로 찔러 어느 기사가 입은 두 사슬 호버크를 뚫었지만, 세번째를 뚫지 못했다는 말이 나온다. 트리플 메일이다!

    판금갑옷 뿐만 아니라 사슬갑옷에도 프루프는 있었고, 이것을 가리키는 "haute cloueur", "demi-cloueur", "botte cassée", "botte" 등의 다양한 용어가 있었다. 이러한 용어들의 정확한 정의는 모호하지만, 일단 프루프에 동원된 공격의 타입이나 사슬의 등급을 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botte는 검의 일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haute나 demi-cloueurs는 각 사슬을 물리는 리벳이 하나냐 두개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보통의 사슬은 리벳 하나로 물려놓지만 더 큰 강도를 얻기 위해 리벳 두개를 사용한 유물도 존재한다. "de toute botte"는 검과 도끼, 화살과 쇠뇌에 대응하는 토탈 프루프를 표현하는 것 같다.

    프루프 기록에서는 보통의 쇠뇌와 권양기로 장전하는 고위력의 쇠뇌를 구분하고 있으므로, 열처리를 거친 솔리드링과 리벳링으로 만든 것을 더블 메일로 두텁게 만든 사슬 갑옷이라면 화살에 대한 방호가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6 쇠퇴

    이런 무시무시한 방어력의 체인메일도 존재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라 그런 것들은 역사적으로 전혀 보편적이지 않았다. 확신할만한 유물을 찾기 어려운 판이니 뭐. 솔직히 말해 사슬갑옷은 구조상 본질적으로 화살에 약할 수 밖에 없다. 잘 만든 사슬갑옷은 보통 수준의 활이라면 근거리 직격은 몰라도 흐르는 화살의 피해 정도는 막아줄 수 있는 방어력은 가지겠지만, 더블 메일이 그리 흔하게 쓰이지 않았으니 사슬갑옷이 약하다는 평판은 당연하다. 게다가 전쟁터에는 쇠뇌나 장궁 같은 매우 장력이 강한 투사무기가 설치고 있다.

    12세기 연대기기록자 웨일즈의 제랄드가 남긴 일화에 따르면, 당시 12세기 후반 웨일즈의 국경선에서는 영국인 남작 윌리엄 드 브라오스가 보낸 병력과 웨일즈인들 간에 산발적인 전투가 잦았는데, 웨일즈의 장궁병이 말에 타고 있는 영국인 맨앳암즈를 쏘아맞추었더니 허벅지를 관통해서 말까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살은 우선 그 맨앳암즈의 호버크를 뚫고, 그 아래의 쇼스를 뚫고, 그 아래의 가죽옷과 맨앳암즈의 허벅지를 관통해서, 가죽으로 된 말안장을 뚫어서, 말 몸통에 박혀버린 것[4]이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일인가! 이 위력에 빠져버린 영국이 장궁병을 미칠듯이 양성해서 운용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하지만 장궁만이 전장에서 두려운 것은 아니다. 도끼, , 할버드 같은 무기들은 충분히 사슬갑옷을 상대할 위력이 있었고, 실제로 이런 무기를 가진 하층민이 기사들을 물리친 예는 여럿 있다. 1302년 플랑드르에서 벌어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는 할버드나 구텐탁 같은 류의 무기를 가진 플랑드르인 민병대가 완전무장한 다수의 프랑스 정규군과 플랑드르 귀족 기사들을 물리친 적이 있고, 1315년 모르가르텐에서 스위스의 농민들은 할버드로 오스트리아 맨앳암즈를 박살내버렸다. 영국에서도 1314년 바낙번 전투에서 초기형 파이크 등으로 무장한 로버트 브루스의 군대가 영국왕 에드워드 2세의 군대를 물리치는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물론 이 사건들이 사슬과 판금갑옷의 교차기에 있었던 중요한 전투란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지만, 이러한 전투들이 사슬갑옷 때문에 이기고 졌다고 말하는 것은 좀 넌센스고 전술, 사기, 각종 정황적인 요소가 훨씬 중요하다. 사슬이 쇠퇴하고 판금이 등장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미 13세기 초반부터 서서히 이루어져가던 일이다. 사슬갑옷을 사용하면서도 팔다리의 보호를 위해서 판금으로 만들어진 트랜지셔널 아머, 그러니까 플레이트 메일을 도입한 과도기적인 시대를 Transition Period라고 한다.

    판금이 보편화되던 시대에 이르면 손이 많이가는 사슬갑옷의 제조비용이 판금의 가격을 뛰어넘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때문에 판금이 보급되기 시작하면 사슬갑옷은 도태될 수 밖에 없었다.

    17세기에 들어 일시적으로 동유럽에서는 체인메일을 약간 쓰긴 했다. 판금갑옷이 총기에 의미있는 방어력을 가지려면, 3 mm 이상으로 두꺼워져야 했기 때문에, 칼이라도 막기 위해서 무겁고 비싼 판금갑옷 대신 보다 가볍고 편한 갑옷이 기병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소가죽으로 만든 코트가 유행했다. 폴란드에서는 셰프니케(쇠를 입은 자)라 불리는 중산층 징집 기병들이 체인메일 슈트를 입었고, 러시아도 마찬가지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이었을 뿐이고, 보병화력이 증가하는 17세기 후반에는 다시 퇴출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총을 맞으면 총탄이 박히는 충격 덕분에 사슬갑옷의 사슬이 부서져서 파편처럼 몸 깊숙히 박힌다라는 점이다. 게다가 이렇게 박힌 사슬의 파편은 외과수술을 해도 100% 제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큰 문제를 일으킨다. 당장 무진전쟁에서 사슬갑옷을 입은 막부군 정예 병력은 총탄을 맞을 경우 갑옷을 입지 않은 근왕측 병사보다 생존확률이 더 떨어졌는데, 일단 현장에서 과다출혈로 죽는 것은 기본이고, 현장에서 살더라도 사슬 파편 덕분에 파상풍에 걸려죽었다. 게다가 천운으로 살아남더라도 몸 안에 있는 사슬 파편 덕분에 육체적 노동을 요하는 일을 못하니 사실상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덕분에 전장에서 살고 싶다면 사슬갑옷따위는 벗고 다니라는 격언이 퍼지게 된다.

    그래서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총탄에 맞아도 갑옷파편으로 인한 부상이 상대적으로 드문 판금을 이용한 갑옷을 사용했고, 그 이후에는 갑옷 자체가 더 이상 방어력을 보장하지 못해서 쇠퇴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인도만이 19세기까지 실전 갑옷으로 체인메일을 이용했는데, 인도는 근대적인 군대와 포병을 운용하면서도 여전히 방패나 검, 갑옷을 애용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7 현대

    군용으로는 이미 17세기에 가치를 잃어버리고 퇴출되었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전차 부대원들의 방호복으로 뜬금없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5]. 그 당시의 느리고 육중한 육상전함 형태의 전차는 방어력이 어찌됐든 간에 적군의 표적이 되기 매우 쉬웠기 때문에, 피격당했을 때 전차 안에서 튀어다니는 파편 등의 방호를 위하여 입었다고.
    현대에도 체인메일의 수요층은 존재한다. 리인액터를 비롯하여 산업 현장의 안전장구로도 사용되고, 멋있어서 사는 사람들까지 다양한데 과거의 군용과는 다른 점이 몇가지 있다.

    벗티드 메일(Butted mail)의 비중이 굉장히 높다. 이는 더이상 체인메일로 실전을 뛰지는 않지만 사슬갑옷은 가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강화 처리가 없어 가격이 싼 체인메일을 제공하기 때문인데, 방어력은 낮은 AR값[6] 과 더불어 칼로 확 베면 링이 우수수 떨어지는 절망적인 수준이다. 힘만줘도 우수수 떨어질 정도니 말 다했지. 촘촘하게 만들면 방어력은 검의 찌르기까지는 막아낼 수 있지만, 이 경우 무게가 역사적 무게보다 5kg이상 무거워진다는게 큰 문제다. 현재는 이 문제 때문에 Get Dress For Battle라는 업체에서 인장강도가 굉장히 강한 스프링강으로 만든 벗티드 메일이 나오고 있지만 그래도 메이커측에서 격투는 삼가하도록 하고 있는 정도다. 중세의 갑옷보다 덜 촘촘하다.

    스테인리스로 만든 체인메일이 나온다. 원래 체인메일은 녹이 상당히 잘 스는 물건이며, 이를 세척하기 위해 과거에는 통에 모래와 체인메일을 넣고 식초를 넣어 마구 굴렸다. 이렇게 하면 모래에 갈려 녹이 떨어지니까. 그러나 취미삼아 갑옷을 사는 현대인들이 갑옷을 모실리 없다. 그러니 스테인리스로 만든 것들이 나온다. 보통 현대 체인메일들은 Mild steel혹은 Iron으로 만들어지는데, 스테인리스 체인메일은 이것보다 보다 튼튼하다는 장점도 있다. 그래서 비싸다.

    머신웰디드 메일도 있다. 정밀기계로 짠 것으로 상어사육사들의 보호복이나 산업현장의 파편방지용 커튼, 육가공용의 날붙이 방어용으로 쓰인다. 링은 굉장히 작지만 하나하나 용접하고 또 스테인리스라 굉장히 튼튼하다는게 특징. 원래 산업용이지만 그 가벼움 때문에 비고증 리인액트 계통에서도 쓰이고 있다. 다만 대개 산업방호복 수준이라 철사가 가늘고 두께도 얇다는 문제가 있어 사람 대 사람의 대련용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파일:Attachment/사슬갑옷/c0063102 496a035778d8a.jpg

    8 잘못 알려진 사슬갑옷들

    Samuel Rusu Meyrick 같은 19세기 학자는 중세의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서 갑옷의 형태를 문자... 아니, 그림 그대로 재현해보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니까 보통의 유럽식 4-in-1이 아닌, 그림에 보이는 패턴을 그대로 재현을 해보려고 용을 썼던 것이다. 19세기 학자들의 연구는 우리 연구의 기초를 제시해주는 소중한 것들이지만, 그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사실 좀 무리가 있는 시도였다. 중세 그림에서 보여지는 특이한 무늬의 갑옷들은 대부분 별달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사슬 그림을 단순화/패턴화해서 그린 것인 경우가 많았다는게 문제다.

    예를 들어 바이외 태잎스트리에서 보이는 갑옷들은 그냥 사슬갑옷이 아니라 링메일, 밴디드 메일처럼 보이는 것이 많지만, 거기 나오는 거는 전부 다 그냥 체인메일이다.

    그런 식으로 (아마도 실제 사용되지 않았을, 실존하지 않았을) 갑옷의 패턴이 잘못 알려진 것들이 있는데…

    8.1 밴디드 메일(Banded mail)


    갑옷의 무늬가 마치 띠처럼 길게 연결되어있는 것에 착안해서, 뭔가 띠처럼 무늬가 들어가게 체인 링을 엮어보다 만들어낸 형태다. 19세기 학자들은 갑옷을 구성하는 보호판 또는 링을 띠처럼 연결해놓은 모양새라고 유추했는데, 이 형태로 갑옷이 만들어지려면... 가죽 천 두겹에 길게 박음질을 해서 띠 형태의 주머니를 만들고, 이 안에 체인링을 빼곡히 채우는 형태로 재현을 해봤다. 또는, 체인링을 엽전 꿰듯이 길게 꿰어서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건 한번도 실존한 적이 없다. 사실은 실험적으로 만들어본 형태일 뿐이고, 19세기만 하더라도 밴디드 메일이라는 것이 실제 형태라고 생각했지만 이후의 학자들은 이게 중세식의 그림을 잘못 해석했을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8.2 링메일(Ringmail)

    사슬끼리 연결하는게 아니라 링을 천 갑옷 등에 꿰메어서 만들어 놓은, 스케일 아머 같은 갑옷이다. 이것 역시 빅토리아 시대의 학자들이 그림을 그대로 해석해 보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밴디드 메일과는 달리 링메일은 실존하긴 했다. 단지 이것이 그림과 조각에 등장하는 만큼 보편적으로 중세 유럽에서 사용되지 않았던게 문제지. 그림을 그대로 읽는다면 사슬갑옷 만큼이나 흔하게 존재했어야 하는데, 유럽에서는 (아래 설명하는 다른 종류를 제외하면) 중세시대의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때문에 보통의 메일을 잘못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게다가 링메일이라는 용어도 문제가 있다. 링과 메일은 동어반복이며, 학자들은 체인메일의 변형 또는 메일을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메일이라는 표현을 허용하고 있다. 이 갑옷은 차라리 스케일 아머의 친척뻘에 가깝고 스케일 아머보다 덜 촘촘하고 더 유연하다. 따라서 링메일이 아니라 링 아머(ring armour)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일단, 링 아머 형태의 갑옷은 동양에도 유럽에도 있었다. 16~17세기 기록에서는 eyelet doublet이나 eyelet coat이라고 불리고 독일에서는 "Schiessjoppe"라는 명칭으로 불린, 더블릿이나 외투에 링을 꿰메어놓은 형태의 갑옷의 기록과 유물이 남아있다. 이것은 확실히 링 아머라고 할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중세가 아닌 근세 시대의 갑옷이다. 카롤링거 시대 프랑크 족의 것 중에는 일반 천 옷 위에 링이나 디스크를 붙여서 보강하여 전투복으로 사용한 것이 있는데 (프랑스어로 broigne maclée라고 부른다) 이걸 사료의 그림을 해석해서 만든 링 아머와 같은 것으로 봐야할지는 조금 미묘한 감이 있다.

    8.3 그 외

    이외에도 Meyrick은 자신이 연구 과정에서 실험해본 패턴을 tegulated mail, mascled mail, trelliced mail 등으로 명칭을 붙여서 의견을 제시했는데, John Hewitt나 Charles Ffoulkes 같은 학자들은 마이릭의 의견이 옳지 않다고 보았으며 20세기에 들어서서 최종적으로 Claude Blaire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서 이것이 도검갑주계에서 보편론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마이릭의 설을 지지하던 Charles Henry Ashdown, Eugène Emmanuel Viollet-le-duc 같은 후대 학자들의 의견이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 등에서 채용된 탓에 실존하지 않는 갑옷, 잘못된 용어가 서브컬쳐계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밴디드 메일과 링메일 같은게 서브컬쳐 계열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던전 앤 드래곤가 게임 상에 갑옷으로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 갑옷에나 대고 냅다 mail이란 단어를 붙인 것도 댄디의 원죄다. 스케일메일, 밴디드메일, 링메일. 등. 때문에 AD&D 시절 드래곤 매거진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적이 있다. 뭐, 결국 말쌈하던 사람들끼리 판타지니까 가능 'ㅅ' 하고 배째고 넘어갔고, 결국 4판 가서는 체인 플레이트로 통폐합. 플레이트가 아니라 아머랬지!

    그런데 이건 말을 꺼낸 댄디도 문제지만, 게임책을 곧이곧대로 믿고 교차검증 안해보고 주워섬기는 놈도 바보다. 게다가 댄디에 나오는 밴디드 메일은 사실 엽전꿰듯이 사슬링을 꿰어놨다기보다는 패딩 위에 얇은 사슬 위에 작은 갑옷조각을 줄지어서 띠처럼 연결해서 보강해서 갑옷 형태를 만들었다고 표현해서, 마치 스플린트 메일이나 로리카 세그먼타타를 떠올릴랑말랑하게 만드는 요상한 느낌으로 표현해놓았다.

    9 미디어에서

    서구권에서는 그나마 다른 문화권보다 사슬갑옷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지만, 플레이트 아머에 비해 인식이 떨어져 잘 등장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판금 갑옷이 간지 면에서는 압도적이기 때문. 때문에 엑스트라나 조연이 착용하거는 경우가 많다. 다만 주인공 세력이 바이킹, 노르만과 같은 북유럽 계열인 경우 마초성을 강조해서인지 맨살에(!) 사슬반팔만 입는 연출이 많다. 그 외에는 고증에 충실한 작품에서나 등장하는 편.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의외로 반지의 제왕 실사영화 시리즈호빗 실사영화 시리즈의 주역들은 위에 옷을 입어서 잘 안 보이지만 전부 사슬갑옷 아니면 찰갑을 입고 있다. 게다가 어떻게 된 게 엑스트라에 가까워질수록 갑옷이 점점 좋아진다(···). 오히려 할디르같은 쩌리나 곤도르 병사들이 판금을 입고 있으며, 악역우루크-하이나 전투트롤들의 갑옷도 투박하긴 하지만 상당히 중장갑이다.

    한국이나 중국 사극에서는 그냥 천옷, 두정갑이나 찰갑, 그리고 찰갑의 탈을 쓴 판금갑옷에 밀려 등장이 거의 없다. 거의 유일하게 주인공이 입은 경우는 천추태후(드라마). 재미있는 것은 이 사슬갑옷 소품은 반지의 제왕 제작진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10 참고문헌

    A Knight And His Armor by Ewart Oakeshott
    Armour & weapons by Charles J. Ffoulkes
    The armourer and his craft from the XIth to the XVIth century by Charles J. Ffoulkes
    Rusu, M., “Das Keltische Fürstengrab von Ciumeşti in Rumänien”, Germania 50, 1969
    Dragon Magazine issue 123(July 1987), 126(October 1987), 131(March 1988)
    http://en.wikipedia.org/wiki/Mail_(armour)
    http://en.wikipedia.org/wiki/Hauberk
    http://en.wikipedia.org/wiki/Surcoat
    http://en.wikipedia.org/wiki/Ringmail
    http://en.wikipedia.org/wiki/Banded_mail
    http://www.arador.com/articles/chainmail.html

    1. 밑의 사슬갑옷 역사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사슬갑옷은 철기시대가 도래한 이후 등장한 갑옷이다. 간혹 청동기 시대 벽화에 사슬갑옷 비스므리한 게 그려졌다고 청동기시대에도 사슬갑옷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지만 애초에 청동으로 사슬형태의 갑옷을 만드는 건 무리다. 이유는 청동과 철의 재질의 차이 때문인데 이는 밑에 후술하겠다.
    2. 이것이 나중에 철기 시대에 철갑으로 진화한다.
    3. 스타킹이 본래 남자 귀족의 옷이었기 때문에 가터벨트 또한 남자의 물건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전혀 이상할 것이 아니다.
    4. 1191년의 무장은 쇄자갑이었고, 이는 대퇴부를 보호하는 곳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하나의 화살이 다리를 뚫고, 말 안장에 꽂혔다고 믿어져 왔던 이야기는 과장된 것이다. 그 기사는 여전히 말을 몰고 다녔으며, 오직 다른 쪽의 다리에 두번째의 화살을 맞았을 뿐이다. Osprey Publishing, Weapon 030, The Longbow, 66 page을 편역하였음.
    5. 이 시절은 참호에서의 백병전 때문에 플레이트 아머를 연상시키는 방탄복이라든지, 메이스처럼 생긴 흉기 따위가 나오기도 했다.
    6. 체인메일의 밀도를 구하는 공식. 체인메일의 링의 내부 직경÷링의 철사 두께=AR값. 벗티드는 AR값이 5밑으로 나와야만 검의 베기를 막을 수 있지만, 그래도 찌르기는 막기 어렵다. 중세 실전용은 AR값이 5이하, 정말 촘촘하게 만든 것은 4이하로 내려가는 괴물도 있지만. 이 벗티드 메일은 AR값이 6에 달하며 칼로 베기만 해도 링이 우수수 떨어지는 그냥 코스튬 용이다.
    [[분류:갑주

12세기 말 서유럽 기사의 무장

11 개요

철사 따위로 만든 고리를 엮은 사슬 형태의 갑옷이다. 한국어번역하면 사슬 갑옷, 쇄자갑 등이 있다. 옛날부터 여러 나라에서 오랫동안 사용한 대표적인 철제 갑옷이다.[1]

12 어원

현대는 '체인 메일'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이나, 사실 'chain-mail'은 대략 1700년대 경에 고안된 신조어이며 역전앞, 족발처럼 동어반복이다. 'mail' 자체가 사슬로 만든 갑옷이라서 그냥 'mail'이 맞다. 영어에서 mail은 무조건 사슬 갑옷이나 그 친척이다.

영어의 mail은 라틴어 macula가 이탈리아어 maglia를 거쳐 불어 maille로 변화한 것이 영어로 건너와서 mail, mayle, 또는 그냥 chain으로 불리기게 된 것인데, 로마시대에는 이 갑옷을 macula라고 불렀고, 노르만 인들은 그물(net)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his war-net, woven by cunning of smith" 같은 식이 된다. 즉 역사적으로는 chain-mail이라고 사용한 적이 없다.

현대의 역사학자나 도검갑주의 연구가들은 영어 단어 'mail' 보다는 프랑스어 단어 'maille'을 더 애용하는데, 그 이유는 mail의 동음이의어(편지)가 워낙에 유명하기 때문. 영어권에서 평범한 일반인에게 mail이라고 하면 사슬갑옷이 아니라 편지를 먼저 떠올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 chain mail이라고 써도 행운의 편지(=chain mail, chain letter)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왈도체에서도 Elven Chain mail을 열 한개의 사슬 편지라고 오역한 것을 생각하면 답이 나오는 문제.

그리고 Armour는 갑옷 전체의 통칭이다, 보통은 메일이 아닌 것에 대해, 대개는 판금 계열을 가리킬때 쓴다. 대한민국에서는 판금 갑옷을 플레이트(plate)라고 부르며 plate라는 표현에 더 비중을 두는 일이 많으나, 영어권에서는 그냥 armour라고 하는게 보통이고 아머라는 단어에 더욱 큰 비중을 둔다. 그리고 둘이 뒤섞인 플레이트 메일은 두 종류의 갑옷을 혼용한 과도기 갑옷이다.

13 역사

아시아와 유럽의 인간 모두 사슬 갑옷을 썼다. 사슬 갑옷을 고안한 시기는 동방이 유럽보다 앞서는 것으로 추정되나, 유럽 쪽에서는 BC 4세기 경 켈트 족장의 무덤에서 충분한 강도와 성능을 지닌 사슬갑옷을 만들어서 썼음이 확인되었으므로 동방에서 서방으로 전파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동방과 관련 없이 켈트족이 독자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 유럽에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13.1 유럽

유럽의 갑옷은 크게 그리스로마 제국의 소위 '전통적인' 청동로 만든 갑옷과, 로마의 적인 '야만족'이 만든 가죽과 사슬로 만든 것으로 나뉜다.

유럽 문화의 기초인 그리스와 로마에서 발달시킨 형태의 갑옷들은 중세 유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후대 르네상스 등에서 로마시대 갑주의 형태를 모방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 제조기술과 형태가 그대로 전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로마의 적들이 사용하던 사슬 갑옷이 그리스와 로마의 것을 누르고 그대로 이어져 중세를 평정했다.

일단 현재 유물 중에서는 BC 5세기 스키타이 족의 사슬 갑옷이 제일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에서도 사슬이 사용되었다고 추정할만한 사료가 약간 있으며, 이집트 파라오의 복장 그림에서도 사슬 비슷한 것이 보이고, 사르마티아인과 페키니아 인들도 썼을 가능성이 있지만 명확한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확실한 건 사슬갑옷은 철기시대 이후 등장한 갑옷이기 때문에 이집트 19왕조 이전 왕조 군대처럼 청동시시대 군대는 사슬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청동과 철의 재질의 차이 때문인데 청동을 사슬 형태 갑옷으로 만들면 청동의 연성 때문에 사슬이 휘어지거나 뚝뚝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슬이 쉽게 끊어지지 않으려면 사슬을 당연히 철 같은 튼튼한 금속 재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 청동 재질 갑옷은 대부분 판금 형태거나 청동판을 가죽에 덧댄 형태[2]다. 당연히 사슬갑옷은 철기시대 이후 등장한 갑옷이며 청동기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누비아 왕조 이후라면 모를까 그 이전 이집트 왕조의 파라오가 사슬갑옷을 입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로마인은 BC 1세기 경 현재의 북부 이탈리아 지방에서 골(Gaul) 족과의 전투 뒤부터 이 갑옷을 쓰기 시작했다. 쓸만한 거라면 뭐든지 받아들이던 로마의 전통대로 골 족의 사슬갑옷을 받아들여 로리카 하마타(lorica hamata)라는 형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로라카 하마타 시절부터 이미 리벳링을 사용했었고, 내경 5mm에 외경 7mm의 청동이나 철제 규격 링을 3만개 정도 사용해서 한벌을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전파된 사슬갑옷이 13세기까지 계속 유럽에서 사용되었다. 사실 4세기 경의 고트족이 사용하던 것이나 12세기 십자군들이 사용하던 것이나 그 기초적인 것은 같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세부에 있어서는 시대 별로 변화가 분명히 있었다.

13.2 아시아

철판을 잘게 잘라 끈으로 엮은 찰갑이 영상물로 자주 나와 사슬갑옷은 잘 쓰이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쇄자갑(鎖子甲)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전기에도 백성들이 군역에 소집될 때 갖추어야 할 갑옷으로 쇄자갑이 있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잘 쓰이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지만, 중국에서는 서역과의 전쟁에서 이를 충분히 체험했고 전진왕 부견이 서역원정을 나섰을 때의 기록으로는 구원에 나선 서역의 회호국 병사들은 사슬갑옷을 입어 화살을 쏘아도 죽지 않았으며, 올가미를 던져 전진하던 병사들을 끌고 가버려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전한다. 명나라 시절부터 사슬갑옷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명나라의 군사백과사전인 무비지에는 사슬로 만들어진 투구로 추정되는 삽화도 남아 있다.

일본은 원래 사슬갑옷을 주된 갑옷으로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팔을 방어하는 고테(籠手)나 종아리를 보호하는 스네아떼(臑当) 등의 보조 방호구의 철판의 틈을 연결하기 위한 보조로 사용했을 뿐이었다. 타다미구족이라고 하여 경번갑 같은 것이 있기는 하나, 이조차도 철판을 연결하기 위한 보조였을 뿐이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들며 사슬갑옷을 본격적으로 주된 갑옷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평복 아래에 간편하게 입을 수 있으면서도 칼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점은 당시 사무라이들로부터 각광을 받았다.복대? 특히 막부 말기의 험악한 치안 하에서 체인메일이 크게 유행하였다. 신선조도 사슬갑옷을 애용했다.

13.3 중동과 인도

중동과 인도는 체인메일을 굉장히 애용했으며 플랫&리벳링에서 관둔 유럽과는 달리 리벳을 2개를 박는 등 한수 높은 강화를 하기도 하고, 그들의 갑옷은 모두 체인 메일과 철판을 연결한 경번갑이 많다. 오스만 투르크(현 터키)는 유럽과 지속적인 전쟁을 벌여 높은 방어력의 유럽 갑옷에 대항하기 위해 벙어리장갑 건틀렛 등 이슬람세계에서도 특별히 방어력을 신경쓰는데, 그들조차도 경번갑을 쓰는 것은 똑같다.

13.4 현대

  • 정육점에서 날붙이에 대한 보호복으로 사용하고 있다.
  • 잠수부들이 상어에 대처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
  • 경찰이나 안전 요원이 방검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 판타지 영화에서는 ABS 플라스틱으로 만들고 금속색 스프레이로 도색한 메일이 널리 쓰이고 있다. 진짜는 무게도 무겁고, 비싸기 때문에 클로즈업 장면에서만 사용한다고.

14 형태

사슬갑옷의 기본은 '사슬로 만든 셔츠'다. 북유럽계는 byrnie라는 단어를 쓰고, 나머지 유럽인들은 hauberk(호버크)라고 불렀던 사슬로 만든 셔츠는 보통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게 만들어서 상체와 하반신을 두루 보호했는데, 다리의 활동성과 말에 탈 때를 대비해서 앞과 뒷부분은 밑자락에서 가랑이까지 세로로 갈라놓았다. 짧게 만든 것은 haubergeon(호버젼)이라고 불러야 옳지만 호버크와 호버젼을 서로 혼동해서 쓰는 일이 많은 편이다.

반소매 티셔츠마냥 짧고 헐렁하게 만들던 팔(소매) 부분은 1100년대에 이르면 손목까지 길게 이어지고 몸에 잘 맞는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1175년 이후부터는 팔 부분이 손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루 모양에 엄지만 따로 나와있는 벙어리장갑(mufflers)을 사슬로 만들어서 손을 덮을 수 있게 해놓았다. 벙어리장갑은 팔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이 되어있는 형태이고, 손바닥 쪽은 덮지 않기 때문에 벗기면 사슬갑옷의 손목에 매달려있게 된다. 머플러는 전투에 임박했을때에만 끼는 것이다. 나중에는 가죽장갑과 사슬을 꿰메어붙인 완전한 건틀렛 형태도 고안된다.

1250년 이전까지 사슬로 된 후드(머리를 덮는 부위)는 호버크에 붙어있는 것이었지만, 1250년대부터 이 부분은 분리형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coif는 중세에 쓰던 머리가리개의 일종이므로 사슬로 만든 것은 mail coif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호버크와 코이프 둘 다 마찬가지로 목 부분은 끈이나 버클 따위로 단단하게 조여서 빈 틈이 없도록 단속했다. 사슬의 유연성 때문에 메일 코이프로만 머리를 보호하는 일은 드물었고 대개 코이프 위에 노르만 투구, 그레이트 헬름, 슈거로프 헬름, 케틀햇, 배시넷 등등의 투구를 썼다. 처음에는 코이프와 투구를 겹쳐서 사용했지만, 투구로 충분한 방어를 얻을수 있는 상태에서 굳이 투구가 가려주는 부분까지 사슬을 덮을 필요는 없기 때문에 투구에 사슬의 드림을 달아놓는 camail 또는 aventail 방식으로 변해간다. 사슬로 만든 목 주변을 덮어주는 방어구는 pixane이라고 한다.

사슬의 시대 초창기에는 다리는 그냥 가죽이나 리넨의 바지로만 보호를 했으나, 1100년대 이후부터는 완전무장하는 맨앳암즈는 사슬로 된 스타킹 같은 형태의 다리 보호구를 입어서 발까지도 보호를 했다. 이 스타킹은 chausses라고 부르는데 허리에 맨 벨트에 끈으로 연결해서(가터벨트?!![3]) 고정을 했다. 현재는 다리 부분의 사슬 방어구는 쇼스라고 통틀어서 말하지만, 허벅지 부분은 chaussons, 무릎부터 그 아래부분은 chausses라고 분리했던 시절도 있었다. 호버크가 대개 무릎길이까지 오기 때문에 chaussons를 보기는 어려운 편이고, 둘을 합해서 그냥 쇼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조 상 쇼스나 코이프 같은 분리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체인메일의 모든 하중은 어깨에 실리게 된다. 체인메일의 무게는 보통의 갑옷 수준이며 유연하고 통기성이 좋기 때문에 행동을 제약하는 면은 없지만, 하중이 모두 어깨에 실리는 것은 착용자의 피로도를 높이므로 상당한 단점이다. 하지만 체인메일을 착용할때에는 벨트를 착용했기때문에 무게가 골반으로 분산되어서 무게가 전부다 어깨로 쏠리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호버크 바깥에 뭔가를 입는 일은 없었으나, 1190년 경 부터는 호버크 밖에 느슨한 외투 - jupon이나 surcoat를 걸치기 시작했다. 서코트는 소백의(cotta) 위에 입는다는 의미의 프랑스말에서 온 것이며, 사실 대부분의 복장과 마찬가지로 기사 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세에 일반적이던 보통의 외투 종류다. 대개 소매가 없거나 짧고, 다른 옷 위에 겹쳐입는 오버코트 형태이고 남녀가 모두 착용했다. 사슬과 마찬가지로 말에 탈때를 대비해서 앞뒤가 가랑이까지 트여있는 것이 보통이다. 사슬갑옷 위에 입은 서코트는 원래 비나 습기가 사슬에 바로 닿는 것을 막아주고 태양광선이 바로 사슬에 닿아서 달아오르는 것을 막아주는 외투의 역할에 충실했는데, 후에는 여기에 자신의 문장을 넣기도 한다. 이게 와전되어서 그냥 문장을 넣는 옷인 것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사슬은 베기에 대한 저항력이 우수하지만, 매우 유연한 갑옷이기 때문에 찌르기나 때리는 충격력을 흡수할 수 없는 구조다보니 현대의 방탄복처럼 죽을 것을 살려놓을 수는 있으나, 부상을 피할수는 없었다. 다만 통념처럼 찌르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슬을 촘촘하게 만들어 둔 웬만한 제대로 만들고 정비 잘 한 사슬 갑옷은 그 당시의 화살 등의 찌르는 공격이 사슬 틈 안에 잘 박히지 못했다. 그러나 찌르기에 치중한 검이나 보드킨 촉처럼 매우 뾰족한 날붙이는 사슬의 틈새로 밀려 들어가서 박히기 때문에 찌르기에 약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맨살 위에 입으면 사슬에 긁히고, 둔기 공격을 맞으면 둔기 타격에 더해서 사슬이 살에 파고 들어버리니 사슬 밑에는 거의 반드시 가죽으로 된 옷을 입거나(고전 시대의 로마의 적이 쓰던 방식) Wambais, Aketon, Gambeson 등으로 부르는 패드를 넣은 천 갑옷을 먼저 입고 그 위에 사슬을 걸쳤다. 물론 이것을 입으면 충격을 어느정도 흡수해줄 수는 있으나, 그래도 공격을 몸으로 완전히 받아낼 수는 없으니 방패로 막거나 움직여서 피해야 한다. 사슬 갑옷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상을 덜 입기 위해서 쓰는 것.

물론 중세의 병사들에게 있어 사슬갑옷은 대체로 우수한 방어도구이며 있으면 아주 좋은 것임은 확실하다. 사슬갑옷을 전신으로 한벌 다 맞추고 투구와 방패를 구비하면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전신 세트를 한벌 맞추는 것은 몹시 비쌌기 때문에 부유한 맨앳암즈(평민 중기병 등의 기사의 부하 전사)나 기사계급 만이 사슬로 한 벌을 다 맞출 수 있었고, 가난한 하급 전사나 보통 병사들은 상의만 걸치거나 그냥 천으로 된 누빈 갑옷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녹이 잘 스는 물건이였고, 통 안에 모래,식초와 함께 넣고 굴려 모래로 겉을 갈아내는 방식으로 녹을 제거하고 손질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금속이 갈려나가는 거라서, 오래되면 처음에 비해 얇아지고 방어력과 내구도도 저하되었다고 한다.

15 제조

사슬갑옷의 제조 기법은 사슬끼리 어떻게 엮느냐의 '패턴'과, 각 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가 핵심이다.

유럽에서 제일 흔한 패턴은 4-to-1(4-in-1으로 표기하기도 한다)인데, 하나의 링이 다른 4개의 이웃링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이 제일 쉬우면서도 사슬갑옷의 기본이다.

이웃하는 링의 수를 늘리면 좀 더 촘촘하고 튼튼해지는데, 6-in-1, 8-in-1, 형태는 4-in-1과 같지만 하나의 링이 아니라 링을 두개씩 겹치는 이중겹침 방식인 double mail(king's mail) 같은 방식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촘촘해지는 만큼 무게가 늘어나기 때문에 사실상 4-in-1이 거의 지배적이다.

대개 링은 연철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물렀지만 후대에 나온 링 중에는 열처리가 가능할 정도의 탄소함유량을 가진 연강이 쓰인 것도 있었다. 일정한 규격의 링을 만들때는 철사를 봉에 감아서 같은 크기로 절단해서 만드는데, 그냥 양 끝단을 연결하지 않고 맞붙은 상태로만 두는 것은 butted ring이라고 한다. 이 형태는 방어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았고 대개 이미테이션에서 쓰이거나, 역사적으로는 행사용으로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둥근 철사로 링 형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와셔처럼 단면이 평평한 형태로 만들어진 플랫링(Flat ring)도 있는데 플랫링은 둥근 철사링보다 구조적으로 더 강도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대개는 양 끝단을 겹치고 납작하게 누른 다음 리벳을 박아 연결하는 리벳티드 링(Riveted ring)이 쓰였는데, 리벳링은 로마시대 로리카 하마타부터 사용되었을만큼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온 방식이며 약점인 틈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그나마 나은 방식이다. 그냥 리벳이 아니라 쐐기 형태의 것으로 리벳팅하는 wedge riveted는 보통의 리벳보다 강력했고 보다 높은 방어력을 위해 리벳을 두개 박아서 고정하기도 했고 스테이플(Staple: U자 모양 못)을 쓰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다.

그리고 제일 강도가 우수한 링은 철판을 찍고 구멍을 뚫어서 만들거나 양끝 단을 용접해놓은 solid ring(또는 close ring)이지만, 솔리드 링은 애초에 끊어진 부위가 없으므로 제일 우수한 강도를 낼 수 있는 반면에 링끼리 연결할 방법이 없으니까. 실제로는 리벳링과 솔리드링을 한줄씩 번갈아서 결합했다. 사슬갑옷 중에서는 이 타입이 가장 강력한 것이고 제대로 된 전투용 사슬갑옷이라 할 수 있다.

사료에서 종종 언급되는 "double mail"은 현재로서는 유물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 정체를 확신할 수가 없다. 호버크를 두겹 겹쳐입은 것일 수도 있고, 링을 2개 더 사용한 것(6-in-1)일 수도 있고, 링을 두배 사용한 것(8-in-1)일 수도 있고, 링 두개를 겹쳐 하나의 위치에 끼워넣어 만드는 king's mail(킹스 메일이란 표현도 현대에 만들어낸 것이다) 8-in-2 패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형태야 어쨌든 더블 메일은 무거운 만큼 방어력이 확실히 우수해서 화살과 랜스에도 잘 뚫리지 않았다는 기록만은 확실히 존재한다.

십자군 전쟁 시대의 이슬람 연대기 기록자인 우사마흐 이븐 문퀴드(Usamah ibn Munqidh)는 아랍계 시리아인 전사가 프랑크인 기사를 마상창으로 찔러 떨어트린 일화를 소개했는데, 그 아랍 전사는 상대가 분명 죽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후 죽은줄 알았던 인물이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온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그 프랑크인 기사는 더블 메일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중세 프랑스의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 보면 랜스로 찔러 어느 기사가 입은 두 사슬 호버크를 뚫었지만, 세번째를 뚫지 못했다는 말이 나온다. 트리플 메일이다!

판금갑옷 뿐만 아니라 사슬갑옷에도 프루프는 있었고, 이것을 가리키는 "haute cloueur", "demi-cloueur", "botte cassée", "botte" 등의 다양한 용어가 있었다. 이러한 용어들의 정확한 정의는 모호하지만, 일단 프루프에 동원된 공격의 타입이나 사슬의 등급을 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botte는 검의 일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haute나 demi-cloueurs는 각 사슬을 물리는 리벳이 하나냐 두개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보통의 사슬은 리벳 하나로 물려놓지만 더 큰 강도를 얻기 위해 리벳 두개를 사용한 유물도 존재한다. "de toute botte"는 검과 도끼, 화살과 쇠뇌에 대응하는 토탈 프루프를 표현하는 것 같다.

프루프 기록에서는 보통의 쇠뇌와 권양기로 장전하는 고위력의 쇠뇌를 구분하고 있으므로, 열처리를 거친 솔리드링과 리벳링으로 만든 것을 더블 메일로 두텁게 만든 사슬 갑옷이라면 화살에 대한 방호가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6 쇠퇴

이런 무시무시한 방어력의 체인메일도 존재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라 그런 것들은 역사적으로 전혀 보편적이지 않았다. 확신할만한 유물을 찾기 어려운 판이니 뭐. 솔직히 말해 사슬갑옷은 구조상 본질적으로 화살에 약할 수 밖에 없다. 잘 만든 사슬갑옷은 보통 수준의 활이라면 근거리 직격은 몰라도 흐르는 화살의 피해 정도는 막아줄 수 있는 방어력은 가지겠지만, 더블 메일이 그리 흔하게 쓰이지 않았으니 사슬갑옷이 약하다는 평판은 당연하다. 게다가 전쟁터에는 쇠뇌나 장궁 같은 매우 장력이 강한 투사무기가 설치고 있다.

12세기 연대기기록자 웨일즈의 제랄드가 남긴 일화에 따르면, 당시 12세기 후반 웨일즈의 국경선에서는 영국인 남작 윌리엄 드 브라오스가 보낸 병력과 웨일즈인들 간에 산발적인 전투가 잦았는데, 웨일즈의 장궁병이 말에 타고 있는 영국인 맨앳암즈를 쏘아맞추었더니 허벅지를 관통해서 말까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살은 우선 그 맨앳암즈의 호버크를 뚫고, 그 아래의 쇼스를 뚫고, 그 아래의 가죽옷과 맨앳암즈의 허벅지를 관통해서, 가죽으로 된 말안장을 뚫어서, 말 몸통에 박혀버린 것[4]이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일인가! 이 위력에 빠져버린 영국이 장궁병을 미칠듯이 양성해서 운용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하지만 장궁만이 전장에서 두려운 것은 아니다. 도끼, , 할버드 같은 무기들은 충분히 사슬갑옷을 상대할 위력이 있었고, 실제로 이런 무기를 가진 하층민이 기사들을 물리친 예는 여럿 있다. 1302년 플랑드르에서 벌어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는 할버드나 구텐탁 같은 류의 무기를 가진 플랑드르인 민병대가 완전무장한 다수의 프랑스 정규군과 플랑드르 귀족 기사들을 물리친 적이 있고, 1315년 모르가르텐에서 스위스의 농민들은 할버드로 오스트리아 맨앳암즈를 박살내버렸다. 영국에서도 1314년 바낙번 전투에서 초기형 파이크 등으로 무장한 로버트 브루스의 군대가 영국왕 에드워드 2세의 군대를 물리치는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물론 이 사건들이 사슬과 판금갑옷의 교차기에 있었던 중요한 전투란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지만, 이러한 전투들이 사슬갑옷 때문에 이기고 졌다고 말하는 것은 좀 넌센스고 전술, 사기, 각종 정황적인 요소가 훨씬 중요하다. 사슬이 쇠퇴하고 판금이 등장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미 13세기 초반부터 서서히 이루어져가던 일이다. 사슬갑옷을 사용하면서도 팔다리의 보호를 위해서 판금으로 만들어진 트랜지셔널 아머, 그러니까 플레이트 메일을 도입한 과도기적인 시대를 Transition Period라고 한다.

판금이 보편화되던 시대에 이르면 손이 많이가는 사슬갑옷의 제조비용이 판금의 가격을 뛰어넘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때문에 판금이 보급되기 시작하면 사슬갑옷은 도태될 수 밖에 없었다.

17세기에 들어 일시적으로 동유럽에서는 체인메일을 약간 쓰긴 했다. 판금갑옷이 총기에 의미있는 방어력을 가지려면, 3 mm 이상으로 두꺼워져야 했기 때문에, 칼이라도 막기 위해서 무겁고 비싼 판금갑옷 대신 보다 가볍고 편한 갑옷이 기병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소가죽으로 만든 코트가 유행했다. 폴란드에서는 셰프니케(쇠를 입은 자)라 불리는 중산층 징집 기병들이 체인메일 슈트를 입었고, 러시아도 마찬가지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이었을 뿐이고, 보병화력이 증가하는 17세기 후반에는 다시 퇴출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총을 맞으면 총탄이 박히는 충격 덕분에 사슬갑옷의 사슬이 부서져서 파편처럼 몸 깊숙히 박힌다라는 점이다. 게다가 이렇게 박힌 사슬의 파편은 외과수술을 해도 100% 제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큰 문제를 일으킨다. 당장 무진전쟁에서 사슬갑옷을 입은 막부군 정예 병력은 총탄을 맞을 경우 갑옷을 입지 않은 근왕측 병사보다 생존확률이 더 떨어졌는데, 일단 현장에서 과다출혈로 죽는 것은 기본이고, 현장에서 살더라도 사슬 파편 덕분에 파상풍에 걸려죽었다. 게다가 천운으로 살아남더라도 몸 안에 있는 사슬 파편 덕분에 육체적 노동을 요하는 일을 못하니 사실상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덕분에 전장에서 살고 싶다면 사슬갑옷따위는 벗고 다니라는 격언이 퍼지게 된다.

그래서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총탄에 맞아도 갑옷파편으로 인한 부상이 상대적으로 드문 판금을 이용한 갑옷을 사용했고, 그 이후에는 갑옷 자체가 더 이상 방어력을 보장하지 못해서 쇠퇴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인도만이 19세기까지 실전 갑옷으로 체인메일을 이용했는데, 인도는 근대적인 군대와 포병을 운용하면서도 여전히 방패나 검, 갑옷을 애용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17 현대

군용으로는 이미 17세기에 가치를 잃어버리고 퇴출되었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전차 부대원들의 방호복으로 뜬금없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5]. 그 당시의 느리고 육중한 육상전함 형태의 전차는 방어력이 어찌됐든 간에 적군의 표적이 되기 매우 쉬웠기 때문에, 피격당했을 때 전차 안에서 튀어다니는 파편 등의 방호를 위하여 입었다고.
현대에도 체인메일의 수요층은 존재한다. 리인액터를 비롯하여 산업 현장의 안전장구로도 사용되고, 멋있어서 사는 사람들까지 다양한데 과거의 군용과는 다른 점이 몇가지 있다.

벗티드 메일(Butted mail)의 비중이 굉장히 높다. 이는 더이상 체인메일로 실전을 뛰지는 않지만 사슬갑옷은 가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강화 처리가 없어 가격이 싼 체인메일을 제공하기 때문인데, 방어력은 낮은 AR값[6] 과 더불어 칼로 확 베면 링이 우수수 떨어지는 절망적인 수준이다. 힘만줘도 우수수 떨어질 정도니 말 다했지. 촘촘하게 만들면 방어력은 검의 찌르기까지는 막아낼 수 있지만, 이 경우 무게가 역사적 무게보다 5kg이상 무거워진다는게 큰 문제다. 현재는 이 문제 때문에 Get Dress For Battle라는 업체에서 인장강도가 굉장히 강한 스프링강으로 만든 벗티드 메일이 나오고 있지만 그래도 메이커측에서 격투는 삼가하도록 하고 있는 정도다. 중세의 갑옷보다 덜 촘촘하다.

스테인리스로 만든 체인메일이 나온다. 원래 체인메일은 녹이 상당히 잘 스는 물건이며, 이를 세척하기 위해 과거에는 통에 모래와 체인메일을 넣고 식초를 넣어 마구 굴렸다. 이렇게 하면 모래에 갈려 녹이 떨어지니까. 그러나 취미삼아 갑옷을 사는 현대인들이 갑옷을 모실리 없다. 그러니 스테인리스로 만든 것들이 나온다. 보통 현대 체인메일들은 Mild steel혹은 Iron으로 만들어지는데, 스테인리스 체인메일은 이것보다 보다 튼튼하다는 장점도 있다. 그래서 비싸다.

머신웰디드 메일도 있다. 정밀기계로 짠 것으로 상어사육사들의 보호복이나 산업현장의 파편방지용 커튼, 육가공용의 날붙이 방어용으로 쓰인다. 링은 굉장히 작지만 하나하나 용접하고 또 스테인리스라 굉장히 튼튼하다는게 특징. 원래 산업용이지만 그 가벼움 때문에 비고증 리인액트 계통에서도 쓰이고 있다. 다만 대개 산업방호복 수준이라 철사가 가늘고 두께도 얇다는 문제가 있어 사람 대 사람의 대련용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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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잘못 알려진 사슬갑옷들

Samuel Rusu Meyrick 같은 19세기 학자는 중세의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서 갑옷의 형태를 문자... 아니, 그림 그대로 재현해보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니까 보통의 유럽식 4-in-1이 아닌, 그림에 보이는 패턴을 그대로 재현을 해보려고 용을 썼던 것이다. 19세기 학자들의 연구는 우리 연구의 기초를 제시해주는 소중한 것들이지만, 그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사실 좀 무리가 있는 시도였다. 중세 그림에서 보여지는 특이한 무늬의 갑옷들은 대부분 별달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사슬 그림을 단순화/패턴화해서 그린 것인 경우가 많았다는게 문제다.

예를 들어 바이외 태잎스트리에서 보이는 갑옷들은 그냥 사슬갑옷이 아니라 링메일, 밴디드 메일처럼 보이는 것이 많지만, 거기 나오는 거는 전부 다 그냥 체인메일이다.

그런 식으로 (아마도 실제 사용되지 않았을, 실존하지 않았을) 갑옷의 패턴이 잘못 알려진 것들이 있는데…

18.1 밴디드 메일(Banded mail)


갑옷의 무늬가 마치 띠처럼 길게 연결되어있는 것에 착안해서, 뭔가 띠처럼 무늬가 들어가게 체인 링을 엮어보다 만들어낸 형태다. 19세기 학자들은 갑옷을 구성하는 보호판 또는 링을 띠처럼 연결해놓은 모양새라고 유추했는데, 이 형태로 갑옷이 만들어지려면... 가죽 천 두겹에 길게 박음질을 해서 띠 형태의 주머니를 만들고, 이 안에 체인링을 빼곡히 채우는 형태로 재현을 해봤다. 또는, 체인링을 엽전 꿰듯이 길게 꿰어서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건 한번도 실존한 적이 없다. 사실은 실험적으로 만들어본 형태일 뿐이고, 19세기만 하더라도 밴디드 메일이라는 것이 실제 형태라고 생각했지만 이후의 학자들은 이게 중세식의 그림을 잘못 해석했을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8.2 링메일(Ringmail)

사슬끼리 연결하는게 아니라 링을 천 갑옷 등에 꿰메어서 만들어 놓은, 스케일 아머 같은 갑옷이다. 이것 역시 빅토리아 시대의 학자들이 그림을 그대로 해석해 보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밴디드 메일과는 달리 링메일은 실존하긴 했다. 단지 이것이 그림과 조각에 등장하는 만큼 보편적으로 중세 유럽에서 사용되지 않았던게 문제지. 그림을 그대로 읽는다면 사슬갑옷 만큼이나 흔하게 존재했어야 하는데, 유럽에서는 (아래 설명하는 다른 종류를 제외하면) 중세시대의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때문에 보통의 메일을 잘못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게다가 링메일이라는 용어도 문제가 있다. 링과 메일은 동어반복이며, 학자들은 체인메일의 변형 또는 메일을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메일이라는 표현을 허용하고 있다. 이 갑옷은 차라리 스케일 아머의 친척뻘에 가깝고 스케일 아머보다 덜 촘촘하고 더 유연하다. 따라서 링메일이 아니라 링 아머(ring armour)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일단, 링 아머 형태의 갑옷은 동양에도 유럽에도 있었다. 16~17세기 기록에서는 eyelet doublet이나 eyelet coat이라고 불리고 독일에서는 "Schiessjoppe"라는 명칭으로 불린, 더블릿이나 외투에 링을 꿰메어놓은 형태의 갑옷의 기록과 유물이 남아있다. 이것은 확실히 링 아머라고 할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중세가 아닌 근세 시대의 갑옷이다. 카롤링거 시대 프랑크 족의 것 중에는 일반 천 옷 위에 링이나 디스크를 붙여서 보강하여 전투복으로 사용한 것이 있는데 (프랑스어로 broigne maclée라고 부른다) 이걸 사료의 그림을 해석해서 만든 링 아머와 같은 것으로 봐야할지는 조금 미묘한 감이 있다.

18.3 그 외

이외에도 Meyrick은 자신이 연구 과정에서 실험해본 패턴을 tegulated mail, mascled mail, trelliced mail 등으로 명칭을 붙여서 의견을 제시했는데, John Hewitt나 Charles Ffoulkes 같은 학자들은 마이릭의 의견이 옳지 않다고 보았으며 20세기에 들어서서 최종적으로 Claude Blaire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서 이것이 도검갑주계에서 보편론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마이릭의 설을 지지하던 Charles Henry Ashdown, Eugène Emmanuel Viollet-le-duc 같은 후대 학자들의 의견이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 등에서 채용된 탓에 실존하지 않는 갑옷, 잘못된 용어가 서브컬쳐계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밴디드 메일과 링메일 같은게 서브컬쳐 계열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던전 앤 드래곤가 게임 상에 갑옷으로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 갑옷에나 대고 냅다 mail이란 단어를 붙인 것도 댄디의 원죄다. 스케일메일, 밴디드메일, 링메일. 등. 때문에 AD&D 시절 드래곤 매거진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적이 있다. 뭐, 결국 말쌈하던 사람들끼리 판타지니까 가능 'ㅅ' 하고 배째고 넘어갔고, 결국 4판 가서는 체인 플레이트로 통폐합. 플레이트가 아니라 아머랬지!

그런데 이건 말을 꺼낸 댄디도 문제지만, 게임책을 곧이곧대로 믿고 교차검증 안해보고 주워섬기는 놈도 바보다. 게다가 댄디에 나오는 밴디드 메일은 사실 엽전꿰듯이 사슬링을 꿰어놨다기보다는 패딩 위에 얇은 사슬 위에 작은 갑옷조각을 줄지어서 띠처럼 연결해서 보강해서 갑옷 형태를 만들었다고 표현해서, 마치 스플린트 메일이나 로리카 세그먼타타를 떠올릴랑말랑하게 만드는 요상한 느낌으로 표현해놓았다.

19 미디어에서

서구권에서는 그나마 다른 문화권보다 사슬갑옷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지만, 플레이트 아머에 비해 인식이 떨어져 잘 등장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판금 갑옷이 간지 면에서는 압도적이기 때문. 때문에 엑스트라나 조연이 착용하거는 경우가 많다. 다만 주인공 세력이 바이킹, 노르만과 같은 북유럽 계열인 경우 마초성을 강조해서인지 맨살에(!) 사슬반팔만 입는 연출이 많다. 그 외에는 고증에 충실한 작품에서나 등장하는 편.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의외로 반지의 제왕 실사영화 시리즈호빗 실사영화 시리즈의 주역들은 위에 옷을 입어서 잘 안 보이지만 전부 사슬갑옷 아니면 찰갑을 입고 있다. 게다가 어떻게 된 게 엑스트라에 가까워질수록 갑옷이 점점 좋아진다(···). 오히려 할디르같은 쩌리나 곤도르 병사들이 판금을 입고 있으며, 악역우루크-하이나 전투트롤들의 갑옷도 투박하긴 하지만 상당히 중장갑이다.

한국이나 중국 사극에서는 그냥 천옷, 두정갑이나 찰갑, 그리고 찰갑의 탈을 쓴 판금갑옷에 밀려 등장이 거의 없다. 거의 유일하게 주인공이 입은 경우는 천추태후(드라마). 재미있는 것은 이 사슬갑옷 소품은 반지의 제왕 제작진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20 참고문헌

A Knight And His Armor by Ewart Oakeshott
Armour & weapons by Charles J. Ffoulkes
The armourer and his craft from the XIth to the XVIth century by Charles J. Ffoulkes
Rusu, M., “Das Keltische Fürstengrab von Ciumeşti in Rumänien”, Germania 50, 1969
Dragon Magazine issue 123(July 1987), 126(October 1987), 131(March 1988)
http://en.wikipedia.org/wiki/Mail_(armour)
http://en.wikipedia.org/wiki/Hauberk
http://en.wikipedia.org/wiki/Surcoat
http://en.wikipedia.org/wiki/Ringmail
http://en.wikipedia.org/wiki/Banded_mail
http://www.arador.com/articles/chainmail.html

  1. 밑의 사슬갑옷 역사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사슬갑옷은 철기시대가 도래한 이후 등장한 갑옷이다. 간혹 청동기 시대 벽화에 사슬갑옷 비스므리한 게 그려졌다고 청동기시대에도 사슬갑옷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지만 애초에 청동으로 사슬형태의 갑옷을 만드는 건 무리다. 이유는 청동과 철의 재질의 차이 때문인데 이는 밑에 후술하겠다.
  2. 이것이 나중에 철기 시대에 철갑으로 진화한다.
  3. 스타킹이 본래 남자 귀족의 옷이었기 때문에 가터벨트 또한 남자의 물건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전혀 이상할 것이 아니다.
  4. 1191년의 무장은 쇄자갑이었고, 이는 대퇴부를 보호하는 곳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하나의 화살이 다리를 뚫고, 말 안장에 꽂혔다고 믿어져 왔던 이야기는 과장된 것이다. 그 기사는 여전히 말을 몰고 다녔으며, 오직 다른 쪽의 다리에 두번째의 화살을 맞았을 뿐이다. Osprey Publishing, Weapon 030, The Longbow, 66 page을 편역하였음.
  5. 이 시절은 참호에서의 백병전 때문에 플레이트 아머를 연상시키는 방탄복이라든지, 메이스처럼 생긴 흉기 따위가 나오기도 했다.
  6. 체인메일의 밀도를 구하는 공식. 체인메일의 링의 내부 직경÷링의 철사 두께=AR값. 벗티드는 AR값이 5밑으로 나와야만 검의 베기를 막을 수 있지만, 그래도 찌르기는 막기 어렵다. 중세 실전용은 AR값이 5이하, 정말 촘촘하게 만든 것은 4이하로 내려가는 괴물도 있지만. 이 벗티드 메일은 AR값이 6에 달하며 칼로 베기만 해도 링이 우수수 떨어지는 그냥 코스튬 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