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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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齊家
1750 ~ 1805

1 소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차수, 재선이며 호는 초정(楚亭), 위항도인이다. 한양(現 서울특별시) 출신이며 본관은 밀양.

2 생애

1750년 왕실 승지 박평의 서자(庶子)로 출생했으며 신분이 서자였던 탓에 승지의 아들이긴 하지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일찍이 서화(書畵)의 재주가 뛰어난 영향으로 신동(神童)으로 평가받았으며 19세 때 스승인 연암 박지원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고 이덕무, 유득공 등 북학파 연구자들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인 북학파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2살 때인 1761년 때는 하마터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 뻔한 적이 있었다. 당시 국법에는 한양 도성 내에서 집을 사고 파는 것으로 위장한 채 함부로 일반 백성들의 집을 빼앗는 행위를 금하고 있었다. 이를 '탈입 금령'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영조가 이 법을 제대로 시행하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 불시에 위반자 목록을 보고하라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박제가의 어머니인 이씨가 걸려든 것. 대부분의 신하들은 이씨가 미망인이자 첩인 점을 감안해서 정상 참작하자고 했지만 영조는 일일이 사정을 봐줘서는 끝도 없다는 다른 신하의 주장을 인용해서 원칙대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당시 이 금령 위반자에 대한 처벌은 벽지 유배형이었다. 하지만 여성인 이씨는 유배형에 처할 수 없었고 미성년자인 아들 박제가 또한 마찬가지였으므로 집안 노비 중 한명을 덕원으로 유배를 보내라고 결정을 내렸다. 노비는 무슨 죄 공짜 여행(?)에 밥주고 집주면 개이득 아니냐?

29세 때 으로 가서 청 왕조의 문물 및 유물을 접하게 되었고 의 학자들과 교류를 나누면서 이 때를 기록한 책인 '북학의(北學議)' 를 집필했다.

1779년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때부터 다산 정약용을 만나서 그와 교류를 나누었고 의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으며 41세 때 정조의 원자(후의 순조 임금) 탄생을 축하한 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연경에 건너갔다. 말년인 1801년에도 연경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자마자 흉서사건(凶書事件)의 주모자인 윤가기와 사돈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갔고 1805년 귀양이 풀렸으나 그 해 사망하였다.

3 여담

박제가와 함께 백탑에서 살던 이덕무, 유득공 등의 벗과 박지원, 홍대용 같은 스승들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책만 보는 바보'라는 책에서 보면 꽤나 이국적인 용모를 지닌 듯 하다. 책의 묘사에 따르면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 조선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눈동자 색이 녹색이었다고 하며 그 탓에 놀림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박제가에 대해 기록된 다른 책들의 모습으로 미루어, 성격이 온순하기보다는 활달하고 거침없는 편이었던 듯 하다. 이 점에서 이덕무와는 기묘하게 성격이 정반대인 듯 하면서도 잘 어울려 다녔다는 점이...

또한 식신이었던 모양. 한번에 냉면 3그릇과 만두 100개를 먹어치웠다는 기록도 있다. 이덕무가 이서구에게 보낸 글 중에는 자기만 단것을 먹고 이덕무 자신에겐 주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이 줬던 것까지 훔쳐 먹었으니 꾸짖어 달라고 징징 쓴 글 도 있다(...). 참고로 이덕무 본인도 단것에는 사족을 못 썼다고. 음식과 관련하여 정약용에게 개고기 레시피를 알려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4 청에 대한 애정

한편으로는 청나라에 대해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북학의에서 박제가는 청나라의 문물이나 문화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 자신의 나라였던 조선에 대해서는 상당히 후진국의 모습으로 바라보았고, 조선은 청나라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서슴치 않았다.[1] 다만 무조건 사대주의라고 보아선 안될 것이, 엄연히 조선의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목적에서 그렇게 주장한 것이고, 그 당시 조선에는 지나친 정신승리가 팽배했던 것이다. 박제가의 저작에서는 조선의 현실에 대한 염려와 진정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의 중국 찬양에 대해서, 박제가가 조선 땅에서는 서얼이라는 이유로 출세도 제한되고 재주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현실에서, 오히려 청나라 사람들은 그를 당대 최고 반열의 선비라 인정해 주었다는 점 때문에 그러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박제가는 연행을 여러 차례 다녀왔는데 그 때마다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선비들이 수두룩했고, 북경의 유리창 서점가에서는 심지어 그의 글씨와 그림이 위조품으로까지 돌아다니고 있었을 정도라 한다(...). 심지어 중국 사신이 조선에 와서 '다음번 사신 보낼 때 박제가 좀 보내주시면 안되겠느냐'는 청을 정조에게 할 정도였다고 하니... 중국에서 학문으로 인정받은 조선 선비 중 하나였으며, 그가 가진 중국 땅에서의 명성과 인맥은 훗날 그의 제자인 김정희가 중국에서 학술적 교류를 통해 큰 명성을 얻는 발판이 된다.

참고로 이분이 남긴 '북학의'를 보면 정말 자세하게 중국의 사물이나 관습이나 기술이 기록되어 있다. 관찰력은 매우 뛰어난 듯 하다. 하기야 직접 중국에 갔던 사람이니... 자세한 것은 정말 본인이 쓴 그대로 내용이 있는 북학의를 참고해 보도록 하자. 다만, 옛날 고전답게[2](...) 한자 낱말이 많으니 국어사전이 필요하다.
  1. 북학의에 따르면,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말을 써야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워낙 과격하면서도 진보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2. 고전 때문이 아니더라도 박제가는 중국어 공용론을 주장할 정도로 한자 사랑에 도가 깊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