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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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84년(정조 8년)에 규장각검서 유득공이 간행한 역사서이다. 유득공은 과거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음에 크게 곡하고 구당서, 신당서 등 17종의 중국 사료와 삼국사기, 고려사 등 한국 사료, 그리고 속일본기 등 합 22종의 고사를 참고, 연구하여 쓴 책이다. 발해고(渤海考)는 한국에서 현존하는 발해 역사서 중 최초의 역사서이다.

2 구성

『발해고』는 서문(序文) 외에 군고(君考)·신고(臣考)·지리고(地理考)·직관고(職官考)·의장고(儀章考)·물산고(物産考)·국어고(國語考)·국서고(國書考)·속국고(屬國考) 등 9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군고(君考)는 발해 역대 왕의 치세를 기록하였다.
2. 신고(臣考)는 대문예 등 이름있는 신하들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3. 지리고(地理考)는 발해의 지리를 기록한 것으로 『요사』, 『신당서』,『청일통지』등을 참고하였다.
4. 직관고(職官考)는 발해의 주요 관직을 기록하였다.
5. 의장고(儀章考)는 발해의 의식과 복장을 기록하였다.
6. 물산고(物産考)는 발해에서 생산되는 물품이나 특산물을 기록하였다.
7. 국어고(國語考)는 발해의 언어에 대해 기록하였다.
8. 국서고(國書考)는 발해 왕이 일본에 보낸 서찰에 대해 기록하였다.
9. 속국고(屬國考)는 발해의 부흥국가인 정안국에 대해 기록하였다.

3 내용

유득공은 서문에서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혔는데 다음과 같다.

“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략)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南北國史)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고려는 남쪽의 신라만 계승한 것이 아니라 북쪽의 발해를 계승하였는데, 고려가 마음만 먹고 발해사를 편찬하려고 했다면 후삼국시대 때 고려로 투항한 발해인을 상대로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고 하면서, 당나라 사람 장건장이 『발해국기(渤海國記)』를 편수했는데 정작 고려인은 발해사를 저술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4 의의와 평가

유득공은 발해가 멸망한지 수백년이 지나 발해의 역사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고 한탄하였고, 이 때문에 발해사(渤海史)라고 하지 않고 발해고(渤海考)라 하였다고 밝혔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하기 이전에 발해사는 삼국사기, 동국통감 등 단편적으로 기술되다가 이익의 성호사설, 이종휘의 동사 등에서 분립되어 서술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발해사는 고려왕조가 기록하지 않은 탓에 분량은 한계가 있었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한 후에는 조선 내에서는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화 하려는 의지는 정약용, 한치윤에 의해 나타났다.

서문을 보면 유득공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명백히 밝혀 한국사의 범주에 끌어들였고,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진이나 거란에게 역사적 영토 권리를 내세우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동북공정'으로 발해가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데에 반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발해고는 사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사서이다.