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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苞
(? ~ 1400)
조선의 인물.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자 대장군에 임명되고 죽성군에 봉해졌으며, 1393년에는 사헌중승으로 있다가 현빈 유씨(왕세자 의안대군 이방석의 세자빈)의 일을 함부로 논했다고 해 여러 관리들과 함께 순군옥에 갇혔다가 이 일로 공신이라 귀양은 면하는 대신에 사저에서 근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394년에 변중량이 이회에게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이 병권을 장악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왕인 이성계가 변중량에게 물었는데, 변중량이 사실대로 답하였고, 박포가 이성계에게 "전하께서 국정을 잘못해 여러 번의 변고가 일어났습니다."라고 하자 박포는 변중량, 이회 등과 함께 문초됐다. 박포는 이들과 서로 따지면서 자신만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지만 결국 죽주에 유배되었다.
1396년에는 황주의 수령이 되었고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 때 조전 절제사로 있다가 이방원에게 가담해 정도원, 남은, 심효생 등의 동정을 몰래 정탐했으며, 이방원의 명령으로 민무질과 함께 조준을 부르려고 했다.
1398년에 지중추원사 의흥 삼군부 우군 동지절제사에 임명되었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토로했다가 죽주로 유배되었으며, 1400년에 회안대군 이방간을 충동질해서 이방원과 싸우게 하면서 제2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다. 이방간이 개경 시내에서 이방원에게 패하자 박포는 붙잡혀 관직이 삭탈되고 장형 1백 대를 받아 청해로 유배되었다.
공신녹권이 회수되었다가 이산으로 옮겨 유배되었으며, 2월 25일에 주살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황희가 박포의 처와 간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해당 내용을 쓴 사관인 이호문이 지나치게 악의적으로 황희를 비난한 사례가 많기 때문. 실록을 검토하던 정인지나 성삼문 등도 이 사건의 실체를 부정하며 '이건 이호문이 근거도 없이 써 놓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나, 그렇다고 해서 실록을 고의로 고쳤다는 선례를 남길수는 없다면서 그냥 해당 내용을 보존해 버렸다.
사실 2차 왕자의 난은 박포가 부추겼다지만 이방간 본인이 주도적으로 한 움직임이나 미리 전해들었던 태조 이성계와 정종 이방과는 넷째가 철부지처럼 군다며 탐탁치 않게 여겨 말렸고,[1] 역시 알고있던 이방원도 차마 또 자기 형제를 죽이기는 그랬는지 연극까지 펼쳐가면서 이방간의 투항을 유도한 후 박포에게 반란을 주도했다며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웠다고 볼 수 있다. 이방간이 반란 주도자면 이방간을 처형하는 걸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차라리 죽여
코미디빅리그의 브리지 코너인 개국공신에서 느닷없이 박포에 대한 내레이션[3]과 함께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