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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영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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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사
생몰년도 | 1346 - 1405 |
이름 | 조준(趙浚) |
자 | 명중(明仲)[1] |
호 | 우재(吁齋), 송당(松堂) |
호 | 문충(文忠) |
여말선초(麗末鮮初)에 활약한 인물이자 조선(朝鮮) 왕조의 핵심 개국공신 중 하나. 그리고 조선 왕조 초대 영의정[2]
평양에서 태어났고 137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좌우위호군 겸 통례문부사가 되었으며, 강릉도안렴사·지제교 등을 거쳐 전법판서에 올랐다. 1382년 최영 휘하에서 체찰사로 왜구를 토벌하고, 그뒤 도검찰사로 있을 때 왜구를 토평해 선위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은퇴하였다. 1388년 허금 등과 우왕의 폐위를 모의하고 이성계의 일파로 밀직사지사사 겸 대사헌에 올랐다.
이성계와 전제 개혁의 필요성을 협의, 상소하였고, 문하평리로서 조선군충의군에 봉해진 뒤 전제 개혁을 반대하는 조민수를 탄핵, 유배케 한 뒤 1390년 문하부지사 겸 대사헌이 되었다. 그 해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개국의 경제적인 기반을 닦고,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에 봉해진 뒤, 오도도통사로 병권을 장악하고, 적장자 아니면 공이 있는 자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묵살당하자 사직하였으나 왕의 만류로 재차 문하좌시중을 지내다가 신덕왕후 강씨의 무고로 한때 투옥된 뒤 좌정승에 올랐다.
이후 한때 동지였던 정도전, 남은등 이 요동정벌을 논하자, 대국인 명을 상대하는 위험과 천도로 인해 백성들의 사정이 곤궁하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과, 그후에도 이방원의 책봉을 주장했으며, 그해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고, 1400년 문하부판사 때 태종을 옹립하여 영의정 부사에 오르고 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시문에 능했고, 토지제도에 밝은 학자로 하륜 등과 함께 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 1405년 나이 60살에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후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송당문집이 있다.
그의 아들로는 조대림이 있었는데, 후일 조대림 사건에 연루되기도 한다.
2 일대기
2.1 집안 내력과 어린 시절
조준은 조덕유(趙德裕)와 오씨(吳氏)사이에서 1346년 태어났다,
조준이 태어난 집안은 그리 한미한 집안은 아니었고 오히려 권문세족이라 할 수 있는 명문이었다. 조준의 가문인 평양 조씨 가문의 시조 조춘(趙椿)은 고려 때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남송(南宋)에 가서 금(金)나라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워 송나라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고 한다. 조춘의 후손이자 조준의 선조인 조인규(趙仁規)는 충렬왕(忠烈王) 무렵에 조정에서 활약한 인물로, 고려사의 열전에서 국구(國舅)로서 당대에 최고 권력을 잡아 아들과 사위도 모두 장상(將相)의 반열에 올랐으니 아무도 그와 견줄 수 없었다며 대놓고 권력 짱이었다고 했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당시가 원간섭기다 보니 나라에서 정책으로 젊은 자제들 중에 싹수가 보이는 사람들을 뽑아 몽골어를 가르쳤는데, 조인규는 처음에는 별로 능력을 보이지 못하였지만 두문불출 노력해서 몽골어를 잘하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쿠빌라이 칸 앞에서 몽골어로 대답을 잘해서 쿠빌라이 칸이 "야 저 서람 몽골어 잘한다. 굳이 중간에 통역[3]을 둘 필요도 없겠네."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원나라 사신이 고려에 앙심을 품고 고려의 풍속을 아예 몽골식으로 바꾸자며 칸에게 상소한 적이 있었는데, 조인규가 칸을 만나 이 상소에 대해 조리 있게 반박하여 이야기하였기에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기존 정책인 '불개토풍(不改土風, 기존의 풍습을 바꾸지 않는다)'이 유지되었다고…. 이처럼 뛰어난 몽골어 실력을 바탕으로 원나라에 30회나 사신으로 드나들었기에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고려사 열전 조인규전에 나오는 기록.
또한 조준의 부친인 조덕유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는 등 대대로 재상을 지낸 가문의 사람이었다. 따라서 쿠데타 세력에 동조하여 새 왕조를 열었다고 해도 조준은 정치 권력이 떨어지는 집안은 아니었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조준이었지만, 졸기에서는 어렸을 때의 조준이 조금도 귀공자처럼 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뜻도 크고 기개도 뛰어나며 효도도 잘했는데, 어느날 조준의 어머니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위풍당당하게 지나가고 앞에서 "물렀거라!" 하는 모습을 보자 "우리 아들 놈들이 수는 많아도 한 놈도 과거에 급제한 놈이 없으니 어디에 써먹누 ㅠㅠㅠ" 하고 한탄했다. 그 모습을 본 조준은 눈물을 흘리면서 열심히 배워야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4]
그렇게 열심히 배우던 중 1371년, 26살이었던 조준이 책을 끼고 궁전 옆을 지나고 있었는데, 마침 수덕궁(壽德宮)에 있던 공민왕(恭愍王)은 젊은이가 책을 가지고 다니자 기특하게 생각해서 불러서 집안 내력을 물어보고 보마배지유(寶馬陪指諭)[5]에 소속시키고 아꼈다고 한다. 그런데 조준은 공민왕이 홍륜(洪倫)을 시켜 난행을 저지르자 "막장인 세상인데 무슨 말을 할까! 임금이 소인배들하고만 이야기 하네!" 하고 탄식하며 디스했다(……).
2.2 우왕 시절
그러던 중에 조준은 1374년 정당문학 이무방(李茂芳)과 밀직부사 염흥방(廉興邦)이 주관한 과거에서 김자수(金子粹) 등과 함께 꿈에 그리던 급제에 성공했다. 그런데 바로 이해 공민왕 시해 사건이 발생했기에 실질적인 관료 생활은 우왕(禑王) 시절부터 시작한 셈이다.
과거에 급제한 조준은 일단 지방으로 내려갔는데,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로 임명되어 강원도의 안찰사로 나갔는데, 지방의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신뢰를 모두 얻고 사납고 간사한 무리를 없앴다는 좋은 평을 받았다. 그 무렵 정선군(旌善郡)에 들렀을 때는 이런 시도 지었다고 한다.
오래지 않아 동쪽 명주(溟州)땅을 깨끗이 씻으리니, 이 땅의 백성들이여 눈을 씻고 맑아질 날을 기다리라.
이 시를 들은 사람들은 "저 놈, 보통 뜻을 가진 놈이 아니구만."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이후 조준은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사헌장령(司憲掌令)으로 임명했다가 감문위(監門衛) 대호군(大護軍) 지제교(知製敎)로 전임 되었는데, 이 당시 「기양소(祈禳䟽)」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이 상소에 정직하고 성스런 사람을 소외시키고 아첨배와 사악한 무리를 좋아한다라는 강한 구절이 있었는데, 이를 본 김주(金湊) 등은 "이거 위험하다."고 여겼는지 고쳐쓰게 한 일도 있었다. 그 무렵부터도 이미 슬쩍슬쩍 강한 개혁적 성격이 나온 듯.
이후 조준은 순조롭게 승진하여 법률의 일을 맡는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는데, 이 당시는 한반도 전역을 유린하던 왜구(倭寇)의 공세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 왜구들은 1380년의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나, 1383년 정지(鄭地)의 관음포전투(觀音浦戰鬪) 전까지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숫자가 상당했던 판이었다.[6] 특히 경상도 지역은 이 왜구의 기세가 심하여 초토화가 될 판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장을 달려가던 고려군은 사기도 엉망이고 장수들도 도저히 왜구와 싸우려고 하질 않았다. 이 때문에 고민하던 최영(崔瑩)은 조준을 천거하여 체복사(體覆使)로 삼았다.[7]
일종의 감찰관으로 지방에 내려간 조준은 왜구가 와도 머뭇거리며 싸우지 않은 도순문사(都巡問使) 이거인(李居仁)을 불러 "너 이색히 이 따위로 할거야?"라고 다그치고, 병마사(兵馬使) 유익환(兪益桓)은 불러다 아예 참수해버렸다. 그러자 이거인 등은 공포에 질려 "차라리 적과 싸우다 죽지 조준 공의 위세를 거스르면 안되겠다." 하고는 힘껏 싸우니 연이어 승전보가 울리며 경상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때가 1382년이었다. 전투 이후에 조준은 효자와 열녀로써 적과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도당(都堂)에 올려 그들이 표창을 받게 함으로써 뒷처리도 깔끔하게 했다.
왜구의 준동을 병사를 더 보낸 것도 아니고, 막장인 군사들을 독려한 감찰관 하나로 돈 한 푼 더 안 쓰고 막아내게 되자, 우왕은 대단히 기뻤는지 "양광도와 경상도에 왜구가 무지하게 날뛰잖아. 근데 군대 사기가 막장이라 애들이 잘 싸우지를 않아. 그러니 네가 계속 감찰관으로 뛰면서 겁먹고 안 싸우는 원수들하고 도순무사들 좀 닥달해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준은 우선 어머니의 나이가 여든 세를 넘었다고 발을 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왕이 계속해서 권고하자 "정 그러면 내가 두 개 도를 관할하며 패전한 장수를 마음대로 처결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한 번 맡아보겠다."고 말했다.
헌데 무인 세력들이 이 제안을 대단히 껄끄럽게 여겨 우왕에게 말해 이를 취소시켰다. 이 임명은 백지화 되었지만, 조준은 도검찰사(都檢察使)가 되고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의 호를 내려받는 등 이인임(李仁任) 등에게 물을 먹은 적이 있었던 다른 신진사대부들과 다르게 비교적 순조로운 관료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에 조준은 별다른 탄핵을 받지 않았는데도 조정의 상황이 혼란스럽자 "에라, 더러워서 더 못보겠네!"라는 식으로 그냥 낙향해서 4년 동안 방콕 생활을 했다. 그 동안 조준은 "정치 더럽다 더러워"라는 태도로 경서와 사서 읽기만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8]
이후 최영이 임견미(林堅味), 염흥방 등을 제거하고 이름이 있던 조준을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 다시 삼겠다고 했지만, 당시 조준은 모친상이라 이를 핑계로 그냥 조정에 나가지를 않았다.[9]
여하간에 바로 이 해,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그동안 쌓인 여러 폐단을 혁파해야할 필요성을 느꼈지만, 무장인 이성계 혼자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때 조준이 인물이라는 말을 들은 이성계는 조준을 불러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야기를 해보니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닌듯하자 이성계는 크게 기뻐하며 조준을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것처럼 대하였고, 자신을 그렇게 후하게 대접해 주자 조준도 기뻐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성계를 위해 적극 협력했다.[10]
2.3 토지 제도에 대한 문제 제기의 시작
조준이 활약하게 된 이 시기는 이성계 일파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이성계 세력은 그동안 심각하게 부패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개혁반대세력을 제거하여 개혁세력의 기반을 확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왕조교체를 전후한 시기의 혼란을 최소화 하고 새로운 왕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중대한 시기였던 것이다. 조준은 이 당시에 필요한 정치, 사회, 경제적 개혁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전면에 나서며 대활약을 하였다.
우선 아직 위화도 회군 이후에 우왕이 쫓겨나지 않았던 1388년 7월 경, 조준은 그 유명한 토지 제도에 대한 상소문을 올렸다.
"어진 정치는 반드시 토지에 대한 정확한 구획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토지제도를 올바르게 함으로써 국가의 살림살이를 풍족하게 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당면한 가장 긴급한 일입니다. 국가의 존속은 민생의 고락(苦樂)에서 나오고, 민생의 고락은 토지제도의 균등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은 정전제(井田制)로 인민을 양육하였으므로, 주(周)나라가 천하를 8백년 넘게 소유하였고, 한(漢)나라는 토지세를 경감해 줌으로써 천하를 4백년 넘게 소유하였으며, 당(唐)나라는 백성의 토지를 균등히 하여 천하를 거의 3백년 간 소유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정전제(井田制)를 훼손한 진(秦)나라는 천하를 얻은 지 2세대 만에 멸망하였습니다.(중략)
옛사람은, ‘나라에 3년 쓸 물자의 비축이 없으면, 나라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근자에 겨우 수개월 간 서북지방에 군대를 보냈는데도 오히려 나라와 민간의 재정이 지탱하지 못하고 상하가 함께 궁핍하게 되었으니 만약 2~3년 동안 홍수와 가뭄의 재해가 계속될 경우 어떻게 진휼할 것이며 수많은 군사를 먹일 군량은 어떻게 조달하시렵니까? 하물며 지금 전국의 창고가 한꺼번에 텅 비었으니 국사에 드는 비용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또 언제 변방에서 전쟁이 터질지 예측할 수 없는 터에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가가호호 추렴하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마침 통토를 측량할 때가 되었으니 액수를 책정해 토지를 지급하기 전에 3년 동안 임시로 국가에서 조세를 거두면 주요한 국사의 비용도 충당하고 관리의 녹봉도 지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지제도를 바로 잡기 위한 조치들의 조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녹과전시(祿科田柴) : 시중(侍中)에서 서인(庶人)에 이르기 까지 관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 그 품계에 따라 토지를 계산해 나누어 지급하고 이들을 아문(衙門)에 소속시켜 현직에 있을 때만 그것으로 생계를 삼게 한다.
1. 구분전(口分田) : 개경에 거주하는 제군(諸君) 및 1품에서 9품까지의 현직에 있거나 산직(散職)41)에 있는 모든 관리들에게 품계에 따라 토지를 지급한다. 첨설직(添設職)을 받은 자는 그 실직(實職)을 감안해 지급하고 모두 해당자의 생존기간으로 한정한다. 그 처가 개가하지 않으면 역시 그가 생존할 때까지 허용한다. 현직 외에 전직前銜과 첨설직으로 토지를 받은 자는 모두 5군(軍)에 소속시킨다. 지방에 거주하는 자는 군전(軍田)만을 지급하고 군역에 편입시킨다. 토지를 받은 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나라에 반납하고 승급하면 순서에 따라 추가로 지급한다.
1. 군전(軍田) : 해당자의 기능과 재주를 시험해 20세에 지급하고 60세에 되받는다.
1. 투화전(投化田) : 우리나라에 귀화한 사람의 생계유지를 위하여 해당자 생전에 한하여 지급하고, 사망하면 나라에 반환시킨다. 관직을 받아 구분전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주지 않는다.
1. 외역전(外役田) : 유수(留守)·주(州)·부(府)·군(郡)·현(縣)의 리와 진(津)·역(鄕)·소(所)·부곡(部曲)·장(莊)·처(處)의 리, 원(院)·관(館)의 직(直)에게 구분전을 전례대로 나누어 지급하고 모두 해당자의 생전으로 한정한다.
1. 위전(位田) : 성황(城隍)43)·향교(鄕校)·지장(紙匠)·묵척(墨尺)·수급(水汲)·도척(刀尺) 등에게 위전을 전례대로 나누어 지급한다.
1. 백정대전(白丁代田)44) : 백성으로서 적에 등재되어 역에 차출되는 자에게는 1호에 토지 1결을 지급하고 조를 징수하지 않는다. 공(公)과 사(私)의 천인으로서 역에 차출되는 자에게도 지급하고 문서에 명확히 기록한다.
1. 사사전(寺社田) : 태조이래 5대 사찰과 10대 사찰 등의 국가비보소(國歌裨補所)로서 개경에 있는 사찰에는 유지 비용을 지급하고, 지방에 있는 사찰에는 시지(柴地)를 지급한다. 『도선밀기(道詵密記)』에 기록된 사찰 외에 신라·백제·고구려 때 창건한 사사(寺社) 및 새로 조성한 사사(寺社)에는 지급하지 않는다.
1. 역전(驛田) : 마위구분전(馬位口分田)47)은 전례대로 나누어 지급하는 데 모두 해당자의 생전에 한정한다.
1. 외록전(外祿田) : 유수(留守)·목(牧)·도호(都護)로부터 고을의 수령과 감무(監務)에 이르기까지 품계에 따라 책정한다. 인구수에 따라 구(口)를 계산하여 녹과전을 지급한다.
1. 공해전(公廨田) : 각 관아의 품계의 높고 낮음과 관원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지급한다.
1. 무릇 작정(作丁)을 할 경우 공전과 사전은 모두 혁파한다. 20결, 15결, 10결씩으로 묶어서 각 읍마다 천자문으로 ‘정’의 호칭으로 삼고 사람의 성명과 관계없이 함으로써, 뒤에 조업전이라고 우길 소지를 없앤다. 토지의 양전이 끝나고 난 뒤에 법으로 나누어 받게 한다. 공전과 사전에서 거두는 조(租)는 1결당 쌀 20두로 하여 민생을 윤택하게 한다.
1. 책임을 맡은 관리로서 토지 지급 때 1결을 초과해 지급한 자, 1결을 초과해 수령한 자, 토지 회수 때 누락한 자, 토지 반환 때 1결이라도 은닉한 자, 부자(父子)가 관청에 신고하지 않고 사사롭게 주고받은 자, 아비가 사망했는데도 그 아들이 아비가 생계 수단으로 삼던 토지를 반환하지 않는 자, 다른 사람의 토지를 1결 이상 탈취하거나, 공전(公田)을 1결이라도 은닉한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 대전(代田)을 받은 백정(白丁)으로 부근의 토지 1결을 숨겨 둔 자, 조를 징수하는 노비로서 공문서를 받지 않고 집행하거나 관아에서 규정한 됫박을 사용하지 않는자는 장 1백대를 때린다. 조를 징수하는 노비로서 1두(斗) 이상을 초과 징수하는 자는 장 80대를 때린다. 토지를 가진 자(食田者) 가운데 노비가 전조를 과다하게 수취한 사실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장 70대를 때린다. 양전(量田)할 때 토지 10부(卜) 이상을 숨긴 자는 사형에 처하며 토지를 누락시킨 자도 마찬가지이다. 조를 수취할 때는 노비 2명과 말 1필만을 사용해야 하며 이를 위반한 자에게는 주인과 노비 모두 장 70대를 때린다. 위와 같은 토지 관련 금지조항을 위반하는 자는 사면 대상에서 제외하고 판도사(版圖司)와 헌부(憲府)에 그 명단을 기재하며 그 자손은 대성(臺省)과 정조(政曹)에 취임하는 것을 불허한다."
이 당시 토지 문제에 대한 격렬한 비판은 조준 외에도 이행(李行), 황순상(黃順常), 조인옥 등도 같이 올렸던 일이지만 조준의 상소문은 개중에서도 가장 내용이 방대하고 무엇보다 문제제기는 물론이고 이를 해결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실무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거의 판을 깔아주기만을 기다린 사람에게 제대로 판을 깔아준 수준.
조준은 토지겸병의 폐단으로 토지를 지급받아야 할 관료, 군인 등이 제대로 토지를 받지 못하고, 토지관계소송과 과다한 조세 징수로 여러 체계가 무너졌음을 지적했다. 그리하여 사전과 토지겸병을 금지하고 관료, 국역담당자, 군사에게 토지를 분급 하자고 주장했다.
조준의 급진적인 개혁안은 신진사대부들에게 엄청난 화두가 되었다. 정도전, 남은, 조준은 물론이고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 여러 유학자들은 개혁에는 동의했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이 있었다. 온건 개혁파인 이색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이를 반대했는데 이색의 편을 든 사람은 이림(李琳), 우현보(禹玄寶), 변안열(邊安烈), 권근(權近), 유백유(柳伯濡) 등이었다. 반면에 정도전, 윤소종은 조준의 주장에 동조했다. 정몽주는 그 둘 사이에서 어느쪽 편을 들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이 논의는 53명의 관료들을 대상으로 논의하게 하였더니, 대부분이 이를 찬성했지만 집안이 부유한 사람들은 이를 반대했다.[11][12] 하지만 이성계는 "당신 하고 싶은대로 해!"라는 식으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준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면서 밀어주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갑자기 조준에 대해서 구린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알고보니 토지 제도에 대한 개혁을 반대하는 부유한 집안들에서 조준을 까기위해 온갖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조준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맞디스를 해가며 물러나기는 커녕 "덤벼봐, 개객히들아!" 같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결국 온갖 압박 때문에 결국 창왕은 조준의 제안을 묵살했다. 물론 허수아비에 어린아이일 뿐인 창왕이 이를 거절했다기보다는 이성계 등이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2.4 조민수 일파 제거
그러나 조준은 이에 굴하지 않고 1389년 3월 다시 한번 상소를 올렸다.
"토지란 본디 인민을 양육하는 바탕인데, 지금은 오히려 백성을 해치는 도구가 되어버렸으니 사전의 폐해가 이렇게 극심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도움을 받아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큰 적폐를 제거하셨으니 이로움을 되살리고 해로움을 없애신 결과를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그러나 권세가와 권력자들이 그 악습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우리 왕조에서 작성된 법전을 하루 아침에 갑자기 없앨 수 없으며 만약 무리하게 없앤다면 선비들의 생계가 날로 어려워져 필시 장사치나 공장(工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마구 헛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을 솔깃하게 만들며 사전을 되살려 자신들의 부귀를 보존하려 합니다."
"한 가문을 살리기 위한 꾀라면 그럴 만도 하겠지만 그러나 사직과 백성은 어찌 되겠습니까? 혹시라도 사전을 되살린다면, 이것은 우리나라 백만의 민중들을 기름불 속에 던져 넣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금 올바른 정치를 도모하면서 도리어 살아 있는 연혼들에게 우환을 끼쳐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기의 토지는 사대부로서 왕실을 시위하는 자의 전지로 삼아 생계의 터전으로 제공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여 왕실과 제사의 비용에 충당하고 녹봉과 군수의 비용을 충족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겸병의 기회를 아예 막아버려 쟁송의 여지를 단절시킴으로써 이를 영원불변의 법전으로 정착시키셔야 합니다."
반대파에 대해 초강경한 언사를 사용한 조준은 상소 이후에 반대 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에 나섰다. 당시 이색과 조준 등이 대립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성계 역시 회군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조민수와 대립하고 있었다. 조민수는 이색과 손을 잡는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조준은 그런 조민수를 탄핵하는데 앞장섰다. 조준의 입장에서는 토지개혁을 막는 반대파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니 좋고, 이성계 입장에서도 조준은 조민수를 처리하는데 큰 도움을 준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온건파 세력이 타격을 받고, 이후 김저(金佇) 사건이 발생하며 온건파 세력은 거의 괴멸이 되었고, 조준의 정책은 더욱 힘이 실렸다.
2.5 공양왕과의 대립, 정몽주의 반격
조민수, 이색 일파가 거진 제거 되면서 조민수 등이 추대한 창왕도 폐위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게 되었는데, 조준은 이성계의 뜻과는 달리 의외로 공양왕의 즉위를 반대했다. 그 이유라는 게 "정창군(定昌君)[13]은 부귀한 환경에서 자라나 재산 모으는 일이나 잘하지 나라 다스리는 일은 모른다."라는 것. 그러나 어찌되었던 공양왕은 왕으로 즉위했는데, 처음부터 조준과 공양왕은 사이가 전혀 좋지 못했다. 본래 공양왕은 즉위 이전부터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땅이 많았는데, 토지개혁을 하게 되면 자신의 땅이 그 대상 중 하나가 되게 되니 좋아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어차피 공양왕 역시 좋은 뜻으로 이성계가 자신을 즉위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테지만, "돈이나 잘 모을줄 아는 작자다."라고 자신을 디스하며 즉위를 반대한 조준을 좋아할리도 만무했다.[14]
그러거나 말거나 조준은 공양왕이 즉위하기가 무섭게 또다시 3번째로 토지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지금 6도 관찰사가 보고하기에 개간된 토지의 수는 50만결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공상(供上)은 풍족해야만 하므로 그 중 10만 결을 우창(右倉)72)에 소속시키고 3만결은 4고(庫)에 소속시키고 있습니다. 녹봉은 충분해야만 하므로 10만 결을 좌창(左倉)에 소속시키며 조사(朝士)를 우대해야 하므로 경기의 토지 10만결을 잘라 나누어 주니 결국 남은 것은 17만결에 불과합니다. 6도의 군사와 진(津)·원(院)·역(驛)·시(寺)의 토지나 향리(鄕吏)·사객(使客)·늠급(廩給)·아록(衙祿)의 용도로도 오히려 부족한데 군대에 쓸 물자가 나올 땅은 으레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지방의 토지를 사전으로 나누어 주려고 하시니, 황실에 쓸 물자와 녹봉의 비용도 나올 데가 없는 판에 진·원·역·시 등 여러 명목의 토지는 어디서 나올 수 있으며 방진(方鎭)의 병사와 해도(海道)의 군인에게는 무엇으로 공급하겠습니까? 만일 홍수나 가뭄의 재해가 3~4년 계속된다면 무엇으로 진휼하며, 수많은 병사의 군량은 무엇으로 충당하시렵니까?
결국 공양왕 2년, 공(公)·사(私)의 토지대장들은 시가지에서 불태워졌는데, 어찌나 많은 문서를 태우는지 그 불씨가 며칠간이나 갔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공양왕은 "내 통치기에 와서 토지 제도가 이렇게 바뀌다니!"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점점 조준은 공양왕에게 있어서 가장 밉상인 놈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정몽주는 조준이 사실은 공양왕의 즉위를 반대했다는 사실을 공양왕에게 알렸고, 또한 조준이 우현보(禹玄寶)를 공격하는 일이 발생했을때 공양왕은 우현보의 편이었으므로, 우현보를 공격하는 조준은 너무나 밉기만 했다. 계속 이렇게 서로 사이가 안좋다 보니,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조준이 돌아올 무렵에 되자 공양왕은 "아, 내가 또 조준 그 인간 얼굴을 봐야겠네."라고 불평을 했을 정도.[15]
하지만 조준을 보고 싶지 않아도 공양왕은 매일 매일 조준의 일을 접하고 살아야 했다. 개혁에 대한 열의에 불타는 조준은 거의 미친듯이 일을 하며 매일 상소를 올려댔기 때문인데, 당시 조준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조준이 헌사(憲司)에 있으면서 올린 건의가 엄청나게 많았다고 표현할 정도다. 당시 조준은 평리(評理) 겸 판상서시사(判尙瑞寺事)로 승진해 관리의 선발과 임명을 관장했으며, 토지 개혁에 대한 상소는 물론 난잡한 호구 체계의 재정리, 정치 폐단에 대한 항의, 부역의 폐단에 대한 대책, 관리 임명 대한 절차, 법 시행의 절차, 과도한 이자에 대한 제한, 재판 절차에 대한 번거로움 철폐, 연좌제에 대한 항의, 심지어 백성들에게 가축을 징발하는건 폐단이니 궁중에 사육장을 만들자라는 등 그야말로 온갖 전방위에 걸쳐 거의 미친 사람 마냥 엄청난 기세로 건의를 올려대고 있었다. 공양왕의 입장에서는 여길 봐도 조준, 저길 봐도 조준이 보이는 환장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개혁파의 의지가 모조리 관철되려는 찰나, 마지막 저항이 나타났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이성계가 낙마사고로 와병하여 잠시 정계에서 물러난 것을 계기로 반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정도전과 남은 등은 유배형을 받았는데, 조준 역시 김진양(金震陽)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김진양의 이 상소에서는 정도전, 조준, 남은이 모두 디스를 당했으나 개중에 조준에 대한 디스가 가장 상세했고, 또 이를 모의한 정몽주 등은 "먼저 이성계의 보좌역인 조준(趙浚) 등을 제거한 후에 이성계를 도모해야 한다." 하며 가장 먼저 제거해야 대표적인 사람으로 조준을 꼽았다. 그 당시 반대파들에게 있어 조준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결국 조준은 감옥에 들어갔으나, 이 모의는 이성계의 귀환으로 싱겁게 막을 내렸고 정몽주 역시 이방원에게 참살되어 실패했다. 감옥에서 나온 조준은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곧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의 건국이 실현되었고, 이성계를 추종하는 문무신료들은 모두 모여 엄청난 행렬을 이루면서 이성계의 집으로 가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때, 유독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만이 고려의 종말을 슬퍼하며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자 고깝게 여긴 남은이 민개를 죽이려 한 것을 조준이 만류했다고 한다.
2.6 조선 개국 이후
2.6.1 일등공신
조선 건국 이후에도 조준은 이성계의 돈독한 신임 속에 엄청난 대우를 받았다. 이성계는 위풍당당하게 즉위한 바로 그날 저녁 몰래 조준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다, 대뜸 "5도 병마(五道兵馬)를 모두 경에게 위임하여 통솔하게 하겠다."며 나라의 군권을 맡겼다. 또한 개국 공신의 위치를 정할 때[16] 조준은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었던 배극렴(裵克廉)에 이어 우시중(右侍中)으로서 바로 다음에 언급되었는데, 조준보다 먼저 언급된 유일한 인물인 배극렴이 곧 사망하였고, 바로 문하좌시중에 임명되어 최고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워낙 파격적인 대우에 권력이 조준, 정도전, 남은에게 집중되자 이에 대한 성토도 나왔을 정도인데,[17] 변중량(卞仲良)은 "정도전, 남은, 조준이 정권과 병권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헌데 그 말을 들은 이성계는 "그 사람들은 내가 제일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인데 어디 의심할 사람이 없어서 그 사람들을 의심해? 괘씸한 놈!"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변중량을 감옥에 집어넣었을 정도.
이러한 사태를 예상했는지 조준은 그 이전부터 평양의 식읍과 도통사의 관직을 사양하는 등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권력을 내려놓으려고 해도 이성계가 윤허하지 않아 그럴 수 없었다. 신하가 권력을 사양하는데 임금이 억지로 군권 등을 더해주는 괴이한 일이 발생한 것. 또한 이성계는 조준이 피부병으로 몸져 눕자 사람을 시켜 문병하게 하면서 "병을 고치려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하니 나라 일 근심하지 말고 편안하게 요양해라."고 당부하는 등 그야말로 지극정성이었다.
2.6.2 정도전, 남은과 틈이 벌어지다
이 무렵까지 정도전과 남은, 조준은 비교적 같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며 딱히 틈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정도전의 경우에는 조준이 정도전의 친구였던 이숭인(李崇仁)과 사이가 나쁘자, 조준과 친해지면서 일부러 이숭인을 멀리하는 등 가까워지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들이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정도전, 남은 등이 요동 원정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면서부터였다.
정도전이 마침내 요동 공격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 한 139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이런 갈등이 표면화되는데 남은의 경우 정도전의 생각에 동의했던 반면에, 조준 등은 이를 반대하고 나선 것. 정도전과 남은 등이 이성계에게 군사를 출병시키는 문제를 이야기하자 조준은 병중에서 일어나서 "사대의 예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실 까놓고 이해관계로 놓고 말하더라도 명나라의 위세가 엄청난데 무슨 공격임?"이라고 말했다. 정도전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위해 조준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때마다 조준은 "지금 천도 이후 나라 백성의 사정이 좋지 않아 원망이 많은데 그들이 우리를 제대로 따르긴 하겠음요? 요동 치려다 나라가 망해요."는 식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시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 등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에 나가기를 꾀하여 임금께 의논을 드렸는데, 좌정승 조준(趙浚)의 집에 가서 유시(諭示)하였다. 준(浚)이 병으로 앓고 있다가 즉시 가마를 타고 대궐에 나와 극력 불가함을 아뢰었다."본국은 옛날부터 사대(事大)의 예를 잃지 않았고, 또 새로 개국한 나라로서 경솔히 이름 없는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심히 불가합니다. 이해관계로 말하더라도 천조(天朝)가 당당하여 도모할 만한 틈이 없으니, 신은 거사하여야 성공하지 못하고 뜻밖에 변이 생길까 염려되옵니다."
임금은 이를 듣고 기뻐하였다. 남은이 분연(憤然)히 아뢰었다.
“두 정승(政丞)은 몇 말 몇 되를 출납하는 데는 가하지마는 큰 일은 더불어 도모할 수 없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은(誾) 등이 준(浚)과 틈이 생겨 뒤에 은(誾)이 준(浚)을 임금에게 무함하니, 임금이 노하여 질책(叱責)하였다.
ㅡ 태조 7년 6월 14일의 기록
처음에 정도전과 남은이 임금을 날마다 뵈옵고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를 권고한 까닭으로 《진도(陣圖)》를 익히게 한 것이 이같이 급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좌정승 조준이 휴가를 청하여 집에 돌아가 있으니, 정도전과 남은이 조준의 집에 나아가서 말하였다."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준이 말하였다.
"내가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반열(班列)에 있는데 어찌 전하(殿下)를 저버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國都)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써 백성이 토목(土木)의 역사에 시달려 인애(仁愛)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군량(軍糧)이 넉넉지 못하니,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능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정도전에게 일렀다.
"만일에 내가 각하(閣下)와 더불어 여러 도(道)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을 정벌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흘겨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즐거이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나는 자신이 망하고 나라가 패망되는 일이 요동(遼東)에 도착되기 전에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임금의 병세가 한창 성하여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원컨대 여러분들은 내 말로써 임금에게 복명(復命)하기를 바라며, 임금의 병환이 나으면 내가 마땅히 친히 아뢰겠습니다."
그 후에 조준이 힘써 간(諫)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ㅡ 태조 7년 8월 9일의 기록
내심 요동 공격은 무리라고 생각하는 이성계는 조준의 말을 듣고 좋아했는데, 사태가 계속 이렇게 되자 남은은 화가 나서 조준에게 "댁들 같은 작자들하곤 큰일을 논할 수 없다."고 디스를 했다. 이때부터 남은은 조준과 사이가 멀어졌고, 이성계 앞에서 조준을 험담하기도 했다.[18] 그러나 이성계는 개소리 집어쳐!"개소리 하지마!"라며 남은을 질책했다. 다만 이성계는 남은도 아꼈기에 따로 벌을 주거나 하진 않고 조준에 대한 욕만 못하게 했다.
또한 다른 문제는 바로 세자 책봉 문제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이 태평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있는 아들이 되는 것이 옳다고 주청했는데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이방번을 밀었고 재상들은 신덕왕후의 소생이 되어야 한다면 방석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상의하여 배극렴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시라고 주청을 올렸다. 태종실록에는 강씨가 엿듣고 눈물을 흘리자 태조가 조준에게 종이와 붓을 주며 이방번을 쓰라고 하였으나 거부하였고 이방석을 세자로 삼는 것이 결정된 후에 아무 말도 하지못했다.
2.6.3 1차 왕자의 난 후
이렇게 기본적으로 틈이 생긴 상황에서 무인정사(戊寅靖社)가 발생했다. 당시 정도전, 남은과 좌정승 조준은 알력이 생기긴 했지만 이성계의 신임을 받고 있는 조준은 이방원 일파와는 달리 그리 급할 게 없던 상황이었기에 왕자들의 싸움에 깊게 말려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1차 왕자의 난에서 조준은 적극적인 참여보다는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려고 했는데, 이방원이 자신을 소환하자 사태가 어찌 흘러갈지 점을 쳐보며 질질 뺴고만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이방원은 이숙번(李叔蕃)를 보내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조준을 데려왔고 그때서야 조준은 나와 이방원에게 동조했다.
다만, 이 점을 치는 행위는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시간을 끌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실록에 따르면 조준은 갑옷으로 무장한 가병들을 거느리고 나왔다고 되어있다. 즉, 처음에는 반란을 진압하려 시도했으나 이미 상황이 기운 것을 깨닫고 이방원에게 설득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적극 참여하진 않았지만, 어찌되었건 이방원을 위해 움직였으므로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책봉되었다. 이는 조준이 지속적으로 정도전과 정치적 대립을 벌인 탓도 있고, 세자 책봉 논의 당시 적장자 쪽을 지지했기에 어쨌거나 이방원 입장에선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 나쁠 것이 없었다. 또한 난의 정당성을 보장해주고 신구세력간의 갈등을 막아줄 수 있는 이름 있는 네임드 원로인사라는 측면도 있었다. 난이 일어나고 여러 사람들이 자리를 움직이는 와중에서도 조준과 김사형은 계속 정승의 자리를 유지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성계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당시보다는 권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눈치 빠른 조준은 정종(定宗) 무렵에 먼저 선수를 쳐서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는데[19] 당시에 정종은 "다 내가 덕이 없는 탓이다."며 조준의 사직을 만류했다.
하지만 조준의 생각대로 곧 사헌부 등에서는 조준이 음란하고 사치스러우며 남의 전답과 노비를 빼앗은 것이 수도 없이 많다며 탄핵을 올렸고, 이에 정종은 "내가 아는 사실과 다 다르니 개소리 하지 마라."고 이를 일축했다. 하지만 정종이 일축했다고 해도 이런 상소가 올라왔다는 것 자체가 조준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후 1400년 8월에는 조준이 불손한 말을 했다는 빌미로 권근 등은 조준을 탄핵했다. 이에 조준은 분이 나서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고, 결국 조사를 위해 감옥까지 들어갔다. 이때 정종은 조준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 결국 조준은 석방될 수 있었다.
2.6.4 태종 즉위와 말년
이런 상황에서 태종이 즉위하자 조준은 다시 한번 정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태종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등극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조준 같은 문인 원로는 왕자의 난 이후 강력해진 종친, 무인 세력을 견제하는데 필요한 자원이었다. 이후 조준은 좌정승이 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그의 아들 조대림은 태종의 차녀 경정공주와 혼인해 왕실의 사돈이 되었다. 태종은 조대림을 군부에 배치해 군권에 대한 왕실의 장악력이 약해지는 걸 방지하고자 했는데 뒷날 여기에 얽혀 조대림 사건이 벌어진다.
그러나 역시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이성계 때와는 달리, 조준은 번번히 자기 뜻과 다른 자들에게 반대를 받으며 이전과 같은 권력 행사는 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후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된 조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라일을 하다가 6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3 평가
조준은 국량(局量)이 너그럽고 넓으며, 풍채(風采)가 늠연(澟然)하였으니,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함은 그의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을 정성으로 대접하고 차별을 두지 아니하며 현재(賢才)를 장려 인도하고, 엄체(淹滯) 를 올려 뽑되,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조그만 장점(長點)이라도 반드시 취(取)하고, 작은 허물은 묻어두었다. 예위(禮闈)를 세 번이나 맡았는데, 적격자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미 귀(貴)하게 되어서도 같은 나이의 친구를 만나면, 문(門)에서 영접하여 관곡(款曲)히 대하고, 조용히 손을 잡으며 친절히 대하되, 포의(布衣) 때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사학(史學)에 능하고, 시문(詩文)이 호탕(豪宕)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 ─ 조준 졸기 |
실제적인 제도개혁에 있어서는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을 포함한 주역 건국 공신들 중에서도 이를 주도한 핵심적 인물로 꼽히는 인물.[20]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 이후 전제 개혁(田制改革)을 통해 새 왕조 출현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닦고, 신 왕조 창건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된다. 조선 건국의 핵심인 정도전이 이숭인을 버리고 조준과 가까이 하려고 했던 모습이나 요동 원정 문제에 있어 조준의 동의를 구하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당시 조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조준은 권문세족의 기득권이라고 볼 수 있는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필요하고 또 개혁적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여말선초의 혼란기에서 자신이 주동적으로 적극 개혁을 주도함으로써 정치적 위치를 확보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원간섭기를 통해 성장한 평양조씨라는 권문세족의 일족이었음에도 시대의 변혁에 휩쓸려나가지 않고 자신의 입지를 적극적으로 확보했던 것이다.
그는 이성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문제의 실질적인 분석,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그리고 이를 시행하는데 필요한 행동력을 모두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왕씨와 이씨의 정권교체' 수준을 벗어난 진정한 세대교체를 이루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조준은 정치, 사회, 경제 등 거의 모든 방면에 걸쳐 개혁안을 내었는데, 이는 조준의 폭넒은 식견을 보여줌과 동시에 조준이 그러한 악습과 부패를 적극적으로 시정할 의사기 있는 인사였음을 보여준다.
조준은 성리학을 하는 인물이었고 다른 인물들처럼 전대의 태평성대를 모델로 하여 고려 말기의 혼란과 부패를 해소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조준은 '기강의 확립'과 '실제행정을 담당하는 지배계층의 행정수행능력'을 중시하며, 그의 개혁안에서도 이러한 점이 엿보인다. 조준의 재상론은 정도전식의 '자기 수양을 부지런히 하고 군주의 나쁜점을 바로잡는 도덕적 재상'보다는 '국가통치에 필요한 행정실무능력' 을 더 중요시 했다고 여겨진다.
조준의 무수한 건의와 제안, 개혁들은 단순히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부분을 떠나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를 보여주었고, 비록 실제 적용되는 과정에서 어느정도의 변동은 있을지라도 대부분 수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때, 조준은 500년 왕조인 조선의 개국에 있어 지대한 공헌을 세운 정치가로써 한국사의 정치가를 통틀어서도 그 입지가 작지 않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조준이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했다는 것. 고려 말기에 성균관(成均館)을 통해 개혁적 성향을 가진 성리학자들이 육성되고 개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정도전이지만, 조준은 이와 독자적으로 공부를 통해 자신만의 사상을 마련했고 이성계라는 동조자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실행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만큼 이성계로부터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는데, 워낙에 신임이 두터웠기에 만년에 이를수록 이때문에 비방을 듣기도 했다.
여러가지로 거대한 족적을 남긴 대정치가지만, 대중적인 인식에서는 저평가를 떠나 아예 그런 사람 있나 싶은 정도의 취급을 받는 편.이 양반도 솔직히 사극주인공 한 번 해야 하는데 워낙에 같은 시기에 활약한 정도전의 영향력이 지대하고, 조준과 정도전이 비슷한 행보를 보인 일조차 모조리 정도전 한 사람에게 주목받는 면도 있다.
이를테면 조선 최초의 성문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은 조선왕조 법전의 중대한 근간인 경국대전 반포 이전까지 조선왕조의 정치, 사회질서에 유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물건으로, 이는 조준의 주도로 편찬되었기에 조준의 사상이 조선초기 국가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헌데 대중적 인식에서는 정도전의 사찬 사서인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 훨씬 더 각인되어 있거나, 혹은 경제육전 등도 정도전의 주도로 편찬되었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21][22] 그러나 그 정도전조차 일부러 조준과 가까워지려고 하고 조준의 동의를 구하려고 했을 정도이니, 조준의 무게감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4 현대 매체에서의 조준
여말선초가 사극에서 많이 다뤄진 시기이고, 조준도 이 시대의 중요한 정치가 중 하나이지만 어째 이 시기를 다룬 사극에서는 비교적 존재감이 강하지 않은 편이다. 사실 조준의 삶 자체가 여말선초 사극에 주역으로 자주 등장하는 공민왕,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에 비해 드라마틱한 부분은 별로 많지 않은 편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일 수도 있겠다.
1980년대에 방영한 개국에서는 노주현이, 조선왕조 500년에서는 현석이 연기했다.
용의 눈물에서는 중견배우 문창길[23]이 연기했다. 존재감이나 이미지가 강렬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유들유들한 성품의 정치가로 그려졌으며,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판에서 조정의 중신으로서 여러 정치인들의 대립을 중재하거나 조정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정도전과 마주앉아 그의 독단으로 어지러운 시국을 지적하고 재상중심 정치의 맹점을 지목하며 설전을 벌이는 씬이 일품이다.
정도전(드라마)에서는 태조 왕건에서 견훤의 넷째 아들인 금강을 연기한 바 있는 배우 전현이 캐스팅 되었다. 아버지와 자신을 죽인 형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24] 자세한 내용은 조준(정도전) 참조.
- ↑ 이름하고 자 둘 다 사격용어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이걸 가지고 드립을 치기도 한다(...).
여말선초 최고의 명궁 명중 조준 선생 - ↑ 매우 잘못된 기록으로 조선 최초로 영의정부사직에 오른 인물은 이서란 사람이다. 이서는 이후에 영의정으로 치사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조준이 아닌 이서가 영의정에 최초로 오른 사람이다.
- ↑ 이전까지는 고려 포로 출신 강수형을 통역으로 두고 있었다.
- ↑ 당시 조덕유에게는 아들이 많았는데 조준에게는 형으로 조후, 조린, 조정, 조순이 있었고 동생으로 조견이 있었다. 이 당시에는 아무도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없었던 듯. 고려시대에 귀족 출신 잘 나가는 정치가라면 음서 뿐 아니라 과거에도 합격하고 보는 게 보통이었다.
-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보마배행수(步馬陪行首)로 나온다.
- ↑ 엄밀히 말하면 관음포전투 이후에도 왜구의 숫자는 꽤 있었다. 다만 황산대첩과 관음포전투 등을 기점으로 왜구에 당하기만 하던 고려는 점점 왜구에 대응해 나가고 있었다.
- ↑ 고려시대 지방에 보내던 임시 사행.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공민왕 및 우왕 연간에 집중적으로 파견되었다. 왜구가 침입한 지역의 민정을 살펴 보고하고, 전투를 독려하며, 그 상황을 점검하는 일을 맡았다.
- ↑ 이때 조준은 처제의 남편이었던 김지 등과 함께 국가 조세제도 및 행정체계, 지리, 예술, 문학등을 집대성하는 공부를 한다. 요즘의 집권 스터디라고 할까. 조준은 이 결과물을 주관육익이라는 편찬물로 펴내는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밑에서 나오는 조준의 토지개혁안은 이 스터디의 결과물에서 나온 것.
- ↑ 이는 고려사의 기록인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해 조준이 밀직제학(密直提學)이었다는 언급도 있다. 이 당시의 조준은 윤소종(尹紹宗), 허금(許錦), 조인옥(趙仁沃), 유원정(柳爰廷), 정지, 백군녕(白君寧) 등과 친구로 지내며 신돈(辛旽)의 자손을 몰아내고 왕씨의 자손을 다시 세우자고 맹세했다고 한다. 다만 아무래도 우왕 신씨설이 윤색의 느낌이 강하게 나는 설이기에 이는 후대의 윤색으로 보인다.
- ↑ 고려사에서는 이성계와 조준이 의기투합한 게 위화도 회군 이전이고, 이후 회군 이후에 조준을 불러온 것처럼 되어 있다. 반면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성계가 최영을 쫓아낸 후에 조준과 의기투합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 ↑ 공양왕도 즉위 이전에 가진 땅이 많아서 즉위 이후에도 조준을 싫어했다고 한다.
- ↑ 그런데 앞서 말했다시피 조준 역시 부유한 집 출신이었다.
- ↑ 공양왕
- ↑ 왕위 책봉에 대한 논의는 이성계 일파끼리의 논의였지만, 정몽주가 공양왕에게 "조준은 전하의 즉위를 반대했다."고 일러바쳤다.
- ↑ 이때 조준은 훗날의 영락제인 연왕 주체를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저 사람 보통 사람은 아니니 계속 저러고 있을 것 같진 않다."고 말했다.
- ↑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8월 20일 2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 1394년 11월 4일 기사
- ↑ 그 배후에는 정도전이 있었다.
- ↑ 당시 정종은 "내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조준이 사직하려고 하더라?"라고 했는데 진짜 조준이 사직 상소를 올렸다.
- ↑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제도개혁』, 김당택
- ↑ 조선경국전은 사찬이므로 명목상의 법전이고, 조준의 원육전은 태조 초기에 완성된 정식 법전으로 이후에 속육전을 거쳐서 이어졌으니 역할의 비율이 완전히 다르다.
- ↑ 이후 조준이 편찬한 경제육전을 원육전 혹은 조준육전이라고 부르고, 이걸 태종시기에 개창한 것을 속육전 또는 하륜육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세종 시기에 이직과 황희의 손에 수정을 거친 것이 경국대전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조선의 시스템은 사실상 조준과 하륜이 만들었다고 봐야한다.
- ↑ 여인천하에서는 남곤을 연기한 배우.
- ↑ 태조 왕건에서 견훤을 맡았던 배우 서인석이 최영 역할로, 신검을 맡았던 배우 이광기가 하륜 역할로 출연했다. 극에 나오진 않겠지만 하륜과는 같이 경제육전을 편찬하던 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