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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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자의 난
1차 왕자의 난2차 왕자의 난

1 개요

1400년에 조선시대 회안군[1] 이방간이 일으킨 난. 이 난을 주도한 회안군의 참모였던 박포가 회안군에게 간사한(...) 입을 놀려 회안군을 현혹시켜 일으킨 난이라고 해서 박포의 난이라고도 불린다.

물론 박포 또한 참모로써의 야심도 분명이 있었겠으나, 결국 앞장선 것은 회안군이기에 정안군이 어떻게든 형을 사형에 처하는 것을 막아보고자 박포에게 죄를 몽땅 뒤집어 씌웠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당장 이러한 반란의 주모자는 극형은 물론이고 집안까지 무사치 못하는데, 박포와 그외 주모자들만 참수당하고, 수괴인 회안군만은 귀양살이로 끝난것을 보면 더더욱. 심지어 박포는 역적 괴수라면서 바로 죽이지도 않고 일단 귀양을 보냈다 얼마 후 처형했다. 그것도 한 번 귀양지를 옮기기까지 했다.

2 배경

이방간은 태조 이성계의 4남으로, 후의 태종 이방원보다 형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노리는 야심을 품고 있었으나 특출난 능력이 없어서 주목받지 못했다.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닐듯 싶은데, 아무튼 눈에 띄는 실적이 없다. 큰 형 진안대군은 고려시절에 벼슬을 했고, 바로 아랫동생은 고려시대에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얻어 이성계가 아주 기뻐했다. 둘째 형아버지 따라 전장에서 활약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본인은 별로 주목받은 적이 없었다. 이방원보다 어린 동생들은 생략(참고로 이방원 바로 아랫동생인 덕안대군은 조선이 건국되기도 전에 죽었다). 참고로 셋째 형 익안대군은 이방원 편에 붙었다.

그런데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박포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2] 이를 노골적으로 떠들다가 열받은 방원에 의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대로 빡친 박포는 이방원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고 이방원을 쓰러뜨릴 만한 세력을 물색하던 중 대권에 노골적으로 야욕을 보이는 방간에게 접근하게 된다.

박포는 방간을 찾아가 방원이 너님을 죽이려 한다고 꾀었고 마침 방원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던 방간이 이에 솔깃하여 대책을 묻자 "첫째, 네 권력을 다 내려놓든가, 둘째, 먼 곳으로 피하든가, 셋째, 군사가 방원에 비해 약하니 기습을 해버리든가 하라"고 답했다.

3 전개

방간이 이에 반란을 결심하게 되고 사냥을 핑계로 군사를 모은 다음에 방원을 쳐서 개경 시내에서[3] 방간군과 방원군 간의 접전이 벌어지게 된다. 한편 방간은 정종에게 거병 사실을 알리고 상왕전을 지나면서 태조에게 알렸다. 근데 그 반응이 상당히 안 좋았으니,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금 뒤에 방간이 그 휘하 상장군(上將軍) 오용권(吳用權)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공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내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합니다. 청하건대, 주상은 놀라지 마십시오."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방간에게 가서 타이르기를,
"네가 난언(亂言)을 혹(惑)하여 듣고 동기(同氣)를 해치고자 꾀하니, 미치고 패악하기가 심하다. 네가 군사를 버리고 단기(單騎)로 대궐에 나오면, 내가 장차 보전하겠다."
하였다[4]. 이문화가 이르기 전에 방간이 이미 인친(姻親) 민원공(閔原功)·기사(騎士) 이성기(李成奇) 등의 부추김을 받아, 이맹종(李孟宗)과 휘하 수백 인을 거느리고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태상전(太上殿)을 지나다가, 사람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靖安)이 장차 신을 해치려 하니, 신이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발하여 응변(應變)합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하였다.

俄而, 芳幹使其麾下上將軍吳用權啓曰: "靖安公謀欲害我, 我不得已起兵攻之, 請上勿驚。" 上大怒, 使都承旨李文和, 往諭芳幹曰: "爾惑聽亂言, 謀戕同氣, 狂悖甚矣。 爾其釋兵, 單騎赴闕, 予將保全之。" 文和未至, 芳幹已爲姻親閔原功、騎士李成奇等所激, 率孟宗及麾下數百人, 擐甲執兵, 道過太上殿, 使人啓曰: "靖安將害臣, 臣不可空死, 故發兵應變。" 太上王大怒曰: "汝於靖安, 異父乎? 異母乎? 彼如牛人, 何乃至此耶!"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1월 28일 갑오 3번째기사

이 소식을 들은 방간은 전의를 상당히 상실하였다. 아버지와 형이 모두 말릴 정도이니 다들 방간이 질 게 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5]

아버지와 형 된 입장에서도 그 지긋지긋한 형제간의 싸움질을 겪었는데 또 형제싸움을 일으키려 하는 방간이 마뜩치 않았을 것이고, 애당초 결과가 뻔한 싸움으로 골육상쟁의 비극을 되풀이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또 이대로 방간의 군사행위를 묵과한다면 왕실의 위신 추락[6]은 물론이고 보위의 안정성이나 국가의 안보 자체가 위험해질 공산이 컸으니 이는 매우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편, 이방원은 이복삼촌 의안대군 이화, 아버지의 의형제(안다) 이지란, 조영무 등 측근과 종친들과 논의하여 이방간의 움직임을 모두 꿰고 있었고 어떻게 진압할지 작전회의까지 해놓고는 집앞에 병사들이 집결하자 어찌 아우가 형을 칠 수 있겠냐며 그래놓고 동생은 잘 죽였더랬지? 이방원: 사이 나쁜 계모의 자식인 이복동생은 형제로 안 침[7] 집안에 처박혀서 안나오는 쇼를 벌이다가 어찌 사사로운 정에 국가의 대사를 저버리려 하냐는 이화의 아주 그럴듯한 대응에 마지못해 나왔고, 갑옷을 입고 나와 말에 타서도 "정녕 피할 길이 없단 말인가?"라고 울면서 외쳐 수많은 병사들을 감동시켰다고 하며, 방간에게 화살을 쏘는 자는 베겠다는 명을 내려 방간을 살려줄 뜻을 확실히 보였다.

결국 2차 왕자의 난은 워낙 준비가 워낙 부족했고 편들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상왕 태조, 현 임금인 정종은 물론이고 태종 형제의 삼촌인 이화 등 대부분의 왕족들과 이지란 같은 공신들이 죄다 이방원 편을 들었다. 1차 왕자의 난과는 달리 실질적인 장남인 정종이 왕위에 올라 있는 상황이라 명분이 전혀 없었고, 애당초 방원이 방간의 행적을 포착하여 이미 계획을 다 짜고 있었던 참이라 이방간의 군대는 참패하고 만다. 실제로 죽은 사람조차 몇 없고 포위된 상황에서 양쪽에 화살 몇 번 오가더니 이내 방간의 군사가 와해되었다고 한다. 쿠데타는 아무나 일으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는 대목.

박포는 당연히 처형되었지만[8]# 이방원은 정종과 태조의 간청과 민심을 의식하여 이방간을 죽이지 않고 귀양을 보낸다. 그리고 이방간은 유배지에서 그럭저럭 편하게 살다가 죽는다.

오히려 방간의 아들 이맹종(李孟宗)이 더욱 경계를 받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맹종은 '활을 잘 쏘았으며 간사하고 꾀가 많았다'고 한다. 즉,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방간의 반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반란을 일으켰던 날 아침에 직접 방원의 저택으로 염탐을 오는 대담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맹종은 유폐 상태로 있다가 결국 자진하라는 어명을 받았는데, 그 때의 왕이 바로 세종대왕. 그것도 아버지가 상왕으로 있을 때도 아니라 태종 이방원 사후의 일이다. 세종시대에 몇 안되는 정치적 문제로 죽은 왕족. 다만 방간을 부관참시하라는 청은 거부하였으며 방간의 시집가지 않은 딸과 맹종의 유가족들에게 땅을 주어 생계를 유지하게 하였다.

2차 왕자의 난은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 형제가 5살 이하의 어린애였을 때의 사건이다. 맹종이 정안군의 저택에 방문했던 것은 거의 '암살'이나 '인질극'까지 노릴 수 있었던 상황이었던 만큼, 원한 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맹종 자체를 위험인물로 보았던 것은 분명하다.

4 후일담

회안군의 왕족 지위는 박탈당하지 않았지만, 그 후손들은 꽤 오랫동안 이름만 왕족 신세가 되었다.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한 것은 숙종 때. 복권의 달인 숙종

이게 뭔 소리냐면 왕족의 명부인 종친부인 선원록에 등록이 되지 못해서 군역이 나왔다는 이야기다. 양반은 군대 안가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조선시대 특히 초기는 그런 것 없이 일단 다 대상이었다. 다만 무과로 가거나, 아니면 과거준비하는 학생으로 분류되거나 관직이 올라가면 병역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군대 끌려간 사람이 적을 뿐이다. 물론 후기로 가면 병역의 군포화가 진행되면서 큰 의미는 없어지고 그냥 빠지지만.

그런데 종친들은 병역 등에 면세 혜택이 있었는데 방간쪽은 쥐뿔도 없었다. 특히 방간의 후손은 폐서인이 되었다고 해서 노역까지 나왔다. 결국 반발했는데 정부에서는 노역하는 것이 맞다라는 결론을 낸 적이 있다. 이 정도면 이름만 왕족도 아니고, 자기들만 왕족이라고 주장한거다.

여담으로 이때 익안군 이방의까지 덩달아서 실각했다. 잘못한게 있어서 실각한 것은 아니고 이방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듣자 즉각 자신의 절제사 도장과 사병 명부를 나라에 바쳐 권력욕이 없음을 증명해 그날로 대권구도에서 배제되었다. 독특한 자기관리로 당시에도 유명했는데, 그 방법이라는 것이 술자리에서라도 정국 애기가 나오면 아예 입을 닫아버렸던 것. 그 덕분에 그는 왕자로써의 부귀를 누리면서 천수를 누리며 살았다.

5 창작물에서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기록에서처럼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초반에는 이방원측이 수세에 몰리고 치열한 전투가 여러차례 벌이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당일날 집에 있었다는 박포는 여기선 방간을 따라 전투에 나선다. 도성 외부와의 연락을 차다하고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방간측에 맞서 얼마 안되는 선봉부대로 최대한 시간을 끄는 한편[9] 정치력을 최대한 발휘해 대신과 종친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명분의 우위를 점하고 유격전으로 도성 외곽 군사를 끌어모으는 방원측의 대결이 치열하다. 고증을 일부러 어긴 대신 긴박감을 잘 살린 전투씬이나 숨가쁘게 진행되는 시퀸스가 매우 훌륭하며 반란 진압 이후 우리들의 세상이라며 희희낙락하던 공신들이 앗 하는 순간 사병 다 내주고 유배길에 오르는 장면도 볼 만하다.

대왕 세종에서는 회상신으로 등장하는데, 용의 눈물에서처럼 전투가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방간의 부하들이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형제를 납치해서 인질로 삼자 이방원과 민씨 형제가 직접 구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사건에 대해 세 형제가 각기 다르게 해석하는 것도 포인트.

47~48회에서 1차 왕자의 난을 다룬 육룡이 나르샤는 최종화에서 다뤄질 것 같았으나 과정은 2년 후란 자막과 함께 스킵되고 개그 캐릭터방간이 이미 옥사에 갇혀 방원에게 매우 호방한 목소리목숨만은 살려달라는 장면 정도만 나왔다.
  1. 후일 회안대군으로 추증되나 당시엔 회안군으로 불렸으므로 이렇게 기술한다.
  2. 1등이 아니라 2등공신이라는 점에 대해 강하게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게, 애시당초 공신책봉은 어느 정도는 사후수습을 위해 정치적인 안배를 해 줄 수 밖에 없는 문제이다.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이방원에게 무릎꿇은 것 말고는 딱히 한 일도 없는 조준, 김사형이 1등공신에 올라있는 반면 정작 이방원의 최측근이자 실질적으로 쿠데타를 주도한 핵심실세들인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등은 모두 2등공신이었다. 그리고 조준 등은 원로로서 구색맞추기 1등공신 대접은 받았지만 이성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이전에 비해 실권은 거의 잃어버린 반면, 2등공신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등은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권력의 핵심으로 왠만한 1등공신들보다 훨신 더 강한 권세를 누린다.그리고 하나씩 제거된다
  3. 당시 정종이 한성에서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이전한 상태였었다(1399년), 이후 한성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건 태종 5년인 1405년의 일.
  4. 해석: 헛소리에 홀려서 동생을 죽이려고 하다니 니가 미쳤구나. 무장 해제하고 혼자 대궐로 들어오면 내가 책임지고 목숨을 보장하겠다.
  5. 특히 이성계는 이방원이 자신의 두 를 모두 죽인 것 때문에 이방원을 매우 증오했다. 그런데도 저렇게 말린 걸 보면 이성계도 이방간이 정신 나간 것이라고 생각한 듯.
  6. 개국하자마자 왕자들끼리 피 튀기며 싸움질하는 정권의 이미지가 어떻게 좋겠는가? 하물며 창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왕조 자체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민심까지 등을 돌리는 건 치명적인 사태였다. 당장 삼국지에서 삼국을 통일한 서진 또한 팔왕의 난으로 정통성에 타격을 입고 국가 막장 테크를 밟은 전례가 있다.
  7. 다만 <태조실록>에 기록된 바로는 이방원은 방석과 방번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나 주변에서 나서 죽인 것이다. 일단 기록에 따르자면 말이다. 믿고 말고는 본인이 판단할 일. 다만 방번은 몰라도 방석은 한 번 세자위에 앉았던 인물이니 만큼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후 치세를 펼치는 데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을 그 이방원이 방석을 살려주려 했을지는... 그리고 역사는 승자에게 유리하게 기록된다는 말이 있으니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8. 정작 박포는 꼬셔놓고는 싸움에는 가담안하고 집에 있었다. 원래는 죽일 정도의 죄는 없었지만 방간을 죽일 수는 없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기에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 여담으로 이 시기를 다룬 사극 용의 눈물에 박포의 처형이 나왔는데, 망나니가 막걸리를 연신 세번이나 박포의 얼굴에다가 뿜어대는 플짤이 은근히 코믹하다. 박포 역을 맡은 배우도 잘 보면 웃음을 참으려고 애쓴다.
  9. 이 역할을 맡은 조영무와 이천우의 병력은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둘의 대사를 보면 사병의 절반 이상이 소모되었다. 희생이 컸던 만큼 두 사람은 방원의 사병혁파때 엄청난 배신감을 내비친다. 제일 사병이 많은 이거이는 방원과의 불편해진 관계때문에 막판에야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